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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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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조회수 :
231,836
추천수 :
5,519
글자수 :
1,674,356

작성
14.01.20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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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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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
21쪽

4. 고통을 먹는 자 (1)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1.

브렌은 책상위에 놓인 메모리 스틱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새로 옮긴 자신의 방은 경비단의 단장이 머무는 방이라, 이런저런 서류나 극비정보들이 많다. 따라서 그의 부재중에는 문이 잠겨버린다. 그의 암릿을 통해 생체정보가 갱신되지 않으면, 이방은 불조차 켜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없을 때, 누가 드나든 것이다. 그 증거는 눈앞의 메모리 스틱이다.

“이건 반입금지 물품.”

지금은 필요한 정보를 암릿에 저장하는 게 보편화된 시대다. 얼마 전 편재에게서 어떤(매우 즐거운) 동영상을 받아올 때도 암릿을 사용했다. 따로 백업을 해야 할 만큼 대단한 데이터를 가진 것도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한창 보안문제로 골치 아픈 때였다.

브렌이 지금 경비단을 맡게 된 것은, 영희 단장의 부재로 인한 것이었다.

‘그 깐깐하던 사람이 변심했다고 믿긴 힘들지만, 적어도 테러를 일으킨 자들과 연관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

그렇기에 더더욱 누군가 단장을 맡아야만 했다. 영희 단장과는 달리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회장 편승은 그 점에서, 브렌을 높게 평가했다. 단지 아들의 옛 전우라서가 아니라, 용병시절의 성향이 크게 작용되었다.

그것은 계약파기 전무의 기록.

일단 계약을 맺어 놓으면, 이후 다른 쪽에서 접근해도 거절. 이것이 브렌의 방식이었다.

딱히 의리를 지키려 그런 건 아니고, 나중에 생길지 모르는 문제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신뢰할 만한 모습이었으리라.

브렌도 사람이다. 남이 자신을 믿어주고 힘을 실어주는데,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안드로이드化 수술에는 피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밥값은 해야 했다.

그래서 단장이 되자마자 의욕적으로 추진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보안의 강화였다.

브렌은 간이 저장장치의 반입부터 금지시켰다.

실제로는 스파이로 훈련받은 인간보다, 스파이봇을 통해 정보를 빼가는 게 더 쉽다. 그래서 이 저택에는 스파이봇을 잡기 위한, 안티 스파이봇들이 깔려 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스파이봇들이 싸우며 쇠 부스러기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스파이의 투입이 더 효율적일 지경이다.

‘스파이라면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암릿에 극비정보를 담는 바보짓은 하지 않아. 그러니 간이 저장장치의 사용만 제한하면, 당장 스파이를 잡지 못해도 정보가 빠져나갈 구멍은 줄어든다.’

만약 브렌의 말을 무시하고 간이 저장장치를 사용하면, 무조건 비상벨이 울린다.

그런 조치까지 내렸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책상에 메모리스틱이 놓여 있다? 달리 생각하면 악의적으로 조롱할 의도까지 느껴진다.

“도전이라 이건가?”

브렌은 책상의 단말기를 조작한 뒤, 암릿의 스캔 기능을 열었다. 주황색 빛이 메모리 스틱을 훑었다.

“다행히 스파이봇은 아닌 것 같군.”

그렇지만 당장 열어볼 염두는 내지 못했다. 이 안에 들어 있는 게 무엇이든 간에, 독단으로 처리하는 건 안 될 일이다. 게다가 이 방의 단말기에는 이 저택의 무장배치나 회장의 일정 등등, 침입자들이 군침을 흘리는 고급정보들이 가득하다. 브렌은 단말기의 접속기록을 확인해보았다. 시큐리티가 걸려 있기에, 이것은 임의로 삭제가 불가능했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기록은 어제저녁이었다.

