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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지오 디 오리진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0.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3.04.25 21:13
연재수 :
8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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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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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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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8쪽

지오 디 오리진 -84화-

DUMMY

“음?”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 마이애미 해변은 1년 365일 사람으로 북적였다.


-J?


중요한 뭔가를 잊어버린 기분. 분명 뭔가가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 잔영으로 남았다.


‘뭘까 이 위화감은?’


어제오늘의 나를 반추해보자.

1. 마이애미에서 여러 사고를 수습 중이다.

2. 하나는 처리했다.

3. 남은 하나를 수습 중이다.

4. 아내에게 일일보고하며 아이들 안부를 확인했다.

5. 배은망덕한 윤 머시기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6. 이택기와 통화했다.

7. 명분을 얻어 탈출했다.

8. 일라이자와 통화했다.

9. 이택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잠깐! 뭔가 이상하다.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넓었다.


-디버깅.

-...오류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모든 카메라와 저장매체를 확인해.


내가 찍혔을지도 모를 모든 폰 카메라, CCTV, 차량 블랙박스 등 메모리보드를 확인했다.


-특이사항... 발견되지 않음.


뭐지? 결과는 아니라고 말하는데 내 본능은 계속 경고를 보내왔다. 하지만, 그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도착했습니다.


이택기와 구즈먼은 약속 정각에 등장했다. 구즈먼의 경호팀이 포지션을 잡는 동안 나는 뻔뻔하게 음료를 주문했다.


“난 딸기 펀치.”


지오의 선택은 애들이 좋아하는 딸기맛.

선오도 선예도 딸기를 좋아한 아내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싶다. 딸기에 환장하는 딸기왕자와 딸기공주님 덕분에 그도 언제부턴가 스트로베리에만 손이 갔다.

코피 루왁만 마실 것처럼 생긴 여자가 벤치에 앉아 설탕주스를 쪽쪽 빨아먹는 모습도 퍽 신기했다. 지오의 시선을 느꼈는지 헤더 구즈먼은 피식 웃었다.


“이래 봬도 펀치 후르츠 대주주야.”

“설탕물 장사가 잘되나 봐?”

“없어서 못 팔지.”


미국인 비만율 폭증의 원인은 햄버거와 콜라가 아니라 지역별로 자리 잡은 설탕물 프랜차이즈 때문이다. 버거킹과 맥도날드, 코카콜라와 펩시는 심히 억울할 노릇이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빨대만 빨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성질 급한 이택기다.


“조이 맬라드는 아이를 낳은 기록이 있습니다. 애가 애를 낳은 셈이죠. 봉인된 기록으론 헤이워드 가문으로 입양됐더군요. 그걸 주선한 게 리키 로드리게습니다.”

“포르노 제작자가 갑자기 입양 브로커가 됐다고?”

“포르노가 많이 양지화됐지만 어두운 부분은 여전합니다.”


법률과 절차에 순응하는 사업자가 많을까 아니면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는 얌체가 많을까? 거기서 제일 고통당하는 건 순진한 이들이다.


“미스 맬라드의 임신은 예기치 못한 사고였습니다.”

“낙태는?”

“본인이 거절했나봅니다.”

“갑자기 모성에 눈떴나...”

“이젠 당사자만 알겠죠.”


죽었으니 물어볼 방법이 없다.


“임산부를 작품에 출연시킬 순 없으니 여러모로 큰 손해였습니다.”

“리키 마틴놈이 손해를 메우려고 애를 팔았군.”

“기록이 봉인된 건 제대로 된 절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이가 아이를 되찾으려고 시도했어?”

“그녀는 스트리퍼로 활동하며 급전을 마련했습니다. 꽤 거금이더군요.”


애를 키우려면 많은 돈이 든다.

육아는 장난이 아니다.


“아이를 입양한 낸시 헤이워드는 파라솔 컴퍼니 오넙니다.”


마이애미 해변엔 파라솔 그림이 새겨진 건물이 즐비했다.


“호텔, 모텔, 콘도 등 마이애미 부동산의 큰손이죠.”

“아이도 결국 알게 될 텐데 타협할 수도 있었잖아? 여긴 입양에 관대한 나라 아니었나?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작은 흠집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통제광, 하나부터 열까지 내 생각과 계획대로 안 되면 미쳐버리는 사디스트는 파시스트보다 더한 정신병자다.


