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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지오 디 오리진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0.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3.04.2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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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2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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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7쪽

지오 디 오리진 -82화-

DUMMY

헤더 구즈먼은 플로리다 최대 컨트리클럽 체인과 남부 톱3 보험회사 씨링라이프의 대주주였다. 구즈먼가家는 사교계 명문이고 그들의 친인척과 친구들이 정계와 재계 곳곳에 포진했다.

쉰이 넘은 몇 년 전부터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줄 준비를 하는 틈틈이 상원의원 출마도 준비했다.

그녀는 고향을 사랑한다.

자유와 희망을 품고 미국 땅을 밟은 조부는 비록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셨지만 그가 쌓은 유산이 오늘날 구즈먼가家를 만들었다. 금주령 시대 당시 제일 유명한 범죄자는 알 카포네지만 플로리다에서만큼은 가브리엘 구즈먼의 명성이 더 높았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죄를 지었지만 조부는 사회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고아를 거두어 키우는 성당과 교회에 기부했고 당시 아무도 관심 없던 재향군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으며 여성운동을 지지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가브리엘 구즈먼은 분명 범죄자다.

그것도 범죄조직을 이끌던 잔인한 보스였다. 하지만, 일각에선 그를 이름 없는 천사로 찬양했다. 약자보다 더 약했던, 인권은커녕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던 소외자들의 수호자였다.

전설처럼 떠도는 소문의 절정은 자수로부터 시작된다.

어둠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그는 어느 날 아침 자수했고 철옹성 같던 범죄제국은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떤 조직원도 가브리엘 구즈먼이 배신했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원래 그래야 했던 것처럼 조부는 과거의 죄를 고백했고 사형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를 사형대로 보낸 검사는 회고록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가브리엘 구즈먼은 분명 증오해야 마땅한 범죄자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힘든 선택을 했고 그 결과를 의심 없이 정직하게 수용했다. 만약 그와 내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만났다면 어쩌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됐을 것이다. 나는 검사로서 많은 끔찍한 악당을 보아왔다. 그리고 그는 내가 보아온 어떤 악당과도 닮지 않았다. 도리어 내가 지키고자 맹세했던 선량한 이들과 비슷했다. 나는 지금 내가 올바른 일을 행했는지 끊임없이 자문한다. 그는 진짜 악당일까? 이젠 잘 모르겠다.’


인간은 복잡한 생명체다.

단순히 선과 악, 이분법으로 구분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모든 질문과 답으로부터 결정되었다. 가브리엘 구즈먼의 아들 찰리 구즈먼은 평생 범죄자의 아들로 살아왔지만 흔한 주차위반 딱지 한번 끊은 적 없는 모범시민이었다.

슬하에 4남 3녀를 둔 가장.

가족을 위해 일하고 이웃과 화평한 여느 평범한 미국인.

그의 집에 괴한이 침입했고 막내딸을 제외한 일가족이 몰살했다는 소식은 플로리다를 넘어 미국을 충격에 빠지게 했다.

‘보스의 아들이 죽다!’

자극적인 언론들은 마치 부친의 업보를 아들이 받았다는 듯 떠들어댔다. 범인은 금방 잡혔다. 어느 동네나 있는 양아치들. 그들은 지나가는 풍문으로 희대의 범죄자 가브리엘 구즈먼의 전설을 들었고 가족에게 남긴 보물이 있다는 뜬소문을 철석같이 믿어버렸다. 그의 아들이 막대한 유산을 숨기고 있다고.

하지만, 가브리엘 구즈먼은 아들을 위해 단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자수를 결심했을 때 찰리 구즈먼은 이미 사회인으로서 한 사람의 몫을 충분히 하고 있었으니까.

아들 역시 부친의 유산엔 관심 없었다.

오해가 빚은 참극.

미국에서 벌어지는 강력범죄는 넘쳤고 구즈먼 일가의 비극도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끝날 법했지만 가브리엘이 남긴 진짜 유산은 몇 푼의 돈이 아니었다.

가장 어두웠던 시대 그가 베풀었던 선행으로 죽어야 할 사람이 살고 절망했어야 할 이가 희망했으니 그렇게 뿌려진 씨앗이 뿌리내려 자랄 시간은 충분했다. 그리고 이제 그 은혜를 갚을 기회가 온 것이다.

구즈먼가家의 마지막 핏줄 헤더 구즈먼은 만인의 사랑 속에 훌륭히 자랐다. 그녀는 플로리다의 딸이다. 그리고 플로리다의 딸은 고향을 위해 못 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오늘 새벽에 경관 한 명이 순직했습니다.”

“어쩌다?”

“야간순찰 중에 차선과 속도를 위반하는 차량을 검문했고... 상대는 약에 취했고 중무장했답니다. 사망자가 한 명인 게 다행일 정도라더군요.”

“음.”

“조의를 표할까요?”


헤더 구즈먼은 손에 쥔 파일철을 내려놨다.


“최고로.”

“알겠습니다.”

“저녁 약속은 취소해.”

“주 상원의장과의 약속을요?”

“경관이 순직했는데 화려한 파티는 보기 좋지 않아. 그보다 어느 경찰서지?”

“마이애미 할리우듭니다.”

“거기 서장이... 엘드리치였던가?”

“네. 조셉 엘드리칩니다.”

