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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17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09.0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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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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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2쪽

불명확한 존재들

DUMMY

이엘은 눈을 뜨자마자 서류를 읽기로 했다. 그는 소파 위로 팔만 대충 올렸다. 던져두었던 서류철을 끌어 내리다가 그만 얼굴에 맞을 뻔했다. 레몬은 잠시 자리를 비운 건지 어디로 가 버린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게 무슨 문제겠는가, 어차피 그쪽에서는 언제든 그를 찾을 수 있을 터인데.


한밤중이었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엘은 정원 쪽으로 난 커다란 창을 통해 그 모습을 보았다. 빗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렸다.


"치안관리부 조사관 연쇄 실종 및 살인 사건."

그는 드러누운 채 팔만 들어 서류를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담당 조사관, 헬리온 라비스타. 마티스 알터."


그 뒤로 그가 모르는 이름들이 두 줄 정도 이어졌다. 뭐가 이렇게 많아. 그 이름들 사이에서 간신히 윌 로체스티아의 이름을 찾아냈다.


치안관리부의 서류를 읽는 건 처음이었다. 서류는 얇은 책 한 권 정도가 될 정도로 두꺼웠다. 그걸 다 읽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이엘은 서류를 팔랑거리며 뒤쪽으로 넘겼다. 그의 눈은 특정 단어를 좇고 있었다.


사건 종결.


"열매의 달 일곱 번째 날, 치안관리부 차장 헬리온 라비스타가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헬리온 라비스타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자필로 쓴 유서가 놓여 있었다. 이하 유서의 복사본을 첨부."


치안관리부 차장이라. 이엘은 그녀와 만난 적이 있었다. 취조실에서. 그 사람을 압박하는 태도 하며, 불쾌한 추리를 줄줄 늘어놓던 모습이란. 그 여자의 이름이 이런 이름이었나?


그 여자가 유서를 쓰고 자살했다니. 그는 비척비척 상반신을 일으켰다. 제대로 읽어야겠군. 과연 뒷장에는 자필로 쓴 유서의 복사본이 붙어 있었다.


"나, 헬리온 라비스타는 치안관리부 조사관 연속 실종 사건, 팔경 지구 일가족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오늘로 멈출 것을 요청한다. 내가 사건의 진범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 같은 도입부로 시작하는군. 이엘은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그가 다시 바닥에 드러눕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건 익숙한 생김새의 인형이었다.


"어딜 다녀오는 거야?"

"끼니를 사러. 넌 거의 하루 내내 먹은 게 없잖아?"


레몬은 점점 그가 아는 모습을 잃어 갔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아는 어떤 모습에 가까워져 갔다. 이엘은 그 사실을 회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코앞에 닥친 일을 어떻게 회피할 수 있을까.


"뭘 샀는데?"

"작약 시장 초입에 수프를 잘 끓이는 가게가 하나 있지."


그 사실은 정체불명의 인형이 알 리가 없는 것이었다. 인형의 지식을 구성하는 데이터베이스 역시 사람이 만든 것이다. 레몬의 경우, 그를 만든 인형사인 자나가 그의 데이터베이스 역시 만들었으리라.


자나는 인형의 집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월의 변두리에 있는 시장에서 무엇을 파는지 알 도리가 없다. 아주 당연한 이치였다.


"지금 안 먹을 거면 냉장고에 넣어둘게."

"먹을래."


배가 고프거든, 이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배는 고프다. 그는 그 사실을 아주 어릴 때부터 이미 뼈저리게 알았다. 사람은 그 어떤 일을 겪어도 허기를 느낀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이 우습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수프는 버섯을 넣어 끓인 것이었다. 이전부터 그가 꽤 즐겨 먹던 종류였다. 이엘은 소파 위로 느릿느릿 몸을 옮겼다. 레몬이 그에게 쟁반에 얹은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이 집 찬장 어디에 쟁반이 들어 있는지도, 그 인형이 단번에 알 수는 없는 정보였다.


"맛이 하나도 안 변했네."


레몬은 수프를 먹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바닥에 던져져 있는 서류철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읽고 있었어?"

"읽다 말았어."


"난 내용을 다 알아. 다 읽었으니까."

"무슨 내용인데?"