“비극.”

“비극이죠.”


어린 나이에 제 몸을 함부로 굴리다 덜컥 임신해 아이를 낳았고 협박이든 뭐든 두려워진 나머지 입양 보냈다. 낳은 엄마와 키운 엄마, 두 모성의 충돌은 끔찍한 비극으로 끝났다.

지오는 구즈먼을 바라봤다.


“그쪽 제안은 뭐야?”

“로드리게스는 자수할 거야.”

“헤이워드와 친해?”

“...부정하진 않겠어.”


조이 맬라드를 위한 온전한 정의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를 죽인 건 로드리게스가 부리던 양아치 중 한 놈이다. 슬프게도 헤이워드는 살인을 교사했음에도 계속 잘 먹고 잘살 테고 윤소희는 결코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

그저 살인범이 잡혔다는 소식만 전해질 것이다.


“이걸로 앙금은 없는 거지? 제이.”

“빚진 걸로 해두지.”

“질문이 있어.”


지오는 말해보란 듯이 으쓱했다.


“새뮤얼의 이복형제야?”

“놉.”


끔찍한 소릴 하네? 이 아줌마가!


“그럼 빚을 지금 받아도 될까?”


빚 독촉이 무슨 LTE냐?


“뭔데?”

“카르텔을 정리하고 싶어.”

“수지가 안 맞지만 어려울 건 없네.”

“...쏘히란 여자를 정말 많이 아끼나 봐.”

“내겐 친구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 없거든.”


통탄할 노릇이지만 나이 먹을수록 친구 사귀기가 힘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오와 헤더는 악수했다.


“오래 걸릴까?”


지오를 고개를 저었다.


“내일 뉴스를 확인해.”


어차피 일이 되게 만드는 건 내가 아니라 G였다.

기계장치의 신!

돌아버린 AI! 돌은 AI! 이름하여 돌AI!


-...

-쿨하고 섹시하게 웃어넘기라고.


여러 범죄정보가 다양한 루트를 통해 플로리다 수사기관과 FBI 등에 제보됐고 실적에 목매는 공무원에겐 진급을 위한 훌륭한 기회였다.

개중엔 줘도 못 먹는 병신도 있고 과욕을 부리다 탈나는 등신도 있을 것이다.


‘나는 기회를 줬어.’


리키 로드리게스는 사흘 뒤 자수했고 윤소희는 즉각 탐정보조에서 해고됐다. 그녀는 리키 마틴놈이 그럴 줄 알았다고 자화자찬했지만 누가 봐도 뒷북이다.

네네! 암요암요! 슈퍼퍽킹코리안우주대스타 윤소희 씨의 말이 다 맞죠. 암요!

약속대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이번 한국행은 이택기의 도움을 받았는데 내 전용기는 여행을 떠난 아내와 아이들이 쓰는 중이다. 그녀들은 먼저 한국에 도착해 그를 기다렸다.

수많은 사건·사고를 손쉽게 해결해온 지오는 드디어 엄청난 난제를 맞닥뜨리고야 말았다.

그건...

며칠 못 봤다고 아빠를 낯설어하는 딸내미에게 똑땅해!

...

주먹으로 처맞았다.

혀를 어디다 두고 왔냐고.

장모님은 바쁘셨다.

아내의 외삼촌 장동원이 친 거대한 사고를 수습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셨다. 아내는 지인들과 연락해 오랜만에 모임을 가졌다.

나는?

당연히 육아에 전념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그를 찾아 미국에서 많은 인원이 넘어왔다. LA패밀리와 뉴욕 미친년, 중앙정보국으로 돌아간 일라이자는 내게 똥을 거하게 싸질렀다.

이 씹련이? 내가 베이비시터야 뭐야.

시간은 계속 흘렀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선오는 어느새 빨빨거리며 돌아다녔고 옹알이를 뗀 선예가 처음 아빠를 불렀을 때 심장이 멈출 뻔했다.

심쿵! 그건 뭔가 벅차오르는 환희다.

아장아장 걸어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올려다보면 저도 모르게 울컥한다. 갱년긴가? 요즘 눈물이 많아졌다. 우리 딸은 초슈퍼울트라퍽킹아메리칸우주대미녀가 될 상이다.

아내는 다시 바빠졌다.

