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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지오 디 오리진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0.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3.04.2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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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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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지오 디 오리진 -61화-

DUMMY

성조 임원 자리엔 굉장한 이점이 있었다. 높은 연봉이나 사회적 지위는 차치하고 평범한 서민은 절대 알 수 없는 비밀을 접하게 된다. 특히 그룹 내 정보를 다루는 부서는 국가정보국 이상의 기밀을 취급했다.

물론 G와 비교하면 새 발의 피지만.


-선호 캐피탈, 읊어봐.

-영화투자전문회사입니다. 자본금은 3000억 정도... 특별한 건 없습니다.

-큰 회사야?

-국내에선 열 손가락 안에 듭니다.


대한민국 영화판 규모를 잘 모르니 자본금 3000억 원이 큰 건지 작은 건지 가늠이 안 된다.


-골드만삭스랑 비교하면?

-월스트리트랑 비교하는 건 좀...

-그래서 그것들은 왜 지랄인데?

-대주주이자 임원인 진태형이 윤소희에게 스폰을 제의했다 까였습니다. 그게 3년 전입니다.

-에휴! 좆 달린 새끼들은 진짜.


세상의 많은 문제가 좆으로 시작된다.

좋게 말하면 사랑의 열병이고 나쁘게 말하면 집착과 망상의 찌꺼기였다. 오늘 일어난 광화문 칼부림도 실연이 시발점이다. 멘탈이 쿠크다스처럼 부서지면 누구든 미친놈이 될 수 있다.

회식이 한창인 음식점 앞에 도착한 지오를 마중한 이는 강윤태였다. 총괄팀장이 회식까지 따라다닐 만큼 한가하냐 싶겠지만 그만큼 PnC에서 윤소희의 위상은 높았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멀쩡해 뵈는데요?”


투명한 유리 너머의 윤소희는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강윤태는 고개를 저었다.


“저거 연깁니다. 연기.”

“그래서 누가 그녈 빡돌게 했습니까?”

“저기 저 사람입니다. 선호 캐피탈 진태형 상무죠.”

“불러오세요.”

“네?”

“여기로 불러오세요. 대성조의 기조본 이사가 보잔다고 전하세요.”


명함으로 찍어누르려면 확실히 찍어눌러야 한다. 안으로 뛰어 들어간 강윤태는 불콰한 얼굴의 장년을 데려왔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갔는지 동공이 살짝 풀렸다.


“진태형 상무? 내가 누군지 알아요?”

“네에... 성조 이사님시라고...”


진태형은 말끝을 흐렸는데 그 말투엔 의심이 반이다.


“기획조정본부 소속이죠. 기조본 알죠? 기조본.”

“네... 압니다.”

“그럼 기획조정본부장님이 누군지도 아시겠네요?”

“...”


이제 살짝 쫄리지? 개새꺄.

윤소희한테 관심 많았으면 당연히 알겠지. 세간에 공표되진 않았지만 성조 장손과 윤소희의 열애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게 여러모로 난감한 부분이 있어요. 남녀 사이라는 게 헤어졌다고 딱 칼로 자르듯 끊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사람 인연이라는 게... 진 상무도 알겠지만 어려워.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되거든.”


지오의 말본새는 갈수록 짧아졌다.

주인공이 언급된 시점부터 상대방 눈동자 초점이 돌아왔다. 영화판이나 투자자로 목에 힘주고 다니는 거지 캐피탈 따위는 성조의 일개 자회사보다 못했다.


“미인한테 끌리는 건 수컷의 본능이야. 알아. 우리 윤 배우가 아름답다는 거. 그래서 본부장님도 많이 사랑하셨는데...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아.”


진태형을 떼어내는 방법은 많다. 제일 쉬운 방법은 폭력이지만 과도한 폭력은 부작용이 심했다. 그럼 다음으로 효과적인 방법은 뭘까?

무서운 권력자를 파는 것.

그리고 윤소희의 전 남친은 세계관 최강자였다.


“알다시피 성조는 우리나라 최고재벌이야. 그 최고재벌의 차기 총수는 사랑도 쉽게 할 수 없어. 우리 윤 배우가 최고재벌 안주인으로 어울리느냐? 안타깝지만 힘들어. 그래도 본부장님은 윤 배우를 많이 아끼시거든. 아시겠어요? 진태형 씨.”

