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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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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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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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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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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글자
23쪽

1. (2)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2.

대절멸이 일어나고 3년 뒤인 서기 2112년. 이 해는 ‘파이오니어 컴퍼니’가 첫 결성된 때였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파이오니어 컴퍼니’는 파괴된 세계를 새로이 개척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불모지가 되어버린 땅을 다시 되살리고 개발하는 데 그들이 쏟은 노력은 눈물겨웠다. 이전의 기계문명은 완전히 파괴되어 땅을 개간하는 것은 순수한 인력이었다. 완전히 파괴된 산업 기간 시설을 다시 만드는 것만 해도 갖은 위험이 따랐다.

치명적인 방사선. 적대적인 돌연변이 생물. 불안정한 지반.

무엇보다 큰 위협은 이기적으로 변해버린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 10년 뒤 곳곳에 콜로니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오염지역에서 살아가던 인류가 안전한 장소로 이주한 날.

그날은 9월 19일. 오늘 날 사람들은 ‘구원절(salvation day)’이라 부른다.


◇◇◇◇◇◈◇◇◇◇◇◇◈◇◇◇◇◇◇◈◇◇◇◇◇


언제나 파란 하늘을 투영하던 스크린루프는, 불꽃이 터져나가며 뿌리는 반짝이는 가루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그 아래에서는 한껏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껏 치장한 퍼레이드가 지나가고, 아이들은 공짜로 나눠주는 아이스크림을 찾아 달린다.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사람이 상대배역의 주먹에 쓰러지자 사람들의 환호가 이어진다.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기 때문에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사람들이 뭐라고 외칠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안다.

죽어라 라엘리언!

편재는 어쩐지 얼굴이 뜨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연극에서 눈을 돌렸다.

“오늘이 19일이었구나.”

“네놈은 어떻게 되어먹은 녀석이냐?”

“제가 하는 일이 옛날 단말기 데이터 해독……그런 거잖아요. 일에 몰두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방에 틀어박혀 있다고 해도 그렇지, 구원절인 줄도 모르다니…….”

영희는 못마땅한 눈으로 편재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서 뿌려지는 무수히 많은 문자기호들을 붙잡아 해독할 수 있다면 이런 뜻일 거다.

이 게을러터진 비곗덩어리 같으니라고.

축 늘어진 뱃살을 슬쩍 잡아당기며 편재는 소심한 반항을 해보았다.

“그래도 탄력은 있네…….”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라 영희는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자 편재는 맞은편에 앉은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모든 일의 원흉. 회장이 바로 이 중년인이었다.

희끗희끗 새치가 돋아나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기고, 적당히 기른 수염과 안경이 조화된 자애로운 모습이 보통 ‘회장’이라는 사람들의 이미지라면, 눈앞의 인물은 그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일단 올백으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은 푸석거려 지저분해보였다. 그게 어깨위로 드리워져 있으니 감점. 얼굴은 잔주름 같은 게 없어 30대로 보아도 무방할 얼굴이지만, 벌써부터 피부가 건조해지기 시작하여 얼굴이 번들거릴 정도로 로션을 발랐다. 이런 광택이라면 대물저격총의 탄환도 비껴날 것만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장’답지 않은 것은 떡 벌어진 어깨였다. 근육질의 몸이란 정장을 더욱 돋보이게 해줄 수 있는 요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적당한 수준일 경우의 얘기. 육체미 선수들의 그것처럼 보여주기 위한 수준으로 잔뜩 부푼 근육들은 금세 양복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신소재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포대자루 같은 옷을 입고 돌아다녀야 할 것이다. 이건 편재에게도 해당되었으나, ‘회장님’과 일개 ‘워커’가 어디 같은가.

“회장니임~”

뭔가 간드러진 목소리가 큐브 속을 울렸다. 영희는 못 볼꼴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고, 회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편재는 주먹을 살짝 들어 올리며 한층 더 간드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한대 더 맞고 싶으세요?”

회장은 고개를 도리질 쳤다. 발갛게 부어오른 턱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풀 파워도 아닌 막 갈긴 주먹에 맞고 기절이라니요?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아․버․지?”

“끄응…….”

불시의 습격이라곤 해도 턱을 맞고 한방에 뻗은 것은 사실이라, 편재의 아버지-편승은 불편한 침묵을 유지했다.