혹시 몰라서 브렌은 전력사용량까지 체크해보았다. 그렇지만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단말기는 브렌 말고는 손 댄 사람이 없다. 즉, 이 방에 침입한 사람은 메모리 스틱만 올려두고 빠져나간 것이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한 거지?”

회장과 편재는 일단 제외. 그 두 사람에게도 이 방의 접근권한은 있다. 하지만 볼일이 있다면 호출할 사람들, 이렇게 몰래 다녀갈 이유는 없다.

브렌은 그 자리에서 단말기를 조작해, CCTV에 찍힌 영상을 확인했다. 하지만 화면에 비치는 것은 새벽의 고요한 복도였다. 새벽단련을 위해 트레이닝 룸을 다녀온 3시간동안, 얼씬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외선 카메라에도 찍힌 게 없다. 스파이봇을 이용한 침입일까 싶어, 전자기장 검색까지 해봤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유령이 다녀갔단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 봐도 이 상황을 설명할 가설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 혼자 고민할은 아니야. 내가 모르는 뭔가가 벌어지고 있어.”


◇◇◇◇◇◈◇◇◇◇◇◇◈◇◇◇◇◇◇◈◇◇◇◇◇


“편재군은 잘 지내고 있소?”

“네. 걱정해주신 덕에 무탈합니다. 케이트양은 어떻습니까?”

“그 아이도 괜찮다오. 그날 저녁에 곧장 회사로 출근했다더군.”

“머리위로 칼이 떨어지는 건, 무서운 경험이었을 텐데. 어린 아가씨가 대단하군요.”

“겉보기만 여리지 실제는 강단 있는 아이라오. 괜히 마도로스社의 사장을 맡긴 게 아니지. 그나저나……범인은 아직 못 찾았소?”

“그렇습니다. 그들 역시 사주 받은 것 같더군요. 그쪽은 어떻습니까?”

“허허……우리 쪽에서도 자체조사를 시작했소. 이번에 관련된 분리주의자는 D2계열이더군요. 그쪽은 파이오니어 컴퍼니보다는, 우리 콜로니 연합과 자주 다투던 자들이었지. 당연히 평소부터 거점들을 파악해놓고 있었다오.”

“기습이로군요.”

“묵혀두었다가 때 되니 수확한 것뿐이오.”

자에몬이 입가의 주름을 일그러뜨렸다. 지금까지의 웃는 낯이 아니다. 입체 홀로그램이지만 그 눈에서 살벌한 기운까지 감돈다. 편승은 자에몬의 심상찮은 반응에 덩달아 긴장했다.

양측 세력이 참석한 파티는 파이오니어 컴퍼니 측에서 주최한 것이다. 그러니 파티에서 생긴 불미스러운 문제의 책임은 이쪽에 있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라면, 이쪽에 책임을 물을만한 증거를 찾았다는 뜻인가?’

보안회선으로 동영상이 전송되자 편승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건 뭡니까?”

“거기서 발견한 거요. 아무래도 이건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자에몬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이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는 일. 편승은 동영상을 재생했다. 그리고 걱정하던 사태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영상은 사람에게 캠을 장착해 찍은 것이었다.

그 속에서는 중키의 남자가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무장한 자들을 상대로 싸우는 모습이 들어 있었다. 무장한 자들의 총구에서 푸른 빛줄기가 쏘아졌지만, 남자는 그것을 모조리 피해내고 가까이 접근해 무기를 탈취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학살. 근거리에서 연사된 총탄에 무장한 자들은 머리를 잃고 나뒹굴었다. 시체를 뒤적이던 남자는 그 밑에 무엇을 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시체들 쪽으로 또 다른 자들이 다가왔다. 그들 중 하나가 시체를 뒤집는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엔 발밑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음성까지 지원되었다.

- 무장 경비대의 절반은 여기서 죽는다.

- 잠깐! 잠깐! 이러지 말라고! 대화로 풀어가자고.

- 시간 끌지 마라.

