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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21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09.05 18:30
조회
27
추천
4
글자
13쪽

아무것도 아닌

DUMMY

"넌 누구야?"

"내가 누구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레몬은 발을 굴러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나는 정원의 잔디에 물을 줬다. 가장 더운 시기는 지났기 때문일까. 다행히 잔디가 말라 죽어 있지는 않았다. 이제 슬슬 솔리들은 사월에서 지내기 힘든 계절이 오겠군.


"내가 누구인지 나도 모르니까."

"말장난처럼 느껴지는군.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모든 사람이 그걸 알고 살아갈 것 같지는 않아."


레몬은 안타레스에서 나와 헤어지기 전에 비하면 훨씬 인간다워져 있었다. 이전에도 불쑥 한 번씩 레몬이 인간처럼 행동한다고 느꼈었지. 그건 인간을 흉내 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은 인간의 일부가 그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어.


"자나가 너에게 설치한 보안 장치는 아실카 시칼트라의 마력을 차단하는 거였어. 그건 시칼트라 학장에게만은 들키고 싶지 않은 게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지금으로서는 몰라. 이제 이전처럼 많은 걸 알 수 없게 되었거든."

"왜 모르지? 너는 여전히 너잖아."


레몬은 손가락으로 그넷줄을 툭, 툭, 하고 쳤다. 마치 사람들이 초조함을 견디지 못할 때 취하는 동작처럼 보였다.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어. 안타레스에서 있었던 일들 때문이겠지."

"그러면 그전에는 완전한 존재였다는 건가."


"나와 자나가 생각하기로는."

"나는 지금 자나를 의심하고 있는데, 그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이엘 알체이라가 자나를 의심하고 있구나, 하고."


나는 물뿌리개에 다시 물을 가득 채웠다. 이제 집 안에 있는 화분들에 물을 줄 차례였다. 레몬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현관 옆에 서 있는 커다란 화분은 멀쩡했다. 이거야말로 천만다행이군.


"검은이파리사월야자. 그렇게 알려줬지. 이 식물 이름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무슨 뜻인지 질문을 이해 못 하겠어."


"이상하잖아, 너는 이 식물을 실제로 보는 게 처음이라고 말했었다고. 하지만 이름을 말할 수 있었지."


그때는 인형 안에 내장된 데이터베이스 같은 데서 식물 이름을 찾아낸 줄 알았다. 물론 정말 그랬던 건지도 모르지.


"너는 안타레스에서 유리오를 한번 구했지. 그리고 유리오에게 그 총을 절대 쏘지 말라고 말했어."


자나가 그렇게 말했었지. 이 인형은 무언가를 찾아내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지만 레몬이 유리오를 찾아 움직인 건,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한 일이었다.

인형이 자유 의지를 갖추고 있다니.


"네 좌표는 나에게 설정되어 있었어. 그러니까 나와 관련된 일을 우선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거지. 네가 독단적으로 유리오를 찾아가 구해준 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

"예비 좌표는 유리오 알첸브라임에게 설정되어 있어."


"자나가 그렇게 설정했나?"

"아니. 내가 설정했지."


레몬은 시선을 피했다. 나는 검은이파리사월야자에 물을 주었다. 꽤 오랫동안 들여다볼 수 없었기 때문인지, 잎끝이 약간 말라 있었다.


"분명 레몬이라는 개체는 그때 검은이파리사월야자를 처음 봤어. 하지만 이게 검은이파리사월야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 그건 이 식물이 뭔지 아는 사람의 기억이 네 안에 남아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곳곳을 돌아다니며 화분에 물을 주는 것도 일이었다. 물을 주고 나서는 창문을 열고 먼지떨이로 집안의 먼지를 털어냈다.


"내일 아침에 인형의 집으로 돌아가자고. 지금은 도저히 장거리 운전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거든."

"그래."


레몬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꼬았다. 자나를 만난다고 해서 이 모든 의문이 해결될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 몇 가지 정도는 있겠지.


"네 첫 번째 기억은 뭐야?"

"첫 번째 기억이라니?"

"말 그대로. 레몬이라는 개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시점의 기억이 뭐냐고."


액자 위를 손가락으로 훑자 먼지가 묻어 나왔다. 이 정도가 될 때까지 내버려 뒀다니. 먼지가 조금 쌓였을 때 털어내는 건 쉽다. 하지만 찌든 먼지를 벗겨내는 건 또 다른 일이다. 먼지 터는 것뿐 아니라 모든 게 마찬가지지.