“제가 참 술을 좋아하는데요. 그걸 보리차로 바꿔놓으신 어떤 분 때문에 아침부터 기분이 참 뭣 같아졌어요. 뭔가 할 말이 있겠죠?”

애초에 편재는 이것 때문에 집안을 뒤집어 놓았다.

술도 엄연한 음식. 그것을 보리차로 바꿔놓은 장난을 친 건 편재 입장에서는 절대 죄악이다. 더 화가 나는 건, 그런 짓을 하려고 몰래 방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월세의 형식으로 자신에 방에서 살고 있는 편재다. 이것도 나름 자립한 거라며 도어락도 수제로 바꾸었고, 타인의 출입을 엄금했다. 그런데 이렇게 몰래 드나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감시받는 것과 다름없다.

“제가 능력이 없어 나가 살지 못해서, 이제껏 제방에 눌러 살았습니까?”

“그래도 집만 한데가 있느냐.”

“이거 왜 이러십니까?”

편재는 한껏 턱을 치켜 올렸다.

“대절멸 이후 구식 단말기 속에서 썩어가던 데이터들을 누가 복구시켰습니까? 응? 기계적 구조나, 알고리즘 따위를 누가 알아서 그런 골치 아픈 작업을 했을까요? 그러보니 어제 입금된 돈을 확인 안했네?”

손목에 채워진 암릿을 조작하던 편재는 홀로그램 영상을 띄웠다. 그것도 보란 듯이 일부러 뒤집어서. 영 단위부터 숫자가 올라가더니 천만단위에서 멈춰 서자 편재는 숫자부분만 클로즈 업 했다.

“이게 어제 받은 착․수․금입니다.”

“으음…….”

편승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착수금만으로 수천만을 찍다니, 당장 나가서 산다고 해도 손색없을 경제능력이 아닌가. pay는 이미 일개 프리랜서가 착수금으로 받을 수준을 벗어났다. 실제 본론으로 들어가면 억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이쪽 업계의 상식이다.

자식이 능력 있다니 대견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 만은, 편승은 얼굴을 굳혔다. 이번 일을 계기로 편재가 진짜 독립을 하려하면 그걸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도 아버지가 곁에 두고 싶어 하니까, 나도 아직 젊고 미혼이니까 ‘까짓 거 그러지 뭐’ 했습니다. 이제껏 이런 저런 간섭을 해도 아비 마음이란 다 그렇지 하면서 참았습니다. 하지만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구원절인데 꼭 이런 식으로 나와야겠어요?”

편승은 더 이상 이야기를 겉돌게 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술과 식단을 통제하려고 한 것은 널 위해서였다.”

“당연하겠죠. 이런 고도비만체형으로 건강하게 살기는 힘들 테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제까지 아버지의 간섭에 다른 의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편재가 아는 한 아버지는 그리 강압적으로 굴지 않았다. 만약 정말 편재가 금주하고 살을 뺄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으로 다이어트를 권했을 것이다.

“그 이유란 게 뭡니까? 어디 한번 들어나 보죠.”

“사실……축제일이니 음주정도는 허락하고 싶었다. 하지만 네가 꼭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다. 그건 말짱한 정신으로 해야만 하지.”

취한 상태로는 못하는 일이라……무엇보다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부탁이란 걸 해올 줄은 몰랐기에 편재는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브림캐스터의 이론을 바탕으로 어떤 기계가 완성되었다.”

한때 광인을 양산시킨 브림캐스터의 가상현실시스템.

오버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엉터리라고 알려진 그 기술이 재현되었단다.

편재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편승을 말리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생길 일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구원절에 듣게 된 것이 못마땅했을 뿐이다.

“그간 많은 희생이 있었다. 악취미라고 볼 수밖에 없는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 때문에라도 우린 서둘러야만 했다. 그리고 드디어 성과를 냈다.”

아버지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편재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범죄라니?

“네가 마지막으로 전해준 그 정보를 바탕으로 생존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전해준 정보? 생존?

벼락이 치듯 사고가 확장되며 살짝 잊고 있었던-솔직히 포기하고 있었던 희망이 떠올랐다.


있는 힘껏 살아남자. 보란 듯이…….

