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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트업(Setup) - 수정판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AAKHS
작품등록일 :
2017.07.07 03:11
최근연재일 :
2017.09.20 09:45
연재수 :
65 회
조회수 :
6,880
추천수 :
64
글자수 :
447,005

작성
17.07.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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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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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셋트업(Setup) - 1편-18

DUMMY

다음날, 세인스 시는 과거는 물론, 미래에도 다시 없을 정도의 혼란을 맞이하고 있었다.


“영민 여러분, 기사와 위사들의 안내와 통제에 따라주기 바랍니다!”

“피난소 공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너무 많은 짐을 가지고 이동하지 말아주십시오!”

“질서를 잃지 말고 천천히 이동하십시오. 다급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전날 밤에 있었던 전투의 결과를 전해들은 데라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도시의 영민들을 일시 피난시키기로 결정했다.

이후 진행되는 피난상황에 관해 에우로파는 이런 소감을 남겼다.


“백작 각하 말대로 ‘일시’였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어제 전투가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소문은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기사들이나 용병들도 어찌하지 못하는 막강한 괴물들이 도시를 파괴하려 한다고. 반신반의하면서도 영민들의 불안감이 더해지던 가운데 어제의 전투 내용이 어떻게 알려진 것인지 소문이 나고, 연이어 내려진 피난 결정은 도시 전체를 혼란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나마 영주인 데라이의 빠른 결단에 의해 도시 기사들과 문관들이 신속하게 대응하여 그 여파를 최소화하며 피난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래. 천막이란 천막은 전부 사들여. 그리고 빨리 여기로 가져와. 식품유통부도 마찬가지, 구호물자로 쓸 수 있는 식료품이나 보존성 있는 음료 중 재고품은 몽땅 가져와. 다만 미리 구입해서 따로 재어 둘 필요는 없어. 어차피 계절이 계절이라 식료품은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물류운송부와 경비경호과, 듣고 있나? 미리 운송에 필요한 사항들을 산출해서 준비하도록. 그리고 이건 당분간 계속될 테니 다른 사업과 비교해서 여력 배분을 잘 해두고.”


세인스 시 전체에서 피난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에우로파는 세인스 성 내부 자신의 방에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여러 개의 수정구가 올려져 있었고, 그것들에는 각각의 인물들이 비쳐지고 있었다. 에우로파가 긴급호출한 제오카 상회의 간부들이었다.


“그리고 토목건축과는 일단 대기하되 납품업자들에게 준비는 시켜놔. 도시가 송두리째 날아가지 않더라도 전투가 끝나고나면 복구공사는 필연이니까. 경리과는 일단 진행하던 사업 중 지금 지시한 것과 최우선으로 설정했던 사안들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일시 중지다. 자금유통에 신경 바짝 쓰고. 금융사업부는 다른 상회에서 빌려도 되니까 일단 자금을 최대한 확보해놔. 피난민들의 현물을 사들일 거니까 상품유통부와도 협조하도록. 업무량이 많아질테니 필요하면 경리과에서 관리인원을 파견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현지 인원을 계약직으로 고용해도 좋다. 대외영업부는 엘프의 숲이나 크로첼 제국 측과 협조해서 마력 수정을 최대한 확보해 둬. 어찌 되었든 이번 일이 끝나면 더 이상 세인스 시는 마도기를 쓰지 않을 테니 도시 전체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수량을 확보하는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에우로파도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이번 사태가 종결된 이후의 경우를 대비한 난민대책과 복구사업. 그리고 다른 하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의 상회의 피해 최소화를 위한 조치였다.


“마지막으로 정치홍보과는 마도기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조치하고, 반대로 미리 소문을 내서 우리 상회가 이렇게 평민들을 위한 상회라고 홍보될 수 있게 해라. 국가적인 문제니 왕국 첩보부와도 협의하되 기사파와 용병단 놈들이 수작부리지 못하게 각별히 주의해라. 이렇게 된 이상 손실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세인스 시 복구사업은 최대한 우리 상회가 독점해야 한다. 알겠나!”

“예!”

“좋아. 이상!”


상회는 적잖은 손실이 예상되고, 자신은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 자신의 고민을 알기는 하는지 베쿰은 박수를 치며 그를 칭찬했다.


