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22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09.17 18:30
조회
64
추천
3
글자
12쪽

철학자 병, 마침 딱 좋은 사건

DUMMY

긴 손가락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졌다. 바닥의 싸구려 깔개에 핏자국이 남았다. 레몬은 핏자국을 지우려면 산화표백제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빨리 세탁할수록 깨끗하게 지워질 확률이 높아진다.


이엘이 손바닥을 뒤집어 제 손끝에 맺힌 피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거칠게 손을 털어 핏방울을 떨쳐냈다. 바닥의 깔개며 얇은 이불 위로 붉은 자국이 점점이 번져 갔다.


손을 꽉 쥐면 손톱이 손바닥을 찢는다는 게 진짜였다니. 한참 뒤에 처음으로 든 생각은 그거였다.


"어떻게 된 걸까?"


그는 안타레스로 출발하기 직전, 파리스 마벨에게 연락을 받았다. 시칼트라 학장의 집이 누군가에게 습격당했고, 유리오와 젠이 거기를 몰래 떠나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마법사들은 역시 믿을 게 못 돼."


몇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오늘 저녁에 바로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그는 너덜거리는 제 손바닥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갈 생각이지?"


레몬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엘은 그 시선이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저게 인간의 시선인지, 인간을 학습한 인형의 시선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일 좀 하러. 일 안 한 지 워낙 오래됐잖아."


레몬은 작은 불안감을 느끼며 그를 따라나섰다.


"여길 자기 발로 오고 별일이 다 있네, 자기야."

"그 징그러운 호칭 좀 버릴 수 없습니까?"


안전사냥부 청사. 부장 아슐리카 키리의 집무실이었다. 옅은 갈색의 머리칼을 깔끔하게 넘긴 부장이 환하게 웃으며 이엘을 맞았다.


이엘은 근 몇 년간 부장을 만나러 여기로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부장이 반가워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는 되도록 여기까지 오고 싶지 않았다.


"너무하네,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하는 말이라고는."


아슐리카 키리, 부장은 안전사냥부에서 제일 짜증 나고 귀찮은 사람이었다. 일단 그에게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기묘하게 사람을 조종한다고나 할까,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일 있습니까?"

"어머, 갑자기 무슨 일? 돈 필요하니, 설마?"


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도박이니, 주색잡기니 하는 것들을 가장 싫어했다. 편집증적인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돈은 늙어 죽을 때까지 먹고는 살 수 있을 정도로 진작 벌어 놨거든요."

"그러면 일은 왜 찾아? 자기한테 들어온 접견 신청서 좀 볼래?"


이엘은 부장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집무실 문밖으로 청사 복도가 보였다. 복도 한편에 서류가 쌓여 있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대충 저런 게 세 개 정도 있거든. 지금까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면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건데?"

"세 개는 좀 많네요."


한때는 그 역시 주기적으로 청사에 들러 제 앞으로 온 서류를 훑어봤었다. 그러지 않은 지 이렇게나 오래됐다니. 저걸 다 읽으려면 계절이 바뀔 것이다.


"새삼스럽게 우습군요."

"뭐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저렇게 많다는 게요."

"자기도 철학자 병에 걸릴 줄은 몰랐는데. 역시 누구나 한번은 앓는 건가?"


철학자 병. 그건 제국 사냥꾼들 사이에서 도는 농담의 일종이었다. 철학자 병의 증세는 다음과 같다. 문득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옳은 것인가? 사람을 죽이고도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인가?


"쯧쯧, 용케 오래 버티기는 했는데."


그러다가 사표를 쓰고 그만두거나, 어느 날 잠적한다. 그런 식으로 사라지는 제국 사냥꾼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아슐리카 키리는 지금까지 그런 사람을 발에 채도록 봤다. 이제 누군가가 그만 둔다는 말을 해도 그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엘 알체이라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철학자 병이라뇨. 아직도 그런 구시대적인 농담 좋아하십니까."

"난 옛날 사람이야. 이쉐랑 동기라구. 알면서 뭐 그런 말을 하니?"


부장은 제 오른쪽 다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티가 나지 않지만, 그 다리는 의족이었다.


"이거만 멀쩡했어도 아직 뛰어다녔을 거거든."