저택을 통째 집어 삼긴 시뻘건 불길. 멀리서도 뜨거움에 몸서리 쳐지는 붉은 배경.

그 뜨거움을 마주하며 버티고 섰던 작은 실루엣. 그 손에 밀쳐진 몸뚱이는 그보다 더 작았었다. 더 이상 말하진 않았지만, 다부진 등으로 내지른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한다.

약속한 거다……꼭 다시 만나자.

혼자만의 약속, 15년째 품고만 있던 것.


몸이 망가진 후로,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던 일인데 아버지 역시 알아보고 있었던가.

갑자기 흥분한 탓인지 뒷목이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편승이 말한 그녀의 생존보다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어딥니까!”

잔뜩 흥분한 편재를 올려다보며 편승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컴퍼니로 가는 것이다.”

단지 방법이 생겼다는 것뿐이다.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안심이 되어 편재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15년간 멈춰진 마음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무엇보다 뜨겁게……뜨겁게.




3.

컴퍼니의 로비를 맡은 경비는 한가로이 구원절 행사 방송을 보고 있었다. 편재 일행이 지나가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편재는 그 경비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신체 일부가 기계로 대체된 안드로이드였다.

대기업에서는 전직 용병 출신의 경비를 선호하는데, 아무래도 험한 일을 하다보면 팔다리가 잘리는 건 예삿일이라, 안드로이드 수술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병들은 이 수술을 통해 고출력의 튼튼한 무쇠팔 무쇠다리를 얻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비무장 상태로도 매우 위협적인 존재다. 이런 자를 경비로 선택하는 건 고용주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무방비하잖아?’

겉보기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로비 곳곳에 주렁주렁 걸어 놓은 구원절 장식을 보면 파티장에 온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다. 엘리베이터를 타며 편재는 무방비한 경비를 지적했다. 그러자 영희는 자신의 암릿으로 경비 배치도를 띄워 올렸다. 경비의 위치를 나타내는 붉은 점이 하나도 아니고 수십 개가 있었다. 그중 몇 개는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었다.

“이제 알겠냐?”

“기계고장 아니에요? 딱 한명 있었잖아요?”

“이놈아. 눈에 안 보인다고 공기는 없는 물질이냐?”

공기처럼……안 보이는, 안 보이는? 편재는 곧 어떤 기술을 떠올렸다.

인비저블 마킹.

특수한 마이크로 봇을 대상 물체에 덧씌워서,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게 지워버리는 기술. 하지만 워낙이 마이크로 봇의 출력이 낮아 어렵다고 들었다. 너무 작아 별도의 동력기관을 탑재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걸 군용으로 만들어 벌써 사용하고 있다?

“설마 테스트?”

“전직 용병이란 놈이 아주 잘하는 짓이다. 이 덜떨어진 놈아.”

“끄응…….”

한번 일에 몰두하면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수준의 집요함 때문에 뉴스 따위 볼 시간이 없었다. 설사 시간이 남아돌았어도 그날의 뉴스 같은 건 안보는 편재였다.

그렇다 해도 인비저블 마킹 정도나 되는 고급기술이 완성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내심 내가 무심하긴 무심했구나 하고 편재는 반성했다. 아버지도 짤막하게 한소리 했다.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지 않겠느냐?”

“네, 네. 반성하고 있습니다. 시간나면 밀린 뉴스나 검색해야지. 그나저나 이거 꽤 깊은 곳에 있네요.”

목적지에 가까워졌는지 서서히 느려지는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가늠해보며, 편재는 문제의 시설이 꽤나 엄중한 경비 속에 보호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나 깊은 지하 속에 꽁꽁 숨겨둘 정도에다가, 인비저블 마킹 같은 첨단 기술로 도배를 한 자들이 지키고 있으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다른 이유 때문임을 깨달았다.

언제부턴가 엘리베이터 벽이 투명해지면서 바깥의 정경이 보였는데, 거대한 배관들이 뒤얽혀 있는 곳을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실제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아 보일 정도였으니 배관만 해도 엄청난 크기였다. 그런데 그런 배관도 일개 부속품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건 마치 콜로니의 한 층을 통째로 차지하는 크기이지 않은가?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드러난 광경을 보니 틀림없었다. 옛날로 따지면 도시만한 크기의 기계를 제작한 것이다.