“거기로 가지.”

“알겠습니다. 통보하겠습니다.”


그녀가 마이애미로 갈 준비할 때 남편이 귀가했다.


“허니?”

“마이애미에 다녀올게.”

“음. 새벽에 순직한 경관?”

“응.”

“나도 갈까?”

“아니, 당신은 애들이랑 있어.”

“늦으면 연락해. 마중 나갈게.”


헤더 구즈먼은 남편과 짧게 키스했다. 연한 샴푸 냄새가 났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대기 중인 차량에 올라탄 그녀는 엄지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녀의 사촌이자 수석비서인 대니엘은 곁눈질하며 입술을 뗐다.


“처리할까요?”

“이번엔 누구야?”

“엘리슨 베이커, 올해 스물두 살입니다.”

“하!”


남편의 외도는 한두 번이 아니다. 그녀가 그걸 용납한 이유는 워싱턴D.C.를 향한 야망 때문에 가족에 소홀한 원죄(결혼했음에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았다)기도 했고 사생아는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과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 않겠다는 남편의 맹세를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도 스물두 살은 좀 너무하지 않나?


“여자 쪽은?”

“의도적인 접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고향은 신시내티고 작년에 탤러해시로 넘어왔습니다.”

“직업은?”

“...”

“대니?”

“콘웨이 항공의 승무원입니다.”

“마커스?”

“네.”

“의도적인 접근이 아니라고?”

“여자에겐 의도가 없습니다. 그냥 이용당한 거죠.”

“...경고가 부족했던 걸까?”

“조치하겠습니다.”


마커스 콘웨이는 헤더 구즈먼의 옛 남자였다. 외도는 남편만 저지르지 않았다. 비행장에 도착해 준비된 제트기에 올랐다.


“경관을 살해한 놈은 다 잡았어?”

“아, 셋은 현장에서 사살됐고 두 명이 도주 중입니다.”

“도주?”

“네. 소총으로 중무장한 갱인데... 사살된 이들을 확인한 결과 전부 콜롬비아 출신입니다.”

“요즘 콜롬비아놈들이 너무 설치는데? 페드로는 뭐래?”

“잭 다니엘 기억하십니까?”

“잭 다니엘이면... 그 비운의 전쟁영웅?”


아들을 잃은 복수와 납치된 딸을 찾기 위해 아마존을 헤매며 냉혹한 마약조직과 전쟁을 벌이다 끝내 목이 잘린 한 아빠의 이야기는 미국인의 감성을 자극했다.

‘내 가족을 건드리면 누구든 좆되는 거야!’

이것이 가족을 가진 평범한 미국인 아빠의 감성이다.

여기에는 흑백 같은 색깔 구분이 없다. 단합된 미국인의 여론은 아무리 철밥통 공무원이라도 무시할 수 없다. 여론에 민감한 정치인이 하나둘 나불거리자 당장 콜롬비아와 전쟁이라도 불사할 것 분위기가 조성됐다.

콜롬비아로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셈.


“그가 공격한 카르텔과 경관을 살해한 범인들이 연관 있습니다. 그리고 미스터 홈즈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왜?”

“잭 다니엘의 죽은 부인이 그의 사람이거든요.”

“...벨리알.”

“미스터 홈즈의 사람들은 그 별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알아. 하지만, 새뮤얼... 그 남자는 악마가 분명해.”

“헤더.”

“걱정하지 마. 밖에서 나불거릴 정도로 멍청하진 않으니까.”


아메리칸 갓스피드

그를 보면 조부 가브리엘이 떠오른다. 아닌가? 조부의 말로는 비참했음에 반해 그 작자는 떵떵거리며 잘만 살아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연방의 날카로운 법률이 시퍼렇게 날이 섰는데 어떻게 그 범죄조직의 우두머리가 무사할까?

어쩌면 조부의 선택은 성급했던 것이 아닐까.


“그의 사람과 가까운 가족을 건드렸으니...”

“전쟁이 벌어지겠군.”


친구를 건드렸다고 지중해를 통일한 전력이 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카르텔 따위 그 악마의 한 끼 식사도 안 된다. 품에 둔 폰이 진동하자 대니얼은 화면을 터치했다. 통화는 오래가지 않았고 그의 표정은 매우 심각해졌다.


“헤더.”

“이미 시작됐나.”


플로리다, 아니 미합중국이 다시 소란스러워질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이 소란이 커다란 기회가 되리라 예감했다.


‘놓칠 수 없지!’


허리케인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중심부로 향하자!

******




“훌리오!”

“끄윽!”

“젠장! 의사는?”

“오는 중이야.”

“이러다 훌리오가 죽겠어!”


난리 치는 산티아고와 달리 마누엘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답답하다고 밖으로 나갔던 다섯 명 중에 살아 돌아온 건 둘뿐이고 둘 중 하나는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중상이었다. 관리를 맡은 마누엘로선 차라리 다 죽는 편이 나았다.


‘멍청한 새끼들!’


얌전히 잡히든가!


‘경찰을 왜 죽여!’


카르텔의 분열로 민감한 시기에 이렇게 사고를 치면 위에서 좋게 볼 리 없다. 그러면 중간관리자인 마누엘의 능력을 의심할 테고 좌천되면 다행이고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분될지도 몰랐다.