"스승님은 오른쪽 다리가 없었어도 뛰어다니셨을 텐데요."


"참, 내. 무슨 말을 못 하겠네. 그래서 무슨 일로 왔냐고."

"일 있냐고 물었잖아요. 보니까 저기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거 같긴 하지만."


"내가 주는 걸 받고 싶은 거니, 혹시?"

"아뇨, 딱히."


이엘은 딱 잘라 거절하고 돌아서려 했다. 어차피 저기 쌓인 서류는 다 그의 앞으로 온 것이었다. 적당히 훑어보고 마음 가는 게 있으면 받으면 되겠지.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가지 말아봐. 자기한테 딱인 게 있거든."


부장이 콧노래를 부르며 그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주소를 적은 부장의 필체는 그의 눈에 익은 것이었다.


"가서 싹 쓸어 버리되 한 명도 죽이면 안 돼요. 알았지?"

"제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부장은 선글라스를 뚫고 그의 불만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셔츠 손목의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자기야, 넌 확실히 최고의 제국 사냥꾼이지. 너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지만."

"최고의 제국 사냥꾼은 제가 아닙니다."


이엘은 이 비슷한 말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로 부정해 왔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한숨을 쉬거나 뒷말을 흐렸다.


부장은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코웃음을 쳤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니? 넌 아무래도 사월을 좀 떠야겠다."

"글쎄요, 이러고 있을 일이 없어지면 더 이상 이러지 않겠죠."


부장이 내민 종이는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엘은 이제 그에게 그걸 받지 않을 힘이 있다는 걸 알았다. 부장은 안전사냥부의 관리자일 뿐 그의 상급자가 아니었고, 그의 행동을 강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부장이 시키는 일을 맡을 터였다. 싹 쓸어 버리되 한 명도 죽이지 말아라. 그 말은 지금 딱 그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이엘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를 흠씬 패 주고 싶기도 했다. 안전사냥부 청사에 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자기 앞으로 들어온 의뢰서들을 대강 둘러보고, 패 주고 싶은 놈이 있으면 패 주고 올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분노가 진정될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는 주소가 적힌 종이를 접어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누구한테 맡길지 고민 중이었는데, 딱 적임자가 올 줄은 몰랐네."


이엘은 피식 웃었다. 아슐리카 키리의 전형적인 화법이었다. 마침, 딱, 운 좋게도, 절묘하게도, 타이밍 좋게도, 기타 등등. 이게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걸 강조하는 온갖 단어와 미사여구들.


어떻게 저렇게 남을 부려 먹기 좋은 인간이 존재하는지.


"아."


하지만 오늘은 그런 부장의 화법이 꽤 잘 들어맞는 날이었다. 이엘 역시 마침 그에게 물을 게 있었으니까.


얼마 전 도달을 만났을 때 도달은 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제국 사냥꾼이라는 존재 자체가 위험에 처해 있노라고. 이엘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부장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장."

"으응?"

"제국 사냥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부장이라면 전부 가지고 있을 터였다. 신임 제국 사냥꾼들의 명단과 그들에게 들어오는, 그리고 그들이 결과적으로 접수하는 의뢰 내역을.


물론 제국 사냥꾼들이 모든 의뢰를 안전사냥부에 보고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전사냥부에 들어가는 통계가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걸 왜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제국 사냥꾼은 확실히 점차 줄고 있어. 계시를 받겠다며 찾아오는 숫자도, 새로 계시를 받는 숫자도. 은퇴 같은 형태로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 수도 꽤 되지. 그런 건 왜 묻니?"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도달이 주장하던 게 아예 일리가 없는 이야기는 아닌 셈이었다. 거기 황제가 얽혀 있다는 근거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그래서, 의뢰는 무슨 일입니까?"

"요즘 여기저기서 아리나딘이 말썽이라는 거, 알고 있지?"


이엘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어떻게 이렇게 절묘할 수가. 이게 아리나딘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거야말로 반드시 이엘이 맡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는 평정심을 가장한 채 되물었다.


"아리나딘이라, 항상 자잘한 골칫거리죠. 뭐가 문제입니까?"

"그게, 자잘하지가 않아. 약물 관련해서 문제가 좀 있거든."

"약물이라."