육아를 위해 일을 그만두려고 했지만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았다. 날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내 아내를 찔러보는 걸까? 물론 강선아의 능력이 부족했다면 이뤄지기 힘든 거래긴 했다.

전업주부의 일상은 바쁘면서도 한가로웠다.

낮잠에 빠진 딸을 침대에 누이고 내려온 그는 냉장고를 뒤지던 불청객을 마주했다.


“엘렌?”

“예스. 보스.”


샌드위치를 입에 문 엘레나는 각 잡힌 경례를 해왔다.


“말도 없이 한국은 웬일이야?”

“보스가 보고 싶어서...”

“써니한테 이른다?”

“아앗!”


유부남한테 큰일 날 소릴 하네.

엘레나 화이트

그녀는 다시 CIA로 돌아갔다. 직장 욕할 때는 언제고 새 국장이 부르니까 쪼르르 복귀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에서 CIA로 복귀한 일라이자 레인은 당당히 국장 자리를 꿰찼다.

쿠데타로 볼 수 있는 파격인데 다들 수긍하고 넘어가는 분위기다. 엘레나는 신임 CIA 국장의 오른팔로서 과거 일라이자가 수행했던 미국과 주인공 사이를 오가는 업무를 맡았다.


“양쪽 다 한창 바쁠 때 아니야?”

“바쁘긴 해요.”


주인공은 현재 총수 승계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상택과 전쟁을 벌인 페이즈2가 삭제되다시피 했으니 주인공의 대한민국 장악은 거의 끝나간다고 봐도 무방했다.

성조에 내홍이 있긴 했지만 무시해도 될 수준이다.


“리 장군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리 장군이라면 이상택을 말했다.


“뭐가 문젠데?”

“활빈당 사건과 신한국 호텔 테러 이후 리는 암흑가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활빈당 사건 이후 테러청정국 딱지를 뗐다. 더구나 총기 테러는 총기안전국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냈다. 6, 70년대 공비가 침투하던 하 수상한 시절도 아닌데 서울 한복판에서 총질해댔으니 제대로 물먹은 것이다.

그래서 이상택은 하수인이 아닌 본인이 직접 총대를 메기로 선택했다.


“이제 국제파 뒤에 누가 있었는지 알 만한 사람은 압니다.”

“위험한 줄타기를 하시네. 노인네가.”


어둠의 실력자? 좋지. 문제는 익명에 숨지 못하면 언제 죽어 나갈지 장담할 수 없다. 이상택이 아니라 이상택 할아버지라도 눈먼 총알을 막을 재주는 없었다.


“남한 조폭은 야쿠자나 삼합회 같은 계보는 없지만 활빈당 사건 이후 신한국은 복수를 천명했고 막대한 자금을 풀어 암흑가를 헤집어놨습니다.”

“꼬리가 밟혔나?”

“진실은 몰라도 의심은 하고 있습니다.”


활빈당 사건의 진정한 배후는 국제파 보스 박성식, 아니 안현민이다. 그리고 사건의 여파는 죽었다고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한국과 함께 꽤 많은 재벌이 연대했습니다.”


총기안전국가이자 높은 치안 수준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재벌들의 경호 수준은 그리 과하지 않았다. 그런데 활빈당 사건을 계기로 대기업 산하 수많은 경호회사가 탄생했다.


“...성조의 의도가 들켰군.”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압도적인 무력 앞에 무너지죠.”


수십억 부자 위에는 수백억 부자가 있고 그 위는 수천억 부자가 있으며 또 그 위는 조만장자가 있다. 위에는 항상 더 위가 있다.

재벌 위에는 아무도 없을까?

군사정권이 끝난 이후 한국의 재벌들은 이제껏 그렇게 여겼지만 활빈당 사건을 통해 통렬하게 깨달았다.


“직업군인이나 경찰, 체육계 출신 경호원을 우대하지만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니 주먹 좀 쓴다는 양아치를 채용하는 경호회사도 많습니다.”


양아치가 괜히 양아치일까? 안 봐도 비디오다. 경호, 경비업계가 엄청나게 커지고 돈이 되니 개나 소나 간판을 걸었을 테고 알짜배기 인력은 이미 대기업이 선점했다.

그리고 인간이 집단을 형성하면 없던 자신감이 뿜뿜 뿜어져 나올 테니 허세력? 충만한 양아치들 습성상 반드시 사고를 쳤다.