쿵-

문이 열리며 요청한 의료진이 들어왔다. 의료사고를 일으켜 자격증을 박탈당한 야매지만 병원에 갈 수 없는 이들에겐 그들도 감지덕지다.


“마누엘. 위에서 불러.”

“알았어.”


마누엘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위로 올라갔다.

멘델슨 빌딩은 카르텔이 미국에 세운 본부였다.

죽은 보스는 야심만만했고 조직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리고 싶어 했다. 폭력은 지양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배제하진 않았다. 지역 갱들과는 가능한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봉합했고 지속적인 우호와 협력에 어느새 로컬로 자리 잡아가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잭 다니엘만 아니었다면 미국 토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마누엘.”

“분위기 어때?”

“별로야.”

“힌트 좀 줘. 엘리샤.”


멘델슨 빌딩을 총괄하는 제너럴 매니저의 비서 엘리샤가 검지와 엄지를 비비자 마누엘은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한 10달러짜리 지폐뭉치를 건넸다.


“본토에서 대리인이 왔어.”

“누구?”

“가린샤.”

“하메스? 왜?”

“계집애들 있잖아.”

“아. 걔들.”


납치된 잭 다니엘의 두 딸.


“협상을 빨리 진행하려나 봐. 근데...”

“...사고를 쳤지.”


경찰이 죽었으니 마이애미를 넘어 플로리다 법집행기관 전부가 총격범을 찾으려 혈안이 됐다. 마누엘은 이마를 짚었다.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건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냐는 것.


“마누엘.”


덩치가 손짓으로 부르자 마누엘은 엘리샤의 손등에 키스하곤 사무실로 들어섰다. 들어가자마자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공기가 느껴진다. 여러 쌍의 눈이 마누엘의 전신을 훑었다.

무감정한 눈빛이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호의를 또 일부는 적의를 숨기고 있다.


“마누엘.”

“예스. 매니저.”


멘델슨 빌딩의 관리자이자 카르텔 보스 중 한 명인 모랄레스는 보스보단 제너럴 매니저로 불리길 좋아했다.

더 세련됐다나 뭐라나?


“똥을 아주 거하게 싸버렸네.”

“...”

“시카리오 질이 떨어진 건가? 어디서 되먹지 못한 정키들을 시카리오라고 데려온 거야? 우리가 무슨 멕시코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누구 추천이야?”

“...”

“마누엘, 지금 충성심을 드러낼 때가 아니야.”

“...모레노 보습니다.”

“모레노? 내 그럴 줄 알았지!”


거대한 카르텔일수록 여러 계파와 보스가 있고 마누엘이 속한 로코-베라크루즈는 구舊 메데인 제국에서 갈라져 정통을 주장하는 조직이었다.


“어떻게 수습할 건가?”

“...”

“마누엘?”

“...처분하겠습니다.”

“우리 경찰 인맥을 이용해 총격 중에 사망한 걸로 처리해.”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네 헌신을 아니까 이 정도로 그치는 거야.”

“감사합니다.”

“나가 봐.”


마누엘은 깍듯이 인사하고 나갔다.

한쪽에서 조용히 듣기만 하던 하메스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운 친구긴 합니다.”

“저 친구를 압니까? 가린샤.”

“실력이 있으니 시카리오 관리자로 임명했죠. 일단 영어 발음에 거북함이 없잖습니까.”


영어도 사투리는 많고 이것이 미국에서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남미 암살자 하면 총질만 해대는 무식한 인간백정을 떠올리기 쉬운데 거대카르텔 시카리오 훈련과정 중 제일 처음 배우는 것이 고급영어였다.

슬랭이 아니라 고급영어다.


“하지만, 누군가는 책임져야겠죠. 아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모레노의 사람이라서 처분하려는 건 아니겠죠? 모랄레스.”

“천만의 말씀!”


하메스의 뼈있는 말에 모랄레스는 펄쩍 뛰었다.


“어쨌든! 상황은 곧 안정될 겁니다. 그보다 계집들을 어쩌려는 겁니까?”

“건드리진 않았겠죠?”

“공주님보다 애지중지 모시는 중입니다.”

“좋군요. 이미 알겠지만 조직의 분열은 피할 수 없고 보스들끼리 어느 정도 합의가 됐습니다.”

“...연합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더 이상의 내전은 외부의 적만 이롭게 하니까요. 대의회가 구성될 예정입니다. 당연히 모랄레스 보스의 자리도 있죠.”

“...”

“모두 당신의 실적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이번 협상은 전부 모랄레스 당신의 실적으로 인정됩니다.”

“실패하면 안 되겠네요.”

“물론이죠. 실패하면... 벨리알의 보복을 맞닥뜨리게 될 테니까요.”


이건 지독한 외통수였다.

말은 모랄레스 본인을 높이고 있지만 그 속내는 무서운 맹수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라 강요했다. 모랄레스는 속으로 침음했지만 달리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개새끼들!’


성공하면 좋고 실패면 그걸 빌미로 날 쳐낼지도 모른다.

내가 마누엘을 쳐낼 생각을 하듯 저들도 날 쳐낼 기회를 봤다. 구심점을 잃고 조직이 분열한 순간 모두 적이고 경쟁자였다. 어쩌면 어제 일어난 경찰 살해도 누군가의 음모일지도.