“아, 알겠습니다.”


마지막은 반존댓말로 돌아왔다.


“역시 말이 통하는 분이라니까. 앞으로도 계속 꽃길만 걸어야지 한눈팔다 시궁창에 처박히면 안 되잖아요? 진 상무님.”

“네, 넵.”

“그럼 가서 일 보세요.”


진태형은 군기가 빠짝 든 이등병처럼 떠나갔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윤태는 이게 맞느냐는 표정을 지었고 지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돈 있다고 목에 힘주고 다니는 병신은 진짜 병신처럼 대우해야 자기가 병신인지 깨달아요. 모르면... 계속 병신인 거고.”

“저는 이사님처럼은 못 합니다. 힘이 없어서.”

“강 팀장은 잘했어요. 뭐 소희가 날 불렀지만 어쨌든 그녀를 끝까지 케어했으니 할 일을 다 한 겁니다. 칭찬해요.”

“감사합니다.”


뜻밖의 칭찬에 강윤태는 쑥스럽게 웃었다.


“이제 들어갈까요?”

“모시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진태형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무슨 핑계를 댔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을 것이다. 대고려란 작품을 진두지휘할 감독과 제작사 대표 등 스태프 그리고 주·조연과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눴다.


“왔어?”

“연기 그만해. 진태형이 보내버렸으니까.”

“어라? 진짜 갔네.”


주위를 둘러보던 윤소희는 진태형 그림자도 안 보이자 흐리멍덩한 눈동자의 초점이 돌아왔다.


“안 왔으면 취한 척 지랄하려고 했구나?”

“구질구질한 남자는 매력이 없는데 그 작자는 그걸 몰라.”

“제법 남자답게 생겼던데? 어차피 너도 싱글이잖아.”

“말이라고! 200킬로로 달리던 차에서 떨어진 호박처럼 갈린 그 얼굴이 남자답다고? 근데 어떻게 보낸 거야?”

“니 전 남친이 누군지 상기시켰지.”

“...”

“워워! 병은 내려놔.”


맥주병으로 내 머릴 내려치려는 건 아니지?


“또 누굴 보낼까? 말만 해.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내줄게.”

“어머머! 누가 들으면 내가 암살이라도 의뢰한 줄 알겠어.”

“아니었어?”

“아니거든!”

“그럼 이만 퇴근하련다. 적당히 마시다 들어가. 광화문도 난리인데 괜히 말 나온다.”

“광화문?”

“뉴스 좀 봐라. 뉴스 좀.”


그제야 텔레비전에 뉴스 속보가 떴다. SNS는 한참 전에 떴던데 메이저는 확실히 한 발자국 느렸다.


“세상에!”


유혈이 낭자한 현장은 모자이크 처리됐다. 회식할 분위기가 아니자 사람들은 눈치껏 자리를 정리했다. 윤소희와 직원들을 배웅하고 친정행 택시를 물색했지만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시간 괜찮으면 찾아오게.”


이상택은 그리 말했지만 지오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지금 빨리 와.’

여자어도 어렵지만 꼰대어도 해석 잘못하면 좆된다.

자택에 펼쳐진 예쁜 정원 한쪽에 남자끼리 마주 앉았다. 해는 완전히 떨어졌고 전기로 빛나는 문명의 이기 덕분에 남자 둘이서 별빛을 헤아리는 궁상은 면했다.


“미국에서 보고 처음인가? 에밀리도 한국에 들어왔다며?”

“조만간 같이 찾아뵙겠습니다.”

“어린애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더군. 그건 그렇고... 종천이는 만나봤어?”

“불안하세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좋아. 아들과 나, 우린 미국 땅에서 많은 얘길 나눴어. 오랫동안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지. 녀석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고. 우린 서로를 너무 몰랐던 거야.”

“실망할까 두려우세요?”

“아니, 이젠 아니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거든.”


이상택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심으로 고마워. 빈말이 아닐세. 음. 표현하기 어려운데... 그래. 다시 태어난 기분이지. 내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내가 틀렸다는 걸 깨달았어. 문젠 아들 녀석도 나 이상 큰 변화를 겪었네. 이게 좋은지 나쁜지 판단이 안 서.”