남자가 단분자 커터를 휘둘렀지만, 서플라이가 망가진 쇳조각은 금세 박살이 나버렸다. 그러자 무장 경비대들이 이죽거리며 총구를 겨누었다. 무기를 잃은 남자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보였다. 하지만 이어진 결과는 전혀 달랐다. 어느 샌가 바싹 접근한 남자가 손을 뻗어 무장경비 하나를 잡았다. 그 손가락은 어렵지 않게 사람의 생살을 파고 들어갔다. 줄줄 흐르는 피가 소매를 적셨다. 남자는 거칠게 손을 뿌렸다. 시체는 가랑잎처럼 날아가고, 그의 손에는 한 움큼의 살점이 남았다. 대단한 악력이었다.

- 쏴! 쏴라!

당황한 무장경비들이 총을 쏘았지만, 남자의 공격에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그야말로 귀신같았다. 그만큼 남자의 움직임은 두서가 없었고, 눈으로 잡아내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이건 동영상이다. 프레임을 웃도는 폭발적인 속도의 움직임은, 무수히 잔상을 남겨 보고 있자니 정신 사나웠다.

- 끄헉!

마지막 비명소리를 끝으로 남자의 잔상은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워들더니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동영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꽤 재미있었을 거라 생각하오.”

편승은 자에몬을 바라보지 못했다. 동영상 속의 남자는 영희다.

대외적으로 얼굴을 자주 내비쳤으니, 자에몬이 그걸 모를 리 없다. 무엇보다 이 영상은 파이오니어 컴퍼니의 치부를 담고 있다. 저렇게 많은 무장 경비가 죽어나간 때는, 구원절 테러밖에 없다.

“우리 콜로니 연합은 테러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소. 파이오니어 컴퍼니가 그렇게나 엉망으로 당했다는 건, 우리 역시 그리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이걸 보고 나니 모든 고민이 해결되더이다.”

에둘러 말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자에몬은 편승을 질책하고 있었다.

파티에서 장식용 검이 떨어지는 일이 생겼지만,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고, 음모를 꾸몄으리라 생각되는 분리주의자들도 잡아들였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건 아니다. 누군가 책임은 져야만 한다. 지금까지 파이오니어 컴퍼니 측에서는 5:5의 과실 책임을 주장해왔다. 파티는 이쪽이 열었지만, 양측 세력이 함께 참석하면서 생긴 빈틈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게다가 양측이 서로 다퉈서 좋을 게 없으니, 좋게좋게 넘어가자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영희는 편승의 측근. 그런 자가 내부혼란을 꾀하여 외부의 침입을 도왔다. 그리고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남아, 최근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에까지 개입했다.

그 증거가 D2계열 분리주의자들의 은신처에서 찾아낸 이 동영상이다.

“이틀의 시간을 주겠소. 이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기를 바라오. 만약……지금까지의 일들이 자작극이라면, 우리 콜로니 연합은 전력을 다해 상대해줄 것이오.”


◇◇◇◇◇◈◇◇◇◇◇◇◈◇◇◇◇◇◇◈◇◇◇◇◇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브렌은 호주머니의 메모리 스틱을 만지작거렸다. 편승의 이야기를 들으니 자신의 문제는 사소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쪽은 거동수상자라는 불명확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 반면, 편승의 이야기는 정치적인 내용이었다. 어쩌면 사병들이 동원되어 실제적인 무력충돌이 발생할 지도 모르니, 사실상 선전포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편승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게 뭐 대수냐는 태도다.

“이젠 자네의 용건을 들을 차례로군. 이른 시간에 찾아올 정도로 중요한 일이겠지?”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방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메모리 스틱이군.”

“아시겠지만 저는 메모리 스틱 같은 건 사용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겁니다. 하지만 CCTV에도, 적외선 센서에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스파이봇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겠지. 안티 스파이봇의 숫자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수세하니까.”

“어쩌면 이건 콜로니 연합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메모리 스틱을 자네 책상에 둔 게, 연합의 스파이가 한 짓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얻는 이익은?”