활빈당 사건으로 추락했던 범죄율은 다시 치솟았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대기업형 남한마피아가 하나둘 자리 잡았습니다.”


경쟁이 과열됐다.

정부도 규제해야 한다는 것을 알긴 아는데 뒷배가 하나같이 재벌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더구나 활빈당 사건 이후 눈 돌아간 재벌끼리 손잡고 여론을 움직여 정부를 압박했다.

민간경찰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근래 남한은 국제무기시장의 큰손으로 꼽힙니다.”


무기는 꼭 총만 가리키지 않는다. 총을 제외하고도 많은 ‘무기’가 국제적으로 거래됐다. 페이즈2는 삭제되지 않았다. 안현민이 박성식이 되었듯 주인공과 이상택의 전쟁은 다른 방식으로 변형됐다.

이것도 이를테면 군비경쟁이다.

단순히 국방비를 쏟아붓는다고 군비경쟁이 아니라 민간이든 군이든 어디든 군수軍需에 투입되는 총합이 늘어나면 그 나라의 국방력은 올라간 셈이니까.

대한민국의 이런 급격한 군비 증가는 중국과 일본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제일 귀찮은 나라를 오해하게 했다.

바로 북한!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지만 그게 꼭 맞는 말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관이 전투적?으로 변하자 북한은 자연스럽게 압박당할 수밖에 없다.

한·중·일·북, 4개국의 물고 물리는 역사와 역학을 보자면 지나친 긴장의 끝은 별로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동북아시아의 불안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뭐?”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일까.

한·중·일·북, 4개국이 전쟁하든 똥을 싸든 알게 뭔가. 어차피 난 이제 한국인도 아닌데 말이다. 지오의 심드렁한 반응에 엘레나는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지만 모든 사람이 성공 지향적이진 않다. 애초에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달랐다. 더 높은 연봉, 더 좋은 차와 집, 더 예쁘고 잘생긴 배우자, 세간에 존경받는 명예는 참 좋은 것이다.

그리고 지오는 지금 충분히 만족했다. 더 많은 권력과 돈을 원하는 누구와는 다르다.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할 뿐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틈날 때마다 내 입장을 언급해왔다.

은퇴하고 싶다.

평온을 원한다.

근데 이 새끼들은 내 말을 개똥으로 알아듣는 것 같다. 다른 의도는 없음에도 하나같이 말을 꼬아서 해석했다. 다들 큰물에서 노는 걸 좋아할지 몰라도 난 나만의 작은 웅덩이가 좋다. 세계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보다 오늘 먹을 저녁 메뉴를 정하는 것에 더 신경 쓰였다.

일라이자 레인은 워커홀릭의 화신이고 난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애국자임은 분명했지만 권력 지향적이란 사실도 맞다. 자신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거나 이끌 수 있다고 믿는 부류. 엘레나 화이트는 권력 지향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역시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부류다.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이들은 분명 훌륭하지만 자기 이상과 어긋나는 세상을 볼 때 눈이 반쯤 돌아갔다. 한마디로 미쳐버린다는 뜻.

이상과 신념에 미친 연놈은 답도 없다.

CIA 앞잡이를 돌려보낸 지오는 은퇴 카운트다운을 밟는 중인 아리엘의 방문을 받았다. 이것들은 한국을 미국 옆에 붙은 동네로 착각하는 게 아닐까?


“여.”

“멀리도 찾아와서 반갑긴 한데... 보자. 얼굴은 좋네. 그러니 진즉 은퇴하라니까.”


암이 노환으로 불리게 된 세상, 정력적으로 일하던 아리엘은 간암으로 고생했고 결국 은퇴를 결심했다. 뭐 수술을 잘했다니 앞으로 20년은 너끈히 살겠지만.


“샌디는?”

“로스쿨 포럼이 있다고 뉴욕에 갔어.”

“뉴욕 크레센트 말이군.”


샌디, 산드라 윤 그러니까 윤소정은 아리엘의 후계자 수업을 받는 중이다. 이수영과 이수현도 할리우드에서 나름 입지를 굳혔다. 확고한 주연급은 아니지만 아시안 여배우 하면 윤소희와 더불어 제일 먼저 거론됐다.

