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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지오 디 오리진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0.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3.04.2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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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5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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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지오 디 오리진 -62화-

DUMMY

지오는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이사급 중역은 1년씩 재계약합니다만?”

“그래서 못 해주겠다고?”

“...알겠습니다.”


이택기는 마지못해 육아휴직을 승인해줬다.

전미란에겐 따로 인사했다. 그녀는 아내가 임신했다는 말에 성조의료원의 특진을 잡아줬다. 혈족만 가능하다는 특진 서비스는 굉장했다. 물론 G는 그 수준 낮음에 코웃음을 쳤다.


-지금이라도 의료봇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J.

-괜찮으니까 넣어둬.


처자식을 싸패AI에게 맡길 순 없었다.


“엄마가 이름을 지어줘.”

“그래도 될까?”


장미소는 일주일 내내 고민하고 작명전문가 수십 명을 찾아가 의뢰한 끝에 어렵게 결정했다.


“선오, 어떠니?”

“오선오... 괜찮네. 자기는 어때?”


선호 캐피탈 뭐시깽이가 생각나 꺼림칙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빠 이름이랑 비슷하다고 나중에 싫어하지 않을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면 돼.”


강선아는 뭘 그런 걸 다 걱정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내의 출산에 에밀리야와 LA패밀리는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참! 도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유나는 아리나와 함께 일본 여자프로축구팀에 입단해 큰 사고를 쳤다. 입단하자마자 아리나와 함께 1군 무대를 밟았고 현재는 득점 2위를 기록 중이다.

한국 뉴스에선 연신 열도를 정복 중인 이유나를 칭찬했다.


-도쿄 마린 퍼플스의 왕자님으로 불리는 중입니다.

-공주가 아니라?

-공주님은 사카가와 아리납니다.


수영선수 출신인 이유나의 피지컬은 일본에선 먹어줬다.


-남자친구와는 헤어졌습니다.

-왜?

-그냥 식은 거죠.

-설익은 애송이의 사랑이 그렇지 뭐.

-...

-왜?

-한때 모쏠이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에베베! 안 들려.

-어쨌든 크게 우려할 일은 없습니다. 아, 며칠 전 마이클 워커가 제거됐습니다.

-드디어 갔나.


마이클 워커가 죽었다는 건 얼라이언스의 새 의장이 탄생했다는 뜻이다. 지오는 직접 손쓰고 싶었지만 아내가 임신 중이라 애써 모른 척했다.

얼라이언스의 새 의장은 남부 딕시 케인 레드포드에게 돌아갔다. CIA가 밀던 매튜 그레이엄은 보스턴 리퍼 스캔들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희대의 연쇄살인마 보스턴 리퍼의 정체가 폭로되자마자 미국 전역이 난리였다.


-보스턴 성자로 불렸던 보스턴 대교구의 마테오 주교가 희대의 연쇄살인마로 밝혀졌죠.


언론이 미쳐 날뛸 수밖에 없는 특종이었다.

마이클 워커를 제거한 건 사카가와 야스히토, 야스형이었다. 워커의 목을 얼라이언스 레드포드 의장의 취임 기념으로 바쳤다. 다카라즈카 테러의 영웅에서 열도를 강타한 대지진을 예언하고 수습해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른 야스형은 어느새 일본 권력의 핵심에 도달했다.

지오는 앞으로 닥칠 자연재해의 작은 힌트를 줬을 뿐 외국인 의형제를 믿고 실행에 옮긴 야스히토가 대단한 사람이다.

애증과 만감이 교차하는 미묘한 한·일 관계를 고려하면 야스형의 행동은 대인군자大人君子다. 강선아가 아들을 낳은 날 그는 한달음에 달려와 대부를 자처했고 외롭지 않도록 동생을 만들어준다는 허황한 약속을 했다.

그게 마음대로 되나? 형수한테 개까일지도.

각오는 했는데 육아는 정말 힘들었다.

