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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지오 디 오리진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0.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3.04.2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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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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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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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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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지오 디 오리진 -1화-

DUMMY

엄마가 돌아가셨다.

사인은 췌장암, 6년이 넘는 투병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육신은 전이된 암을 버티지 못했다. 큰딸 이수진은 상주로서 의연한 태도로 장례식장을 지켰다.

10년 전 아빠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뒤 친가 쪽 친척과 소원해졌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오래전에 돌아가셔 연이 끊겼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외가 식구라도 찾아와야 맞는데 동생들은 몰라도 맞이인 이수진은 외가와 소원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재혼再婚

아빠와 달리 엄마는 두 번째 결혼이고 전남편과 안 좋게 헤어졌다고 들었다. 외조부가 엄마의 이혼을 격렬히 반대했다고 한다.

이수진은 엄마를 이해했다.

열아홉 살 꽃다운 나이에 팔리듯 중매로 결혼했으니까.

외가는 딸을 판 돈으로 한동안 잘 먹고 잘살았다고 들었다. 친가든 외가든 친척이 찾지 않는 장례식장은 그래도 조문객으로 붐볐다. 부모님이 잘못 살아오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오늘 아버지가 다른 형제와의 만남이 예정됐다.

그러니까 엄마와 전남편 사이에서 나은 자식이고 스물넷 이수진보다 무려 열 살이나 많은 오빠다. 듣기로는 엄마와 이혼한 전남편은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언니! 언니!”


자정이 가까운 늦은 밤, 조문객도 하나둘 떠나고 거의 빈자리만 남은 장례식장의 적막을 깬 건 동생들의 호들갑이었다.


“왜?”


이수진은 피곤한 눈을 비비며 동생들을 맞았다. 역시 한 살이라도 젊은 것이 좋다.


“왔어! 왔어!”

“누가 와?”

“양키 브라더 말이야.”


엄마를 떠나보내고 요 이틀 시무룩하더니 기운을 차렸을까? 동생들의 호들갑이 화나기보단 다행스럽다. 이제 세상에 기댈 곳은 우리 자매뿐이다.


“어?”


전화 통화로만 대화했으니 얼굴은 몰랐다. 장례를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이기도 했고 열 살이나 많았어도 결국은 30대도 초중반에 불과했으니까.

뭐 후줄근한 아저씨를 상상한 건 아니지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부형제는 드라마 속 실장님을 연상케 했다.

두근두근

괜히 심장이 뛴다.


“수진?”

“네, 네. 헤, 헬로?”

“하하.”


한국어로 답하던 이수진이 영어로 말하자 상대는 작게 웃었다.


“웬 영어? 한국어로 통화했잖아.”

“아, 맞다.”


그는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영정과 상주에게 절을 하는 한국식 장례문화를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잘 좀 살지. 엄마.”


독백에 가까운 중얼거림에 이수진은 울컥했다. 원망도 책망도 없는 순수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한참을 그렇게 영정사진을 쳐다보던 사내는 상주 이수진과 맞절이 아닌 악수를 했다.


“아, 깜빡했네.”


그제야 생각난 듯 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럴 수야 없지. 네게 주면 돼?”

“네.”


이수진에게 봉투를 건넨 그는 방명록 앞에서 펜을 들다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어 이름으로 적어도 됩니다.”

“그래.”


하지만, 방명록에 적은 이름은 한글이었다.


“내일 새벽 발인이지?”

“네.”

“그럼 그때 다시 보자.”

“어? 오시려고요?”

“마지막 가는 길은 봐야지.”

“아, 네.”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눈만 데룩데룩 굴리는 동생들에게 손인사 하며 떠나갔다. 눈치 보던 애들은 그제야 쪼르르 달려왔다.


“우와와! 대박! 유전자의 승리인가!”

“겁나 잘생겼지?”

“응응! 완전 연예인 포스! 키도 엄청 크고.”

“수트핏 개간지! 완전 쩌러.”


동생들의 자유로운 언어구사에 이수진은 피식 웃었다. 애들 말대로 키 크고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좋았다.


“열어 봐! 열어 봐!”


동생들의 재촉에 그가 주고 간 봉투 내용물을 꺼내다 흠칫했다. 하얀 수표에 적힌 0의 향연에 세 자매는 깜짝 놀랐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히익!”

“억, 억!”