“그것은…….”

“정답을 말해주지. 이득은 없네. 이건 자네 책상에 놓여 있었네.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 가버리면? 게다가 이걸 건네받은 내가 그냥 없애버리면? 그러면 공작의 의미는 없어지네. 저들이 짠 각본치고 너무 미적지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럼 왜 이게 제방에 있는 겁니까?”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 그때까지는 어떤 추측도 금물이네.”

“알겠습니다.”

“일단……비밀을 지켜줄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겠군. 아들 녀석이 요새 좀 부지런해 진 것 같긴 한데.”

그런 이유로 메모리 스틱은 편재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편재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손으로 덤벨을 들어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는데 이게 놓여 있었다고요?”

“그래. 사실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만, 일단 내부인 중에 이런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은 피온 밖에 없더라고.”

“일단 사람이 놓고 간 건 맞을 거예요.”

“그렇겠지. 메모리 스틱에 발이 달려서 혼자 걸어들어 온건 아닐 테니.”

“답은 뻔한 거죠. 브렌의 새로 옮긴 방은 역대 단장들이 모두 거쳐 간 곳이에요.”

“그게 뭐.”

편재는 팔을 바꿔 덤벨을 들어 올리면서 혀를 찼다.

“쯧쯧. 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이런 문제가 생기지. 역대 단장은 그 방에 하나의 물건을 남길 권한이 주어져요. 단장을 맡고 있는 동안, 위험물이 아닌 경우에 한하여 한 가지 물건을 지정해둘 수 있어요. 그러면 단장의 교체와 함께 해당 물건은, 진공 포장되어 보관되다가 일주일이 지나면 개봉돼요. 아, 3㎏를 넘기는 건 절대 안돼요.”

브렌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급하게 단장이 된 건 맞다. 이런 걸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것을 어째서 회장은 알려주지 않았단 말인가. 브렌은 회장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결론 내렸다. 회장 역시 모르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럼, 이게 영희 단장이 남긴 거라고?”

“전 그렇게 생각해요. 누구도 들어온 흔적이 없다면, 결국 방 안에서 이뤄진 일이잖아요. 나중에라도 확인해 봐요. 단장 전용 캐리어에 냉장고까지 있다던데, 설마 지금까지 몰라서 안 쓰고 있었던 건 아니겠죠?”

전용 캐리어에 냉장고란다. 그런 게 있는 줄은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브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편재는, 덤벨을 내려놓았다.

“왠지 브렌이 못미더워지는데요?”

“큭. 이런 소리를 듣다니 자존심 상하는군.”

“지금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열어 볼 테니까, 아버지께 보고 끝나면 단장실 매뉴얼이라도 다시 살펴보세요. 어떻게 단장씩이나 되어가지고, 자기가 누릴 권리조차 파악을 못하고 있어요?”

“끄응.”

브렌이 얼굴을 붉히거나말거나, 편재는 메모리 스틱을 단말기에 꽂고 분석을 시작했다. 역시나 암호가 걸려 있는 상태. 단장실에서 나온 것이니 당연한 것이지만, 꽤나 까다로운 방법으로 압축까지 시켜놓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파일에서 나온 것은, 암호로 밀봉된 또 다른 데이터였다. 편재는 팔짱을 꼈다. 이대로라면 끊임없이 암호만 파다가 끝날 거라는 예감 때문이다.

“뭔가 잘 안 되는 것 같군. 실력이 녹슨 거 아니냐? 피온?”

편재는 고개를 저었다.

“실력이 녹슨 게 아니라, 예전에도 못 풀던 거예요. 이거 오리지널이거든요.”

“무슨 소리냐?”

“이 압축방식에 해당하는, 전용 프로그램으로 풀지 않으면 원본 데이터가 손상돼요.”

“뭐? 이미 풀어버렸잖아!”

“네. 원본 데이터는 손상되었어요.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건 아니에요. 방법은……전용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언락은 물론 데이터 복구도 가능하겠죠.”

