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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87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11.19 20:30
조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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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꽃의 공주

DUMMY

"진흙처럼 보이는데요. 저게 아리나딘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저 질감은 익숙해. 분명 어디선가 봤어. 어디서 봤지? 아리나딘의 사자라는 녀석을 만났을 때 말고, 다른 곳에서. 어쩌면 더 오래전에.


"아이니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아리나딘 역시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야. 아리나딘의 신자들조차 그걸 믿지 않지만."

"그쪽 신은 만나 보셨습니까?"


도달을 저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여전히 늪에서 튀어나오는 것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제 서서히 버거워 보이는데.


하지만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게 우습지만, 마치 늙고 병든 어머니를 두고 집을 떠나야만 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이 자리에 그대로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는 거지.


"아리나딘은 만나지 않아도 돼. 아이니와는 구조적으로 다르지."

"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 구조를 논하다니, 기분이 묘하군요."

"아리나딘은 내 안에 있어. 이제 조금씩 그 힘을 더해 가는 중이고."


잠깐.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나는 내가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래, 그래서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했었지. 눈을 가리고 있으면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지레 내가 과묵하고 무게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 선글라스는 지금 내 외투 주머니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참고로, 이건 진짜란다. 어떤 종교를 믿는 이들이 신을 자기 마음속에 모신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라. 아리나딘은 그와 함께 움직이는 이들의 안에 씨앗을 심고 뿌리를 내려."


나는 오물인지, 구정물인지, 진흙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진 기둥을 바라보았다. 그건 늪에서 솟아올라, 아주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이따금 그 안에 섞인 불순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의 팔이나, 다리 같은.


"그걸 현실에 옮겨 심을 만한 힘을 원했지, 언제나."

"저 진흙탕에 심고 싶답니까?"

"아니, 아까 말했잖니. 저건 부산물이야. 본체가 아니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아니, 내가 저게 뭔지 이해할 수 있는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저게 뭘 할 수 있죠? 사월을 덮치고 사람들을 해칩니까? 아니면 그냥 컨테이너를 더럽게 만들고 끝날 뿐입니까?"

"글쎄······."


도달은 이제 슬슬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 검을 움켜쥐고 몸을 일으키자, 스승은 내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달 아자칸. 익숙한 이름이구나. 그 이후로 우리가 하는 일에서 손을 뗐다니?"


그 말은 내 귀를 타고 들어왔지만 이내 반대쪽 귀로 빠져나갔다. 그게 무슨 뜻인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도달이 나를 맞았다. 하지만 의외로 그 움직임에는 여전히 예리함이 살아 있었다. 커다란 기둥은 여전히 컨테이너 안에 멀쩡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려는 것 같아요."

"뭐가?"

"너무 끔찍한 게 아니길 바라야겠죠."


도달은 지팡이 짚듯 검을 짚고 서서 기둥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늪에서 기어 나오는 잡다한 것들을 처리하는 역할은 내가 교대했다. 도무지 적응될 것 같지 않은 감각이군.


"도대체 이게 뭘까요."


인간의 귀를 눕혀 놓은 모양에 곤충의 다리 비슷한 게 달려 있었다. 크기는 내 손바닥만 한 것부터 고양이만 한 것까지, 검으로 가운데를 가르면 조직이 바싹 마르면서 움직임을 멈췄다.


"전에 같은 걸 본 적이 있어. 이런 기둥 같은 건 없었지만."

"언제요?"

"기억나? 우리가 사월에서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때. 네가 아리나딘의 사자와 싸울 무기로 발라딜로를 빌려줬었지."


"기억나요. 난 컨테이너 밖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주저앉아 있었죠."

"넌 그때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어."

"저길 봐요."


휘몰아치는 흙탕물의 기둥에서 기다란 봉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그건 얼핏 보기에는 깃대처럼 보이기도 했고, 지팡이나, 어쩌면 총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격렬하게 움직이던 물기둥은 완전히 멈췄다. 순간적으로 시간 그 자체가 멈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커다랗고 어두운 것이 내 시야를 가렸다. 내 눈앞으로 우산이 펼쳐졌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몇 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조심해요."


물기둥이 무너져 내리며 엄청난 양의 물이 우산 앞으로 내뿜어졌다. 다행히 얼굴이나 몸은 크게 젖지 않았지만, 나와 도달의 바짓자락은 지저분한 흙탕물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우산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거야?"

"처음부터 우산이었는데요."


도달은 내가 검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접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진흙탕 한가운데 기다란 봉 하나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물기둥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난 다음에야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건 꽃대잖아."


그것도 아주 커다란. 그리고 그 꽃이 무슨 꽃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나와 도달은 가만히 커다란 꽃봉오리가 서서히 맺히고, 여물어, 이내 열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거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꽃이 피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 사람처럼.


"아카시아인가."

"그런 것 같네요."


꽃잎 하나는 거의 택시 천장만 한 크기였다. 커다랗다는 표현조차 그리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집채만 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군. 꽃은 분명 가장 자연적인 존재인데, 저 정도로의 크기로 구현된 모습을 보자 이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나오는데요."

"꽃의 공주님이라도 나오는 건가? 아이를 원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 슬퍼하던 부부가 아이 대신 화분을 정성스레 길렀는데, 어느 날 그 화분에 핀 꽃에서 손가락만 한 소녀가 태어났다는 동화가 있었지."


"이엘이 혼자 외롭다는 걸 알고 누군가가 꽃의 공주님을 보내준 모양이네요."

"사양하고 싶은데."


저 안에서 나타날 건 보통 존재가 아니야. 나는 그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쩌면 총을 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꽃잎 바깥으로 한쪽 다리부터 꺼내 놓았다. 기다란 부츠를 본 도달이 그쪽을 향해 무언가를 휙, 하고 집어던졌다. 짧은 나이프였다.