“이야, 역시 큰 상회는 뭔가 다르구만. 대단한걸? 다른 상회도 이런 식이우?”

“아니. 이렇게 체계적으로 부서를 운영하는 건 우리 상회뿐일 거다.”


옆에서 보고 있던 베쿰의 칭찬에 평소라면 즐겁게 받아들이며 있는 대로 잘난척을 할 만도 하였으나. 지금의 에우로파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뭐 그건 그렇다치고, 진심이요? 남은 제어탑 두 개 중 하나를 포기한다는게.”

“그래.”


세 번째 제어탑이 무너진 뒤 에우로파는 몇 가지 고민 끝에 영주인 데라이에게 네 번째 제어탑의 포기를 건의하였다. 상대가 이쪽의 한계를 넘어설 수준으로 강력한 이상, 전력을 분산시킬 여유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전부 지킬 수 없다면···한 곳에 몰빵해야지. 안 그래도 빡빡한 와중이니까.”

“몰빵? 그건 또 무슨 말이요?”


도드룸의 전례도 있다보니 그들에 대적하지 못할 대부분의 병사, 기사와 용병들은 피난소의 경비와 그곳 내에서의 치안 유지로 돌려졌다. 이제 성에 남는 것은 에우로파나 베쿰을 포함한 소수의 정예들 뿐이었다.


“슬슬 스승님이 보내주신다던 강자들과 ‘그것’이 올 때가 되었을 텐데···빨리 와 줬으면···”


누가 올 지는 모르겠지만 에우로파는 그가 알고 있는 강자들 중 도우러 와 주었으면 하는 이들의 리스트를 떠올렸다.


-쾅


여섯 명 째인가 떠올리고 있는 무렵, 누군가가 방문을 거칠게 걷어차고 들어왔다.


“여어. 돼지야, 여기 있었냐?”


노골적으로 빈정대는 말투와 함께 사내 한 명이 안에 들어왔다. 적당히 기른 검은 머리칼에 광대뼈가 도드라진 갸름하고 마른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근육으로 다져진 탄탄한 체구를 한 사내로, 가슴 한쪽에는 에우로파의 로브에 있는 것과 동일한 프로튼 왕국의 문양이 새겨진 흉갑을 입고 있었다.


“민우! 이 양아치놈, 왜 온거냐?”


에우로파 역시 적대감 가득한 말투로 그를 대하였다. 상대는 에우로파의 말에 불만이 있는지 미간을 찌푸리더니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시비조로 말하였다.


“어이, 누가 민우라는거야. 이 몸의 이름은 락플리 부단장님이라고! 돼지가 드디어 대가리 속도 돼지가 되셨나, 아앙?”


손가락으로 에우로파의 배를 찌르며 빙글빙글 돌리려 하였으나 에우로파는 상대의 손을 붙잡아 옆으로 뿌리쳤다.


“우와. 우리 돼지 많이 컸네? 옛날엔 쪽도 못 쓰고 찌그러져 있더니.”

“네 녀석이 날 도와주러 왔을 리는 없고.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냐?”


자신을 향해 직접적으로 적대감을 발산하고 있는 것에 대해 상대-락플리는 입가를 씰룩이더니 손가락으로 코를 쥐며 막는 시늉을 하였다.


“네 말대로 너같은 돼지를 도우러 온 건 아니지. 아휴, 돼지 냄새.”

“용건이 없으면 썩 꺼져!”


에우로파가 노성을 지르며 카드를 뽑아들어 위협하자 락플리 역시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칼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는 검을 뽑지는 않은 채 피식 웃더니 이윽고 손을 거두었다.


“하긴, 어차피 얼마 안 지나 뒈질 놈 조금 일찍 없애려고 왕국 부기사단장인 내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지. 나도 내 할 일이 있고 가 봐야 하는 곳이 있거든. 여기 들른 건 너같은 돼지를 도와준다는 멍청한 놈들이 누군지 보러 왔을 뿐이라고.”


락플리는 ‘3번대장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중얼거리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던 중 다시 에우로파를 향해 돌아보며 한 마디 남겼다.