“이게 다 뭐에요?”

“뭐긴 뭐냐. 하얀 코끼리지.”

“실제 ‘애니악’도 이런 크기는 아니에요. 대체 아버지는 뭘 만든 거예요?”

편승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입을 열었다.

“간접적 가상현실변환집속 시스템(Indirectly focused convert virtual reality system).”

“하지만 너무 긴 이름이지.”

편재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낮선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갈색 스웨터를 걸친 배불뚝이 대머리 사내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자세히 보니 옆구리에 베개를 끼고 있다.

“복잡하고, 낭만도 없어.”

“누구십니까?”

“아인슈타인도 바이올린 연주정도는 즐기며 살았는데, 어찌하여 우리들은…우리들은……일만 하다가 시들어야 하나!”

마치 악덕 고용주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비애 같은 걸 막 쏟아내던 배불뚝이는 생긴 것 답지 않게 센치한 사람이었다. 이후로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그는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더니 눈을 크게 치떴다.

“이노옴!”

갑자기 배불뚝이가 폴짝 뛰어오르며 편승의 멱살을 잡았다. 단추가 뜯어지며 양복이 늘어났으나 편승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싱글거리며 배불뚝이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강박사. 오늘은 구원절. 게다가 오랜 숙원에 가까이 다가선 날입니다. 몇 대를 때리더라도 개의치 않을 테니 서운한 게 있으면…….”

“오오냐! 안 그래도 그리할 참이다!”

배불뚝이가 솥뚜껑 같은 주먹을 휘두르자 편승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설마 한방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배불뚝이는 당황했다.

“어? 이봐, 뭐야? 왜 그래?”

때린 상대를 힘없이 끌어안은 편승의 모습에 더럭 겁이 났는지 배불뚝이가 변명했다.

“나 그렇게 세게 안 때렸어!”

그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잘 안다. 하지만 사람을 한방에 보내버리는 주먹이라니, 벌써부터 근처의 사람들이 쑥덕이기 시작한다. 무쇠주먹이니, 살인 아니냐는 둥. 배불뚝이-강박사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편재는 단박에 어찌된 일인지 알았다.

‘아마 퉁퉁 부은 곳을 무의식적으로 약점으로 파악하여 어퍼를 날렸겠지. 그게 정타로 들어갔으니 뭐…….’

주변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편재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한 매를 채워주어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심지어 영희마저도 자업자득이라며 혀를 차고는 아버지를 질질 끌고 나갈 정도였다. 그러자 구경하던 사람들도 흩어져 자기 일을 하러 가버렸고, 엘리베이터 앞에는 편재와 강박사만 남겨졌다.

그러자 강박사는 시치미 뚝 떼고 베개를 꼬옥 끌어안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전형적인 안면몰수에 물 타기였다. 아마 정치인 했다면 대성했을지도 모른다.

편재는 다급해졌다.

‘난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도 모른다고.’

강박사의 앞을 떡 하니 막자, 강박사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느냐는 표정으로 편재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이해는 한다. 이렇게 키가 큰 사람을 첫 대면에서부터 기꺼워하긴 힘들다.

‘에…그러니까, 초면일 때니 먼저 인사부터.’

“안녕하세요. 편재라고 합니다.”

편재는 한쪽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추려 했다. 그러자 강박사가 외쳤다.

“스톱. 지금 뭐하는 거야?”

“예?”

“지금 눈높이 맞추려는 거지?”

“네.”

강박사는 냅다 편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에라!”

황당함에 편재는 강박사를 쳐다보았다. 뭘 잘못했다고 이런 반응인가?

“이놈아! 네 아비보다 내가 더 나이 많다. 그런데 초면부터 꼬꼬마 취급을 해?”

딱히 작아 보이지 않는 중키였지만, 편재 옆에 있으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편재는 헤픈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헤헤, 서있으면 다들 무서워해서 그만 습관이 들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예의가 바른 거냐. 쓸개가 빠진 거냐.”

강박사는 거칠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더니 편재의 손을-정확히는 손가락을 잡아끌었다.

“여기 온 목적이야 뻔하지. ‘셸터’부터 둘러보세.”

“셸터요?”