“종천이가 틀렸다고 보십니까?”

“사랑이 영원하리라 믿나?”

“믿고 싶습니다.”

“아차! 자넨 신혼이지. 질문을 바꾸겠네. 사랑만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변화된 삶의 동기를 부여할 순 있습니다.”

“...자식을 믿지 못하는 부모는 틀렸나?”

“모든 부모가 자식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은 공염불이죠. 어떤 부모도 자식이 상처받길 원하지 않으니까요. 싫든 좋든 자식을 위한 원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아들의 임관을 원했던 과거의 회장님도 같은 마음 아닙니까?”

“맞아. 강하게 크길 원했거든. 군대만큼 사람을 억압하는 곳은 없네. 있다면 교도소? 자유를 빼앗긴 고통은 상상할 수 없지. 군대에서 벌어지는 일은 상식과는 거리가 멀어.”


군대는 모든 것이 비정상이었다.


“군대는 문명사회에서 금하는 살인을 배우고 기술을 연마하는 비정상적인 폭력집단이지. 하지만, 군대는 효율성과 결과만을 중시해 개인을 쉽게 재단하거나 버리는 민간과는 달라. 쉽게 포기하지 않네. 그걸 미련한 전우애로 폄훼해도 동료를 위하는 자발적 헌신과 일치단결한 모멘텀은 오직 군대에서만 가능해. 공포가 깊고 클수록 우리는 더욱더 하나가 돼. 외부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어. 국가수호에 몸과 마음을 바친 우리는 쉽게 꺾이지 않는다네.”

“신념입니까?”

“신념? 그런 고상한 말은 몰라. 악과 깡, 이 두 개만 있어도 이미 훌륭한 군인이거든.”

“아드님에게 악과 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군요.”

“나도 제 엄마도 녀석보다 빨리 세상을 뜨겠지. 그때는 누가 있어 걜 지킬까? 자식 걱정을 그만두라는 건 부모에겐 죽으라는 말과 같아.”


이상택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다.


“전엔 무조건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믿었어.”

“지금은?”

“그냥 사기당하지 않고 물려준 유산만 잘 건사하면 평생 먹고사는 불편은 없겠지. 딱 그 정도만 바라네.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칠수록 삶은 녹록지 않아. 누군가의 마지막을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군. 세계를 호령하던 양키도 총 맞으면 뒤지는데 나라고 별 수 있나?”


이상택은 혼자 남은 에밀리야 코르센코를 보며 아들의 미래를 상상했다.


“우리처럼 거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은 적이 많아.”

“한국은 총기안전국가입니다.”

“아니, 이 나라는 안전하지 않아. 우리 머리 위에 전 세계에서 손꼽는 마약생산대국이자 불법무기수출대국이 있어. 혹시나 어떤 미친놈이 등장해 방아쇠를 당기면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하겠지.”


안전불감증은 산업현장에서만 쓰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난 결심했네. 나라를 뒤흔들 미친놈이 등장할 거 같으면 미리 제거하기로. 자네 보스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야. 사실 난 그가 미친놈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거든.”


콜 오브 듀티는 당신이라고! 이상택 씨!

전쟁의 사자, 전쟁의 부름은 흑화한 이상택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들을 잃고 미쳐버린 이 작자는 서울의 절반을 날려버릴 계획을 세웠다. 그게 아직 오지 않은 미래고 어쩌면 앞으로도 볼 수 없는 미래다.


“장고 끝에 우린 합의에 도달했네. 서로의 영역을 탐하지 않기로. 우호의 증거로 VG 경영에 참여하기로 했지. 그래서 대리인이 필요해졌어.”


본래 성조에 흡수될 베스타 글로벌VG의 미래가 변했다.


“...절 대리인으로 두려는 겁니까?”

“지분을 양도받아도 알력은 피할 수 없으니까.”

“총알받이는 사양하겠습니다.”


베스타 글로벌에 이상택이 합류하면 회사 규모는 단숨에 국내를 넘어 아시아에서 손꼽는 PMC로 확장될 것이다. 한 가지 우려는 VG는 이제껏 주인공에게만 충성하는 사병조직이란 점이다.