놀랍게도 1억 원짜리 수표였다. 부티 나게 입은 걸 보니 미국에서 꽤 성공했나 싶었는데 거금 1억 원을 부의로 내놓을지는 몰랐다.


“돌려줘야 하나...”

“왜에에?”

“너무 많아.”

“안 돼에에.”


고딩과 중딩이 떼를 쓴다. 아무리 어려도 돈이 뭔지 모를 나이는 아니다. 아빠의 유산 덕분에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엄마의 오랜 투병으로 가세가 기운 것도 사실이다.

1억 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이수진은 무의식적으로 방명록을 쓰다듬었다.

알파벳 몇 개 위로 찍찍 그은 선 밑으로 정갈한 필치의 한글 세 글자가 보였다.


오지오


스물넷 평생 처음 만난 새 형제의 이름이다.

******




“애들은 어때?”

“물어 뭐해. 너 어디 갔냐고 빽빽거리지.”


호텔로 돌아온 지오는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미국에서 기다릴 또 다른 엄마에게 전화했다.


“언제 돌아올 거니?”

“다음 달에.”

“난리 나겠네.”


시차를 고려하면 떼쟁이 동생들은 학교에 있을 시간이다.


“한국은 어때?”

“작년에도 왔었는데 신기할 건 없지.”


미국인이 됐다고 한국을 안 찾은 건 아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 모두 정정하셨다. 이혼으로 어머니만 상처를 입은 건 아니었다. 아버지도 큰 상처를 입었고 할아버지와 크게 싸우기까지 했다. 아버지의 도미渡美는 아메리칸 드림이 목적이 아니라 도피에 가까웠다.

거기서 새엄마를 만난 건 천운이다.


“아버지는 뭐해?”

“그렉은... 지금 서재에 있어.”

“엄마가 잘 좀 달래줘.”

“아빠는 네게 화난 게 아니야. 샘.”

“알아.”


친모의 부고를 듣고 한국행을 결정했을 때 부친은 엄청나게 화를 냈다. 보통 이혼이 남자의 외도에서 시작되는 것과 달리 아버지는 의무를 어긴 적이 없었다.

바람이 났든 어쨌든 가정을 지킬 마음이 없던 이는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엄마는 항상 돈에 팔려 왔다는 피해의식 속에 살아왔고 십여 년이면 오래 참은 셈이다.


‘사람이 좋은 건지 바보인 건지...’


지오가 아는 오태양은 이름 그대로 태양처럼 밝은 호인好人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호구다. 새엄마는 아버지의 넉넉한 인품에 반했다는데 아무리 봐도 특이한 성벽性癖이 있다.

금발미녀와 검은머리야수랄까? 다행이라면 나는 아버지보단 돌아가신 엄마를 닮았다. 존잘의 삶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만족감이 있다.


“선물 사 갈게요.”

“됐으니까 빨리 와. 떼쟁이들은 나도 힘들다.”

“알았어요. 케이트. 버텨 봐요.”


통화를 끝내고 샤워를 했다. 자기에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미리 찾아둔 현금다발을 가방에 챙겼다.

상조회사에 추가금을 지급했으니 화장장까지 운구해줄 인력은 부족하진 않았다. 주차장에 세워둔 렌트카를 타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새벽의 이태원은 낮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군기지의 미군은 줄었을지언정 이태원을 누비는 외국인 숫자는 줄지 않았다.

클럽 메릴랜드

이태원을 찾는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한 번은 들렀을 정도로 유명한 유흥업소다. 이곳이 한국인지 외국인지 모를 별나라 같은 이태원을 더 유별나게 만드는 건 심심하게 터지는 도그파이트 때문이다.

퍽퍽-

살벌한 주먹질에 나동그라지는 사람들.

알콜도 들어갔겠다 수컷의 허세와 함께 남성호르몬은 최고조에 달했다. 과시하고픈 욕망과 아드레날린의 분출에 싸움은 쉽게 일어났다. 지오는 싸우는 사람들과 그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인파를 피해 클럽 안쪽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브라이스.”

“새뮤얼.”


시가를 물고 있던 흑인은 지오의 등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한술 더 떠서 두꺼운 서류철을 책상에 올려놨다.


“경비는 따로 청구할 거야.”

“오케이.”


현금다발이 든 가방을 건네자 지퍼를 열어 들여다본 브라이스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브리핑해줄까?”

