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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72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11.18 19:00
조회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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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3쪽

신의 부산물

DUMMY

"선배는 그렇게 말했지. 아이니를 죽이라고 말이야."

이엘은 그제야 유리오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엄마는 아이니 신을 찾으러 가겠다고 메모를 남겼다, 그런 말을 했었지.


그래, 거기까지는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그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하나씩 짜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 말이 스승님을 흔들었군요."

"트리그 레밀턴은 단단한 사람이었지. 난 그때 단단한 사람도 칼로 찌르면 피를 흘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칼로 찔렀다는 건 아니지만."

"저도 그 사실을 잘 알죠."


이쉐 알첸브라임은 선배였던 트리그 레밀턴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최후를 보며, 이쉐가 가지고 있던 믿음의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이니 신을 직접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월을, 제 가족을, 그리고 제자를 떠났다.


"정말로 신을 죽일 생각이었습니까?"

"글쎄. 그게 가능하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알고 싶었단다."


"무엇을 말입니까."

"뭘 원했는지 궁금하지 않니? 왜 인간에게 계시를 내리는지."


계시라. 이엘은 그에게 계시에 관해 이야기했던 수많은 이들을 떠올렸다. 제국 사냥꾼에게 유독 관심이 많았던 솔리 남자는 그가 받은 계시의 내용을 궁금해했다. 그리고 도달은 그의 계시 내용을 알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도달이 정말 알고 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군. 그건 단순한 허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 계시를 한 번도 어기신 적이 없었습니까?"

이엘은 반문이 돌아올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가볍게 빗나갔다.

"아니. 나는 계시를 지키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


"그건 어째서입니까? 그러니까, 아이니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조차도···그런 생각을 하신 적이 없다는 겁니까?"

"그래. 계시에 얽매이면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지 않겠니?"


이쉐는 그제야 제 제자가 차고 있는 활에 시선을 주었다. 좋은 물건이네, 한 번쯤 쏴 보고 싶군.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트리그 레밀턴이라는 사람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겠군요."

"반대로 묻자, 이엘. 지금까지 한 번도 계시를 어긴 적이 없니?"

"없습니다."


사냥의 숲에서 계시가 내려왔을 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거라면 평생 지키고 살 수 있겠다고. 신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신 앞에서는 언제나 떳떳할 수 있겠다고.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신이 존재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끝끝내 신과 한 약속을 지키면서.


"한 번도, 그래. 한 번도라. 재미있구나. 그 활은 어디서 구한 거니? 그것도 계시를 어기지 않고 구했나?"

"이건···제 물건이 아닙니다."


이쉐가 그런 질문을 한 의도는 뻔했다. 그녀는 그 활이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었다. 그게 누가 가지고 있던 물건인지, 그걸 손에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나 발라딜로 세타야를 죽이는 게 그의 계시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제가 구한 물건도 아니죠. 친구에게 잠깐 빌린 겁니다."

"그 활을 가지고 있던 사람을 만났니?"

"만났습니다. 좋은 사람이더군요."


뚜벅뚜벅 바닥을 밟는 소리가 컨테이너 안에 울렸다. 이쉐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한참을 걸어 다녔다. 그 걸음걸이는 마치 걷는 법을 이제 막 배운 사람처럼 보였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저렇게 위태로워 보인다는 걸.


"그 사람이 마스터 라리안느라는 제국 사냥꾼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스승님의 스승이었죠."

"그래, 비슷한 세대겠구나. 발라딜로의 주인이라면 말이지."


"발라딜로의 주인은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온 암열입니다. 그 사람이 마스터 라리안느와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은 최근까지도 살아 있었어요. 그렇다면 마스터 라리안느와 같은 세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아까 했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네. 요즘 사람이냐는 게 뭐냐, 그런 질문을 했었지?"

"그랬었죠."


이엘은 조용히 제 스승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우물가를 제멋대로 걸어 다니는 아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저러다가 퐁당, 하고 빠져 버릴 것만 같달까.


"암열처럼 오랜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말이지. 살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다더구나. 영혼은 죽고 육신이 남은 일들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거지."


"마나 씨의 영혼이 오래전에 이미 죽었을 거란 이야기입니까?"

"내가 그 사람을 직접 만난 건 아니지만, 아마도. 나처럼 말이야."


컨테이너 안을 한참이고 걸어다니던 이쉐가 불현듯 뚝, 하고 멈춰 섰다. 그러더니 이엘이 등에 메고 있는 발라딜로를 가리켰다.


"정말 딱 좋은 무기네. 그 활이라면 신이라도 사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활을 쏠 걸 그랬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종잡을 수가 없군.


"알첸브라임으로는 신을 죽일 수 없었습니까?"

"확실히 해둘 게 하나 있는데, 나는 신을 만나지조차 못했어. 당연한 거 아니니?"


지금 이 제국에 아이니 신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강신 의식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신은 육체를 얻어 이 땅에 내려오고 나서야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아이니 신을 죽이라고 해도, 아이니 신은 인간이 만나고자 한다고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지. 한낱 인간과 위대한 신,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만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만날 수 없다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글쎄, 거기서부터일까. 모든 게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한 게."


이쉐가 바닥에 풀어 던진 시계는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이엘은 그 시계 밑의 바닥이 조금씩 일렁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바닥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는 이런 일을 이미 겪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지금과 거의 같은 장소에서.


"일그러진 걸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없을까요?"

"일그러짐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니?"


바닥은 조금씩 늪 같은 재질로 변해 갔다. 이제 곧 그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 터였다. 지난번에 마주했던, 오물을 뒤집어쓴 괴상한 물체이리라.