"고통스러웠어."

"물리적으로?"


"몸에 불을 질렀을 때 느끼는 작열통과 유사한 느낌이라고 설명할게."

"괴상하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그런 통증을 느낀다는 게."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몸이 아프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 고통을 견디기 힘들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인형은 굳이 고통을 느낄 필요가 없는 존재다. 고통을 느끼지 않게 만드는 게 가능하니까. 실제로 레몬은 하라딘을 집어먹고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인형은 약물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제작하는 게 가능하니까.


"네가 아픔을 느꼈다면 그 이유는 뭘까? 자나가 의도적으로 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자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자나는 사람을 망가뜨리는 극한의 괴로움을 한 번 맛봤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제 창조물에게 그런 아픔을 느끼게 만들었을 리 없지.


"그렇다면 그 고통의 출처가 있을 거 아냐."


저 인형 안에 들어 있는 인간의 영혼 조각. 그 조각에서 기억도, 고통도 넘겨받은 거겠지. 레몬이 말한 대로 이제 이건 완전한 인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간도, 인형도 아닌 애매한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까.


나는 청소를 대강 끝내고 물을 한잔 마셨다. 이 집은 아주 오랫동안 비어 있었기 때문에, 안에 먹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찬장을 털어 봐야 통조림 몇 개나 나올까.


"지금부터 자야겠어."

"그래."


원래 내가 쓰던 방에는 들어가지 않은 지 좀 되었다. 이 집 구석구석을 청소하면서도 거기만은 내버려 두었다. 지금 내 방은 제국 사냥꾼 숙소에 있었으니까. 소파에 대충 누워 잘까 했는데 소파에는 저 인형이 집주인인 양 떡 하니 앉아 있고.


비키라고 할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소파 앞 바닥에 깔린 카펫 위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평소에 청소를 열심히 한 보람이 있게도 카펫은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진짜 잔다."

"아무도 안 말려."


베개도, 이불도 없었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가장 쉽게 잠드는 방법은 오랫동안 잠들지 않는 것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잠들지 않으면 결국 몸이 버티다 못해 잠에 빠져든다. 나는 이 방법으로 적지 않은 나날을 겨우 잠들며 보낼 수 있었다.


요즘은 잠들 때마다 꿈을 꿨다. 꿈을 꾼다는 건 피곤하다는 증거라던데. 과학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말인지는 모른다.


꿈에서 나는 다시 이틀 전, 시칼트라 학장의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집은 무슨 기숙사 같았어. 그 짧은 기간 동안 온갖 젊은이들이 모여들어서 사고를 치고, 충격적인 일을 접하고, 싸우고 화해를 하고 뭐 어쩌고.


유리오가 내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줬었는데. 물론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그때 마법 총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듣고 있어?"

"듣고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잘 들을 수 있겠지. 이건 두 번째 기회니까.


"그 긴 통로를 따라 한참을 쭉 걸었단 말이야. 얼마나 갔는지 기억도 안 나. 정말 한참을 걷고 나니까 동굴 같은 공간이 나왔어. 아마 자연적인 동굴은 아니고 누군가가 파 놓은 공간이었겠지만."

"그래서?"


"여기저기 촛불이 켜져 있고. 동굴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조각상이 있었거든. 사람 키보다 훨씬 컸어. 거의 내 키의 두 배 정도는 됐던 것 같아. 그 조각상이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그게 사람인지, 신인지, 뭐 아니면 다른 존재인지. 하여튼."


"그런 은밀한 공간에 커다란 조각상이 있는데,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야?"

"혹시 모르잖아."


그래, 그건 맞는 말이지. 나는 그 애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이틀 전 내가 멍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그 애를 화나게 만든 것과 달리.


"그리고 우리는 그 조각상 위에서 시신을 발견했어. 시신에는 우리가 찾던 성물, 리오나의 검이 박혀 있었지."

"그게 네가 차고 다니는 그 검이야?"


"뭐어, 그렇지. 아무도 이 검을 가지고 다니고 싶지 않아 했거든. 아무래도 시신에 꽂혀 있었던 검이라 찝찝한가 봐. 다들 종교인이잖아? 나랑 다르게."