"헬리온 라비스타가 범행을 자백했어. 조사관들을 살해한 게 자신이라고 말했지. 정확히는 유서에 그렇게 쓴 거야."


그는 수프를 천천히 떠서 삼켰다. 같은 치안관리부 조사관들을 살해했단 말인가. 뭘 위해서 그런 일을 한 거지?


"증거는 나왔어?"

"실종된 조사관들의 사체를 묻은 장소. 살해를 사주할 때 사용한 연락책. 은폐 방법까지 자세히 적어두었으니까. 조금만 조사해도 그게 완전히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겠지."

"그래서 사건을 종결해 버린 건가."


그렇다면 윌 로체스티아가 조사관을 그만두었다는 이유도 뻔하군. 상관의 부정에 충격받아 사표를 쓰는 것 역시 흔한 일이었다.


"서류는 안 읽어봐도 될 것 같네."

"중요한 내용이 하나 더 있어. 헬리온 라비스타는 팔경 지구 일가족 살인 사건을 제국 사냥꾼에게 사주했다고 해."


"그런 얼빠진 의뢰를 받는 녀석이 있구나."

"멍청한 짓이지."


이엘은 그 인형에게서 느껴지는 서슬 퍼런 기색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수프 그릇은 어느새 비어 있었다. 어쨌든 중요한 내용은 대강 알았으니 서류를 읽는 건 뒤로 미뤄야겠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지금?"

"늦어서 좋은 점이라고는 없으니까."


챙길 거라고는 서류철과 검, 그리고 총뿐이었다. 현관에는 검은 장우산이 꽂혀 있었다. 이엘은 현관문을 나서며 우산을 펼쳤다. 레몬이 자연스럽게 우산 아래로 들어왔다.


"내가 완전한 인형이 아니라면 나와 이엘의 관계는 예전과 달라지는 건가?"

"네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내가 무엇인가. 그런 지식은 입력되어 있지 않은데."


레몬은 뒷좌석에 앉았다. 따지고 보니 이 차로 사월을 떠나는 건 처음이었다. 지난번 출장은 로체의 차로 갔으니까. 로체의 차는 그때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걸 수리하는 데도 상당한 비용이 들어갔을 것이다.


치안관리부에서 알아서 처리했겠지만.


"벨트 매라."


인형은 안전벨트를 맬 필요가 없다. 법적으로 인형은 벨트를 매야 하는 인간이 아니라 차에 싣는 물건, 즉 짐으로 분류되니까. 벨트를 매지 않았다가 사고가 난다고 해도, 레몬 정도의 인형은 한낱 인간 따위보다 훨씬 견고하다.


그러니까 레몬이 안전벨트를 매야 하는 이유는 없었고, 원래의 레몬이라면 그 사실들을 구구절절 늘어놓았을 터였다.


"귀찮아."


레몬은 그렇게 대답을 일축하고는 몸을 눕혔다. 하긴, 급정거를 한다고 몸이 앞으로 휘청일 일도 없다. 어지간히 무거워야지.


"운전대 잡는 게 왠지 어색해."

"왜?"

"글쎄, 이제 택시는 그만 몰 때가 된 걸까. 택시 기사였던 때가 마치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져."


그가 택시를 몬 건 그의 스승이 그걸 권했기 때문이었다. 제국 사냥꾼 같은 건 그만두고 택시 기사를 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었지. 아마 스승이 권한 게 슈퍼마켓 사장이었더라면 슈퍼마켓을 열었을 것이고, 매표소 직원이었다면 매표소 직원이 되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이엘의 스승은 그에게 가장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으리라.


그녀가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에서 누군가를 죽인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자나가 네 가족이라고 했었지. 그 생각은 아직 변하지 않은 거야?"

"자나가 나를 만들었으니까.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내 부모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


"자나가 만들지 않은 부분이 네 안에서 점점 커져 가고 있더라도?"

"그거랑은 상관없잖아. 어쨌든 이 신체를 만든 게 자나라는 건 변하지 않아."

"만약 내가 자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나를 적대할 건가?"


레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표정은 마치 고민하는 인간의 표정처럼 보였다.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와 인형의 집 사이에는 분명한 접점이 있었다. 이엘은 이미 그 사실을 자나와의 통신에서 확인했었다.


그리고,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 인형의 집. 그 두 가지에서 각각 뻗어나간 선이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쉐 알첸브라임이라는 점.