“그러면 고맙지.”

“제일 비싼 술로 가져와.”


브라이스의 손짓에 술병과 술잔이 들어왔다.


“문제가 많더구먼. 오천명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뒤 추대된 새 회장을 지지해야 할 사장단이 비협조적이더군.”

“왜?”

“새 회장이 여자니까.”

“그게 문제가 돼?”

“한국에선 문제가 되지.”

“한국사람 다 됐네. 브라이스.”


술잔을 든 흑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양주를 원샷했다.


“크으, 어쨌든 성조에서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몰라.”

“주동자는?”

“왕이 되지 못한 왕족들이지.”

“들?”

“반역에 관심 있는 게 한두 놈이 아니거든. 아, 그러고 보니 너도 왕족이지? 어때, 관심 있어?”

“아니.”

“그럼 왜 알아보라는 거야?”

“미국에 갔다 돌아오면 한국에 오래 머물 테니까. 귀찮은 일은 사양이야. 근데... 타이밍이 미묘하게 됐어. 이러면...”

“왕좌를 노리는 또 다른 반역자로 보일 수도 있겠지.”

“맞아.”


아버지는 성조그룹에 관심 없다. 벌써 20년 전도 전에 왕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떠났다. 하지만, 오 씨 형제자매는 20년 동안 아버지의 진심을 의심하고 항상 알고 싶어 했다.

진심을 말해도 믿지 않으니 설득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알아보라는 건?”

“이충재 씨? 10년 전 사건이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더구먼. 기록도 부실하고. 뭐 범인이 바로 잡혔으니 경찰로선 더 파고들 필요가 없었겠지.”

“결론만.”

“이상한 점은 없어.”


이충재 씨, 그러니까 친모의 두 번째 남편이자 이수진 자매들의 친부였다. 벌써 10년도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범인도 바로 잡혔고 과실치사로 처벌도 받았다.

불행한 일이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고였다. 당시 크게 주목하진 않았다. 내 앞에 닥친 현생을 살기도 바빴고 무엇보다 아버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아버지가 킬러를 보낸 것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천생 호구, 아니 호인인 오태양은 그럴 위인이 못 된다.


“속도위반과 음주운전, 과실치사로 징역 6년을 복역하고 사회에 복귀했는데 알다시피 전과자는... 힘들지. 택시를 몰아 근근이 사는 중이야. 근데 누가 사람을 붙였더군.”

“누가?”

“김일용. 리즈텍 대표야. 성조자동차 하청이지. 리즈텍 지분을 확인하니 바지고 전대근이 진짜 소유주야.”

“전대근이면...”

“전미란 여사의 막냇동생, 성조엔지니어링 대표.”


할머니의 동생 즉 작은할아버지였다. 할머니와는 나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었는데 아버지보다도 어렸다.


“수고했어.”

“2차는 없는 건가?”

“더 깊이 들어가면 성조에서 눈치채겠지. 욕심 그만 부려.”

“끙.”


아무리 날고 기는 정보상이라도 한국은 성조의 앞마당이다. 걸렸다간 좋은 꼴 보기 힘들다.

술값을 추가로 지불하고 클럽을 나왔다.

이대로 장례식장에 가면 시간이 딱 맞다. 막 운구차에 실리는 엄마의 관을 보다 시선이 마주친 이수진과 눈인사했다. 발인에 따라나선 이들 태반이 얼굴을 모르는 남이었다.

외가 친척은 결국 한 명도 안 온 건가.

엄마의 이혼은 친정에 크나큰 타격을 입혔고 분노한 외조부는 딸자식과 의절해버렸다. 이충재도 이혼녀인 엄마와의 재혼으로 친부모와 크게 싸우고 의절했다니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

서울을 떠난 운구차는 수원에 들러 화장했다.

타고 남은 뼛가루를 나무 밑에 묻는 것으로 장례를 끝냈다.

이수진은 끝까지 함께한 엄마 친구들에게 아침을 대접하고 전세버스로 올려보냈다. 상조회사와 남은 비용을 정산하니 벌써 한낮이다. 이수진은 끝까지 남은 지오에게 다가왔다.


“끝?”

“네.”

“방 잡아놨으니까 일단 쉬어. 사양하지 말고.”


세 자매를 차에 욱여넣은 지오는 양평 별장으로 향했다.