그 검은 유리오에게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원래 그 애가 가지고 다니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성물을 찾았으니 잘 됐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근데 문제는 말이야. 그 검 손잡이에 감겨 있던 손수건이야."

"기사님에게 보내는 사랑의 증표 같은 거 아니야?"

"무슨 그딴 촌스러운 소리를 하고 있어."


유리오는 눈을 흘겼다. 그러고는 제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해진 작은 천 하나를 꺼냈다.

손수건처럼 보이는데.


"이 손수건에서 꽃향기가 났거든. 젠은 그게 아카시아 향이라고 했어. 그리고 아카시아는······."

"그래, 아리나딘의 꽃이지."


결국 아리나딘이 그 시신과 엮여 있단 말인가. 그 죽은 남자는 아리나딘의 사자들에게 살해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거기까지는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되겠지.


"하지만 왜 성물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이상하지 않아?"

"이상해."


"우리가 처음에 다른 신전을 방문했을 때, 다른 도굴단이 선수를 쳐서 그 검을 가져갔어. 그러니까 죽은 남자는 아마 도굴꾼이었을 거야. 그 남자는 검을 훔쳐서 도망쳤어. 여기까지는 추론하기 그리 어렵지 않거든."


"문제는 그 남자가 시신으로 발견된 점, 그리고 그런데도 검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네. 검을 가져가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남자를 죽이는 게 목적이었던 걸까?"

"응. 그래서 그걸 조사할 겸, 젠이 아리나딘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한테는 개인적으로 용건이 좀 있다고 해서. 흥신소라는 곳을 찾으러 갔다가 혼쭐이 난 거지."


나는 유리오가 차고 있는 검을 찬찬히 다시 살펴보았다. 이게 죽은 남자의 몸에 꽂혀 있던 검이라는 건가.


"그런 걸 잘도 차고 다니네. 찜찜하지 않아?"

"찜찜할 게 뭐가 있어? 죽은 사람이 저주라도 걸었을까 봐? 하지만 살인범은 내가 아니잖아."


"살인인 건 확실한 건가? 사고로 죽은 시신에 칼을 꽂고 옮겨 놓았을 가능성은?"

"그런 짓을 뭐하러 하겠어. 칼에 찔린 상처 때문에 과다출혈로 죽은 거래. 일행 중에 의사가 있거든. 그리고 시신에서 약 냄새가 난다고 했었어."

"약이라."


또 약인가. 아무래도 제국 어딘가에 마약왕이라도 활약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난세에는 반드시 영웅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어디선가 영웅이 나타나서 이 모든 걸 쓸어버리고 똑바로 돌려놔 줬으면 좋겠군.


"느낌이 안 좋아. 성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더 위험한 일에 부딪힐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도 총은 쏘면 안 돼."

"왜 쏘면 안 되는데?"


나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기시감이라고 하나. 소름 돋는 감각이 내 어깨를 타고 목덜미로 넘어왔다.


"내 손이 더러워질까 봐 두려워? 엄마나 이엘처럼?"


이건 유리오 알첸브라임이 아니야.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현실의 우리는 이런 대화를 하지 않았어. 나는 완전히 딴 데 정신이 팔렸었고, 유리오는 내 옆에서 혼잣말을 늘어놓다가 짜증을 내며 자리를 떴다고.


"하지만 살다 보면 사람을 죽여야 하는 때라는 것도 있지 않을까?"


없어, 그런 건. 그렇게 말해야 했다. 이게 비록 현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유리오는 흐물흐물 무너져 진흙더미 같은 형체가 되었다. 나는 언젠가 이런 모양을 본 적이 있었지.


"당신은 그렇게 살잖아. 죽여도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계속해서 구별하면서."

잠에서 깨어나자, 내 몸 위에는 담요가 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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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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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실종 22.11.25 29 1 12쪽
136 유일한 목격자 22.11.24 34 1 12쪽
135 왕의 귀환 22.11.23 35 1 12쪽
134 빈틈 +1 22.11.20 74 2 12쪽
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132 신의 부산물 22.11.18 36 2 13쪽
131 진짜 이야기 +1 22.11.17 55 2 13쪽
130 책의 무덤 +1 22.11.16 33 3 12쪽
129 복수 22.10.08 44 3 13쪽
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5 3 13쪽
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1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9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40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4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8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5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1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5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50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6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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