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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33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11.25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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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실종

DUMMY

창고의 소유주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람. 만약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이 광경을 보고 당장에 뒤로 나자빠졌을 것이다. 피와 오물, 그리고 엉망진창으로 찢어지고 흩어진 책이며 종이 상자들.


젠은 컨테이너 안을 혼자 걷고 있었다.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여자를 의사에게 보내기 위해 유리오와 레몬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자가 무사히 들것에 실리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참을 더 걸어 들어온 참이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공기가 탁해졌다. 불쾌할 정도로 진한 향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상하게도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고향이라, 고향이라니. 그에게 고향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런 이상한 곳에서 마음이 편안해지다니. 그 편안한 감각이 불편했다.


"쏘지 마!"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젠은 그게 유리오의 목소리라는 걸 알았다. 역시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 그는 얼마 전부터 기묘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가장 컸다. 이전에는 마법이 그에게 그리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 적이 딱히 없었다. 그냥 쓸 수 있으면 좋다고 여겼을 뿐이었는데.


무언가의 존재감이 가장 커지는 건 그걸 잃고 난 다음이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발을 멈추었을 때 젠은 빛의 화살을 보았다. 마치 신상(神像)처럼 서 있는 남자의 손끝에서 빛의 궤적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여기저기 상처 입고, 한쪽 눈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 이엘 알체이라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도, 팔도, 그저 고요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빛의 화살은 저편에 서 있는 여자의 몸을 꿰뚫었고, 그 순간 무언가가 폭발했다. 젠은 제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유리오의 팔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선반 뒤쪽으로 간신히 몸을 숨겼다.


"뭐야?"

"뭐가 뭐냐는 건데?"

"나도 모르겠어."


유리오는 영문 모를 말을 했다. 방금 있었던 폭발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하지만 그 눈동자와 목소리는 더없이 또렷했다. 잠시 후, 젠은 폐부를 찌르는 연기 때문에 한참이고 기침을 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연기야?"

"나도 모르겠어."


"정신 좀 차려. 아는 게 뭐야?"

"이엘이 엄마를 쐈다는 거?"

"아."


분명 그런 장면을 본 기억이 났다. 젠은 그제야 활을 든 남자가 이엘 알체이라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었던 거겠지.


고개를 내밀어 선반 너머를 바라보았다. 연기는 걷히지 않은 상태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인형은?"

"멈춰버렸어."

"멈췄다고?"


그래, 그건 인간이 아니라 인형이었지. 그렇다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인형이 유리오의 신변을 보호해 주기 위해 존재했다는 거지.


그 인형이 지금 활동할 수 없다면 유리오의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서 만월정의 그 여자에게 가야 해.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아야 했다.


"여기서 기다려."


젠은 쓰러진 선반과 책등이 꺾여 버린 책들 사이를 빠져나와 천천히 걸었다. 폭발이 일었던 곳으로,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던 곳으로. 그와 함께 이 창고에 들어섰던 인형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었다.


이름이 레몬이었지. 그는 인형의 옆에 앉아 그 뺨을 건드렸다.


"레몬."


일어나. 정신 좀 차려. 어떤 말을 써야 하지? 이건 인간이 아니니까 정신을 차릴 수도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마치 사람을 깨우듯 뺨을 건드리는 자기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이 인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이라고 치면 죽었다고 해도 될 법한 상태였다. 완전히 활동을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미련 없이 인형을 내버려 두고 일어섰다. 이제야 연기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해, 간신히 앞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인 겁니까? 알체이라 씨."


젠은 놀란 기색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이엘이 생각보다 그에게서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선글라스 없는 맨얼굴로, 아름다운 활을 옆에 내려놓은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고서 앉아 있었다.


"그게 문제라도 됩니까?"

"저 사람이 이쉐 알첸브라임이라고, 유리오가 그러더군요."

"직접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실 테지만."


이 남자를 만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아레인스터에서 분명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으니까. 물론 그때는 인사를 나누고 서로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 게 전부였다. 나중에 들었다. 아리나딘의 사자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게 이엘 알체이라였다는 사실은.


그래서 젠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일 거라고. 유리오가 어렸을 때 그 애를 가족처럼 돌봐줬고, 말없이 집을 떠나 버린 유리오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 나타나서 우리를 도왔다.


그는 그게 지극히 편리한, 제 입맛대로 생각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엘 알체이라는 대리석처럼 싸늘한 얼굴을 하고는 제가 죽인 여자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정말···죽은 겁니까?"


대체 왜? 이쉐 알첸브라임은 저 남자의 스승이자 유리오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제 형체를 잃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직접 확인해 보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죠."


이엘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쪽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는데, 반대쪽 허리의 홀스터는 비어 있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법 총은 어디에도 없었다.


"계속 거기 계실 겁니까?"