별장관리인이 나와 일행을 마중했다. 촌놈처럼 두리번거리는 자매를 각방에 밀어 넣고 1층으로 내려와 눈을 붙였다. 자매는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일어났다. 붕 뜬 머리카락, 배고픔에 못 이겨 방 밖으로 나오던 그녀들은 입을 크게 벌려 하품하던 폼 그대로 굳었다.


“밥 먹어.”


앞치마를 입은 지오.

그러고 보니 이부형제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들은 비명도 못 지른 채 후다닥 방으로 뛰어들어갔고 지오는 피식 웃었다.

한 10분이 지나서야 세 자매는 조신을 떨며 식탁에 앉았다.

하나같이 커다란 안경을 쓴 걸 보니 눈화장할 여유는 없었나보다. 눈치껏 수저와 젓가락을 들고 찌개를 떠먹어 보곤 눈이 커졌다. 맛있다? 그것도 그리운 맛이 난다.


‘엄마...’


엄마의 맛이다.

밥상에는 찌개만 올라온 건 아니다.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환장하는 한우도 올라왔다. 마음 놓고 먹게 자리를 비켰다. 부족한 음식을 채우는 건 찬모饌母에게 맡겼다.

밖으로 나오자 새카만 밤하늘이 마중했다.

휴양지로 유명한 양평답게 강 지류를 끼고 군데군데 별장이 보인다. 오늘 모친을 떠나보내고 슬픔을 달래는 세 자매와 달리 저 멀리 작은 선착장에는 흥청망청 파티가 한창이다.

시끄러운 이웃에게 항의할 수도 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파티피플은 미국에서도 흔했다. 특히 대학을 낀 주택가의 여름은 하루 걸러서 경찰이 출동할 만큼 파티로 이어진 나날이다. 웃긴 건 지나친 음주와 가무로 체포하고 보니 대학생은커녕 지역민도 아닌 외부인이 태반이란 사실이다.

파티가 열리면 슬그머니 끼어든다. 어차피 학생끼리도 서로 다 아는 얼굴은 아니니까. 알콜이 들어가 이지가 흐려지면 누가 누군지 알게 뭔가. 대학교 기숙사를 괜히 동물의 왕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뭐 발랑 까진 연놈들은 이미 고딩 때 볼장 다 봤겠지만.

마이애미의 경우 봄방학 시즌에는 밀려드는 외부인으로 난장판이 된다. 어느 나라든 휴양지는 다 그랬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는 가까이 와도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미어캣처럼 곧추서 이쪽을 관찰하던 이수영과 이수현 자매는 주춤거리면서 다가왔다.


“언니는?”

“설거지요.”


고용인한테 맡기지. 이수진의 본래 성격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상식과 원칙에 충실했다.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는 부류. 아버지 없는 10대 시절을 보내서 그럴까? 남의 시선에 아주 민감했다.


“학교는 다음 주부터 가?”

“네.”


오늘이 금요일이고 몇 시간 후에는 토요일이다. 놀토라니? 입시지옥이라는 한국 학교도 의외로 다닐 만하지 않나?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내 인생이 제일 빡셌다.

테라스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 자매가 묻고 지오가 답하는 식이다. 오랜 세월 모르고 지냈던 남매치고는 거리감을 느끼기 힘들 만큼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티 없이 맑은 그녀들의 언행은 충분히 사랑받고 자랐음을 알 수 있었다.


‘외롭진 않았겠어. 엄마.’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나는 부모 마음이 어떨까? 그래도 엄마의 마지막은 마냥 슬프진 않았을 것 같다. 후회가 든다. 아버지는 질색했겠지만 조금 더 일찍 엄마를 만났으면 어땠을까.


“앉아.”


설거지를 끝냈는지 쭈뼛거리며 다가오던 이수진에게 손짓했다. 아줌마에게 부탁해 음료를 내왔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커피보단 달달한 쉐이크를 선호했다.


“내 소개를 다시 할까. 오지오야. 아빠가 다르니 이부? 이부형제라고 하나? 수진이가 스물넷이니까 내가 열 살이 더 많구나.”

“전혀 그렇게 안 보여... 요.”


막내 이수현이 요를 붙이자 지오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존대할 필요 없어.”

“그래도 되... 요?”

“어.”

“오올! 아메리칸 스타일.”


그는 이수현이 내민 주먹에 주먹을 갖다 댔다.