-사사건건 부딪칠 거 같은데?

-둘 다 한 성질머리 하죠.

-총질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한 지붕 두 가족 같은 모양새가 되면 100% 파벌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지오는 답을 얼버무리고 도망쳤다. 이상택은 그를 붙잡지는 않았지만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건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며칠 후 지오는 다시 성조 본가를 찾았다.


“우리 도련님 얼굴이 아주 볼만하더구나.”

“도련님이요?”


아니, 오장군이 도련님으로 불릴 나이는 아니지 않나? 결혼해서 장성한 아들이 있으면 서방님 아닌가? 하지만, 전미란이 그리 부르고 싶다면 누가 말릴까.

누가 봐도 텐션이 높았다.

주기영 회장에게 원투! 그리고 스트레이트를 얻어맞은 오장군 부회장은 본가로 냉큼 달려와 중재를 요청했다. 승계를 빌미로 꼼수를 부리던 시동생의 낭패한 기색에 전미란은 웃참하느라 혼났단다.


“최치수에게 경고를 남겼습니다.”

“그쪽은 몰라? 기영이도 그렇고 아예 모르던데?”

“사기를 쳤다고 광고할 필욘 없잖습니까.”

“하하!”


전미란은 좋다고 손뼉을 쳤다.


“부회장은 한동안 얌전할 거고 영천 주 회장은 어르신을 더욱 의지할 겁니다.”


전미란을 찾은 주기영은 오장군에게 당한 억울함?을 고자질했고 그녀는 오구오구! 하며 응석을 받아줬다. 전미란은 신통방통한 도깨비방망이를 보는 눈빛으로 지오를 바라봤다.


“실적을 냈으면 보상이 있어야지. 원하는 게 있어?”

“딱히...”

“없어?”

“아내한테 물어보고 답해도 될까요?”

“하하!”


전미란은 정말 크게 웃었다. 깜짝 놀란 비서가 들어올 정도로 화통한 대소大笑였다.


“마누라를 많이 사랑하나 봐?”

“제겐 과분하죠.”

“아내 쪽이 나이가 더 많은 걸로 아는데?”

“그만큼 현명하고 생각이 깊은 여잡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막말로 G에게 명령하면 노화를 억제할 수 있는 신약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미래기술로 화장품을 만들면 대박 나겠는데?

-천박한 발상입니다.

-하나 만들어 봐. 생일선물로 딱 좋네.

-...

-싫어? 싫으면 시집 가!

-...만들겠습니다.


G가 내게 적응했듯 나도 G에게 적응했는데 이 녀석은 의미불명의 말장난을 극혐했다. 감정회로가 마구 뒤엉킨다고 해야 하나? 유리 긁는 소리가 끔찍하듯 논리 없는 헛소리를 싫어했다.

면담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고애란이 소개팅을 시켰다.


“천나랩니다.”

“앞으로 당신을 전담할 친구예요.”

“애란님은?”

“전 은퇴할 예정이거든요.”


님 자를 붙이자 고애란은 중간에 호호! 웃었다.


“그럼 은퇴할 때까지 절 버리지 마세요. 애란님.”


실연당한 남자가 여자를 붙잡는 듯이 애절함을 연기하자 고애란은 다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평생 전미란을 보좌한 고애란은 결혼은커녕 흔한 연애 한 번 하지 않은 철의 여인 그 자체였다. 수녀도 그렇게까지 철두철미하진 않을 것이다.


‘시바! 대마도사도 그녀 앞에선 절해야 할 듯!’


그래서 고애란은 님으로 불릴 자격이 있었다.


“알았어요. 그래도 연락처는 교환해요.”

“그러시다면야.”


지오는 천나래와 명함을 교환했다.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힌 깔끔한 명함이었다.

본가를 떠난 지오는 차에 올랐다.


-천나래 35세,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 학사,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성조에 입사, 가족관계는... 없습니다.

-가족이 없다고?

-고아입니다.

-비밀결사의 전형적인 수법이네.


부모 없는 아이 중 뛰어난 자질을 가진 아이를 후원해 나중엔 골수까지 빨아먹는 건 비밀결사가 자주 써먹는 수법이다.