시카리오가 아무리 미친놈들이라도 중무장한 채 도심을 어슬렁거리는 건 많이 이상했다.


“그럼 우리 귀염둥이들을 보러 갈까요?”


하메스는 모랄레스의 고민 가득한 표정은 모른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민해봐라. 답이 나오나.’


대의회는 미국 쪽 조직을 재편성하기로 결론 내렸다.

당연히 기존 조직망은 갈아엎어야 했다.


‘내가 새로운 보스다.’


협상이 끝나면 모랄레스는 제거되고 빈자리는 내 것이 되리라. 기분 좋은 내일을 그리며 협상 재료를 찾아가던 하메스는 걸음을 옮길수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쯤 되면 보안요원 서넛은 마주칠 법한데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가 손을 들자 뒤따르던 수행원 몇 명이 곧바로 튀어 나갔다. 그들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 같다.

그리고 하메스는 진짜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느낌이 아니다.

두 눈으로 봤다.

줄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덩치들.


“이런... 너무 빠른데.”


낯선 목소리.

남은 수행원이 하메스를 뒤로 물리며 권총을 꺼냈다. 평소라면 바로 방아쇠를 당겼겠지만 그들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수행원은 서로 곁눈질했다.

‘야! 너도? 어! 나도!’

분명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환청이 아니면 진짜 귀신이 떠들었나?


“멀쩡한 사람 귀신 만들진 말라고.”


지오는 은폐장을 해제했다.

허공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자 수행원들은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지만 권총이 손을 떠나 날아갔다. 그것들은 지오 주위를 둥둥 떠다니다 총구를 바꿨다.


“계속 길막 비매너 하면 온몸에 바람구멍 뚫어 준다.”

“잡아!”


속임수라고 굳게 믿은 누군가의 외침에 덩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지오는 자기 뒤에서 서로 끌어안은 위스키 씨의 딸들에게 윙크하며 속삭였다.


“눈 좀 감을래? 금방 끝나.”


이건 애들에겐 시청지도자가 필요한 장면이다. 올바른 정서 함양에 바람직하지 않은 과도한 잔인함이 문제였다. 아이들이 눈을 꼭 감고 서로를 끌어안은 모습에 지오는 위스키 씨가 왜 눈이 돌아가 카르텔과 전쟁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 다시 없을 사랑스러움이군.’


이런 자식을 빼앗긴 아빠의 분노는 하나님도 막을 수 없다.


-이건 중계해도 좋아. G.

-얍!


총을 빼앗는 신기神技는 보여줄 수 없지만 사람을 패는? 장면은 동종업계 종사자가 보기엔 꽤 재미있을 것이다.

지오가 애들을 안심시키는 동안 그의 지척에 도달한 덩치는 넷이었다. 비좁은 통로에 다섯이 얽히니 꽉 차 보인다. 지오는 우선 엘리미네이션 모드를 비활성화했다.

잘못하면 주먹질 한 방에 어디든 함몰당할 수 있으니까.

퍽-

코뼈가 주저앉은 놈이 자기 코뼈처럼 주저앉았다.

쾅-

로우킥이 허벅지를 부러뜨렸다.

컥-

턱뼈가 돌아가고.

악-

마지막은 남자의 상징을 박살 냈다.

소식을 들은 조직원이 하나둘 통로에 등장하자 진짜 콜레스테롤에 막힌 패스트푸드 성애자의 혈관처럼 막막해졌다. 그러나 지오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강철이니까.

나는 지치지 않는 야수의 심장을 가졌다.


“악!”


아군이 많다고 믿으면 누구나 용감해진다. 그러나 한 명이 박살 나고 두 명, 세 명에 이어 열 명이 넘어가면 1초쯤은 망설이게 된다. 그리고 열 명이 20명이 되고 30명이 되면 슬슬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지오가 불러온 폭력의 행진은 이제 빌딩 로비를 지났다.

덩치들은 총을 쏘고 싶었지만 아무리 낯짝 두꺼운 카르텔이라도 호텔 겸 카지노, 은행으로 이용하는 빌딩의 로비에서 총질했다간 무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오가는 손님들의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지오를 반겼다.

지오가 애들을 무사히 빌딩 밖으로 데리고 나왔을 때 그곳에는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로 가득했다.


“Freeze!”


지금 필요한 건 무엇?

바로 FBI 고문 명함이다.


“미합중국의 영웅 잭 다니엘의 납치된 두 딸입니다.”


이 한마디에 어떤 의문도 불필요했다.

다음 단계는 주인공을 위해 일하는 양키들의 몫이다.


-사용자를 향한 관심은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Good.

-코쉬 내 사용자의 평판과 명성이 매우 우호적입니다.


바디캠처럼 꾸며진 G의 중계는 패키지 팀과 코쉬 인더스트리얼 내에서 꽤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나름 뛰어난 해결사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무서운 실력자임은 처음 알았다.

전투전문가들조차 혀를 내두르는 실력이 회사 내부에 공개되자 여전히 암약하던 일부 반反에밀리야 세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에밀리야 코르센코와 사용자의 결혼을 언급하는 임직원이 늘어났습니다.

-난 유부남인데?

-그들도 알고 있습니다.


미친놈들인가?