“이수현!”

“왜에에 오빠가 괜찮다잖아.”


중딩이 왜 중딩인가. 겁이 없으니 중딩이다.


“미국은 어때?”

“너무 광범위한 질문인데.”

“드라마처럼 막 치어리더가 여왕벌이고 마음에 안 드는 애를 괴롭혀?”

“운동부 애들이 좀 거칠긴 하지. 그건 한국도 똑같잖아?”


미국이라고 왕따가 없는 것이 아니다.

10대의 허세는 미국이라서 더 도드라질지도 모르겠다. 겸손 따윈 개나 줘버린 자신감은 좋게 말하면 패기만만이고 나쁘게 말하면 진짜 싹수가 노란 셈이다. 3억이 넘는 인구,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미국은 어딜 가든 알력과 텃세를 이겨내야 했다.


“약육강식이 어느 나라보다 어울리는 곳이야.”

“무서워.”

“그렇다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십인십색이라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첫인상이 결정될 거야.”


친절한 미국인도 많았다.

옆에서 누가 죽어도 모른 척할 인간이 있다면 생판 모를 남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인간도 있다. 프라이버시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면서도 또 공동체의 위협에는 인권이고 나발이고 없는 이중잣대를 들이밀기도 했다. 20년이 넘게 미국인으로 살아왔지만 참 이상한 나라다. 미국은.


“미국에서 학교 다닐 때 참 많이도 싸웠어.”

“인종차별 같은 거 당했어?”

“어. 심하지. 어려서 그런지 감정에 솔직해. 근데 딱히 억울하진 않더라.”

“왜?”

“같은 백인끼리도 차별하고 흑인도 황인도 서로 까거든. 물론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것도 있지만 주된 차별은 성적, 외모, 부모의 경제력? 참 다양하게 차별해. 딱히 피부색만 차별하진 않아.”


인기 있는 운동선수는 피부색에 구애받지 않는다. 부자라면 흑인이든 황인이든 거리낌 없이 어울렸고 같은 백인이라도 후줄근하게 다니면 빵셔틀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차별이 나쁘다고 교육해도 사라질 리 없었다.

아이의 순수함이 때론 어떤 악보다 잔혹했다.


“오빠는 직업이 뭐야?”

“나? 탐정이라고 알런가.”

“탐정?”

“나, 나! 알아. 셜록 홈스도 탐정이야. 맞지?”

“오, 잘 아네. 여자애들은 그쪽으론 별 관심 없던데.”

“영드로 봤어.”

“영드?”

“영국드라마.”


지오가 한국어를 잘하긴 했지만 애들 입에서 가끔 튀어나오는 약어는 난도가 높았다. 오래전 미국에 처음 갔을 때 XOXO를 못 알아듣던 것과 비슷했다.


“탐정이면 막 나쁜 놈들 잡아?”

“그렇기도 하고 다른 여러 가지를 해. 이를테면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준다거나.”

“그게 돈이 돼요?”


여전히 존대하는 이수진은 현실적인 문제를 짚었다. 아무래도 졸업반이다 보니 취업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부잣집 고양이 몸값은 아주 비싸.”

“고양이 키우고 싶다.”

“나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대화는 두서가 없었다. 자정이 넘어갈 즈음 하품하는 이수영과 이수현을 방으로 올려보내고 이수진과 독대했다.


“돈은 돌려드릴게요.”

“돈?”

“1억이요.”

“너무 많이 넣었나?”

“네.”

“돌려받을 생각은 없어. 차라리 기부하든가.”

“음.”

“기부는 아깝지?”


그녀의 솔직한 반응에 지오는 작게 웃었다. 식은 커피를 리필했다. 저 멀리 선착장을 낀 이웃은 아직도 파티로 떠들썩했다.


“세금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

“왜... 잘해주세요?”

“응? 아, 그야... 미안하니까.”

“미안하다고요?”

“어, 엄마가 살아있을 때 찾아올 수도 있었는데... 많이 후회되네.”

“엄마가 밉지 않아요?”

“왜?”

“그야...”

“엄마는 엄마의 행복을 찾아 떠난 것뿐이잖아? 어렸을 때는 미운 감정이 있긴 했어. 하지만, 크고 보니 이해가 되더라. 누구나 자기 인생을 살 권리가 있어. 불행으로부터 도망칠 권리가 있어.”