“아참, 그러고보니 한참 됐는데도 이 말을 못했네. 4년전 그 일은 참 유감이었어. 참으로 슬픈 일이었지. 가끔은 성묘라도 가 보라고. 어차피 시체조차 없이 묘비만 박혀 있는 무덤이지만 말야, 낄낄낄.”

“이···이 개자식이!”

“큭큭큭큭. 어쩌면 너도 그들 뒤를 따라가겠는걸? 시체도 남지 않을 만큼 열심히 해 보라고, 돼지야.”


상대가 이미 나간 후에도 한참을 씩씩거리던 에우로파를 보던 베쿰은 그의 기세가 조금 진정된 듯 보이자 옆에 다가와서 그에게 질문했다.


“저건 누구요? 기사인 것 같은데, 답지 않게 참 무례한 사람이구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사’라는 직함을 가진 자의 언행에서 한참 어긋난 모습을 보며, 용병들도 저러는 놈 흔치 않다는 생각이 든 베쿰에게 에우로파는 악의 섞인 말투로 답변하였다.


“저 빌어먹을 놈이라고 평소에도 저러진 않아. 아마 저게 본성이겠지만.”

“그러쇼? 어지간한 악연인가 보구먼?”

“그렇지. 악연이지. 이 곳에 오기 전부터 말야···”

“이 곳? 그게 무슨···”


에우로파가 말한 ‘이 곳’이 현재 있는 세인스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베쿰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우로파는 그 이상은 답변해 주지 않았다.


“에우로파, 여기 있어?”


베쿰이 질문하는 순간 이번에는 나트와 나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의 등장에 에우로파는 황급히 표정을 정리하며 평상심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아아. 무슨 일이지?”

“이제 우리 무구와 옷을 돌려줘도 되지 않아? 언제까지 이런 옷을 입히고 있을 건데?”

나트는 어제 전투로 찢어진 메이드복을 대신하여 받은 나들이용 드레스의 (유독 여유면적이 많이 남은) 가슴소매 한쪽을 잡아당기며 독촉하듯 말하였다.

“미안. 처리해둬야 할 일이 있다보니 늦어졌군.”


사실은 적당히 농담이라도 하며 응대해주고 싶었지만, 방금 전 일로 인해 그럴 기분이 아니었던 에우로파는 제자를 불러 그녀들이 가지고 있던 옷과 무구들을 가져올 것을 지시하였다. 제자들은 여전히 그녀를 경계하는지 흘끗흘끗 그녀를 살피며 방을 나섰다.


“그러고보니, 에우로파. 방금 우리가 들어오기 전 그 인간은 너의 동료인가?”

“음? 아니···오히려 그 반대랄까···”


일단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은 아닌 듯 한데. 나트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다시 에우로파에게 질문하였다.


“그 자는 지금 네 옷에 있는 것과 같은 문양을 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같은 소속인 게 아니었나?”

“그건 맞지만 이쪽도 나름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그런가.”


그렇게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닌 듯 그것으로 질문은 끝났다. 다만 나트는 방금 자신들이 들어온 문 쪽을 돌아보며 불쾌한 감정을 담아 말하였다.


“방금 전 그 인간. 나와 나시를 보더니 건방진 소리를 하면서 낄낄거리며 지나가더군. 정말 불쾌한 녀석이었어. 생각 같아서는 그 태도를 고쳐먹을 때까지 혼을 내 주고 싶었지만 네 동료라고 생각해서 문제가 될까봐 참았거늘.”

“아니, 혹시나 다음에 다시 보게 되면 그때는 제발 박살을 내 줬으면 좋겠는데.”


락플리에 대한 불쾌감을 통한 공통의견을 나누어서인지, 덕분에 조금은 기분이 풀린 에우로파는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그는 방금 전 상회의 회의를 하느라 수정구슬을 여럿 깔아놨던 테이블 옆의 작은 탁자에 직접 의자를 놓으며 그녀들에게 앉을 것을 권하였다.


“진작 했어야 하는 이야기지만···어제는 너희들 덕분에 이쪽에 큰 피해가 생기지 않았지. 그 점에 대하여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곧바로 시녀들이 들어와 자리를 세팅하기 시작하였다. 에우로파의 감사말에 나시는 앞에 놓여진 찻잔을 들어올리며 답했다.