돈 있으니 사람을 쓰면 되지 않느냐 묻지만 하루하루가 진짜 전쟁이다. 친정이 가깝지 않았다면 난 100% 우울증에 걸렸다.

아이는 이상한 생명체다.

하루 24시간 울어대 짜증 나고 힘들어도 방긋방긋 웃는 미소를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이제는 이상택과 한중겸, 죽은 브라이스와 알렉산더의 마음을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선오는 돌잡이 때 돈을 집어 장모님을 기쁘게 했다.

가업을 잇는데 관심 없는 딸이나 사위보단 손주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신 것 같다. 오천명 명예회장이 장남보다 장손에게 기대는지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 오천명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는 두 달 전 작고했다. 기본적으로 노환이긴 한데 뇌출혈? 뇌경색의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던 거인巨人 한 명이 떠나갔다.

오천명 사후 성조의 위상은 확실히 예전만 못했다.

오채령이 아무리 뛰어나도 성별을 뛰어넘을 순 없고 세상은 여전히 남성이 지배했다. 물론 눈에 띄는 여성 지도자가 없는 건 아니다. 영국에는 아직 여왕이 있고 여성 대통령과 총리가 간간이 등장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세계를 놀라게 한 여성 CEO들.

오채령 회장은 분명 능력 있는 여자지만 오천명 사후 성조는 큰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육아휴직을 빨리 신청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 파도에 휩쓸려 야근을 밥 먹듯이 했으리라.

경일 본가는 몰락했지만 그 끈이 완전히 떨어진 건 아니다. 재벌끼리 얽히고설킨 혼맥의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깊다.

가끔 이택기의 푸념 섞인 전화를 받는다.

속내는 빨리 복귀하라는 것 같은데 내가 그 진흙탕을 왜 기어들어 갈까. 3년이다. 3년, 나는 육아휴직이 가능한 3년을 꽉 채울 계획이다. 보통은 3년은커녕 6개월도 많이 쓰는 편이지만.

서너 살쯤 되면 비행기를 타도 괜찮을 테니 한국을 떠나 어디 미국 구석으로 튀어도 좋다. 아들내미 돌잡이를 끝낸 이후 아내는 다시 일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톱이다.

뭐 매일 나가는 건 아니지만 일주일 세 번쯤? 서울과 가평을 오갔다. 장모님은 아예 가평으로 주소지를 옮기셨다. 김포 있던 아내의 스튜디오도 가평과 가까운 남양주로 옮겼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강선아를 남양주 스튜디오에 내려주고 돌아온 지오는 불청객을 맞이했다.


“일라이자?”

“제이.”


일라이자 레인, CIA 수석 정보분석관 아니 이제는 부국장인가? 그녀는 파격적으로 승진했다. 마이클 워커의 일로 장난쳤고 프랑스에서도 뒷공작을 걸어왔지만 딱히 큰 유감은 없다.

비뚤어진 애국심으로 무장한 양키는 원래 그런 놈들이니 어지간히 개같이 굴지 않으면 넘어갈 수 있다.


“아이가 귀엽네.”

“귀여운 악마지.”

“써니는?”

“미팅, 연락도 없이 뭔데?”

“대통령이 곧 방한하거든. 여차여차해서 미리 들어왔지.”


한·미 정상회담은 뉴스로 본 것 같다.


“헛소리 말고 용건을 말해.”

“이래서 널 좋아한다니까.”

“늙은이는 사양해.”


허튼소리 말라면서도 내미는 파일철을 받았다.


“이제 종이는 버릴 때도 되지 않았어?”

“윗분들은 여전히 옛날 사람이거든.”


한마디로 틀이다.


“제시카 멀리건?”

“DTI 통신 최고기술책임자, 이틀 전 호텔에서 실종됐어.”