알렉산더 코르센코는 진짜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어놨다. 마이애미 경찰과 FBI 마이애미 지부가 멘델슨 빌딩을 해체하는 동안 지오는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지 못한 채 마이애미에 남았다.

왜?

신新골D미드단이 거하게 똥을 쌌기 때문이다.


“뭐? 미녀들의 해변?”

“아니요. 미녀들이 가득한 해변입니다. 프로그램 이름이죠.”

“그 변이나 그 변이나.”


똑같은 똥이잖아? 어쨌든!


“그 똥이 왜?”

“마이애미를 찾는 남녀는 뜻밖의 로맨스를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로맨스? 원나잇이겠지.”

“...”

“틀려?”

“맞습니다.”

“그래서 이 누님들이 본색을 드러내 젊은 남자를 사냥해 잡아먹기라도 했어?”

“미녀들이 가득한 해변은 마이애미 방송국에서 제일 유명한 리얼리티숍니다. 마이애미뿐만 아니라 미국, 아니 전 세계에서 수입해가는 인기 프로그램이죠.”

“프로그램 포맷이 뭔데? 뭐 헐벗은 여자들만 잔뜩 나오나?”

“...”

“진짜?”


눈부신 해변을 배경으로 헐벗은 여자들이 가득하다?

오! 인기 있을 만한데?


-근데 왜 한국은 수입 안 하지?

-미국은 15세지만 한국은 19세로 분류될 겁니다. 황금시간대는 절대 방영 안 될 겁니다. 시민단체와 학부모들이 집단으로 들고일어나겠죠.

-아하! 심야로 밀리면 광고가 붙기 더 힘들겠군.


수입해봐야 방송사는 재미를 못 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촬영 중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관광이 절정인 시기 마이애미 해변에선 하루 수백 개의 파티가 벌어졌다. 꼭 해변에서만 파티를 여는 건 아닌데 수영복으로 도심을 활보하는 건 이상하잖은가.

헐벗은 남녀들이 잔뜩 취해 꽐라가 되면 모래사장이든 아스팔트든 어디서든 헐떡이느라 정신없다. 한국군대에서 야외훈련을 나가면 누가 싸지른 똥을 피해야 하듯 마이애미 해변에선 남이 싸지른 정액이나 정액 가득한 콘돔을 피해야 했다.

우웩!

파도가 이것을 휩쓸고 지나가지 않는다면 해변 관리인은 매일 정액 냄새를 맡다 게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분들이 직접 겪은 일은 아닙니다.”

“그럼?”

“현지에서 사귄 친구 중 한 명이 해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죠.”

“...미란이니.”

“네?”

“아니.”


사람들은 코난만 사건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하는데 미란이도 만만찮다. 사실 코난+미란이는 한 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성조 대모 전 여사의 본명도 미란이다.


-쿡쿡!

-...


지오는 골D미드단이 묵는 호텔을 찾았다.

윤소희를 위시한 누님들은 날 보자 놀라고 한편으론 안심한 얼굴이다.


“우리 땜에 온 거야?”

“그럼 왜 왔을까?”


거짓말이지만 굳이 진실을 알 필욘 없다.


“죽은 여자랑 친했어?”

“안 지는 며칠 안 됐는데... 괜찮은 친구였어. 시애틀에서 교사로 일한다고 들었는데...”

“알아보니까 아니던데?”

“아니라고?”

“폴댄서야.”

“폴댄서?”

“더 범용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스트리퍼?”

“...”


윤소희는 충격받은 얼굴이다.


“첫 만남에 진심을 다 말하는 사람은 잘 없지.”


한국도 처음 만난 사이에 진심을 다 털어놓는 일은 거의 없다.


“경찰은?”

“진술은 했어. 당분간 마이애미를 벗어나지 말라던데?”

“그건 내가 처리했으니 돌아가고 싶으면 가도 돼.”


증인을 많이 확보하려는 꼼수다. 애초에 용의자도 아닌 외국인인 그녀들의 이동을 제한할 어떤 법적 근거도 없다. 아니면 벌써 유치장에 처넣었겠지.


“난... 진실을 알아야겠어.”


웃고 떠들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변사체로 발견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형사와 검사 역할도 맡아봤던 윤소희지만 진짜 현실은 대본 속 사건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너 배우야. 스캔들에 얽히면 손해라고.”


지금도 윤소희 이름이 언급되는 걸 억지로 막은 상태다.


“아니! 난 알아야겠어.”

“...”

“은퇴해도 상관없어.”


윤소정이 미국에서 나름대로 자리 잡은 이후 윤소희는 종종 은퇴를 언급했었다. 반반일까? 뭔가 연예계나 스타로서의 더 큰 성공에 미련이 없어진 듯 보였다.


“좋아.”


삶의 목표가 희미해졌다면 새로운 뭔가로 자극해주면 된다.


“널 탐정보조로 임명하지.”


땅땅!

일단 우리 쿠거 누님들은 로스앤젤레스로 돌려보냈다. 아름다운 해변은 마이애미만 있는 것도 아니고 꺼림칙한 사건으로 기억될 이곳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었다.

윤소희는 신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변장했다.

어설픈 변장이 아니라 할리우드 변장팀도 울고 갈 CIA 스파이식 변장이다. 어이없는 요구를 받은 CIA는 속으로 투덜거릴지 몰라도 주도권은 여전히 내게 있었다.