젠은 쓰러진 여자에게 다가가지도, 다시 유리오에게 돌아가지도 못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시신을 보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저기에 쓰러져 있는 여자는 분명 유리오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시신을, 그 딸보다 자신이 먼저 눈으로 봐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서비가 있었더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줬을 텐데.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떠나온 일행을 간절히 그리워했다.


이엘은 젠을 그대로 남겨 두고 자리를 떴다. 등 뒤로 그가 누군가와 통신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팔경 지구의 컨테이너 단지에서 이쉐 알첸브라임을 사살했습니다. 조사관을 보내 주십시오."


이윽고 연기가 완전히 걷히고, 젠은 비틀거리며 유리오가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그제야 이엘 알체이라의 마법 총을 유리오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치안관리부의 조사관들이 두 사람의 신병을 인도받았다. 이런저런 조사를 해야 해서 당장은 풀어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젠은 더 일찍 도망치지 않은 걸 후회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말 그대로예요. 이엘이 엄마를 쏘고 사라졌다는 거죠."


마리포사 알루나는 벼락같은 속도로 치안관리부 청사에 찾아왔다. 보석금을 주고 젠과 유리오를 풀려나게 할 요량이었는지, 그녀 옆에는 커다란 가방을 든 수행원이 서 있었다.


"사라졌다고? 그럴 리가 없어. 제국 사냥꾼은 살인에 관해 면책 특권이 있다고. 도망칠 필요가 없잖아?"

"그건 저도 잘 알아요."


"정말 사라진 거니?"

"치안관리부 조사관들의 말에 따르면요. 이 사람들이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문가에 서 있던 조사관 한 명이 유리오를 슬쩍 흘겨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취조실 천장에 있는 총알구멍은 이쉐 알첸브라임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젠은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유리오는 아무래도 엄마를 많이 닮은 모양이군, 그런 생각을 하며.


"말도 안 돼. 하여튼 너희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 이엘이 범행을 자백했고 목격자가 있으니까 범인은 확실히 이엘이고, 이엘은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치안관리부의 조사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그건 계시에 부합하는 살인이었을 경우에 한정돼요. 엄마를 쏘는 게 과연 사냥의 신이 내린 계시에 부합하는 행동이었을까요?"

"글쎄······."


마리포사는 말끝을 흐렸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이 사건은 곧 사월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 게 뻔했다. 당연히 이엘과 공개적으로 교류해 온 마리포사의 가게에도 수많은 인파가 몰릴 터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앞으로의 모든 대답을 통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일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신문에 나오는 살인범 친구 같아요."

"너는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니?"


유리오는 담담했다. 마치 어제저녁에 옆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더군요, 혹은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신발 굽이 망가져 있지 뭐예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 같았다. 젠을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건 유리오의 그런 태도였다.


"그렇다면 저는 반대로 대답해야겠어요. 언젠가 그런 일을 저지를 줄 알았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진심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유리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마리포사는 담당 조사관의 명함을 받고 자리를 떴고, 젠은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침묵 속에 남겨졌다.


얼마나 걸렸을까, 담당 조사관이 취조실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크고 모자를 푹 눌러 쓴 여자였다. 그녀는 유리오의 얼굴을 이상할 정도로 유심히 살펴보았다.


"유리오 알첸브라임?"

"네."

"그쪽이 젠 아이니겠군."


뭔데 반말이야. 젠은 이런 상황에서도 반발심이 고개를 쳐드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농담할 정신이 있는 사람도 있는데. 조사관은 두 사람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서류철을 내려놓고는 다리를 꼬았다.


"저 총알구멍을 이쉐 알첸브라임이 만들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여기 와서 이미 질리게 들었어요."

"내가 늦었나, 어쩔 수 없지. 복직한 지 얼마 안 돼서."


조사관이 유리오에게 장갑 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유리오가 그 손을 맞잡았다.


"윌 로체스티아, 치안관리부의 조사관이지. 이엘 알체이라와는 다소 인연이 있어서···이 사건은 내가 맡을 것 같군."

"네."

"먼저 현장 상황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조사관은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유리오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을 하고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신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거야. 이쉐 알첸브라임은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지, 그래서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걸 그 딸 앞에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혹시 부친께서는 오실 수 있나? 듣기 힘들 것 같다면, 아버지 쪽으로······."

"아빠는 바빠서 못 와요."


젠은 그제야 유리오의 아버지에 대해 들은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어머니인 이쉐 알첸브라임, 그리고 피가 이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오빠이자 사형(師兄) 같은 존재였다던 이엘에 대해서도 충분히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막연히 그가 죽은 사람이리라 생각했었다.


"그러시겠군. 그렇다면 직접 말하지. 현장에서 나온 건 이쉐 알첸브라임의 시신이 맞아. 고등 마법 무기인 '발라딜로'에 가슴을 맞은 게 사인이야."


"알고 있습니다. 직접 봤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문제라 함은?"

"발라딜로는 원래 표적을 폭발시키는 화살인가? 시신의 손상이 너무 심해. 현장에서 초동 수사를 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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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9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40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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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1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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