그녀들이 속한 SNK는 여전히 거대한 에이전시다.

근래 아리엘의 은퇴 발표로 논란이 일었지만 일라이자 레인에 버금가는 워커홀릭이니 은퇴한다고 일에서 완전 손 떼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은퇴가 맞나?

윤소정은 현재 로스쿨을 다녔다.

아리엘의 추천도 있었고 미국에서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싶다면 변호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 편했다. 아리엘도 거물 변호사고 SNK 법무팀 자체가 여느 로펌에 뒤지지 않는 규모니까.


“조만간 로빈이 결혼을 발표할 거야.”

“애슐리랑?”

“어.”

“또 누가 말썽인데?”


결혼을 발표하는 거야 저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그거 하나 말하자고 아리엘이 직접 태평양을 넘어올 리 없었다.


“옛 애인들?”

“여자들은 아니겠고... 남자새끼들?”

“좀 그렇긴 하지.”


가끔 잊곤 하는데 일리야 로빈은 양성애자였다.

세상이 알면 놀라 자빠질 비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건 기독교적 윤리관에선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이 커밍아웃에 관대하다고? 개소리다. 진보의 상징인 성소수자의 대우가 얼마큼 열악한지 알면 미국이 진보적이라는 말은 쏙 들어갈 것이다.

정치의 이중잣대와 저열한 속성을 안다면 결코 정의를 입에 올릴 수 없다. 우린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누군가 날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자 위선자다.

세상은 인간의 숫자만큼 계층이 나뉘고 더 위와 더 아래는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분화됐다. 개인과 집단, 개인이 집단에 경도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순리다. 그러나 집단의 의지를 투영하는 건 그 집단이 표방한 대의라기보단 집단의 꼭대기에 앉은 소수의 리더였다.

웃기지 않은가?

크게는 국가와 민족 작게는 동네와 이웃이 속한 집단의 나아갈 방향 혹은 대의를 소수의 몇 명이 결정했다. 민주주의는 지오가 아는 한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거짓말이었다.

대의민주주의?

세상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평범한 계층의 사람들이 최고권력층의 행동과 사상, 목적을 안다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개소리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것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전혀 다른 풍경이다.


“워싱턴에서 충고하더군. 조만간 미국에서 큰 스캔들이 터질 거라고. 그리고 그놈의 국익을 위해 이쪽을 이용할 거라고.”


톱스타 스캔들로 뭔가를 덮는 건 한국에서만 쓰는 방법이 아니다. 도리어 원조는 미국이다.


“예상 피해는?”

“돈은 중요하지 않아.”

“로빈은 알아?”

“모르지.”


정작 당사자는 모른다. 아마 아리엘쯤 되는 인물이니 미리 정보를 얻었으리라. 다른 에이전트나 톱스타는 왜 당하는지도 모르고 스캔들에 휘말렸을 것이다.


“로비로 해결할 수 없어?”

“힘들어. 백악관에서 나온 소스거든.”

“기다려봐.”


지오는 폰을 들고 정원으로 나와 통화하는 척했다.


-뭔데?

-장군들의 대규모 항명사탭니다.

-쿠데타야?

-버금가는 상황입니다.

-왜?

-대통령 직속 인권위원회가 군 내부를 들쑤셨거든요. 군 내부에서 여전히 자행되는 여러 비인간적, 비윤리적 행태를 대대적으로 고발한 겁니다. 살인, 강간, 윤간, 스토킹, 군납비리, 폭행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력범죄를 은폐하고 축소한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선진국 군대는 시발!

정치군인이 워싱턴D.C.를 버젓이 활보하는 곳이 미합중국 군대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알겠지만 그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집단이다. 사관학교에서 집단강간이 일어나도 쉬쉬하는 곳인데 어련할까.

약육강식!

군인은 어디든 어떤 상황이든 강해야 한다는 것이 모토인데 약자를 배려할 리 없다. 아! 미디어에선 배려할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약한 것은 죄악으로 치부되는 곳이다.

명예와 헌신? 좆까! 임무 성공이 전부다.

할리우드 전쟁영화를 보고 많이 오해하는데 전쟁은 전쟁이고 살육과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인권 따윈 없다. 국제법과 교전수칙을 자주 언급하지만 당장 죽게 생겼는데 알게 뭔가? 실제 적보다 아군에게 죽는 경우도 많다.

