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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50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09.27 18:30
조회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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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2쪽

귀농한 사냥꾼의 삶

DUMMY

"거기 가만히 있을 건가?"


지붕 위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하는데. 그렇게 대답하자 인기척은 사라졌다.


이들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는 자명했다. 계시를 받기 위해 신전에 오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군. 아마 높은 확률로 공격하려 했을 것이다. 실제로 피해를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뭐래도 제국 사냥꾼이 되려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대니까.


이엘은 신전 앞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있으니, 마치 그가 문지기처럼 보였다.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묵묵히 앉아 있는, 검을 찬 남자. 그는 제가 앉은 곳에서 조금 떨어진 피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에는 사슴 사체가 하나 쓰러져 있을 것이었다.


이들이 여기 자리를 잡은 지 얼마나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 숲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숲은 조용해졌다. 이따금 칼바람이 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여기서 사람을 죽였나?"

"아직."


"아직이라는 건?"

"제국 사냥꾼이 되려는 인간이 온다면 살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런 인간이 오지 않았다."

"왜 그런 일을 하지?"


솔리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엘은 느긋하게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늘은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여자에게 건네받은 아카시아 가지를 외투에 꽂았다.


"완전히 어두워진 것 같은데. 어디로 가면 되나?"

"신전 뒤쪽에 결계가 있어."


꽃향기가 불쾌하게 코를 찔렀다. 어둠 속에서 눈발이 점점 거세졌다. 서서히 눈이 쌓이기 시작할 터였다. 아무도 치우지 않으면 사슴 사체도 꽁꽁 얼어붙겠지.


"루스."


손바닥 절반 정도의 크기나 될까, 빛의 구체가 나타나서 이엘의 앞길을 비췄다. 그는 쌓이기 시작한 눈 위를 저벅저벅 밟았다. 신전 뒤쪽으로 돌아가자 예상외의 풍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도대체."


지붕 위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솔리 여자는 말이 없었다. 그의 눈앞에 우뚝 서 있는 건 온실이었다. 마치 뾰족한 삼각뿔처럼 생긴 온실. 이게 대체 무슨 촌극이란 말인가. 이엘은 천천히 온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외투에 꽂혀 있던 가지가 공중에 떠오르더니, 열쇠처럼 문을 열었다. 문은 철컥, 하고 열렸다.


"안 하던 일을 하시네요."

"사람은 누구나 변하지."


온실 문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이엘은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다. 그 안에 뭐가 자라고 있을지, 정말 무언가가 자라고 있기나 할지. 아카시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사람을 잡아먹는 꽃이라거나.


가장 먼저 이엘의 눈에 들어온 건 장미였다. 그리고 가지, 호박 덩굴과 살구나무. 온갖 작물들이 줏대 없이 섞여 자라고 있었다.


"저건 대체 뭐죠?"


이엘은 처음 보는 나무를 가리켰다. 이파리가 넓고, 작은 노란빛의 열매가 달린 나무였다. 이쉐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건 어린귤이지. 실물은 한 번도 본 적 없니?"

"먹기만 했죠."


이쉐 알첸브라임은 온실의 한가운데,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발치에는 커다란 물뿌리개가 하나, 삽이며 갈퀴 같은 것들이 제멋대로 널브러진 상태였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넘긴 두건이며, 흙 묻은 앞치마와 장화 같은 차림이 이엘에게는 더없이 어색했다.


그는 온실 입구에 서서 다시 한번 찬찬히 그 안을 둘러보았다. 언제 이런 걸 만들었을까. 마법의 힘 없이 이런 환경을 조성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하지만 살구와 가지, 호박과 당근, 장미와 어린귤이 같이 자라고 있다니. 누가 봐도 평범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여기까지 오는 길에 사슴이 한 마리 죽어 있더군요."


사실 그는 사슴이 죽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총을 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로 하고 싶었으니까. 마치 자신이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하면, 실제로 없었던 일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끔 사냥을 한단다. 이제 총을 쏠 곳이 거의 없으니까 말이야."

"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모르는 소리지. 너도 알겠지만, 총을 가지고 있으면 쏠 수밖에 없어."


이쉐는 흙 묻은 장갑을 털어내듯 벗었다. 발치에 집어 던지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은 사월을 떠날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왜 거기 그러고 서 있니?"

"여기는 제가 있을 곳은 아니니까요."


치안관리부 부장 사사야 타테지아는 이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강력한 마법 무기는 필연적으로 무거워진다고. 그렇게 무거운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위치를 특정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그리고 뭐라고 했었더라, 유리오 알첸브라임은 사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했었지. 나중에 유리오를 만나고 나서 이엘은 그 일을 떠올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유리오는 꽤 오랫동안 제국 남부를 돌아다녔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사사야 타테지아가 추적했던 마법 무기의 흔적은 대체 뭐였을까?


진짜 마법 총이 정말 사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냥의 숲을 사월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할 수 있나.


"왜 여기 자리를 잡으신 겁니까? 농사를 짓기에 그리 좋은 곳은 아닐 텐데요."

"확실히 북부는 춥지. 남쪽 끝에 있는 섬 같은 데로 갈 걸 그랬나?"


이엘은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까 마주친 솔리 여자에게도 그런 말을 들었다. 제국 사냥꾼이 되려는 인간이 여기로 온다면 살해할지도 모른다고.


이쉐 알첸브라임은 길목을 지키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바로 이엘에게 털어놓지는 않았다.


"여기다 이런 온실을 지어 놓고 사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편하겠죠."

"이걸 짓는 데 얼마나 큰 노력이 들어갔는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


"아카시아는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신 겁니까?"

"향이 좋잖니."