DTI 통신은 동남아 최대통신사였다. 통신과 비밀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인공위성뿐만 아니라 해저 광케이블로 연결된 전 세계는 인터넷이란 문명의 은혜를 누렸다. 그러므로 정보가 오가는 데이터 총량은 무선보다 유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도시 한가운데서 납치?”

“동남아는 납치천국이야.”


21세기 신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냉전이 끝난 세계는 많이 변했고 아시아, 특히 동남아는 거의 환골탈태 수준이었다. 중국과 화교, 공산주의와 종교, 독재와 군벌 등이 어지럽게 뒤섞인 혼돈의 도가니였다. 냉전은 끝났고 중국도 중국이지만 동남아시아 그 자체가 골칫거리로 변했다.


“요즘 그쪽 동네는 화교 때문에 난장판이지?”

“동방그룹이 날아갔으니 중국이 예민하게 굴어.”


스티븐 천, 천영석 회장이 지분을 정리하고 튀자 선장을 잃은 동방그룹은 내분으로 갈가리 찢겼다. 화교를 제 통제 아래 두려던 중국공산당의 공작이 만천하에 밝혀지자 전 세계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전 세계 화교 중 최고로 손꼽는 동남아시아 화교는 일단 본토와 거리를 두는 모양새였다.


“그치들은 그럴 수밖에 없어. 아니면 진짜 죽창에 찔릴지도 모르거든.”


프랑스 시민혁명 당시 귀족과 왕족을 목매달았듯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는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부를 독점한 화교는 자칫 꼬챙이에 꿴 꼬치구이가 될지도 몰랐다.


“요점만.”

“제시카 멀리건은 우리 사람이야.”

“정보원?”

“노, 우리 직원.”


정보원CI이 아니라 요원Agent이란 뜻이다.


“동남아 최대통신사의 CTO가 요원이라고?”

“DTI는 위장회사거든.”


스케일이 커도 너무 컸다. CIA 단독으로 만든 건 아닐 테고 아마 정보공동체에서 공동으로 관리하는 회사일 것이다. 미국 정보기관은 CIA만 있진 않다.


“제시카를 납치한 곳은 골든 트라이앵글에 거점을 둔 반구잉이란 조직이야. 밀수와 인력알선을 가장한 인신매매를 주력으로 삼은 곳이지.”


납치자를 알면 구하면 된다. 하지만, 너무 빨리 구출팀을 보냈다간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납치한 인질은 중국 국경 옆으로 옮겨.”

“여차하면 중국 국경을 넘겠다는 속셈이네.”


납치는 하나의 비즈니스고 인신매매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익 높은 사업이다. 중국이 배후라는 건 너무 뻔한 시나리오다. 그래서 더 좆같다.


“되놈이 아무리 똥배짱이라지만 멀리건의 딸을 납치한다고? 날 멍청이로 아는 거야?”

“...”

“일라이자.”

“후, 이럴 줄 알았다니까. 잠깐만 기다려줘.”


일라이자는 뻔뻔하게도 어깨를 으쓱하며 시간을 끌었다. 한 5분쯤 지나자 검은 SUV 서너 대가 집 앞 길가에 멈췄다. 천사 같은 얼굴로 자는 아들내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마당으로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오. 제임스 레녹습니다.”

“국가안보보좌관이라... 무서운데?”

“샘의 소개를 받았습니다.”


주인공놈이 날 팔아먹었다. 문제는 왜냐다. 그냥 말하면 되지 번거롭게 연막을 쳤을까?


“시험?”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마당 구석에 있는 돌의자를 권했다.


“찰스 멀리건이 누군지 아시죠?”


수많은 찰스 멀리건 중에 국가안보보좌관이 언급할 정도로 유명한 찰스 멀리건은 한 명뿐. 그리고 제시카 멀리건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예상했다.


“애너하임 코퍼레이션의 찰스 멀리건 아닙니까.”

“맞습니다. 제시카는 찰스의 딸입니다.”

“비상이 걸릴 만하네.”