“아까 말을 안했던가? 안했군. 저 커다란 쇳덩이가 ‘셸터’네. ‘간접적 가상현실변환집속 시스템’(Indirectly focused convert virtual reality system)이라는 이름은 너무 길고 낭만도 없어. 뜻 모를 단어만 덕지덕지 처발라서 나 역시 헷갈리지.”

“강박사님이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응? 내가 아직 자기소개도 안했어? 이것 참, 잠이 모자라 큰일이군. 난 강우진이라고 하네. 자네 말대로 호칭은 강박사가 좋겠군. 이력까지 줄줄 읊어야 하나?”

“들어도 잘 모르겠지만……간략하게나마 부탁드립니다.”

“이것저것 관심은 많아서 연구 성과는 많지만……가장 내세울 만 한건 역시 브림캐스터의 이론을 보완한 거로군.”

“그럼 저 기계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셨군요.”

“아니, 셸터 제작에는 3년 전부터 참여 했다. 저건 최소 10년은 된 프로젝트야.”


◇◇◇◇◇◈◇◇◇◇◇◇◈◇◇◇◇◇◇◈◇◇◇◇◇


편재가 강박사의 안내를 받아 셸터를 구경할 때, 영희는 조용한 방구석의 의자에 앉아 스포츠 음료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것도 긴장감이라곤 약에 쓰려 해도 찾을 수 없는 편한 자세로.

“음료수라도 좀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제도 철야하고 쫄쫄 굶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사내는 답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거부임을 알기에, 영희는 재차 권하지 않았다. 사내는 입체영상으로 띄운 자료들을 빠르게 넘기고 있었다.

“그나저나 편재 녀석,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말로 몰라볼 줄이야.”

영희의 중얼거림에 사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편승이었다.

“아무리 기억상실이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아버지가 남한테 얻어맞고 다닌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그런 주제에 제 이름을 듣고는 낄낄대더군요. 별 시답잖은 거나 기억하고……이건 뭐, 삼류 드라마도 이렇진 않습니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

“뭐가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밥도 안 먹고 일에 파묻혀 삽니까? 간신히 애비 얼굴만 알아보는 걸! 엘리베이터에서 그놈이 한말 좀 떠올려 보십쇼! 인비저블 마킹이 실용화 되었냐니? 인비저블 마킹이 적용된 강화복을 지가 디자인 해놓고서도 그걸 기억 못하지 않습니까?”

“진짜 괜찮다. 정말이다.”

분통을 터뜨리는 영희를 보며 메마른 웃음을 지어보인 편승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영희는 가슴이 다 아려왔다. 괜찮다는 사람이 저렇게 웃을 수는 없다.

“대체 회장님은…….”

뭐라고 한 소리 하려던 영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앞으로 흰 가운을 입은 여성의 모습이 불쑥 솟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실제 사람이 아닌 입체영상. 먼 곳에 있는 사람을 투영한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늘씬한 여성의 몸매는 길가다가도 한 번씩은 돌아보게 만드는 매력을 풍겼다. 하지만 영희는 그런 매력 따위 느끼지 못하는 듯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상대 여성도 영희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 이봐요, 당신. 지금 우린 영상회의 중이거든요? 잡음은 꺼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웃기시네. 회의라고? 인사 몇 마디 나누고, 브리핑 자료 던져주는 게?

- 비전문가 주제에 많은 걸 바라는군요. 기본지식 정도는 암기해야 할 거 아닙니까? 안 그래요 회장님?

편승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말도 타당하지만, 우리가 한두 해 본 사이도 아니고……매번 이해가 안갈 자료를 먼저 주는 이유를 모르겠군.”

홀로그램으로 뜬 그래프와 도표를 한쪽으로 치우자 편승의 앞으로 흰 가운의 여성이 나타났다.

- 평소부터 뇌 속에 근육 말고 지성이란 것도 채워 넣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모독수준의 독설을 내뱉는 여성의 모습은 미묘하게 노이즈가 껴 있었고, 얼굴이 자리한 곳에는 붉은 색의 단어-censored가 무수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볼륨 있는 몸매와 훤칠한 키만 봐도 미인일거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편승은 딱히 호감도 반감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성을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다시 공부한다고해도 내가 천재가 될 가능성은 전무 하겠지. 그보다, 한 시간 뒤면 셸터를 기동시킬 텐데 어째서 날 불렀나?”

