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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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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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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05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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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글자
25쪽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5)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5.

콜로니의 A블록 최상층에는 각종 연구기관들이 밀집되어 있다.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연구들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출입이 통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같은 A블록이라도 모두에게 개방된 공간이 있다.

바로 식물원이라 불리는 장소다.

이곳은 생태계 복원을 목표로 하는 연구 기관에서 민간인을 위해 마련되었다. 콜로니 사람이라면, 설사 맨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라 해도 식물원에 올 수 있다. 혹자는 연구단지의 보안 때문에 막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불미스러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콜로니를 지배하는 VIP들은 아예 식물원까지 직통으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주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식물원에 호의를 보이는 이유는 하나다.

아무리 콜로니가 각종 편의를 제공하여도, 사람들은 콜로니 바깥을 동경한다.

머나먼 조상님들이 거닐던 흙투성이 땅, 시원한 강물과 바닷물의 짜디짬을.

누구나 스크린 루프가 투영하는 이미지가 아닌, 진짜 파란 하늘을 눈에 담는 상상을 한다. 기상시스템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진짜 자연 그대로의 바람에 몸을 맞기고, 진짜 비를 맞으며, 진짜 눈을 만지고 싶어 한다.

생태계 복원 연구는 그런 욕망을 이루어줄 열쇠다. 인류가 다시 제로 그라운드에서 살아갈 기회를 주기위한 노력인 것이다. 분리주의자들마저도 A블록 연구단지에서는 단 한 번도 테러활동을 벌이지 않았다. 방법이 다를 뿐 그들 역시 ‘제로그라운드’로의 진출을 바라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 사람들의 열망 때문에 생태계복원 연구기관은 한 층의 절반이나 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콜로니의 한 층이 어지간한 메트로폴리스의 몇 배나 되는 규모임을 감안해본다면, 이건 지나치게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런 사람들의 관심을 대변하듯 생태복원 연구기관은, 라엘리언 침공이전의 식생을 복원한 식물원을 공개했다.

콜로니의 시민들은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고, 때론 산책을 하며 식물원에서의 시간을 즐겼다. 최하층 블록에 사는 사람이라 해도 엘리베이터를 통하면, 얼마든지 식물원에 올라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곳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북적이는 장소였다.

식량 플랜트 블록에서 파견된 농부가 묵묵히 꽃을 심고 있었으며, 근처에서는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소풍을 나온 것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숲을 뛰어다녔고, 교사들은 통제하려고 애를 썼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미소 지었다. 자고로 아이들은 저렇게 뛰어놀아야 하는 법이다.

풋내 나는 초보 교사들이 진땀을 빼는 모습조차도 평화로웠다.

맞은 편 벤치에 앉아있는 덩치 역시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덩치는 자신의 암릿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는 손목을 뒤집었다.

짧은 메시지가 홀로그램 창에 떠올랐다.

- 휴식시간 종료.

덩치는 아무 말 없이 후드를 눌러쓰며 몸을 일으켰다. 휘어진 벤치가 원상복구 되면서 쇠 뒤틀리는 소리를 냈다. 근처에 있던 아이하나가 손가락을 들어 덩치를 가리켰다.

“돼지다! 돼지!”

교사가 달려와 아이를 말렸다.

“죄, 죄송합니다. 아직 어린애라서…….”

덩치가 다가오자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살이 덕지덕지 붙어있다고는 하나,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당당한 체구의 사람이 앞에 서 있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충분히 거인이었다. 그런 존재를 화나게 했다고 여기자 아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덩치는 말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혔다. 큼직한 손이 다가오자 급기야 아이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덩치가 입을 열었다.

“괜찮다. 화 안 났어.”

낮은 목소리가 아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덩치는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을 풀더니, 전력질주로 달려 사라져버렸다. 이미 식물원에는 뚱뚱한 사람들이 헐떡이며 뛰는 광경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복장을 보니까 다이어트 중이었나 보네. 현태야.”