납치된 제시카가 찰스 멀리건의 무남독녀 외동딸이라면 대통령이 움직일 만했다. 그렇다면 이번 납치 배후는 중국이 아닐 확률이 높다. 왜냐면 애너하임이 중국에 투자한 금액은 천문학적이니까.

그렇다고 중국공산당을 통한 중재를 바랄 순 없었다.

현 백악관의 대對중국 기조는 매우 강경했다.


“제시카 멀리건은 살아서 돌아와야 합니다. 아니면 많은 사람이 괴로워지겠죠. 샘이 당신을 추천하더군요.”

“꿩 대신 닭이라.”


이건 주인공이 아니라 이택기의 농간 같다. 개새끼! 나한테 꿀 빤다고 지랄염병하더니 이런 개수작을 부릴 줄이야.

주인공은 지금 매우 바빴다.

오천명 명예회장 사후 성조그룹의 위상은 예전 같지 못했고 납작 엎드렸던 오장군도 슬슬 기지개를 켰다.


“몸값은 얼마를 요구합니까?”

“1억 달러.”

“휘이!”


지오는 휘파람을 불었다.


“부친이 누군지 아는 게 확실하네.”

“돈은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확실히 풀려나느냐.”


1억 달러?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이지만 찰스 멀리건에겐 껌값이나 다름없었다. 상대 눈치를 보니 몸값을 지급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쪽은 몸값 지급을 망설이는군요?”

“...불쾌한 전례를 남기게 되겠죠.”


제시카 멀리건은 어쨌든 공무원 신분이었다. 정부가 처리할 업무를 개인이 나서서 해결한다면 위신이 떨어지는 건 차치하고 안 좋은 선례를 남길 것이다.

미국은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

납치범도 테러리스트일까? 하지만, DTI 통신은 진실이야 뭐든 겉으론 민간기업이니 찰스 멀리건이 날뛰어도 정부와는 상관없었다. 겉으론 말이다. 겉으론.


-멀리건은... 미국판 드뷔신가?

-비슷합니다.


미친놈은 어딜 가나 비슷한가보다.


“미스터 멀리건과 대화가 필요하겠네요.”

“쓰시죠.”


상대가 건네는 위성전화기의 재다이얼을 눌렀다.


“미스터 멀리건?”

“제이?”

“맞습니다.”

“샘이 자네가 최고라더군.”


쓸데없는 립서비스다. 아니면 일을 떠넘기려는 필사의 몸부림일지도.


“1억이든 10억이든 난 준비됐네.”

“정부는 망설이는데?”

“...레녹스, 그 씹어먹을 개새끼가 그러나?”

“공무원 신분은 제약이 많죠.”

“돌아오면 반드시 CIA는 때려치우게 할 거네.”


부모 마음대로 될까 싶지만 쓸데없는 말은 삼켰다.


“양쪽 입장을 고려해 다른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해보게.”

“몸값을 지급하지 않고 구출하는 거죠.”

“코쉬는 어렵다던데?”


CIA는 구출팀을 파견하고 싶었지만 다른 정보기관들은 DTI 통신의 위장이 밝혀질까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막강한 민간군사기업이자 정보기업인 코쉬 인더스트리얼에 의뢰한 찰스 멀리건은 단시간에 구출은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런데 지오가 구출을 언급하니 황당하단 반응이다.


“난 가능합니다.”

“...”

“싫으면... 말고.”


싫으면 시집가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대가는 성공 후에 받겠습니다.”

“좋아. 단! 내 딸이 다치면 안 돼.”

“찰과상도 안 됩니까?”

“...그 정도는 괜찮아.”

“다시 연락드리죠.”


통화를 끝내고 위성전화기를 돌려줬다.


“가능합니까?”

“가능하니까 말했겠죠. 잠시만.”


지오는 제임스 레녹스와 한 걸음 떨어져 전화하는 척했다.


-이거 자작극이지?

-네.