“처음에는 ‘그대’라고 부르시더니 어느 순간부터 ‘너’라고 부르시는군요. 갑자기 이렇게 가까운 척 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죠, 에우로파 씨?”

“아니 뭐···이상한 목적은 아니고, 그저 지금은 서로 협력관계이니까 서로 친하게 지내는게 좋지 않을까 해서 바꿔본 건데, 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철회하도록 하지.”


사실은 어제 그녀들이 자신의 예상보다 (적어도 정신적 면에서의, 그리고 그녀들 종족 기준에서) 어린 나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다보니 자연스레 말이 놓여진 것 뿐이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보니 적당히 둘러대었다.


“아뇨. 별로 신경쓰지 않아요. 에우로파.”

“그거 다행이군.”


자신에 대한 경칭을 생략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한 나시는 양 손으로 받쳐들 듯 찾잔을 들어올려 두어 번 정도 찻잔의 내용물을 홀짝인 뒤 다시 찾잔을 내려놓았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 보였다.


“보아하니 소지품을 돌려달라는 것 말고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뭐 필요한 거라도 있는가?”

“그 말대로에요. 어제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에우로파, 당신에게 협력해 드리기로 했죠. 그리고 대신 저희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했었는데 기억하시나요?”

“당연히 기억하지. 지금 바로 이야기해보게.”


에우로파의 대답에 두 자매는 잠시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나트 측에서 이야기를 꺼내었다.


“너, 어제 말하기로 프로튼의 귀족에 왕실마법사라고 하던데. 정말이야?”

“물론. 이 왕실의 문양이 보일텐데?”


자랑스럽게 자신의 옷에 수놓아진 문양을 가리키는 에우로파의 답변에 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만나고 싶은 자가 있어. 그에게 데려가 주었으면 해.”

“이름은?”


원하는 것이 고작 사람 찾기였다니, 생각보다 별 것 아닌 부탁이군. 에우로파는 자신의 작위와 지위, 그리고 상회의 재력이라면 그녀들이 원하는 대상이 누구든 순식간일 것이라 확신했다. 에우로파는 미리 멋들어진 대답을 하기 위한 대사를 준비하며 나트의 답변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예상보다도 더 쉽지만, 미처 떠올리지 못한 인물이었다.


“너희 나라에 히아스라는 자가 있을 텐데? 그 자를 만나고 싶어.”

“이 나에게 있어서는 별 것도 아닌 일···에엑?!”


의외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나오자 에우로파는 당황하여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뜨거운 찻물이 쏟아지며 그의 허벅지를 적셨다.


“아뜨뜨뜨! 아뜨, 아뜨!”

“왜 그래? 어떤 요구라도 다 들어줄 것처럼 하더니, 설마 이제 와서 무리라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의자에서 일어나 로브와 바지자락을 흔들어 털며 에우로파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설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스승님일 줄은 몰랐는데.”

“스승님? 너는 그 자의 제자인가?”

“그래.”


어느 정도 바지를 털은 뒤, 에우로파는 옆 테이블의 수정구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좋아. 어찌되었든 쉬운 부탁이군. 지금 바로 볼 수 있게 해 주겠어.”


수정구를 들고 다시 나트 자매가 앉은 테이블로 가져와 내려놓은 에우로파는 이윽고 수정구의 기능을 기동시키는 주문을 외웠다. 이윽고 수정구가 밝아지며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히아스 님 직통입니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에우로파다. 스승님께 드릴 이야기가 있다.”


언제나처럼 어린 소년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에우로파의 대답에 소년은 고개를 숙인 뒤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하얗게 센 턱수염을 기른 노인-히아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슨 일이냐 에우로파야. 어제 보고 한 것 외에 더 할 이야기가···아아, 아니!?”

“오랜만이야.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많이 늙어버렸네.”

“오오. 이렇게,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히아스와는 이미 구면인 듯 나트는 익숙하게 인사말을 건네었다. 에우로파의 옆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히아스는 절을 하려는 듯 상체를 숙이려다 그래서는 수정구 내의 화면에서 모습이 사라진다는 것을 깨닳고 다시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들. 여전히 변함없으시군요.”