“와! 진짜 감쪽같네?”

“전문가의 손길이니까.”

“할리우드랑은 달라. 거긴 소품을 많이 쓰는데... 화장만으로 이게 되네?”


스파이가 소품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면서도 확실한 변장 방법은 간첩에겐 목숨줄이나 마찬가지다.


“오늘부터 넌 미란이다.”

“?”

“미국 이름은... 스테파니.”


지오는 윤소희에게 모니카를 소개해줬다.


“CIA 요원이야.”

“와! 진짜요?”

“...”


그를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니카를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쳐다보는 윤소희에게 히죽거리는 지오다.


“빚을 갚을 기회가 왔어. 모니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야.”


모니카는 포기한 태도다.

우린 우선 경찰보고서를 손에 넣기로 했다. G를 통하면 0.1초면 되지만 그러면 모니카가 할 일이 없다. FBI 고문 명함을 이용해도 되지만 너무 자주 쓰면 그게 다 빚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일을 모니카에게 맡기고 윤소희에겐 그녀를 따라다닐 것을 주문한 지오는 이택기와 통화했다.


“화끈하게 해치우셨더군요.”

“설마 그렇게 잔뜩 몰려올 줄은 나도 몰랐지.”

“피고인들이 이상한 진술을 공통으로 하던데요? 투명인간이 있었다고.”

“정키들이 약을 과하게 했나 봐.”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치죠.”


새끼! 떠보는 거 보소!

엘리미네이션 모드를 비활성화하지 않았으면 통로는 피바다였을 테고 사람이 사람을 찢어 죽이는 엽기적인 사건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40대1? 50대1?

정확한 숫자는 기억 안 난다.


-정확히는 46대1입니다.


어쨌든 난 전설을 썼다.


“부회장님께선 매우 흡족해하셨습니다.”

“...언제 부회장까지 올라갔대?”

“아직 발표 전입니다.”

“휴우!”


지오는 휘파람을 불었다. 주인공놈이 부회장에 올랐다는 건 내부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다는 방증. 대한민국은 이제 성조공화국이 아니라 성조제국이나 똑같다.


“애들은?”

“전문가들이 케어 중입니다.”

“납치된 애들한테 이런 말 하긴 그런데... 사랑스럽더라. 위스키 씨가 왜 그리 미쳐 날뛰었는지 이해가 돼. 나 같아도 눈이 돌아갔을 거야.”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지만 내 아들이 죽고 딸이 납치됐다고 상상하니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아마 온 세상을 불태우겠지.’


꺼지지 않는 분노가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내겐 그럴 능력이 있다.

UN군도 미군도 어떤 군대도 날 막아설 수 없었다.


“쌍둥이들과 비슷한 절차를 밟을 계획입니다.”

“나쁘지 않군.”


어느 날 급사한 정보브로커 브라이스의 쌍둥이들처럼 훌륭한 위탁가정을 찾아줄 계획이다.


“부회장님께서 당신이 원하는 게 뭐든 들어주라 지시하셨습니다.”

“백지수표는 지겨운데... 돈은 필요 없어.”

“예상했던 바군요.”

“그보다는 권력이 필요해.”

“권력이요?”

“살인사건을 하나 탐문 중이거든.”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사님.”

“그게 뭐냐면.”


지오는 윤소희의 살해된 파티친구(그러고 보니 아직도 이름을 몰랐다;;) 이야기를 해줬다.


“그렇군요... 사정은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택기의 목소리는 딱 5분 뒤에 다시 들렸다.


“헤더 구즈먼과 약속을 잡았습니다. 한 시간 뒤 괜찮겠습니까?”

“오케이.”

“건투를 빌죠.”


지오는 폰을 넣다 멈칫거렸다.


-근데 헤더 구즈먼이 누구지?

-아카이브에는 없는 이름입니다. 검색할까요?

-아니.


새로운 캐릭터는 언제나 환영이다.

왠지 두근두근한다.

******




“제이가 누구야?”

“제이?”


헤더 구즈먼의 질문에 대니얼은 갸웃거렸다. 제이란 이름이나 별명은 너무 흔했다. 그가 아는 사람만 열 명이 넘는다.


“젠슨 리가 전화했어.”

“젠슨 리라면... 설마 미스트 파이어?”

“맞아. 벨리알의 오른팔.”


대니얼은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그쪽과 관련된 제이라면... 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제이! 엘에이의 제이일 겁니다.”

“내가 아는 친구?”

“코쉬의 새 고문 말입니다.”

“아! 뉴욕 공주님의 기둥서방 말이군.”


헤더 구즈먼은 알았다는 듯 손뼉 쳤다.


“상당히 젊다고 들었는데?”

“30대 중반?”

“어리네.”

“그 친구가 왜요?”

“발 벗고 도와주라는데?”

“부탁입니까? 아니면 명령조입니까?”

“아주 정중했어.”

“음. 젠슨 리는 예의 있는 친구긴 하죠.”

“내가 알아야 할 건?”

“제이가 미스터 홈즈의 형제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생아? 사이러스의?”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

“그건 만나 보면 알겠지. 또?”

“좀 더 깊은 세계의 정보론...”

“정보론?”

“암살 마스터랍니다.”

“...그걸 믿으라고?”