이건 100% CIA 자작극이다. 근데 눈앞에 있는 국가안보보좌관은 그걸 몰랐다. 와! 일라이자든 CIA든 백악관을 속일 생각이라니 간도 크다.


-근데 날 납치나 인질협상전문가로 아나?

-드뷔시가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습니다.

-...죽여 버릴까.


인간이란 얼마나 믿기 힘든 족속인지 다시 깨닫는다. 통화하는 척을 끝내고 제임스 레녹스와 마주했다.


“작전은 지금부터 72시간 내로 끝날 겁니다.”

“정말 가능합니까? 실패하면 목 여러 개가 날아갑니다.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고요. 그냥 돈을 줘버리는 게 나을지도...”


상대는 뒤늦게 후회했다. 구출이 실패해 만약 제시카 멀리건이 다치거나 죽는다면 진짜 파국이었다. 검은 SUV가 줄줄이 떠나고 끝까지 남은 사람은 일라이자였다.


“성공할 수 있겠어?”

“당신 애인을 누가 구했어? 단순 비교면 아프리카가 더 지옥이야.”


아프리카 깡촌 군벌은 심심하면 사람을 칼로 썰어대는 개백정들이다.


“자, 이제 솔직해지자. 일라이자. 작전이라면 도가 튼 너희가 보란 듯이 외부인을 끌어들이려는 이유가 뭐야? 설마 진짜 구출팀을 보낼 거라 믿었어? 이거 자작극이잖아.”

“...”

“계속 입 다물면 폭스나 CNN에 찔러버린다.”

“...도저히 속일 수가 없네.”


이것들은 끊임없이 뒤통수를 치려고 아득바득거렸다.

남을 속이고 이용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변태놈들.


“DTI는 너무 커버렸어.”


DTI 통신이 설립된 건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한 직후였다. 냉전의 칼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던 70년대 중반 자유의 한 축이 와르르 무너졌으니 태평양을 마주한 미국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팽배했다.

세계최강 미군의 패배!

미국은 그제야 깨달았다. 두 번째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전쟁의 양상은 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전면전은 눈요기는 좋을지 몰라도 실효성은 없었다. 그러므로 미래전쟁은 국지적이고 더욱더 비밀스러워졌다.


“에셜론을 위해 전 세계에 걸쳐 네트워크를 구축했어. 사실 우리와는 크게 상관없는 작업이었지. 애초에 통신비밀은 다른 기관이 관장했으니까.”

“NSA.”

“그날의 뉴욕이 미국을 바꿨지. 아마 그 사건이 없었다면 기관들은 정보공유는커녕 지금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을 거야.”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내린 그 날 미국의 기존 관념도 함께 무너졌다. 테러를 방비하지 못한 정보기관들은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DTI는... 원래 성장하면 안 되는 회사였어. 그건 그냥 동남아 거점이자 중계기지 중 하나일 뿐이었거든. 근데 대충 뽑은 민간인 직원들이 너무 일을 잘해서 곤혹스러웠지.”


위장회사를 만드는 이유는 이목을 피해 각종 공작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DTI는 어느새 동남아 최대통신사로 발돋움했다.


“문제는 대중국 기조가 바뀌면서부터 발생했어.”

“윗분들이 DTI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생각이었군.”

“위장회사는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어. 아무리 포장을 잘해도 샅샅이 해부당하면... 끝장이야.”


중국만 화교 이민자나 삼합회 같은 범죄조직을 이용해 남의 등골을 빼먹는 것이 아니다. 양키는 되놈보다 한술 더 떴다.


“제일 중요한 건 회사를 상장하려면 공작금으로 쓴 돈을 그대로 돌려놔야 해.”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네.”

“어떻게든 예산을 쥐어짰지.”


DTI 통신 본사는 태국에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주가조작 아닌가?”

“...사소한 건 넘어가.”


태국이 호구가 아니라면 미국과 교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이건 리스크가 너무 큰 작전이었다. 내부고발자 혹은 해킹으로 폭로 당하면 자본주의의 뿌리를 뒤흔들 스캔들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지오는 손가락을 튕겼다.