“네?”

“낯선 사람의 흉을 본 게, 요 주둥이더냐?

교사의 손이 아이의 입술을 잡아당겼다.

“아, 아…아파여!”


◇◇◇◇◇◈◇◇◇◇◇◇◈◇◇◇◇◇◇◈◇◇◇◇◇


한 시간 가량 달리던 편재는 식물원에 위치한 도시락 판매점으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라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편재는 ‘싱싱 야채 스페셜’을 주문했다. 미리 알아본 바로는, 이게 가장 평이 좋았기 때문이다. 점원은 고개를 저었다.

“품절입니다.”

“그럼 ‘파릇파릇 야채’는요?”

“품절입니다.”

편재는 눈을 굴려 도시락 먹는 사람들을 곁눈질 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편재처럼 살이 찐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이들이 먹는 도시락에는 파릇파릇한 풀만 그득했다. 모두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먹을 것을 그랬어.’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다. 편재는 도시락 하나 사겠다고 줄까지 서는 게 탐탁찮았다. 그래서 한산해질 때까지 식물원을 뛰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 결과가 품절이라면 달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설마 야채 도시락은 전부 품절입니까?”

“한 종류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 그걸로 주세요.”

편재는 암릿을 스캔하여 값을 지불했다.

“네. ‘콩콩 스페셜’ 여기 있습니다.”

도시락을 받아들고 보니 겉포장에서부터 다양한 콩 요리가 들여다보였다.

‘콩밥과 콩자반, 두부까지는 알아보겠군. 근데 나머진 하나도 모르겠어.’

편재는 라벨을 확인했다. 대체 무슨 요리인지 알고는 먹어야 할 것 아닌가.

‘콩고기를 곁들인 깍지콩에 오크라 조림? 오크라는 AU연합 특산물이지. 참 먼데서도 왔네. 베이크드 빈, 이건 알겠어. 이것도 대충 삶고 조린 거 아냐. 얼씨구? 두유까지? 이거 다 먹으면 뱃속에 가스 장난 아니게 차겠네. 그래서 인기가 없었구나.’

평소 편재가 먹는 양에 비해 모자란 양이지만, 벌써부터 편재는 도시락이 부담이 되었다. 이걸 먹고 운동을 하다간 대형사고가 터질 수밖에 없다.

‘으음…어른이 되어가지고 바지에 지릴 순 없는 노릇이지.’

먹는 걸 버릴 수도, 그렇다고 굶을 수도 없다. 결국 편재는 도시락을 들고나와버렸다. 적당히 러닝이나 더 하고나서 먹을 생각이었다. 저녁에 있을 파티까지 식물원을 이용할 계획은 유효했다.

‘댁들은 참 좋겠수다.’

샐러드를 와삭와삭 씹어대는 사람들을 흘기며 편재는 달려 나갔다. 그런데 엉뚱한 곳을 보며 뛰다보니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코앞에 서있는 사람을 미쳐보지 못한 것이다.

“어맛!”

“헉!”

충돌직전에 편재는 가까스로 몸을 빙글 돌려 피했고, 상대방 역시 흐느적거리는 동작으로 비켜섰다.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예요!”

하얀 지팡이가 가볍게 바닥을 찍었다. 편재는 지팡이에 둘러진 검고 붉은 고리를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보조 장비였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의 소녀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편재의 어깨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까딱 잘못하면 이 아이를 다치게 할 뻔했구나.’

편재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을 하고 걷느라 이런 일이 벌어졌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편재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앞도 안 보이는 소녀를 다치게 할 뻔했기 때문에, 얼굴은 이미 뜨뜻해진지 오래다.

주변에서 쏘아보는 눈초리도 따갑다. 소녀가 예쁘장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소녀는 콜로니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종의 특징과는 거리가 먼, 이국적인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어두운 금발에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거기에 주근깨가 콧잔등에 가라앉아 있었고, 호리호리한 몸에 비해 신체의 일부만 발육이 좋았다.