나이프는 다리에 꽂히기 직전까지 날아가다가, 기묘한 각도로 몸을 틀어 바닥에 떨어졌다.


"제법인데요, 공주님."


잔잔하게 펄럭이는 기다란 외투 자락, 기다란 팔과 턱 언저리에서 깔끔하게 잘려져 있는 검은 머리카락.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그 실루엣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야, 내가 소년 시절부터 질리도록 봐 온 모습이 아니겠는가.


"총을 들어요."


그래서 도달이 그렇게 말했을 때, 이미 내 손은 손잡이 위에 올라가 있었다.


나는 인간의 형상이 아카시아꽃 바깥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장면을 보았다. 도저히 꽃의 공주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가 어머니의 존재를 그리워했기 때문에 꽃이 제게 어머니를 보내주신 걸까요? 그런 농담을 했다가는 머리에 구멍이 뚫리겠지.


"아리나딘의 부산물이라고 했었지, 이게 부산물이라면 본체는 얼마나 엄청난 존재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


나는 거대한 꽃받침 위에 앉아 있는 이쉐 알첸브라임의 형상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지금의 본인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10년 정도 전일까, 어쩌면 15년? 나와 한참 함께 움직이던 시절의 스승님이니까, 지금의 본인보다 훨씬 강하겠군.


그것은 밀랍이라도 씌워 둔 것처럼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것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것이 절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총은 가지고 있지 않군요."

"그게 왜 불행이야? 천만다행이지."

"총에 맞아 죽을 수 있다면 고통은 없지 않겠어요?"


먼저 움직인 건 도달이었다. 지치지도 않았는지, 검, 아니, 우산을 쥐고 그대로 그것에게 돌진했다. 도달이 온 힘을 담아 휘두르는 우산을 그것은 몸도 제대로 돌리지 않고 가볍게 쳐냈다.


"똑같군."


그 움직임은 내가 알고 있는 스승의 것과 완전히 같았다. 그건 도달을 혼자 놔두는 시간이 길수록 확률이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도달을 잃어버릴 확률 말이다.


나는 두 사람의 사이에 뛰어들었다. 이걸 상대하려면 그나마 이쉐 알첸브라임에 대해 잘 아는 내 쪽이 더 유리할 테니까.


그것은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차가운 액체가 울컥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한 번 구역질을 참았다.


"도달, 뒤쪽의 진짜를 봐줘."

"알았어요."


저건 마법으로 만들어진 존재일까? 그렇다면 내 검으로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검은 제국 사냥꾼에게 주어지는, 마법적인 존재를 파괴하는 검이었다. 나는 그것의 다리를 향해 검을 한 차례 휘둘렀다. 제발 이 검이 효과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결론은, 이 검이 효과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검이 닿아야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을 게 아닌가?


그것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다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 정강이 부근을 걷어찼다.


"윽."


제대로 맞았다면 다리가 부러졌을지도 모르는 충격이었다. 이건 인간의 몸이 아니잖아. 강철로라도 만든 건가?


"넌 누구야?"


대화가 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하면서도 괜히 말을 걸어 보았다. 그 입에서 내가 아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과 나오지 않는 것, 뭐가 더 무서운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대답이 없군. 성대까지 구현하지는 않은 모양이네."


그것은 대답 대신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의 사소한 특징들마저 내가 봐 온 것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누군가가 그 시절의 이쉐 알첸브라임을 본떠 틀을 만들고, 그 틀로 이걸 빚어낸 걸까?


나와 그것은 세 번 정도 검을 부딪쳤다. 그 세 번 검을 맞대는 과정에서 아주 많은 걸 깨달았다. 그것이 네 번째로 검을 휘둘러왔을 때 나는 훌쩍 뛰어 뒤로 몸을 피했다.


제대로 된 방법으로는 죽어도 이길 수 없어. 고등 마법 무기를 써야 해. 하지만 만약 그것조차 먹히지 않는 상대라면?


"아니면 나와 대화할 생각이 없는 건가?"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향기가 났다. 엉망진창인 진흙탕 속에서, 구정물 기둥 속에서 걸어 나온 주제에. 나로서는 상처를 입지 않도록 공격을 받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이걸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것은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지도,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지도, 팔을 떨지도 않았다.


"도달, 발라딜로를 써야 해."

"그건 먹히지 않을 거예요, 이엘."


대체 왜?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볼 뻔했다. 무방비하게 고개를 돌렸다가는 그대로 머리가 날아갈 만한 상황이었다. 도달은 내 쪽으로 달려오며 그것의 머리 쪽을 향해 나이프를 두 개 던졌다. 그것이 고개를 슬쩍 틀어 피하며 약간의 빈틈이 생겼을 때, 나는 허리춤에서 총을 뽑아 그것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이건 처음부터 이렇게 만들어졌어요. 거슬러 올라갈 시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요."


그것은 총을 가져다 대자 발밑으로 검을 떨어뜨리고는 양손을 들었다. 마치 사람처럼 반응하는군.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스승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던가?"

"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내가 방아쇠에 올려놓은 손을 슬쩍 움직였을 때, 그것이 입을 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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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유일한 목격자 22.11.24 34 1 12쪽
135 왕의 귀환 22.11.23 36 1 12쪽
134 빈틈 +1 22.11.20 75 2 12쪽
» 꽃의 공주 22.11.19 31 2 12쪽
132 신의 부산물 22.11.18 37 2 13쪽
131 진짜 이야기 +1 22.11.17 56 2 13쪽
130 책의 무덤 +1 22.11.16 34 3 12쪽
129 복수 22.10.08 45 3 13쪽
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6 3 13쪽
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2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8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50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8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41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5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9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6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1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5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50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7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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