-한채원이 경찰을 그만뒀습니다.

-그렇게 됐나...


한채원과 오현우의 맞선은 없던 일이 됐다. 딸을 지키기 위해 안문길 게이트를 폭로하고 그토록 혐오하는 재벌과 맞선까지 추진했던 한중겸이다.


-그녀는 부친이 자길 지키기 위해 벌인 여러 일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경찰로서 정의를 관찰하고 싶었는데 열심히 하면 할수록 부친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는 진실에 절망했다.


-심경에 큰 변화를 겪은 한채원은 현재 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이종천도 그렇고 다들 인생의 전환점을 겪는 중이다. 죽어야 할 사람이 살고 살아야 할 사람이 죽는 아무도 모를 역사의 격변기.

시나리오와 타임라인은 이미 어긋날 대로 어긋난 상태다.

설마 걔도 흑화하는 거 아니지?

원래 선한 자가 타락하면 더 지독한 악당이 된다.

사실 악당이 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다. 중요한 건 한채원이 보여줄 새로운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느냐다. 모든 작가는 변태다. 재미만 있으면 살인도 금기도 허용되는 것이 그들의 시나리오다. 교훈적 동화든 아름다운 시든 악의 교전이든 그 추구하는 바는 언제나 끝없는 환락이었다.

여유를 얻은 지오도 등한시했던 펜을 다시 잡았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주인공은 여전히 주인공이었다. 최종목표는 영화로 만드는 것이다. 돈은 충분했다. 문제는 이 세계에선 IL이 존재하지 않으니 배우를 섭외해야 한다.

시뮬레이션이야 머릿속에 있는 장면을 끄집어내면 끝이지만 이곳에선 미장센이 필요했다. 머릿속에만 있는 것을 바깥으로 꺼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배역 하나는 윤소희에게 부탁할까?

이야기만 잘 뽑아내면 배우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기서도 성조 명함은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아, 촬영감독은 아내에게 부탁해보자. 사실 그것도 말이 안 되긴 하는데 어차피 취미생활의 연장선이었다. 내가 영화를 만든다고 뭐 블록버스터 대작이 나올 일은 없었다.


“너흰... 언제 가냐?”


가평의 어느 별장에 도착한 지오는 망중한 아니, 대놓고 늘어진 에밀리야 코르센코와 LA패밀리를 볼 수 있었다.


“다음 주에 가요.”


다른 애들은 들은 척도 안 했고 케이트와 제니퍼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답했다.

어우 시발!

양키는... 뭐든 엄청 컸다. 처음 봤을 땐 피죽도 못 얻어먹고 다닌 줄 알았더니 못 본 사이에 엄청나게 성장해버렸다. 케이트와 제니퍼는 강봄의 가출팸이지만 리더 강봄보다 나이가 많았다.

작년 6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를 양성하는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노력 여하에 따라 4년제로 편입할 수도 있고 아니면 처음 선택대로 간호사가 될 수도 있다.

그녀들의 미래는 활짝 열려있다.

프랑스 일이 있기 전부터 둘은 내게 관심이 많았다. 강인한 수컷에 암컷이 흥미를 갖는 건 당연했다. 노골적인 유혹들, 영악한 둘은 아내가 있을 땐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오는 그 행동을 일시적인 호기심으로 봤다. 엉뚱하고 모험적이고 생기발랄한 나이가 아닌가. 위험한 로맨스의 짜릿한 스릴을 즐기는 것도 젊을 때나 가능했다.


-모른 척해. 일일이 반응하면 더 날뛴다고.

-...

-뭔가 불쾌한 느낌?

-인기 있다고 착각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실제로 난 인기 있어. 존나 인기 있지.


이 세상이 만화 속이라면 내 코는 하늘을 뚫을 듯 솟구쳤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인생에 세 번쯤 인기 있을 때가 있어.

-...

-난 지금인 거야! 모테키이이!


모테키는 야스형한테 배운 일본어다.

애들을 한번 체크하고 이씨자매의 일상을 보고서로 작성해 이택기에게 메일로 보냈다. 이택기? 모테키? 흠. 별장에는 애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은 우리 장미소 여사님의 땅이다. 그녀는 애들을 굉장히 좋아했다.