“뜬소문도 많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도 없죠. CIA에서 그를 도와준다는 정보도 있고 FBI를 도운 전적도 있습니다. 아, 경찰과 FBI 쪽은 확인된 정봅니다.”


뭐 하는 작자지? 헤더 구즈먼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FBI와 친하면 CIA와는 사이가 안 좋고 그건 반대로도 작용했다. 두 기관의 일하는 방식은 완전히 반대였으니까.


“이제껏 마스터 레벨의 실력자는 벨리알이 유일한 걸로 알았는데?”

“진위는 반반입니다. 단지 CIA의 태도로 보면 마냥 헛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신기한 친구네. 더 알아야 할 게 있어?”

“소문난 애처갑니다.”

“...훌륭한 남자네.”


헤더 구즈먼은 성공한 남자 중에 불륜을 저지르지 않는 남자를 본 적이 드물었다. 특히 LA에 사는 유력자치고 부인 따로 애인 따로인 남자와 여자는 차고 넘쳤다.

서로를 향한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남녀는 한 시간이 아니라 30분 만에 마주 앉았다.


“헤더.”

“제입니다. 헤더.”


헤더 구즈먼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당신을 도와주라더군요. 제이. 근데 당신이 누군지 알아야 돕지 않겠어요?”

“현명하군요.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죠.”

“하지만, 오기 전에 당신을 도울 거라 결심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왭니까?”

“당신이 패밀리맨이란 사실을 알았거든요. 가정에 충실한 사람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죠.”

“과분한 칭찬입니다.”

“자, 내가 뭘 도와줄까요? 제이.”


지오는 조이 맬라드 살인사건(이제 이름을 안다;;)을 설명해줬다. 끝까지 집중해서 들은 헤더 구즈먼은 짧게 탄식했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안타깝지만... 혹시 피해자와 아는 사인가요?”

“놉.”

“그런데 왜 신경 쓰죠?”

“내가 신경 쓰는 사람이 신경 쓰니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조이 맬라드가 죽든 말든 솔직히 아무 감정도 생각도 없어요. 내가 아끼는 사람이 조이 맬라드의 죽음에 슬퍼한다는 겁니다. 단지 그뿐이죠.”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데?”

“글쎄요? 어떤 대가가 날 곤란하게 만들지 잘 상상이 안 되는군요.”

“당신의 가장 소중한 걸 원하면?”

“하하.”


크게 웃던 지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자 헤더 구즈먼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플로리다의 딸이자 플로리다의 꽃, 플로리다의 무기, 플로리다의 여왕으로 군림한 그녀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온갖 정치인과 기업가, 마약상, 갱 등 다양한 인간군상을 상대해왔다.

어떤 놈은 유혹하고 어떤 놈은 구슬리고 어떤 놈은 협박했다. 하지만, 헤더 구즈먼은 그 어떤 상대에게도 굽힌 적이 없다. 왜냐면 온 플로리다가 그녀의 편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여성을 혐오하는 플로리다 북부의 레드넥 쓰레기들이 민병대를 보냈을 때도 헤더 구즈먼은 도망가기보다 샷건을 들고 최전방에 섰고 허리케인이란 재앙이 반도를 덮쳤을 때도 피신하기는커녕 한복판에서 구호본부를 진두지휘했다.

피부색은 상관없다.

헤드, 헤더 구즈먼은 플로리다의 머리 즉 사령관이다. 그녀가 플로리다 독립을 주장하면 무기를 들고 봉기할 시민이 절대다수였다. 이것이 가브리엘 구즈먼의 진정한 유산이다.

사람!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절대적인 인맥! 플로리다 땅에서 구즈먼가家의 눈을 피해 뭔가를 하는 건 불가능했다.


‘뭐야! 저거? 무서워!’


그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공포를 느꼈다.

레드넥 민병대와 총격전을 벌였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순수한 죽음이 헤더 구즈먼의 온몸을 짓눌렀다. 비명을 질러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만 목소리는커녕 짧은 숨조차 뱉기 힘들다.


“누구에게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어요. 헤더. 아니, 구즈먼 부인. 나는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패밀리맨입니다. 친구들은 장난스럽게 애처가라고 놀리지만 난 그 놀림에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부끄럽거나 굴욕적이지 않았어요. 왜?”


그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자 헤더 구즈먼은 억제된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이상을 감지한 경호원이 달려오려고 하자 그녀는 급히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애처가는... 내겐 최고의 찬사로 들렸거든요. 나는 애처가고 아들바보에 딸바봅니다. 그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에요.”

“큽, 크흠.”


잔기침을 내뱉던 헤더 구즈먼은 잔에 담긴 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내게서 가장 소중한 걸 가져가겠다고요? 새뮤얼도 감히 그런 요구를 못 하는데 구즈먼 부인... 당신이?”


지오는 목에 힘을 주거나 딱딱한 어조로 말하지 않았다. 그냥 평소 대화하는 그대로다.


“오늘 만남은 없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분노하는 건 어리석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양키식 농담으로 얼버무릴 수도 있지만 명백히 내 인내의 한계를 시험했다.

더 나아갔다면 헤더 구즈먼은 이미 죽었다.

보는 눈이 많든 적든 상관없다.

다 죽이면 그만이니까.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다.