한마디로 비스크 인형 같은 분위기의 아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뿐.

유창하게 이곳의 언어를 구사하며 조목조목 따지는 소녀는, 10대의 당돌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죄송하다면 다예요?”

“그렇다면 얼마면 되겠습니까.”

자신의 잘못도 있고, 장애인을 상대로 막 대하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았기에 편재는 저자세로 나갔다. 그런데 상대는 그게 또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돈이면 다 해결 되나요?”

“그럼 연락처를 드리겠습니다. 추후에 문제가 생기면 알려주십시오.”

소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 것 같은데, 설마 헌팅하는 거예요?”

편재는 기가 막혔다. 돈으로 보상하는 것도 싫다, 나중에 문제 생길 때를 대비해 연락처를 준다니 그것도 싫다.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편재는 화를 삭였다. 상대는 연하에, 장애인. 그것도 미모의 외국인 소녀다.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는 뚱땡이들은 전부 편재가 잘못했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다.

‘CP라도 달려오면 일이 귀찮아져.’

오늘 저녁의 파티 때문이라도 편재는 조신하게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편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다면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합당한 보상을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미천한 뚱땡이라 미모의 아가씨와 부딪칠 뻔한 대형 사고는 처음 겪어봅니다만?”

말해놓고 보니 비꼬는 말처럼도 들린다. 은연중에 마음속의 불만이 새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다치지 않았으니까, 보상은 됐어요. 연락처도 필요 없고요. 다음부터는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녀요. 저 같은 사람에게 이런 말 들으면 화도 안나나요?”

“끄응…….”

편재는 거듭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고는 부리나케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런데 뒤에서 소녀가 편재를 부르는 게 아닌가.

“이건 가지고 가야 할 거 아녜요? 당신 물건 아닌가요?”

소녀가 내미는 건, 조금 전 구입했던 ‘콩콩어쩌고’ 라는 이름의 도시락. 편재는 도시락을 받아들고 전속력으로 내뺐다. 꼬장꼬장하게 구는 소녀와 대거리 하다가는 제 성질을 못이길 것 같았다.

쌩하니 편재가 사라지는 방향을 살피던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익숙해.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일까?”


◇◇◇◇◇◈◇◇◇◇◇◇◈◇◇◇◇◇◇◈◇◇◇◇◇


밤이 되자 편재는 정장으로 갈아입고 파티장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탠딩 파티로군.”

파티장에 의자들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실제 앉아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참가자의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을 데려온 연장자들은 대부분 회의실로 들어 가버렸다. 한마디로 파티장은 젊은 사람들끼리 놀라고 준비해둔 곳이었다.

‘하긴. 여기 온 사람들은 미래에 콜로니를 이끌어나갈 사람들. 미리 안면이라도 익혀두라고 데려온 거겠지.’

하지만 편재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아니, 파티장에 들어온 순간 사람들의 눈이 편재를 향하긴 했다. 그 다음부터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을 뿐이다.

편재는 쓰게 웃었다. 이유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을 멀리 하려는 저들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이게 다 어린 시절 너무 터프하게 놀았던 탓이다.

자신 때문에 분위기를 망치는 건 곤란했기에, 편재는 음식이나 조금 챙겨서 구석진 자리로 가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인사는 필요 없었고, 서로 간에 따로 볼일도 없었기에 그렇게 하는 게 좋았다.

간단한 요리와 샐러드가 늘어선 탁자에 도착한 편재는, 낮에 먹은 콩 도시락을 떠올리며 콧김을 뿜었다. 아무리 다이어트 중이라 해도, 야채 특유의 아삭한 식감을 포기한 도시락은 먹는 즐거움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편재의 눈에는 온통 잎채소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신없이 담다보니 접시는 샐러드의 산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접시를 들고 돌아선 편재는 눈매를 좁혔다. 근처에서 요리를 담던 사람이 너무도 낯이 익은 것이다. 금발머리에 흐리멍덩한 눈동자. 그리고 손목에 걸린 하얀색 지팡이.