근래 술자리에서 언급한 적 있다. 대가족을 갖는 게 꿈이라고 말이다. 아니, 딸내미가 많아서 감당이 될까싶지만 딸 대신 남탕을 상상하니 이쪽이 백번 낫다.

고추밭은 너무 혐오스러웠다. 자매는 어떻게 싸우는지 모르지만 형제는 진짜 치고받고 싸운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지 않을까?

지오는 장미소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별장 2층 발코니에서 애들이 노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입양 절차는 변호사가 마무리했어.”

“좋네.”


강봄은 이제 장미소의 진짜 딸이 됐다.


“교환학생은 무리지 싶은데... 곧 졸업 시즌이잖아.”


미국은 가을에 입학해 여름 초입에 졸업했다.


“졸업?”

“미국의 졸업은 6월이야. 걔네는 가을에 입학하거든.”


천상 한국인인 장미소가 미국 교육과정을 알 리가 있나.


“미국에 같이 가야겠다.”

“회사는?”

“아휴! 딸년은 물려받을 맘이 없으니 전문경영인을 따로 구해야지.”


장미소는 한숨을 내쉬며 지오를 곁눈질했는데 사위라도 나서줬으면 하는 눈빛이다.


“엄마가 날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난 회사를 경영할 능력은 없어요.”

“일은 원래 아랫사람들이 다 하는 거야. 사장은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돼.”


저렇게 애원하니 딱 잘라 거절하기도 그랬다.


“근데 너흰 언제 낳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응?”

“임신 같거든.”

“뭐? 선아는 별말 없던데?”

“그냥 내 감이 그래. 내 감이.”


영 못 믿는 눈빛이다. 어쩌겠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장모의 하소연을 한참 들어준 지오는 시간에 맞춰 서울로 돌아왔다.

테러로 묻힌 감이 있지만 파리 패션위크에 포토그래퍼로 참여한 강선아의 업계 인지도는 급상승했다. 예전에는 여자치곤 제법 찍는다는 반응이라면 이제는 세계와 경쟁하는 능력을 갖춘 실력자로 손꼽았다.

스튜디오 예약자가 전에도 줄을 섰지만 지금은 진짜 미어터졌다. 그래도 과로는 위험하다. 스트레스는 모든 병의 근원이니 적절히 끊어줄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해서 유산이라도 하면 산모 본인도 충격이고 지오도 못 견딜 것 같으니까.

그는 하루하루 아빠가 될지도 모른다는 흥분과 두려움을 실감했다.


“왔어?”


스튜디오에서 강선아와 가벼운 포옹과 입맞춤을 나눴다.


“잠깐만. 이것만 마무리할게.”

“천천히 해.”


일에 집중하는 그녀를 배려해 자리를 피했다. 휴게실로 나오자 몇몇 직원이 인사해왔는데 개중에는 아주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이은비?”

“안녕. 아니, 존댓말 할까요?”

“됐고. 한국에 완전히 들어온 거야?”

“응. 일단 언니 밑에서 일하기로 했어.”

“아, 너 패션 쪽으로 공부했다고 했었지.”


아내와 처음 만났던 유럽여행 가이드를 맡았던 이은비.

그녀는 이번 패션위크 때도 통역으로 함께했었다.


“언니 밑에서 경험이랑 인맥 좀 쌓으려고.”

“잘 생각했네.”


잘나가는 사진작가를 찾는 기업과 연예인은 많았다. 여기서 인맥과 실적을 쌓고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좋다.


“어? 우리 지오가 왔네.”

“누님.”


스튜디오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김미영(이름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 지오를 알아보고 포옹해왔다. 그녀는 내 앞에 있던 이은비도 알은체했다.


“은비 씨도 우리 지오를 알아?”

“선아가 얘기 안 했어요? 유럽에서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가이드였잖아.”

“아! 난 패션위크 때 통역을 맡겼다는 얘기만 들었지.”


김미영은 새삼스럽단 얼굴로 이은비를 쳐다봤다. 지오와 친분이 있다면 그냥 신입은 아닌 셈이다. 그녀 안에서 이은비의 가치가 높아지는 순간이다.

바쁜 김미영은 인사만 하고 떠나갔다.