- 그야 우리 귀염둥이의 상태가 궁금해서이죠. 영양상태, 수면, 멘탈 그래프 수치, 육체적 외상 등등.

“손바닥에 얕은 자상을 입은 것 말고는 없네.”

- 설마 자해?

편승은 고개를 저었다.

“접시를 쥐고 힘을 줬더군. 외상에 잘 듣는 약을 발라서 이젠 괜찮네.”

- 뭐 그 정도면 문제는 없겠군요. 이쪽에서도 할 만큼 했으니까 나머지는 그쪽에 맡기고, 제 일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알겠네.”

영상이 꺼지며 컴컴한 회의장에 조명이 들어왔다. 영희는 만지작거리던 음료수 캔을 우그러뜨렸다. 매번 회의장에 따라왔지만 이렇게 빨리 끝난 건 처음이었다. 내용도 별거 없었다.

“저 여자, 마음에 안 듭니다. 얼굴도 안보여주고 사사건건 간섭이나 하고. 무엇보다……저 여자 때문에 편재가 저렇게 된 거 아닙니까?”

“하지만 믿어야 할 사람이지.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믿긴 뭘 믿습니까? 지금이라도 편재를…….”

“그래…편재는 지금 정상이 아니야. 장기가 괴사되었던 것을 억지로 살려 놓았고, 기억도 온전치 못해. 하지만 그런 몸으로도 계속 그 애를 찾으려 하고 있네. 자네는 내 얼굴만 겨우 알아본다고 했었지? 그건 나와의 추억이 별로 없기 때문이야. 영희 자네의 이름에 반응한 것은 자네와 보낸 시간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고.”

“그런 얘기가 아니질 않습니까?”

“녀석이 구조되었을 때,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떠올려보게. 생명과 기억……그놈다운 선택이지.”

“젠장!”

영희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대화상대가 사라져버렸음에도 편승은 말을 이었다. 이 대화는……자신과 나누는, 그저 그런 넋두리이자 감정의 토로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생긴 것 답지 않게 녀석은 패밀리 맨이야. 이제 녀석에게는 가족밖에 안남은 거지.”

편승은 눈가를 주물렀다.

“피곤하군. 빨리 끝내고 쉬고 싶어.”


작가의말

다이어트 전 편재 삽화 있습니다.

https://blog.munpia.com/gazha/category/287720/post/40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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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절이 바뀌는 때 (2) 관련 검색 해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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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4) +2 13.11.30 1,026 23 27쪽
33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3) +2 13.11.29 1,153 30 21쪽
32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2) +3 13.11.28 1,052 25 20쪽
31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1) +4 13.11.23 1,525 20 19쪽
3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ED) +1 13.11.22 1,151 22 15쪽
2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8) +1 13.11.19 1,220 24 34쪽
2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7) +1 13.11.16 1,517 29 24쪽
2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6) 13.11.15 1,558 28 23쪽
2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5) +1 13.11.13 1,753 28 21쪽
2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4) +1 13.11.12 1,147 25 14쪽
2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3) 13.11.11 1,138 31 21쪽
2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2) +2 13.11.08 1,565 39 18쪽
2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1) +1 13.11.07 2,194 36 23쪽
21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0) 13.11.06 1,142 36 18쪽
2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9) +1 13.11.05 1,534 31 22쪽
1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8) +3 13.11.02 1,115 23 20쪽
1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7) 13.11.01 1,205 32 23쪽
1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6) 13.10.29 1,153 31 23쪽
1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5) 13.10.28 1,145 27 14쪽
1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4) 13.10.26 1,477 36 17쪽
1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3) +1 13.10.25 1,587 36 16쪽
1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2) +1 13.10.24 2,422 40 21쪽
1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 13.10.22 2,118 32 15쪽
11 1. 계절이 바뀌는 때 (ED) +1 13.10.19 2,875 138 19쪽
10 1. (9) +1 13.10.16 1,915 42 23쪽
9 1. (8) 13.10.14 1,705 29 23쪽
8 1. (7) +1 13.10.05 3,290 60 25쪽
7 1. (6) 13.10.04 2,229 42 22쪽
6 1. (5) 13.10.02 2,269 39 17쪽
5 1. (4) 13.09.29 2,362 4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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