‘얘도 VIP였어?’

편재는 상대를 외면하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다행이 소녀는 못 알아챈 것 같았다. 의자를 끌어와 구석에 자리 잡은 편재는, 샐러드 바에서 집게를 깨작거리는 소녀를 보며 턱을 긁었다.

‘앞도 안 보이면서 이것저것 잘 찾네. 혹시 안 보이는 척 하는 거 아냐?’

생각해보면 낮에 부딪칠 뻔했을 때, 소녀 역시 회피동작을 취했었다. 보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앞 못 보는 가련한 소녀 연기라도 하는 중인가? 이게 말로만 듣던 중2병?’

짐작 가는 거라고는 이런 엉뚱한 상상 밖에 없었으나,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보기도 그렇다.

‘신경 끊자.’

편재는 묵묵히 샐러드를 입속에 쑤셔 넣었다. 샐러드가 담긴 접시가 반 정도 비워질 무렵, 세 청년이 샐러드 바를 향해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은 접시에 음식을 담는 대신, 누군가를 둘러쌌다.

“소문 들었다. 케이트. 네가 마도로스 社의 신임사장이라며?”

한 청년이 말을 건 사람은 편재가 식물원에서 마주친 시각장애인 소녀였다.

샐러드를 씹던 편재의 턱이 멈췄다. 해킹사건 이후 신임사장의 존재는 매스컴에 드러나지 않았다.

신비주의 전략이 아니라, 업무에 방해가 될 수도 있기에 가급적 노출을 꺼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며 그 정체를 밝히려 했지만, 마도로스社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런 어린애라고? 마도로스社 녀석들은 전부 정신이 나간 건가?’

편재는 더 오션에 모든 것을 걸었다. 폐쇄구역의 unlock을 위해 현질까지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게임을 서비스 하는 회사의 사장이 저런 여자아이라면, 앞으로도 게임이 제대로 굴러갈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장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적다.

‘빌어먹을. 이러다 메인 퀘스트 전부 깨기 전에, 회사가 망해버리면 어떡하지?’

편재는 허둥지둥 샐러드를 모조리 입속에 밀어 넣고, 빈 접시를 들었다. 그리고 태연히 샐러드 바에 다가가 접시를 채우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뚱보가 먹을 것에 껄떡거리는 모습이었다. 실제로는 가까이에서 대화를 엿듣기 위해서지만…….

세 청년들은 편재를 보고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케이트와의 대화에 열중했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군요. 사장이라면 높은 사람 아닌가요? 서류 결재를 비롯해 이런저런 일들 총괄해야 하는데, 앞 못 보는 계집이 그런 일을 어떻게 하나요?”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이미 소문이 짜~하게 났단 말이다.”

케이트는 얼음이 풀풀 날리는 표정으로 청년들을 돌아보았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이봐…네가 인정하건 하지 않건, 우리들은 너에게 용건이 있어.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말라고.”

“말하시죠.”

“이번에 업데이트 되는 내용 중, 중간 보스급의 적이 출현한다는 게 사실이냐?”

케이트는 눈썹을 세웠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설사 제가 마도로스社의 사장이라 해도 순순히 알려줄 것 같나요?”

“후후……너의 그 태도. 충분한 답이 되었다. 중간 보스급이란 말이지? 하나 더 묻자.”

“불쾌하군요. 상대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그 뻔뻔함. 착각하는 건 자유지만,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진 않습니다. 비켜주세요.”

케이트는 음식접시를 들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청년 중 하나가 케이트의 손목을 붙잡았다. 바닥에 떨어진 접시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음식이 사방에 튀며 바닥을 어지럽혔다. 사람들은 샐러드 바를 힐끗 쳐다보았을 뿐, 다시 고개를 돌려 하던 일을 계속했다.