“얌마, 피온. 오리지널 프로그램을 만들어 쓰는 괴짜를, 어디 틀어 박혀 있는지 알고 찾아내라는 거냐?”

“그럴 필요 없어요. 아는 사람이니까요.”

“누군데?”

“이 방식. 예전에 본적 있어요. 사실 긴가민가했는데, 한번 건드려서 틀어진 데이터를 보니 알겠어요.”

편재는 단말기를 조작해 문자열로 빼곡히 들어찬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대각선으로 그으며 알파벳을 이어 읽어보라고 했다.

브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글자를 읽어나갔다.

“에키드…나? 이렇게 읽는 게 맞나? 이 단어는 무슨 뜻이지?”

“에키드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이름이에요. 상반신은 아름다운 여인, 하반신은 뱀. 그 자체의 단어로도 살모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그 대각선을 따라 계속 읽어보세요.”

“라미아……이건 알겠군. 게임에 자주 나오는 몬스터잖아. 이것도 네가 말한 에키드나랑 다를 게 없지. 이다음엔 메두사……알골, 이건 아랍어로군. 알골은 페르세우스자리의 그 변광성을 말하는 거지?”

“맞아요. 그 단어들의 공통점은?”

“뱀이지. 진짜 그 녀석이냐?”

“프로그램에 잔뜩 뱀을 집어넣을 사람이 또 있겠어요? 혹시 리암이랑 연락돼요? 용병일 관두고는 한 번도 연락이 안됐는데.”

“끄응. 알았다. 여기부터는 내가 알아서 해보마.”

“역시 연락은 꾸준히 하고 있었네. 나중에 만나면, 안부 전해줘요.”

편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메모리스틱을 건네주었다. 방을 나선 브렌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떻게든 혼자 해보마라고 말은 했지만, 리암과 연락하는 건 그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리암의 소재는 알고 있었다. 최근에 만나서 싸우기까지 한 사이다.

구원절 테러에 참여한 리암은 인형병기-스캐럽 타입을 개조해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브렌은 목이 졸려 죽기 직전까지 가야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로비의 경비 병력을 몰살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리암은 지금 냉동감옥에 수감 중이다.

파이오니어 컴퍼니 원로들은 사형시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회장 편승이 더 조사할 게 남아있다는 핑계로 취한 조치였다. 하지만 사실은 브렌이 고개를 조아려가며,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냉동감옥 수감이라도 브렌은 만족했다.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그리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옛 동료로서 챙겨주는 건 여기까지라고.

헌데 편재의 의견대로라면, 이 메모리 스틱의 데이터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냉동감옥에서 리암을 풀어줘야 한다. 회장에게 또 부탁을 해야 하나 싶어 브렌은 난감했다.

“영희 단장이 남긴 물건이라니 꺼림칙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안볼 수도 없고.”

그러나 일단 보고는 해야 했다. 편재에게 가서 메모리 스틱의 내용을 알아보라고 한 건 회장이었다.


◇◇◇◇◇◈◇◇◇◇◇◇◈◇◇◇◇◇◇◈◇◇◇◇◇


회장실에 들어선 브렌은 편재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그리고 편승의 반응을 살폈다.

죄인을 살려달라고 부탁해, 냉동감옥에 가두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죄인을 냉동감옥에서 꺼내달라고 말한다. 회장인 편승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법도 하다. 무리해서 부탁을 들어주었더니, 이젠 옷까지 벗겨먹으려는 태도 아닌가. 그래서 브렌은 욕 얻어먹을 각오까지 한 상태다.

헌데 편승의 반응은 브렌의 예상을 벗어났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보안회선을 열어 냉동감옥의 관리자를 호출한 것이다.

“거기 수감된 자들 중에, 리암이라는 용병이 있을 거요. 그자를 당장 해동시키시오.”

- 알겠습니다. 해동에 걸리는 시간은 16시간입니다. 인계는 어떤 방식으로 하겠습니까?