“하지만, 약속하건대 내 일을 방해하거나 조금이라도 거슬린다면... 가브리엘 구즈먼, 당신 조부가 세운 왕국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드리죠.”


온 플로리다를 불태워버릴 것이다.

지오는 음료 값을 계산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호텔 카페라 존나 비쌀 텐데, 사소한 화풀이다. 이택기의 전화가 온 건 윤소희 일행과 합류하기로 한 장소에서 불과 십여 걸음 떨어진 곳이었다.

카페 안에서 손 흔드는 윤소희가 보인다.

지오는 폰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모든 걸 바로 잡겠습니다.”

“사과할 필요 없어. 세상일이란 게 마음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

“우리 보스도 꽤 미움받는 포지션인가 봐. 하긴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지.”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괜찮아. 딱히 어려워서 부탁한 건 아니거든.”


전지전능한 기계신이 함께하는 지오에겐 불가능은 없다. 단지 이번엔 인간관계를 고려한 사회적인 절차?를 중시했을 뿐이다.


“아니요. 제가 곧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

“곧 갑니다.”


이택기는 확고부동한 태도로 통화를 끝냈다.


-굉장히 열받은 목소린데?

-구즈먼이 플로리다에서 대단한 인물인지는 몰라도 주인공은 전미를 아우르는 실력잡니다. 비록 자리를 오래 비워 예전만 못하더라도 구즈먼 따위가 비빌 상대는 아닌 셈이죠. 주인공의 홍위병인 이택기는 이를 굉장히 심각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결국 주인공놈의 본진은 미국이니까.

-어쩌면 구즈먼을 카르텔과 동급으로 취급할지도 모릅니다.

-난리 나겠는데?


헤더 구즈먼은 딱히 나쁜 년으로 보이진 않았다. 다만 권력자 특유의 허세와 자존심, 자기합리화로 똘똘 뭉친 것 같았다. 내가 어려 보이니 대뜸 찔러보는 것도 과도한 자신감의 발로였다.


-남들이 여왕이라고 떠받들어주니 진짜 여왕인 줄 아나 봐.


이래서 가정교육이, 크흠! 아무리 화나도 패드립은 삼가자.

지오는 카페로 들어갔다.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사건을 토의해도 되나 싶지만 양키는 다른 사람에게 의외로 관심이 없다. 공공장소에서 물고 빠는 남녀를 보면 그게 맞을지도.

윤소희는 자랑스럽게 자신이 맡은 일을 떠들었다.


“그녀는 거짓말하지 않았어. 조이는 선생님이 맞아.”

“선생님이자 스트리펀가?”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

“그 말을 학부모에게 해봐. 몇 명이나 이해해줄까. 단 한 명도 없다는데 내 손모가지를 건다.”


진취적인 양키는 링컨과 함께 죽었다.

스트리퍼에게 자기 자식이 교육받는다고 생각해봐라. 나라도 학교로 찾아가 깽판 칠 것 같다. 어쨌든 조이 맬라드의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가 왜 마이애미 해변에서 살해당했냐는 것.

낯선 만남에 의한 우발적인 살인?

원나잇을 즐기러 온 선생님이자 스트리퍼의 죽음은 마이애미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왜냐면 이렇게 죽어나가는 관광객은 매년 수십 명이 넘기 때문이다. 실종자는 그보다 더욱 많았고 플로리다 경찰의 맨파워가 전부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파티에서 우리와 헤어진 조이의 마지막 동선은 여기 젤라틴 프로미넌스 쇼야.”

“젤라틴 프로미넌스 쇼?”


뭐야 이 병신같은 조합은? 내 아들이 작명했다고 믿을 만큼 어처구니없는 명칭이다. 참고로 선오는 아직 알파벳을 모른다.

윤소희는 자신이 찾아낸 영상(사실 모니카가 찾았다)을 폰으로 재생했다.

꺄하하- 아앙-

지오는 얼른 터치스크린의 중단 표시를 눌렀다.

시발! 야동인 줄 알았잖아!

공공장소에서 포르노를 트는 건 범죄다. 물론 이게 포르노라는 건 아니다. 젤라틴 프로미넌스 쇼는 그 미녀들의 해변? 아닌가. 미녀들이 가득한 해변이란 프로그램과 비슷한 부류의 리얼리티쇼였다.

뭔가 끈적거리는 이물질을 잔뜩 바른 헐벗은 여자들이 단체로 나와 서로 비비적대는? 여기서 더 발전하면 진흙 레슬링이란 경기가 있다. 진흙탕에서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 서로 밀어내 승리를 쟁취하는 경기! 핵심은 서로를 밀다 비키니가 예상할 수 없는 사고로 막 벗겨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물론 진흙 범벅이니 아찔한 살색이 그대로 보여질 일은 없다. 그러면 방송사고가 되니까.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받는 바디페인팅과 진흙을 응용했다고 보면 된다.

예술계는 인정하지 않지만 뭔 상관인가 돈만 잘 벌리는데.

나쁜 돈은 없다.

돈은 돈이다.


“흠흠. 좋아. 일단 조이 맬라드의 마지막 동선인 젤라틴 프로미넌스 쇼부터 탐문해야겠군.”

“...”

“왜?”


절대 내가 궁금해서 그런 건 아니다.


-...

-왜?


아니라니까? 나 못 믿어? 나 패밀리맨이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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