“보스가 끼어들었군.”

“샘은 훌륭한 애국자지.”

“안 이를 테니 억지로 칭찬하진 말라고.”


주인공놈이 공작금과 자본금을 치환해버렸다. 뭐 채권이 남지만 처분할 수도 없으니 사실상 휴지나 다를 바 없었다.


-시가총액의 절반인 대략 170억 달럽니다. 한화로 약 21조 원이죠.


DTI를 통해 40년 동안 써댄 공작금이 약 21조 원이란 뜻이다. 위장회사가 한두 군데도 아니고 기관의 일개 지국이 40년 동안 21조 원을 태우다니 미국의 저력이 느껴진다.

하여튼 미친 나라긴 했다.


-본인 사재를 태웠어?

-네.

-얻은 건?

-더 깊은 신뢰?


주인공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170억 원도 아니고 170억 달러를 태우다니.


“이걸 대통령이 모르는구나? 찰스 멀리건과는 교감이 있고.”

“와우!”


일라이자는 진심을 담아 손뼉을 쳤다.

맞다. 찰스 멀리건은 딸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진즉 알고 있었다. 그럼 왜 백악관을 움직여 방한했을까? 뻔했다.


“너희는 170억 달러가 필요했고 우리 보스는 양키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를 배경으로 찍을 사진이 필요했군.”


일라이자는 말없이 엄지를 들었다.


“미스터 멀리건은... 딸이 CIA를 관두길 바라고?”

“제시카는 훌륭한 요원이지만 그 훌륭함을 이제는 민간에서 발휘할 때가 됐어.”


자식이 안전하길 바라는 건 모든 부모의 바람이다.

제시카는 납치당했지만 또 납치당하지 않았다. 그녀를 납치한 반구잉은 아마 주인공과 CIA의 합작으로 탄생한 허상이었다. 제시카는 안전했고 쇼가 끝나면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CIA-주인공-멀리건

이 셋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손잡았다.


“대통령이 알면 너흴 갈가리 찢어버릴 거야.”

“백악관은 알 필요가 없지.”


국익을 위해서라면 대통령도 속일 수 있는 곳이 CIA다.


“난 왜 필요한데? 광대 짓이나 하라고?”

“놉, 미스터 홈즈는 네가 금방 진실에 다가갈 거라 믿었고, 맞았어. 넌 방금 삼중공작을 깨트린 거야.”


일라이자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론 많이 놀랐다.


‘대체 뭐지? 이 인간은?’


조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사람을 키우고 배치하고 업무를 배분하며 결과를 얻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정착시키려면 한두 해 가지는 어림도 없었다.

10년? 아니 20년도 짧다.

반세기를 넘은 CIA의 역사는 그 조직의 탄탄함을 대변했다. 우리는 세계최강대국 미합중국의 눈이자 귀였다. 세상에 CIA가 모르는 비밀은 많지 않다.


“나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래도 시늉은 해야지.”

“육아에 바빠서 출장 같은 건 무리야.”


낮잠에서 깬 선오의 울음이 들렸다.

우는 아들을 안고 달래던 지오는 오늘은 그만 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가까이 다가온 일라이자의 금발이 신기했는지 손을 뻗는 선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그녀는 눈인사로 작별을 고했다.

준비된 차량에 올라 출발하자 폰을 들었다.


“젠슨.”

“어땠습니까?”

“단숨에 간파하더군.”

“그럴 거라고 말했죠? 속이는 건 어렵습니다.”


이택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많이 화내던가요?”

“아니.”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부탁할 일이 있는데 화내면 곤란하거든요.”

“넌 그의 정보라인이 궁금하지 않아?”

“놉! 하나도 안 궁금합니다. 충고하는데 쑤시고 다니지 마세요. 그런 쪽으론 가차 없는 친구니까. 워커의 일을 그가 모르리라 믿는 건 오만입니다. 레인 부국장님.”