“내가 직접 가겠소.”

통화를 마친 편승은 아무렇지도 않게 찻잔을 기울였다. 브렌은 안절부절 못했다.

“리암은 이번 일에 깊이 관련된 인물입니다. 이렇게 쉽게 풀어줘도 되는 겁니까?”

“반발이 심하겠지.”

“어째서 이러십니까?”

“영희가 남긴 메모리 스틱의 데이터, 그자만이 풀 수 있다니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렇다면 제가 만나보겠습니다.”

브렌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야 할 때임을 알고 있었다.

이미 편승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뒤다. 콜로니 연합에서 영희 단장을 악의 축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파이오니어 컴퍼니 내부에서도, 편승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 생겨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 그러니 브렌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섭섭하군. 자네는 벌써부터 내가 회장직에서 물러날 것처럼 구는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알지 알아. 하지만 주변의 눈치만 보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난 이 메모리 스틱이 실마리라고 생각하네. 나타난 시기가 너무도 절묘하지 않나.”

편승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책상위의 메모리 스틱을 응시했다.

영희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

그는 구원절 당일 삭제된 CCTV영상을 복구해 재생하던 때를 떠올려보았다.

영희가 무언가 위험한 일에 관계되어 있다는 심증만을 남긴 영상. 동시에 영희의 이중성을 알게 해준 영상이기도 했다.

그 내용은 침입자를 해치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신경가스를 사용한-잔인한 방법을 취한 게 문제일 뿐. 그래서 파이오니어 컴퍼니의 모든 구성원들은, 영희를 처벌하길 원치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 입은 피해에 비하면, 약소한 복수라고 생각하는 자들까지 있었다.

물론 영희가 보여준 의외의 모습에 놀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무장경비를 이끄는 단장으로서,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일로 치부되었다.

그렇지만 편승은 내내 마음에 걸렸다.

가까이에 두고 지켜본 사이이기에, 그가 아는 영희와 동영상속의 영희가 주는 간극이 크게 느껴졌다.

그것이 자에몬이 보여준 동영상으로 확실해졌다.

영희는 배신자였다. 아군을 학살하고 혼란을 조장한 양떼 속의 늑대.

편승은 마음속으로 미뤄온 결정을 이제는 내려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우두머리로서 배신자인 영희를 처단해야 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메모리 스틱 속에 든 내용을 확인하는 게 먼저다. 어쩌면 영희의 행동을 뒷받침해줄 증거가 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

‘어쩌면……난 아직도 녀석을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군.’

편승은 비어버린 찻잔을 내려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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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5) +1 13.11.13 1,751 28 21쪽
2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4) +1 13.11.12 1,143 25 14쪽
2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3) 13.11.11 1,134 31 21쪽
2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2) +2 13.11.08 1,562 39 18쪽
2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1) +1 13.11.07 2,192 36 23쪽
21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0) 13.11.06 1,139 36 18쪽
2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9) +1 13.11.05 1,531 31 22쪽
1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8) +3 13.11.02 1,113 23 20쪽
1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7) 13.11.01 1,203 32 23쪽
1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6) 13.10.29 1,151 31 23쪽
1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5) 13.10.28 1,143 27 14쪽
1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4) 13.10.26 1,476 36 17쪽
1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3) +1 13.10.25 1,585 36 16쪽
1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2) +1 13.10.24 2,419 40 21쪽
1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 13.10.22 2,117 32 15쪽
11 1. 계절이 바뀌는 때 (ED) +1 13.10.19 2,871 138 19쪽
10 1. (9) +1 13.10.16 1,911 42 23쪽
9 1. (8) 13.10.14 1,703 29 23쪽
8 1. (7) +1 13.10.05 3,286 60 25쪽
7 1. (6) 13.10.04 2,228 42 22쪽
6 1. (5) 13.10.02 2,266 39 17쪽
5 1. (4) 13.09.29 2,359 4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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