확실히 온실 안에는 좋은 향이 감돌았다. 그야 꽃과 과일이 가득하니까. 잎을 편 식물들은 모두 건강해 보였고, 열매는 먹음직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정원이나 농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도 즐겁겠지.


"잘 지내시는 것 같군요."

"뭐어, 두 번째 인생이지. 이 정도면 나름대로 만족스러워."


두 번째 인생이라. 스승이 사라지고 나서 이엘은 한동안 그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 가서 이전과는 무관한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물론 아무도 이쉐 알첸브라임을 모르는 곳이란 이 제국 안에 없을 테지만. 그래도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을 존중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행복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이따금 이전의 기억들이 파도를 타고 떠밀려와도, 모른 척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이전의 삶을 떠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엘은 그 사실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누가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하면서 집을 팔고 그 옆집을 삽니까?"

"무슨 뜻이지?"

"뭐, 별 뜻 아닙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겉돌고 있었다. 사실 대화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형태였다. 이엘은 질문을 하고, 이쉐는 빙 돌려 이상한 대답을 한다. 이엘은 혼잣말처럼 불평한다. 이런 걸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부장에게 들었습니다. 제국 사냥꾼의 수는 확실히 줄어들고 있다더군요."

"잘된 일이지."


"그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그녀가 앞치마에 달린 큼직한 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유리오가 가지고 있던 것과 똑같은 물건이었다. 이엘은 지금 총 두 자루를 앞에 놓고 구별하라고 해도 구별할 자신이 없었다. 어디서 그런 물건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나는 말이지. 제국 사냥꾼이라는 존재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습니다."

"왜, 이제 너도 공감하게 됐니?"


이엘이 고개를 저었다. 제국 사냥꾼이라는 존재가 머지않아 사라지리라 생각하기는 했다. 구시대의 잔재. 그런 게 아직도 남아 있는 건 단지 누군가가 없애자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쉐의 말은 더 위험한 함의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국 사냥꾼이라는 존재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그건 제국 사냥꾼이라는 존재는 사라질 것이라는 말과는 전혀 달랐다.


"잘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지겠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 굳이 제가 참여하고 싶지는 않군요."

"그거 아니? 요즘 같은 시대에도 꼭 제국 사냥꾼이 되고 싶다는 사람은 있단다."


"어느 시대에나 있겠죠. 요즘 같은 시대에도 마부가 되고 싶다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처럼."

"제국 사냥꾼보다야 차라리 마부가 낫지 않겠니?"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마부는 사람을 죽이지 않잖아."


이쉐는 공중에서 총을 두어 바퀴 정도 돌렸다. 여전히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장갑을 벗어 드러난 맨손 여기저기에는 밴드가 붙어 있었다. 이엘이 그 상처들을 보고 슬쩍 얼굴을 찌푸리자 그녀가 웃어 보였다.


"이건 원예의 훈장이란다. 사람이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고통을 받아야 하거든. 그래서 애 낳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건지도 몰라."

"아리나딘은 유리오를 신으로 만들려고 하더군요."


이쉐의 여유롭던 얼굴에서 순간 표정이 사라졌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쉐 알첸브라임은 원래부터 무서운 스승이었다. 특히 제자가 만용을 부리거나 위험한 일을 하는 걸 눈 뜨고 못 보는 성격이었다.


정작 본인은 언제 누가 자신을 칼로 찌르든 개의치 않는 양 살았으면서.


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화를 내거나 소리를 치는 상황이 아니었다. 얼굴을 굳히고 입을 싹 다물어 버릴 때였지. 보통은 그다음에 진짜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는 했다.


"그래. 그 애는 아이니의 가장 좋은 그릇이지. 현재로서는 말이야."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죠? 아리나딘은 그 애를 몇 번이나 위협했습니다. 그런 아리나딘과 손을 잡다니."


"앞뒤가 반대란다, 이엘."


이엘은 슬쩍 내려 제 허리에 꽂혀 있는 총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걸 바로 뽑아서 쏠 수 있을까? 어쩌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려 드는 게 오만한 행동인지도 몰랐다.


"유리오를 노리는 아리나딘과 내가 손을 잡은 게 아니야.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아리나딘이 유리오를 노리기 시작한 거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사실인데, 막상 본인의 입으로 인정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애가 가지고 있는 총 말인데."

"왜 그런 물건을 만드신 겁니까? 그게 가짜라는 걸 알기까지 몇 년이 걸렸습니다."

"그게 왜 가짜라고 생각하는 거니?"


가짜와 진짜. 얼마나 미묘한 표현인가. 유리오가 가지고 있던 총은 분명 가짜였다. 그건 진짜 알첸브라임을 교묘하게 따라 만든 물건이니까. 하지만 그건 동시에 진짜였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진짜 총이었으니까.


"그래, 생각해 보면 그게 가짜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중요한 건 그걸로 사람을 쏘면 사람은 죽는다는 거야."

"유리오가 사람을 죽이길 바라신 겁니까? 그 애는 그걸 정말로 쏠 생각이었어요."

"내가 아까 말했지. 총을 가지고 있으면 쏠 수밖에 없다고 말이야."


이쉐 알첸브라임은 총을 장전했다. 철컥, 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익숙한 소리가 났다.


"인간이 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엘."

"아이니 신의 그릇이 되는 법을 물으시는 거라면······."


"네가 하나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무슨 말씀이시죠?"


"아이니 신의 그릇이 되려면 말이지, 이엘."

그녀가 이엘의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반드시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여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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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9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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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금연 구역 +1 22.09.30 40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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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9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6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1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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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꼬리 잡기 +1 22.09.18 57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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