“...”

“미국이란 울타리가 당신의 안전을 보장하리라 확신하지 마십시오. 그 친구를 건드리지 말라는 샘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언젠가 큰코다칠 겁니다.”


통화를 끝내고 생각에 잠겼다. 사색은 미국대사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곧장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영을 찾았다.


“결정됐습니까? 부국장.”

“대통령께서 이번 방한 일정 마지막에 발표하실 겁니다. 일본은... 국무부가 달래는 중입니다.”

“일라이자.”


제임스 영은 한숨을 내쉬며 일라이자의 이름을 편하게 불렀다.


“남한은 생각보다 안전하지 않아.”

“압니다.”

“중국놈들이 제집 드나들 듯이 오가. 언제부턴가 우리 눈치도 안 보기 시작했지.”

“이곳이 난장판이 되든 말든 우리와는 상관없죠. 그건 미스터 홈즈가 책임질 일입니다.”

“기어코 샘을 돕겠다고?”

“170억 달러라고요. 제임스. 170억 달러.”

“그건 CIA만을 위한 게 아니야. 상원정보위에서 알면 널 씹어먹으려고 달려들겠지. 일라이자.”

“그들 손에 170억 달러가 있다면 똥꼬를 핥겠지만 없잖습니까? 우린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합니다.”

“절차를 무시하는 건 깡패나 하는 짓이야.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들은 권력을 향한 어두운 비밀을 경계하셨어.”

“건국의 아버지들이 오늘날 우리 잘난 의원님들을 보셨다면 개탄하셨을 겁니다. 내가 이런 추악한 꼴을 보려고 독립에 헌신했나 하고요.”


정치인은 국익보단 자기 선거구의 이익과 제 정치적 입지를 우선했다. 제임스 영이 만약 정보국 출신이 아닌 순수 정치인이었다면 일라이자와 CIA는 청문회에 소환돼 난도질당했으리라.

냉전이 종식된 후 CIA는 그 쓸모를 의심받아왔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거대한 미군이 해체됐듯 무소불위한 권한을 휘두르던 정보국의 축소는 불 보듯 뻔했다.

독재와 독점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양키 특성상 냉전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CIA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냉전은 끝났다. 사람들은 자유와 평화를 이룩했다고 믿지만 어째선지 90년대 이후 미국을 목표로 삼은 테러는 폭증했다.

왜?

냉전의 한판승으로 이제 더는 미국의 패권을 의심하는 나라는 없었다. 그렇다고 도전자가 몽땅 사라졌을까? 아니다. 완벽한 1등이 정해졌으니 타도할 대상이 오히려 명확해진 셈.


“우린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어요. 제임스.”


예전에는 소련이나 군벌 독재자 같은 명확한 적이 있었다.


“축포를 일찍 터트리고는 왜 못 막냐고 비난하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팔다리를 다 잘라놓고 뭘 어쩌라고요?”


한정된 예산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알아요. 과거 비윤리적인 많은 작전과 공작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분명 필요한 조치였어요.”


정직한 정보공작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적인 작전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면 주저해선 안 된다.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려면 준비된 노력 이상의 희생이 요구됐다.

많은 동료가 이름 없이 죽어갔다.

손가락질하는 건 쉽다. 손을 들어 가리키면 되니까. 우린 변명하지 않는다. 왜냐면 성공했든 실패했든 침묵이야말로 우리의 신조기 때문이다. 미합중국을 수호하는 것이 CIA의 사명이었다. 어떤 오욕과 희생을 치르든.


“알았어. 협조하지.”


제임스 영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 국무부에 요청이 있어요. 제임스.”

“뭔데?”

“이민국에 보낼 강력한 추천서가 필요해요.”

“누굴?”

“이름은 지오, 성은 오.”


일라이자는 파일을 넘겼다.


“그는 미국에 꼭 필요한 인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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