외할아버지의 과욕이 화를 불렀다. 인간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었다. 자식을 희생해 얼마나 큰 부귀영화를 누리겠나.


“외가에 부고는 전했지?”

“네.”

“그런데 한 명 안 온 건가? 지독하네. 진짜. 어쨌든 이러는 건 내 욕심이 맞아. 뒤늦은 후회이자 속죄야.”

“우린 괜찮아요.”

“그래. 너흰 괜찮을 거야. 그렇다고 날 밀어낼 필욘 없잖아. 왜 이제 신경 쓰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긴 한데... 미안하다.”


이수진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힘들었다. 6년에 걸친 투병, 엄마는 끝내 이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힘들어서 울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집안의 장녀로서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이 그녀를 버티게 했다.


“엄마가 떠났다는 얘길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은 생각을 했어. 한 번도 찾지 않은 건... 바보 같은 자존심이었어.”


엄마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녀를 여전히 원망했는지도 모르겠다.


“불편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와 나 그리고 수영이랑 수현이는 가족이야. 이건 영원히 변하지 않아.”

“흑!”


이수진이 스스로 입을 막지 않았다면 대성통곡했을 것이다.

어제 처음 본 이부형제는 지금도 낯설지만 싫진 않았다. 그저 투정을 부리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부모 없이 두 동생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두려웠다. 졸업하고 취직은 어떻게 하지? 동생들의 대학등록금은? 남은 돈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깜깜한 미래에 자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났다.

지오는 입을 막고 흐느끼는 이수진에게 다가가 살포시 안아주었다.


“흑흑!”


그녀는 더는 밀어내지 않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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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1

  • 작성자
    Lv.99 물빛여운
    작성일
    22.07.20 17:59
    No. 31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7 yo****
    작성일
    22.07.28 14:30
    No. 32

    재밌긴 하네요 초반은 좀 흥미로울뿐 약간 지루했는데 가면 갈수록 재밌네요.
    내용은 단순화 하자면 빙의물 정도로 치면 될듯 봐서 후회 안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4 뮤블롱
    작성일
    22.08.23 08:53
    No. 33

    예전에 봤던 것 같은데.. 진짜 예전인데. 강쳘신검님이 쓰신줄은 몰랐지만 이게 기억이 나네요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2 별그리고나
    작성일
    23.04.18 05:37
    No. 34

    엄마 돌아가셨는데
    여동생들은 신났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6 re******
    작성일
    23.04.24 08:46
    No. 35

    뒷북... 췌장암 6년은 거의 기적!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혼돈군주
    작성일
    23.04.27 02:26
    No. 36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시면 그 슬픔은 짧은 편입니다.
    제 아버지도 몇년을 투병 하시다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이든 화장장이든 눈물도 안 나오더군요.
    이미 진즉에 마음의 준비를 알게 모르게 했던 듯 싶더군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혼돈군주
    작성일
    23.04.27 02:30
    No. 37

    앞쪽에 이부형제라는 말을 잘 모르시는 분이 계신 듯 한데 이 말이 동복형제란 말보다는 뜻이 더 정확 합니다.
    동복형제란 말은 동부든 이부든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71 어쩌다빌런
    작성일
    23.04.30 00:25
    No. 38

    벌써 재밌네요 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4 평범한자
    작성일
    23.04.30 11:11
    No. 39

    이복형도 있고 이복누나도 있고 이부형도 있고 이부누나도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같은 형제는 없습니다. 가족이라 부를만한 형제가 많지요. 그렇게 친하다고 느끼지는 못합니다. 중요한 순간에는 뭔가 걸리는게 있어요. 형제들의 말과 행동에서 느껴요. 엄마아빠가 같은 형제가 없어서 이런 느낌과 감정이 정상인지 아닌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번편을 보면서 생긴 감정은 저 스스로도 잘 모르겠네요.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8 step
    작성일
    23.05.02 20:16
    No. 40

    10살 이전에 본인 행복찾아 떠난 엄마.20년이 넘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으면... 중간에 연락도 없었고, 난 엄마라 생각 안할듯.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0 夢戀
    작성일
    23.05.07 18:09
    No. 41

    대박!!!
    강철신검 작가님의 글이 연재되는지도 몰랐다는!!
    단편으로 끝났네요.

    빨리 읽고 새로 연재하는 요셉 읽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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