이 애들을 아십니까, 스승님? 당장 그렇게 물어보고 싶어졌지만 자신이 끼어들 차례가 아니었다. 나중에 설교를 듣고 싶지 않은 에우로파는 그녀들이 수정구 정면에 보일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주며 양 측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헌데, 아가씨들께서 그런 곳까지 가신 것은 무슨···”

“히아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거기서 나시가 대화에 참가하였다. 나트 역시 자신보다는 나시 측에서 설명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듯 그녀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넘겼다.


“수상한 자들이 저희 집을 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들께서는 저희를 피신시키셨고요.”

“그런! 대체 어떤 자들이···?”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머니께서 저희를 전이시키기 직전에 그 자들의 뒷모습을 본 것과 이야기의 일부를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그 자들은 아버지께···”


나시가 그 ‘수상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히아스가 손을 들어올려 그것을 제지하였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자세한 설명은 이곳으로 오신 뒤 듣겠습니다.”


무언가를 떠올리고, 그리고 그것이 염려되는 듯 히아스의 목소리가 몹시 가라앉아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에우로파를 불렀다.


“에우로파. 아직 옆에 있느냐?”

“예,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갑자기 흥분해서인지, 히아스는 잠시 숨을 고르며 스스로를 진정시킨 뒤 에우로파에게 지시하였다.


“네가 어떻게 그분들과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도 나중에 듣겠다. 두 분을 모시고 최대한 빨리 왕도에 돌아와라. 알겠느냐?”


어떻게 만났냐니···마늘가루를 들이마시게 하고 충격파로 기절시킨 뒤 메이드복을 입히면서 만났는뎁쇼.


‘라고 말할 수 있겠냐!? 분명 나중에 또 물어보실텐데, 뭐라고 둘러대야하나···’


“왜 그러느냐. 못 알아들었느냐? 대답하거라.”


아무튼, 지금까지 에우로파가 본 그의 스승의 모습 중 이렇게까지 다급해 보이는 경우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여유롭고 (설교를 할 때를 제외하면) 인자한 모습만 보이던 스승이 이렇게 될 때도 있다니···


“알겠습니다. 이곳의 사태만 정리한 뒤 바로 왕도에 복귀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에우로파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히아스의 명령을 핑계로 마도기와 도시를 포기할까 하고. 그렇게 하면 적어도 목숨은 온전히 보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그가 원하는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래서는···아니, 그러고보니 그 도시에는 마도기가 있었지?”

“그렇습니다.”

“그것도 회수해서···그랬다가는 시간이 너무 걸리겠군. 적어도 네가 말한 그 뱀파이어들에게 빼앗기지는 않도록 해라. 그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갑자기 이야기가 휙휙 급진되는 것 같아 에우로파는 대체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난감해질 지경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히아스는 재차 그에게 강조했다.


“그곳의 일을 신속히 정리한 뒤, 최대한 빨리 왕도에 돌아와야 한다. 두 분을 모시고서.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히아스는 다시 나트와 나시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나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이 통신도 위험할 수 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왕도에 도착하신 뒤에 하겠습니다. 이만 연결을 끊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수정구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비춰지지 않았다. 에우로파는 두 눈이 휘둥그래진 채 나트와 나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에우로파의 머릿속에 점점 그녀들에 대한 궁금점들이 쌓여갔다.

이 두 소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대체 무슨 연유로 자신의 스승은 뱀파이어인 그녀들과 연이 있었던 것인지. 왜 그녀들에게 이런 극존칭을 쓰며 대하는지.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하진 않을 그녀들의 부모는 대체 어떤 존재인지···


한창 자신들의 스승과 큰스승이 통신 중이어서 끼어들지 못했던 것인지. 에우로파의 제자 중 한 명이 통신이 종료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에게 다가왔다.


“스승님. 큰스승님께서 보내주신 분들이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알았다. 지금 가지. 미안하지만 다른 손님이 온 것 같군. 뭔가 묻고 싶은 게 많지만 그것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수많은 궁금점들을 옆으로 밀어두며 에우로파는 자리를 나섰다. 다만, 나서려던 중 다시금 돌아와 방금 전 자신에게 왔던 제자에게 한 가지 지시를 한 뒤 다시금 방문을 나섰다.