“신임사장님. 그렇게 앙탈 부리지 말라고. 그냥 정보나 좀 얻자는 거 아냐?”

케이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목에 걸린 스트랩을 미끄러뜨렸다. 지팡이를 고쳐 쥔 케이트를 보고 청년이 웃었다.

“설마 그걸로 때릴 생각이야? 이봐. 그러지 말라고. 우린 같은 콜로니 연합이잖아? 파이오니어 컴퍼니의 소굴에서 다투는 모습을 보여 봐야 좋을 게 없잖아?”

그 말을 들은 케이트는 부르르 몸을 떨어댈 뿐이었다. 어찌나 분한지 찡그린 얼굴에서 눈물까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외면하며 청년들은 케이트를 닦달하려 했다. 그때 큼직한 손이 청년들과 케이트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뭐, 뭐야?”

편재는 아무렇지도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죄송합니다. 이걸 먹고 싶었는데, 하도 비켜서지 않으시기에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 그렇군요.”

접시에 음식을 담는 편재를 보며 청년들은 순순히 사과하고 물러섰다. 어쨌거나 남에게 피해를 준건 맞았으니까. 그들은 다시 케이트를 둘러쌌다. 편재는 케이트 바로 옆의 음식에 손을 뻗었다.

“죄, 죄송……이것도 먹고 싶어서…….”

청년들은 아무 말 없이 한 발짝 물러서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케이트를 압박하는 거리에 서 있었다. 편재는 다시 음식에 손을 뻗는 척하면서, 집게를 툭 쳐올렸다. 음식더미에 꽂힌 집게가 회전하면서 음식이 튀어 올랐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청년들에게 정확히 떨어져 내렸다. 곧 이들의 양복에 얼룩덜룩한 자국이 생겨났다.

“이……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지금 시비 거는 거요?”

편재는 궁색한 한마디를 흘렸다.

“전기 통구이가 먹고 싶어서 그랬던 것뿐입니다.”

편재가 말을 마치자마자 파티장에서 잡담하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파티장은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청년들은 편재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이 치가 먼저 시작한 거요.”

“내 옷 좀 봐요. 더러워지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청년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입구 쪽에서 수다를 떨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전기 통구이.”

그리고 파티장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불쌍한 것을 보는 시선으로 바뀌었다. 그 시선을 받은 건, 세 청년이었다.

“뭐, 뭐요? 왜 다들 그렇게 보는 거요?”

누군가 물었다.

“자넨 모르는가? 전기 통구이를?”

“저기 샐러드 바에 있지 않소?”

청년이 가리키는 곳에는 편재가 집어먹으려던 전기 통구이 된 닭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혀를 찼다.

“모르는군.”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세 청년들은 곰곰이 자신들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전기 통구이라니 그게 어쨌단 말인가?

“아…….”

갑자기 청년 하나가 신음을 흘렸다. 나머지 두 사람은 친구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데?”

“어떻게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뭔데 그래?”

“전기 통구이. B블럭 초등교육단지.”

친구의 말은 단서의 나열이었지만, 두 사람은 단박에 알아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거?”

“잠깐. 그게 왜 여기서 나와?”

“전기 통구이, 그 놈은 파이오니어 컴퍼니 계열이야.”

세 청년은 고개를 돌려 자신들에게 시비를 건 뚱보를 바라보았다.

뚱보는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편재라고 해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청년은 누구보다 빠르게 뛰어 파티장을 빠져나가버렸다. 그들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다시 수다를 떨며 파티장을 소음으로 가득 채워나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케이트 옆으로 다가선 편재는 조용히 손수건을 손에 쥐어주었다.

“술이 당기네. 빌어먹을.”