“휴.”

“왜 긴장해?”

“넌 김 부장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김미영이 스튜디오 전반을 관리한다는 건 그도 알고 있다.

강선아가 안식년을 가질 계획을 세웠던 결정적인 이유도 김미영을 믿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도 경영진이 따로 있었지만 강선아를 제외하면 김미영의 입김이 제일 강력했다.

프랑스 유학파 재원이라도 신입은 신입이다.


“힘내라.”


지오는 그 말밖에 해줄 수 없었다.

일상은 계속됐다.

아내와 함께 출근하고 퇴근할 땐 그녀를 마중 나갔다. 셔터맨치고는 외유가 잦았지만 지오는 별 불만은 없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또 겨울을 지나 봄이 오는 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주인공놈의 소개팅 프로그램은 방송역사에 남을 대박 시청률을 기록했다. 아이자와 유이나 케샤 이몰린 등 각국을 대표하는 미인이자 거물 신인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소개팅 프로그램의 세계적 붐을 일으켰다.

사적으로 큰일을 뽑자면 임신을 알게 된 강선아는 모든 일에서 손을 놨다. 장모님은 크게 기뻐했다. 아이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결국 친손주는 누구도 못 이긴다.

봄이 오는 문턱에서 아내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들이란 건 진즉 알고 있었다. 품에서 꼬물거리는 녀석을 보자니 심장이 간질간질해졌다. 말도 못 하는 작은 생명이 날 보고 방긋방긋 웃었다.


“그래. 내가 니 아빠다.”


I Am Your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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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 디 오리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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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지오 디 오리진 -86화-(완) +29 23.04.25 3,724 195 17쪽
85 지오 디 오리진 -85화- +18 23.04.24 2,937 144 30쪽
84 지오 디 오리진 -84화- +17 23.04.18 3,048 161 38쪽
83 지오 디 오리진 -83화- +44 23.04.15 3,637 189 44쪽
82 지오 디 오리진 -82화- +63 22.08.22 5,582 216 37쪽
81 지오 디 오리진 -81화- +28 22.08.16 4,279 249 32쪽
80 지오 디 오리진 -80화- +19 22.08.09 4,443 210 34쪽
79 지오 디 오리진 -79화- +21 22.08.01 4,773 231 35쪽
78 지오 디 오리진 -78화- +27 22.07.25 4,696 231 31쪽
77 지오 디 오리진 -77화- +22 22.07.19 5,226 211 51쪽
76 지오 디 오리진 -76화- +27 22.07.12 5,019 237 32쪽
75 지오 디 오리진 -75화- +23 22.07.04 4,436 194 19쪽
74 지오 디 오리진 -74화- +13 22.06.28 4,388 190 16쪽
73 지오 디 오리진 -73화- +16 22.06.27 4,317 198 23쪽
72 지오 디 오리진 -72화- +20 22.06.23 4,534 227 27쪽
71 지오 디 오리진 -71화- +13 22.06.21 4,400 185 20쪽
70 지오 디 오리진 -70화- +22 22.06.16 4,470 202 14쪽
69 지오 디 오리진 -69화- +16 22.06.14 4,503 174 25쪽
68 지오 디 오리진 -68화- +19 22.06.11 4,597 186 18쪽
67 지오 디 오리진 -67화- +12 22.06.10 4,522 187 21쪽
66 지오 디 오리진 -66화- +13 22.06.09 4,374 195 11쪽
65 지오 디 오리진 -65화- +10 22.06.08 4,723 198 31쪽
64 지오 디 오리진 -64화- +13 22.06.07 4,697 183 29쪽
63 지오 디 오리진 -63화- +12 22.06.06 4,687 189 18쪽
62 지오 디 오리진 -62화- +15 22.06.05 4,757 198 24쪽
» 지오 디 오리진 -61화- +23 22.06.04 4,685 205 23쪽
60 지오 디 오리진 -60화- +17 22.06.03 4,730 196 27쪽
59 지오 디 오리진 -59화- +18 22.06.02 4,441 207 12쪽
58 지오 디 오리진 -58화- +23 22.06.01 4,436 184 15쪽
57 지오 디 오리진 -57화- +25 22.05.31 4,701 189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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