“아참, 그녀들의 소지품은 가져오는 대로 바로 돌려줘라. 옷은 세탁해 뒀겠지?”


복도를 지나면서 에우로파의 머리 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기도 하고, 거칠게 머리를 긁어대기도 하면서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으아아!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이번 일만 하더라도 일생일대급의 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안 봐도 앞날이 뻔하다. 앞으로 저 두 소녀와 연루되어 지금까지 자신이 겪어보지도 못했던 온갖 위험한 일들에 휘말리겠지. 그러한 생각들에 에우로파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크게 소리질러 버렸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 눌러 앉을 생각따위 하지도 말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나 계속 연구했어야 했어!”




작가의말

이번 화는 양도 많은데, 주로 떡밥만 좌악 깔아버리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습니다...


락플리의 경우야 뭐 이후 전개에서의 위치는 다들 예상하실 거고,

히아스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의 전체 스토리와도 연관이 있는 부분입니다.


수정 전 버전에서는 4번째 제어탑에서도 (에우로파 일행이 대판 깨지는) 교전 내용이 있었지만, 너무 길어지는데다가 내용상으로도 너무 불필요한 부분 투성이라 그냥 통째로 들어내 버렸습니다...

덕분에 4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사라졌군요;;


그래서, 단번에 최종전으로 넘어갑니다.


추천과 선작, (우호적인) 댓글은 글쓴이에게 더없이 큰 힘이 되어줍니다.

(멘탈이 약합니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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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20 파란펜촉
    작성일
    17.08.31 13:19
    No. 1

    나트 나시가 스승보다 높은 신분? 에우로파가 당할 각이네요 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AAKHS
    작성일
    17.08.31 13:47
    No. 2

    덧글 감사합니다.
    신분이나 위계상의 이야기까지는 아니지만...뭐 이후 잡혀살긴 합니다.
    특히 2편 초중반에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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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셋트업(Setup) - 1편-29 17.07.25 98 0 12쪽
29 셋트업(Setup) - 1편-28 17.07.24 77 0 11쪽
28 셋트업(Setup) - 1편-27 17.07.24 45 0 12쪽
27 셋트업(Setup) - 1편-26 17.07.23 89 1 13쪽
26 셋트업(Setup) - 1편-25 +2 17.07.22 110 1 16쪽
25 셋트업(Setup) - 1편-24 17.07.21 73 0 15쪽
24 셋트업(Setup) - 1편-23 +2 17.07.20 109 1 17쪽
23 셋트업(Setup) - 1편-22 17.07.19 74 0 16쪽
22 셋트업(Setup) - 1편-21 +2 17.07.18 97 1 18쪽
21 셋트업(Setup) - 1편-20 +4 17.07.17 90 2 15쪽
20 셋트업(Setup) - 1편-19 +2 17.07.16 81 1 11쪽
» 셋트업(Setup) - 1편-18 +2 17.07.15 88 1 21쪽
18 셋트업(Setup) - 1편-17 +2 17.07.14 126 1 13쪽
17 셋트업(Setup) - 1편-16 +2 17.07.13 78 1 13쪽
16 셋트업(Setup) - 1편-15 +2 17.07.13 124 1 17쪽
15 셋트업(Setup) - 1편-14 +2 17.07.12 103 1 12쪽
14 셋트업(Setup) - 1편-13 +2 17.07.12 100 1 13쪽
13 셋트업(Setup) - 1편-12 +2 17.07.11 94 1 19쪽
12 셋트업(Setup) - 1편-11 +2 17.07.11 157 1 14쪽
11 셋트업(Setup) - 1편-10 +2 17.07.10 103 1 12쪽
10 셋트업(Setup) - 1편-9 +3 17.07.10 88 1 11쪽
9 셋트업(Setup) - 1편-8 +2 17.07.09 93 1 19쪽
8 셋트업(Setup) - 1편-7 +4 17.07.09 68 1 19쪽
7 셋트업(Setup) - 1편-6 +4 17.07.08 138 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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