"자나를 죽일 거라고?"

"자나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따라서, 어쩌면."


이엘은 그 희미한 삼각형을 노려보았다. 그는 그 각각의 점 사이에 그어진 선이 얼마나 단단하고 견고한지 확인하러 가는 중이었다.


"자나가 무슨 일을 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건 가 봐야 아는 거지. 그냥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뿐이야."


이엘에게 자나에게 가장 묻고 싶은 건, 자나가 테러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가 아니었다. 왜 레몬을 자신에게 붙였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자나가 만약 테러를 사주했거나 테러 사건의 진범이라고 해도, 그 사실이 왜 이엘에게 레몬을 붙였는지를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네가 자나를 죽이는 건 원하지 않는데."

"정확히 뭘 원하지 않는 건데? '내가' 자나를 죽이는 것? 내가 '자나를' 죽이는 것? 아니면 내가 자나를 '죽이는' 것?"


"전부 다라고도 볼 수 있겠지. 꼭 하나만 골라야 하나?"

"하나만 고르라면?"

"첫 번째. '네가' 자나를 죽이는 것."


"담배나 한 대 피울까."


이엘은 문득 그런 충동을 느꼈다. 그는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걸 알면 사람들은 대체로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도대체 담배를 피울 것처럼 생겼다는 건 무슨 뜻일까.


물론 그는 외투 주머니에 항상 담배와 라이터를 넣고 다녔다. 하지만 그건 그가 피우려고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도달을 만났을 때 그녀에게 주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얼마 전 도달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 그 담배의 이름조차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그니 호에 입수했을 때 그 담배와 라이터도 못 쓰게 되었을 터였다.


"안 돼."

레몬이 딱 잘라 말했다.

"미치겠네."


그가 담배를 배우지 않은 건 그가 살던 집에 어린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리오를 돌보는 입장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 댈 수는 없었다. 간접흡연도 치명적이라고, 특히 어린이들한테는. 그는 처음으로 담배를 피울 시기를 놓치고, 그 뒤로도 딱히 담배를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인형은 담배 연기를 마신다고 암에 걸리지 않아, 레몬."

"넌 담배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구나?"


그의 스승 역시 젊었을 때는 담배 연기로 뭐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소문의 소유자였더랬다. 그녀가 담배를 끊은 것 역시 아이 때문이었다. 그녀가 종종 말하고는 했다.


"아니, 알지. 사람 목숨 끊는 것보다 담배 끊는 게 더 어렵다던데."


차 안은 다시 침묵이라는 이름의 연기로 가득 찼다. 그들은 시답지 않은 대화 두어 마디를 나누고, 이내 입을 다물고, 선문답 같은 대화를 하고, 다시 입을 다무는 걸 반복했다. 그 지루한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다 보니 어느덧 인형의 집에 도착했다.


도착했을 때쯤에는 새벽하늘이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공기가 묘한데."


레몬은 그렇게 말하며 인형의 집 정문 앞으로 달려갔다. 인형의 집은 이엘이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깨끗했다. 창살 위에 한 점의 먼지도 앉지 않은, 강박적인 공간.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레몬이 문을 열었고, 이엘은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자나."


자나는 데스크에 앉아 있었다. 그걸 앉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의 육체는 의자에 주저앉혀진 채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구르며 레몬을, 그리고 이어 이엘을 바라보았다.


만약 자나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의 복부 중앙에는 무슨 포탄이라도 맞은 듯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실패했어요, 이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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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결착 22.12.01 26 2 12쪽
139 세 번째 만남 +1 22.11.29 42 2 13쪽
138 남겨진 사람들 +1 22.11.27 24 1 12쪽
137 실종 22.11.25 29 1 12쪽
136 유일한 목격자 22.11.24 34 1 12쪽
135 왕의 귀환 22.11.23 35 1 12쪽
134 빈틈 +1 22.11.20 74 2 12쪽
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132 신의 부산물 22.11.18 36 2 13쪽
131 진짜 이야기 +1 22.11.17 55 2 13쪽
130 책의 무덤 +1 22.11.16 33 3 12쪽
129 복수 22.10.08 44 3 13쪽
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5 3 13쪽
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1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9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40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4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8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5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0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5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50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6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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