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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61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11.20 20:30
조회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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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빈틈

DUMMY

"나는 혼돈 그 자체다."

이쉐 알첸브라임과 똑같이 생긴 그것은, 그 한마디를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 놈들이 가장 위험하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빠르게 무력화해야 한다.


그건 이엘이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배운 아주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어차피 그것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해도 무언가를 알아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것을 멀쩡하게 살려 두었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나도 컸다.


하지만 이엘이 제 마법 총, 알체이라의 방아쇠를 당겼음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총을 맞지 않았다. 애초부터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으니까.


"이엘."

도달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먼저 알아차렸다. 그것은 제 손바닥으로 알체이라의 총구를 덮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이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것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먼 곳에서 이 모든 걸 바라보고 있는 진짜에게 시선을 옮겼다.


진짜 이쉐 알첸브라임은 벽에 등을 댄 채 가짜를 응시했다. 그렇게 닮았으면서도 조금 다른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이엘은 아주 묘한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마치 진짜가 가짜처럼, 가짜가 진짜처럼 보였다. 가짜가 진짜의 어떤 특성들을 흡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생명력까지도. 도달은 이쉐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를 보호해야만 할 것 같다는 예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한참이나 이쉐를 바라보다가, 다시 이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혼돈 그 자체라면, 네가 아리나딘인가?"


이쉐는 분명 아리나딘 역시 실체가 있다고 말했었다. 커다란 아카시아꽃 안에서 태어난,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존재. 그게 신의 실체라고 가정한다면 모든 의문이 사라진다.


"아니, 나는 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번에 그 가설을 부정했다. 그 검은 눈 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그것은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신이 만든 인간의 부산물이다. 나는 혼돈 그 자체다."


그것이 검을 든 팔을 다시 옆으로 뻗었다. 그리고는 제 미간 앞으로 검이 오도록 도사려 잡았다. 이쉐 알첸브라임이 검을 잡을 때의 습관 그대로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이엘은 문득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이 이쉐 알첸브라임을 완벽하게 모방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자신은 그것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에는 내 눈 아래를 향해 치고 들어오겠군. 그는 예상대로 들어오는 공격을 한 차례 받아냈다. 여전히 팔이 떨릴 정도로 강한 무력이었다. 이게 인간이 아니라는 건 확실한데, 그래서 이게 대체 뭘까.


"어딜 봐서 네가 혼돈이라는 거지? 너는 아주 정돈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혼돈이라는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존재해서도 안 되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버젓이 서 있었다. 그 자체가 혼돈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어 그의 목 옆쪽, 옆구리와 아랫배를 향해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냈다. 아주 짧은 빈틈만 만들면 돼. 본체를 어떻게 할 수 없다면 무기를 빼앗아 버리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그가 아는 이쉐 알첸브라임을 그대로 모방해 움직인다면 반드시 빈틈은 있을 터였다.


"아."


다른 이들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는 알고 있는 비밀, 아주 사소한 습관.


그것은 찰나의 순간 눈을 감고 제 앞을 향해 후, 하고 짧은 바람을 불었다. 이엘의 얼굴은 보기 좋게 찌푸려졌다. 이런 것까지 닮았다니.


"이건 대체 뭐야?"


그의 왼쪽 소맷자락 아래에서 검은 액체가 튀어 나갔다. 얼핏 먹물처럼 보이는 액체는 그것이 쥐고 있는 검날에 묻었다.


그리고 다시 검을 맞부딪쳤을 때, 그것이 쥐고 있는 검은 날이 완전히 나가 쓸 수 없게 되었다.


제 검이 제 몫을 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그것은 아무렇지 않게 검을 쥐고 움직였다. 하지만 당연히 그 공격에는 이전만큼의 위력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군. 다른 무기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무기를 버리는 게 나을 텐데.


마치 미리 입력된 행동을 수행하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잖아.


"너는 과연 신 같은 게 아니군. 너는 인형이었어."

"뭐?"


그것은 대답하지 않은 채 공격을 멈췄다. 이엘은 제 추측을 확신했다. 하지만 인형이라고 치면 레몬과 비교했을 때 너무 수준이 떨어지는데. 레몬은 인간의 영혼 조각을 넣어 만든 인형이라고 했다. 이건 그냥 인간의 외형과 행동 양식을 복사했을 뿐이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정밀한 외형의 인형을 제작할 수 있는 건, 그가 아는 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자나가 널 만들었나?"


찰그랑, 하고 바닥에 금속성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제 검을 바닥에 내던지고 두어 걸음 정도를 뛰어 물러섰다. 목과 어깨를 돌리며 관절을 푸는 모습조차 본체와 완벽하게 닮아 있었다.


"그래."


두 사람이 어디서 만났는지 이제야 알겠군. 자나에게 제 스승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엘은 근본적인 의문을 하나 품었다. 인형의 집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던 인형사와 제 가족도 떠나며 사회적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제국 사냥꾼의 접점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자나의 이야기에서도 그 부분만은 마치 구름이 낀 것처럼 흐릿했다. 이쉐 알첸브라임이라는 인간의 영혼이 붕괴했다고 말하던 그 인형사.


"자나 역시 혼돈을 원하는 사람이었군요."

"자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니? 들었다면 그게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어느 정도는요."


당연한 일이라는 건 뭘까, 사고로 육체를 잃어버린 사람은 반드시 세상이 더 혼란스러워지기를 바라야 하는 건가? 과연 자나가 겪었던 사고는 개인이 감당하기에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건을 겪은 인간이므로 당연하게 세계의 혼돈을 바랄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생소했다.