◇◇◇◇◇◈◇◇◇◇◇◇◈◇◇◇◇◇◇◈◇◇◇◇◇


결국 편재는 술 대신 생수를 선택했다. 앞으로 2주만 더 참으면 다이어트에 성공한다. 이제 절반밖에 안 왔는데 한순간의 유혹으로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편재는 씨근덕거렸다.

“누군지 몰라도…저런 양아치들을 데리고 오다니. 제 정신이 아니야.”

“그렇게 무시할 집안이 아니랍니다.”

편재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케이트가 곱게 접힌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빨아서 건조시켰습니다.”

“그냥 가지셔도 되는데.”

“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해야 하는군요.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헌팅하려는 건가요?”

“네?”

케이트는 푸훗 하고 웃었다.

“농담이에요. 그냥 돌려준다는 핑계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온 거예요. 그리고 손수건은 그냥 제가 가지겠습니다.”

“그러시든지.”

케이트는 지팡이를 접으며 편재의 옆에 앉았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기가 막히게 정확한 위치에 착석. 그 모습을 보니 편재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앞이 안 보이는 거 맞습니까?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자연스러운데요?”

“약시입니다.”

“아주 안 보이는 건 아니군요.”

“하지만 제가 보는 세상은 너무 흐릿하죠. 그러니 지팡이는 필요하답니다.”

“영화 속에서 기절한 주인공이 정신을 차릴 때, 시야가 흐렸다 밝아졌다 하는 것처럼 말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평소에도 계속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거로군요.”

“딱히 그런 뜻은 아닌데…….”

“따지는 건 아니에요. 아, 첫 만남이 너무 안 좋아서 그런 선입관이 생긴 건가요?”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고작 몇 시간 전의 일인 걸요. 게다가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이고.”

편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목소리는 흔한 게 아니다. 중저음과 고음을 왔다 갔다 하는 목소리라서, 노래라도 부른다면 쉽게 음 이탈이 일어나 노래를 망치는 목소리인 것이다.

“사람들이 크게 좋아할만한 목소리가 아닌데 이상하군요.”

“우리 만난 적이 있나요?”

편재는 뚫어지게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금발머리에 푸른 눈. 용병 생활 중에 많은 외국인들을 만나보았지만, 이렇게 전형적인 서양인의 외모와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글쎄요. 당신 나이의 소녀와 만날 일은…그것도 서양인과 만날 기회는 없었습니다.”

“외국인을 전혀 만나지 못한 건가요?”

“아뇨. 외국인들이라면 수없이 접해보았습니다. 다들 엇비슷하게 생겨서 그렇지요.”

“비슷해요? 어떻게요?”

“어…몽골리안도 섞여 있고, 아프리칸에, 잉글랜드에, 라틴 등등. 둘 이상은 섞였어요. 다들 조상님들이 인종을 초월한 사랑을 했나보지요. 수세대를 거치면서 피가 희석되어 뭔가 전형적인 분위기의 얼굴이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실제로 보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럼 저 같은 얼굴은 처음이겠네요.”

“네. 솔직히 말하자면 희귀하지요. 요즘 세상에 순혈주의자는 거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인종차별은 존재하잖아요.”

“그거야 과거와는 다른 이유지요. 피부가 까만 자들을 배척하는 건, AU가 너무 잘나가서 아닙니까. 최고의 과학기술, 그리고 이미 테라 포밍을 시작한 땅. 부러워서 시기하는 겁니다. 저도 부럽다고요. 젠장.”

케이트는 킥킥대며 웃더니 정색을 하고 물었다.

“조금 전의 일. 궁금해서 그러는데 물어봐도 돼요?”

무엇을 물어볼지 편재는 알고 있었다. 세 청년이 도망친 이유. 하지만 편재는 그것을 답해줄 생각이 없었다. 괴로운 기억을 헤집어가며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는 건 취향이 아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에요.”

“낮에 하신 말을 되돌려 드리지요.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진 못합니다.”