"일그러진다는 건 형태나 부피가 변화한다는 거야. 한번 접었다 편 종이가 이전처럼 다시 빳빳해질 수 있겠어?"


아무래도 도달을 불러야겠어. 이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등에 매어 두었던 활을 뽑아 들었다. 이쉐의 존재가 지금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상태일 줄이야.


"왜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왜 나를 여기로 오라고 했지?"


마치 깨진 시계 틈에서 오물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바닥은 천천히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늪이 넓게 퍼져 갈수록 이쉐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저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여기로 오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죽여야겠다는 생각은 했지."


지금의 그녀는 마치 창고 안을 배회하는 유령 같았다. 늪의 기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을 덮치려 들었을 때, 이엘은 제 스승의 멱살을 잡아챘다.


"도달!"


그러고는 뒤쪽으로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선반이며 상자 따위에 사람 몸이 부딪치는 소리는 꽤 폭력적이었다. 그는 간신히 몸을 피하고 제가 원래 서 있던 위치를 돌아보았다. 바닥은 마치 아주 높은 온도로 지진 것처럼 그을려 있었다.


도달은 컨테이너 천장을 무자비하게 깨부수며 뛰어내렸다. 그녀가 뽑은 검이 늪에서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존재를 한 차례 반으로 갈랐다.


이어 두 번, 세 번을 치자 인간의 귀처럼 생긴 물체는 몸이 갈라져 절명했다. 역시 이전에 이엘이 한번 본 것과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묻고 싶은데, 그럴 때가 아닌 것 같긴 하네요."


도달이 창고 뒤쪽에 처박힌 이쉐 알첸브라임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애써 다시 끌어왔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모양이었다. 누군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왠지 나쁜 짓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다시 늪에서 기어 나오는 물체를 베어 넘기는 데 집중했다.


"죽지도 죽이지도 않았군요."

"그럴 줄 알았지?"


"그럴 줄 알았다고 하면 화를 낼 것 같아서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요. 이엘은 그럴 줄 알았나요?"


그는 조용히 늪 한가운데를 조준하고 있었다. 잘 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잘 쏠 자신도 없는 활을 꾸역꾸역 여기까지 가져오다니. 사람을 죽이려면 그냥 머리에 총알을 한 방 꽂아 넣는 게 가장 쉬운 길인데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인정하기 싫었나 봐."


이엘은 한쪽 눈을 감았다. 그리고 늪의 중앙을 향해 보이지 않는 화살을 날려 보냈다. 빛나는 실처럼도 보이는 궤적이 정확히 날아가 목표한 곳에 꽂혔다. 그러는 동안에도 인간의 귀처럼 생긴 정체불명의 물체들은 늪 바깥으로 계속해서 기어 나왔다.


도달이 몇 번이고 검을 휘둘렀다. 흰 검날이 오물을 갈라내자 파편이 창고 여기저기로 튀었다. 이 책들은 죄다 못 쓰게 되겠군. 어차피 버리는 책들이지만.


두 사람은 하얗게 타는 늪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그 활을 쏘려고 한 건 그게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죽지도 죽이지도 않는 건 상대방 역시 비슷한 마음이었을 때나 가능한 거잖아요. 이엘이 저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한다고 하더라도, 저 사람이 이엘을 죽이려고 했다면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겠죠."


"나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게 아닌 것 같은데."

죽일 수 없었던 거겠지. 이엘은 제 스승이 불안정한 모습으로 책을 찾던 모습이나, 컨테이너 안을 배회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리 봐도 온전한 상태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아니다, 어쩌면 죽을 생각으로 찾아왔던 건지도."

아무렇지 않게 등을 드러냈었지. 그건 사냥꾼과 적대하는 사람에게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말까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정말 이쉐 알첸브라임을 제거해야 한다면 지금처럼 좋은 순간은 없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뒤쪽, 상자가 잔뜩 쌓인 창고 구석에 처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엘이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늪에서 무언가 솟아올랐다.


"이런, 대체······."


그건 마치 오물로 된 기둥처럼 보였다. 태풍이 몰아칠 때 생기는 물기둥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정체 모를 액체가 몰아치는 안에, 인간의 신체 기관처럼 보이는 물건들이 휘감겨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에 달린 손톱을 보고 이엘은 슬쩍 눈을 피했다. 굳이 쳐다보고 있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거 본 적 있어?"

"아뇨."


이엘은 발라딜로를 내려다보았다. 이전에 비슷한 늪이 나타났을 때는 이 활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건 대체 뭐지? 왜 저런 게 나타난 거지? 그리고, 저걸 이대로 놔두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두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엘. 당신 스승의 상태를 확인해봐요. 여기서 나가야겠어요."


도달이 뒤쪽으로 턱짓했다. 그녀는 정체불명의 기둥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엘은 조심스레 뒷걸음질을 쳐 창고 구석으로 다가갔다.


어디가 부러진 건 아니겠지? 순간적으로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어 그렇게 행동하긴 했지만, 막상 벽에 처박혀 있는 스승의 모습을 보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글러 먹었구나."

"다행히 의식은 있으시군요."


이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얼마 만이었지? 어쩐지 이 상황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이쉐는 조용히 숨을 몰아쉬며 오물 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까지 마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다시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놀란 기색도 당황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아리나딘의 부산물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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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왕의 귀환 22.11.23 36 1 12쪽
134 빈틈 +1 22.11.20 75 2 12쪽
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 신의 부산물 22.11.18 37 2 13쪽
131 진짜 이야기 +1 22.11.17 56 2 13쪽
130 책의 무덤 +1 22.11.16 34 3 12쪽
129 복수 22.10.08 45 3 13쪽
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5 3 13쪽
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2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9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8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40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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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1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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