안 그래도 만월정의 마리포사에게 물어 둔 참이었다. 사월에서 최근 약물과 얽힌 사건이 있었느냐고. 아직 그쪽에서 답이 돌아오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과연 뭔가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군.


"약물 이야기라면 제가 빠질 수 없죠. 출판사 '데바' 일로 벌금을 5백만 블룸이나 냈는데요."

"그래, 그때 그 일도 말이지. 출판사 대표가 직원들에게 약물을 먹여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었잖아?"

"그리고 그 범인이었던 레이먼드 디베나는 병원에서 죽었죠. 누군가가 병실에 침입해서 목을 졸랐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뒤가 구린 사건이었다. 레이먼드 디베나는 조금 큰 회사의 대표이기는 했다. 하지만 과장을 섞어도 대부호라거나, 마약왕이라거나, 그런 이름을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레이먼드 디베나가 사용했던 약물. 분명 그 약물을 공급한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약물이 뭐였는지는 나왔습니까?"


이엘은 레이먼드 디베나를 반쯤 죽여 놓은 뒤 그 사건에서 손을 뗐다. 그 뒤의 조사는 치안관리부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레이먼드 디베나에게 약물을 공급한 공급책이라거나, 더 큰 범죄 조직과의 연관성이라거나. 레이먼드 디베나를 살해한 범인도 잡아야 했겠지.


"나왔지, 누구 덕분에. 사무실의 증거는 싹 없어진 상태였다더군. 네가 레이먼드 디베나를 떡이 되도록 패 주고, 그가 병원에서 죽기 전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말이야."

"그렇다면 제가 사무실에서 빼 온 커피 봉투가 증거였겠네요. 치안관리부에서 포상 같은 건 안 한답니까? 상금이라거나, 뭐 훈장을 준다거나."


"그건 하라딘이었어."


역시나.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이엘은 그가 적지 않은 양의 하라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누군가가 지금 당장 그의 방을 뒤진다면, 그는 마약사범으로 바로 잡혀갈 것이다.


안타레스의 호텔에서 소포를 받아 줬던 종업원이 증언해 준다면 도움이 되겠군.


레이먼드 디베나 사건에서 사용된 약물도, 누군가가 그에게 보냈던 약물도 하라딘이었다.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의 제국 사냥꾼들이 흡입했던 약물도 하라딘이었을까.


"하라딘이라는 약물이 아리나딘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치안관리부에서 마지막으로 알려준 바에 의하면 그렇지. 문제는, 치안관리부가 지금 맛이 가 있다는 거야.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니?"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장이 범죄 사실을 고백하고 자살했다지. 부서 전체가 마비될 만한 대사건이었다.


"하라딘 건으로는 치안관리부와 협력해서 알아보고 있었어. 아무래도 약물 범죄 같은 게 계속 일어나서야 우리도 좋을 게 없지 않겠니. 그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쪽은 완전히 멈춰 버렸지만."


"이쪽은 멈추지 않는 겁니까?"

"차장이 자살하다니, 정신없을 만한 일이지만 그건 그쪽 사정이잖아? 우리 차장이 자살한 것도 아니고."


이엘 역시 그 말에 완전히 동의했다. 부장은 싫은 인간이지만 가끔 이렇게 그와 통할 때가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지각 사과 및 연재 관련 공지 22.12.08 79 0 -
142 추심 +1 22.12.03 66 3 12쪽
141 정리정돈 +1 22.12.01 33 2 12쪽
140 결착 22.12.01 26 2 12쪽
139 세 번째 만남 +1 22.11.29 42 2 13쪽
138 남겨진 사람들 +1 22.11.27 24 1 12쪽
137 실종 22.11.25 29 1 12쪽
136 유일한 목격자 22.11.24 34 1 12쪽
135 왕의 귀환 22.11.23 35 1 12쪽
134 빈틈 +1 22.11.20 74 2 12쪽
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132 신의 부산물 22.11.18 36 2 13쪽
131 진짜 이야기 +1 22.11.17 55 2 13쪽
130 책의 무덤 +1 22.11.16 33 3 12쪽
129 복수 22.10.08 44 3 13쪽
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5 3 13쪽
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1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9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40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4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8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5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1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5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50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6 4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