"자나는 저걸 무슨 목적으로 만든 거죠?"

"나는 자세히 듣지 못했어. 하지만 저걸 실제로 보니 이제 알 것 같구나."


이쉐 알첸브라임은 제 허리에 차고 있는 총을 뽑아 들었다. 이엘은 그 팔이 가늘게 떨리는 걸 애써 못 본 척했다.


방아쇠가 당겨지고, 아무도 볼 수 없는 속도로 총알은 가짜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말도 안 돼."


이쉐의 옆에 서 있던 도달은 제 눈을 의심했다. 총알은 분명 가짜의 머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정확히 도달했다. 다만 가짜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거기에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치 아주 짧은 순간 거기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총알은 반대쪽 컨테이너 벽까지 날아가 거기에 박혔다. 이쉐가 쳇, 하고 혀를 찼다.


"안 되겠군. 잘 들어,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그것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쉐가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명백함에도 반격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지금은 제 바로 옆에 서 있는 이엘에게도 아무런 공격성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텐데.


"나는 얼마전에 자나의 신체를 살해했어. 혹시 이미 알고 있니?"

"알고 있습니다. 자나를 만났으니까요."


"그래. 자나가 너에게 뭐라고 했는지까지는 내가 알 필요 없겠지."

"왜 그러셨죠?"

"자나를 왜 죽이려고 했냐고? 자나는 미래를 볼 수 있었어.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해서 제 목적을 이루려고 했지."


자나가 세 번째 눈으로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건 그 본인에게 직접 들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눈으로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


"자나는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에서 제가 죽는 미래를 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를 죽일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죠."

"그래서 나를 의심했니?"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도 생각했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도 생각했으니까요."


막상 실제로 만난 이쉐는, 온실에서도 컨테이너에서도 이엘을 죽이려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나가 그때 거짓을 말했던 걸까.


"자나가 영혼석에 관해 연구하는 이유도 들었겠구나."

"살아 있는 인형을 만들고 싶다고 했었죠. 아닙니까?"


그것만은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게 거짓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뒤에 다른, 더 거대한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나는 아리나딘을 담을 그릇을 만들고 싶어 했어. 개인적인 이유로 육체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이겠지. 아리나딘의 몸이 있든 없든 신이 가지는 힘이 달라지겠니? 몸이 있으면 가구에 걸려 넘어지기나 하겠지."


"신을 담을 그릇이라고요."

"그건 가장 완벽한 인형이어야 했어. 그리고 혼이라는 걸 담아 움직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물건이어야 했지."


결국 살아 있는 인형을 만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건가. 인간의 혼을 담아도 견딜 수 있는 육체여야 신의 혼을 담아 보려는 시도라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저게 바로 그 결과물일 거야."


인형은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마지막 이쉐의 말이 끝났을 때 그것이 고개를 까딱였다.


"잠깐. 이 인형은 자신을 스스로 신이 만든 인간의 부산물이자 혼돈 그 자체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자나가 신이라는 겁니까?"

"저 인형에게는 그렇지 않겠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군. 이엘은 그냥 눈앞의 인형을 망치로 깨부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리나딘의 사자니, 천사니, 뭐니 하는, 이런 녀석들과 엮일 때마다 스스로가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망치로 깨부술 수 있는 물건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총알도 피하는 걸 보니 이걸 무력화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말이다.


"스승님의 영혼 조각이 들어가 있다는 인형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잠시 같이 다녔는데, 괜찮은 친구더군요."

"뭐, 재료가 워낙 좋았으니까."

"저것도 그런 겁니까?"


이쉐는 다시 제 가짜와 눈을 마주쳤다. 오래전의 자기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피부 표면을 아주 가느다란 무언가로 끊임없이 긁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알고 있어.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나와 비슷하게 움직일 리가 없지 않겠니?"

"저와 같이 다니던 녀석 역시 무지막지하게 강하던데요. 철문 정도는 한 손으로 부숴 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제가 보기에 저쪽이 더 함량이 높아 보이는데, 그럼 저쪽이 그 녀석보다 훨씬 강한 거 아닙니까?"


"함량이라. 재미있는 표현이네. 아마 너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갖는 약점이 있어. 인간에 더 가까운 쪽이 갖는 약점 말이야."

"역시 인간에 가까운 쪽이 무조건 더 좋은 건 아니군요. 그래서, 그게 뭡니까?"


"인형의 코어가 되는 영혼 말이지. 그 영혼을 가진 인간, 그러니까 원본이 파괴되면 인형 역시 타격을 입어. 그 영혼의···그래, 함량이라는 게 높을수록 말이지."


이엘은 제 스승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죽으면 저 인형 역시 망가질 거라는 뜻이군요."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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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실종 22.11.25 30 1 12쪽
136 유일한 목격자 22.11.24 34 1 12쪽
135 왕의 귀환 22.11.23 36 1 12쪽
» 빈틈 +1 22.11.20 75 2 12쪽
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132 신의 부산물 22.11.18 36 2 13쪽
131 진짜 이야기 +1 22.11.17 56 2 13쪽
130 책의 무덤 +1 22.11.16 33 3 12쪽
129 복수 22.10.08 45 3 13쪽
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5 3 13쪽
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1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9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8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40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5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9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6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1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5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50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7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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