“대가는 금전이 아니랍니다. 더 오션의 다음 업데이트 내용이 궁금하지 않나요?”

편재는 순간 움찔했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아니, 누구보다도 이런 종류의 정보가 절실했다.

레드 오션이라는 게임을 해킹하다 못해, 갈아 엎어버린 편재다. 오로지 폐쇄구역을 열기 위한 도구로 쓰기 위해서. 그 과정은 분명 범죄라 불릴만한 것이었고, 편재는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더 이상 해킹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도로스社의 신임사장인 케이트가 자진해서 정보를 내밀고 있다.

편재는 순간 의심을 품었다.

‘설마 내가 해킹범인 걸 알고서 함정을 깔아두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조금 전 자신이 혼쭐을 내준 세 청년 역시 의심스럽다. 마치 한편의 연극 같지 않은가. 편재는 올가미가 조여 오는듯한 환상을 보았다.

“벼, 별로 안 궁금합니다. 그리고 업데이트라면 언젠가는 발표될 내용. 미리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번 업데이트는 메인 퀘스트와 관련된 전쟁 이벤트라 보통 중요한 게 아니죠. 거기다가 바하르칼 vs 안티바하르칼의 본격적인 대립이 이루어질 텐데, 우리 회사에서 균형을 맞추려 애쓰지 않겠어요?”

“하나도 안 궁금하다니까요.”

그에 아랑곳 않고 케이트는 벌떡 일어나 편재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통을 먹는 자가 참전해도요?”

편재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정보를 듣고 말았다. 눈앞에는 케이트가 활짝 웃고 있었다.

“이제 이야기 해주시겠어요. 전기 통구이가 뭐죠?”


작가의말

1.

전기 통구이?

뭐긴 뭐야.

전기 통구이 파는 트럭을 통째로 털어 먹은 식신(食神)의 전설이지.

으히히히......


2.

추운 날씨가 발목 잡을 줄은 몰랐습니다.

냉기가 몸속에 파고들다보니, 집에 들어오면 글을 써야지 싶다가도....

몸만 녹이자고 이불속에 들어가면 다음날 아침...

아오......정신 바짝 차려야 겠습니다.



케이트 리뉴얼 버전 삽화 있습니다.

https://blog.munpia.com/gazha/category/287720/post/45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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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1) +4 13.11.23 1,521 20 19쪽
3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ED) +1 13.11.22 1,148 22 15쪽
2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8) +1 13.11.19 1,217 24 34쪽
2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7) +1 13.11.16 1,514 29 24쪽
2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6) 13.11.15 1,556 28 23쪽
2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5) +1 13.11.13 1,751 28 21쪽
2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4) +1 13.11.12 1,144 25 14쪽
2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3) 13.11.11 1,134 31 21쪽
2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2) +2 13.11.08 1,563 39 18쪽
2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1) +1 13.11.07 2,192 36 23쪽
21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0) 13.11.06 1,139 36 18쪽
2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9) +1 13.11.05 1,531 31 22쪽
1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8) +3 13.11.02 1,114 23 20쪽
1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7) 13.11.01 1,203 32 23쪽
1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6) 13.10.29 1,151 31 23쪽
1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5) 13.10.28 1,143 27 14쪽
1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4) 13.10.26 1,476 36 17쪽
1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3) +1 13.10.25 1,585 36 16쪽
1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2) +1 13.10.24 2,419 40 21쪽
1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 13.10.22 2,117 32 15쪽
11 1. 계절이 바뀌는 때 (ED) +1 13.10.19 2,871 138 19쪽
10 1. (9) +1 13.10.16 1,911 42 23쪽
9 1. (8) 13.10.14 1,703 29 23쪽
8 1. (7) +1 13.10.05 3,286 60 25쪽
7 1. (6) 13.10.04 2,228 42 22쪽
6 1. (5) 13.10.02 2,266 39 17쪽
5 1. (4) 13.09.29 2,360 4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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