AI 보조를 받는 제국군에서도 사고가 터졌는데 인간끼리 모인 미군에서 사고가 안 터질 리 없다. 그리고 장군쯤 되면 그냥 정치인으로 봐도 무방했다.

정치인은 거짓말이 패시브다.


-그건 말단의 관점입니까? J.

-시발! 그래! 나 장교 짬찌다! 짬찌!


사병으로 입대했던 지오는 부사관을 거쳐 마지막은 공훈을 인정받아 장교를 하긴 했다. 물론 하루에 불과했지만.


-지금 대통령이 누구지?

-투표했잖아요?

-몰라.


육아에 바빠 누굴 찍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찰스 멀리건입니다.

-엥? 익숙한 이름인데?

-애너하임 코퍼레이션.

-아! 제시카 멀리건.


제시카 멀리건

몇 년 전 동남아시아에서 실종됐던 CIA 요원이자 애너하임 코퍼레이션 오너를 부친으로 두었다.


-원래 대통령이 됐었나?

-변수죠.

-왜?

-시나리오상 애너하임 코퍼레이션은 다크 사이드에 의해서 무너져야 했습니다. 근데 당신이 캘리포니아에서 암약해야 할 추종자들을 뿌리 뽑아버렸으니...


미인계와 그 약점으로 캘리포니아 정·관계를 주물렀어야 할 다크 사이드는 날개를 펴기도 전에 망했다. 현재 그들의 사업은 제프리 하그리브스가 이어받아 성황 중이다.

제프리 하그리브스!

로스앤젤레스의 새 나이트 킹!


-찰스 멀리건이 대통령까지 올라갈 인재였어?

-시기가 좋았습니다.

-기업인 출신 대통령이 군부와 마찰을 일으킨다? 왠지 내막이 있어 뵈는데.

-백악관 주인이 되기까지 그를 지지한 세력은 진보적인 성향이 짙습니다. 더구나 기브 앤 테이크를 지키지 않으면 국정을 운영할 수 없습니다.

-로빈을 이용하겠다는 계획은 어디서 나온 거야?

-웨스트윙입니다.

-비서실 누구?


망막디스플레이에 프로필이 떴다.

해리 덩컨-브루스

비서실 소속 정책자문관이다.


-로빈이 주인공의 절친인 걸 몰라?

-비서실장의 재가를 받지 않은 독단입니다.


섹스경쟁?을 벌일지라도 겉으로 보기엔 일리야 로빈은 주인공의 절친이다. 벨리알 주변을 건드리는 건 백악관도 쉽지 않았다.

일단은 통화를 끝낸 척 아리엘과 마주 앉았다.


“해리 덩컨 브루스, 알아?”

“해리 덩컨 브루스?”

“백악관 정책자문관이라더군.”

“...”

“짚이는 바가 있나?”

“음. 그의 아들을 알지. 바비 폭스, 본명은 딜런 웨스트.”

“뭐하는 친군데?”

“약물과용으로 사망한 배우 기억해? 뉴스가 크게 났지.”

“아.”


두 달 전쯤 뉴스로 본 것 같다.


“웨스트는 모친의 성이야. 바비가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했거든.”

“내 기억으론... 니 배우는 아니잖아?”

“캐시가 데리고 있었지. 캐시 브라운이라고 내 밑에 있다 독립한 에이전트야. 그 일이 있고 캐시는... 은퇴했지. 경찰은 그냥 흔한 약물 사고로 판단했는데... 그 부친은 달랐어. 자기 아들은 마약 따윈 안 한다고 믿었으니까.”


LAPD에 부검을 요청했지만 거부됐다.

백악관 정책자문관이 막강한 파워를 가졌어도 로컬폴리스를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그는 온 인맥을 동원해 로스앤젤레스 경찰이 부검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했다.


“부검은... 타살 징후는 발견되지 않아 그대로 종결됐지.”

“여전히 믿지 않겠군?”

“사립탐정을 고용했단 소식은 들었어.”

“그가 로빈을 미워할 이유가 있어?”

“...”

“여자 문제?”

“...스테이시는 원래 바비의 애인이었어.”

“하하.”

“그건 그냥 비즈니스였어.”


일리야 로빈의 전前 여자친구 스테이시 휘트먼은 잘나가는 남자를 갈아타며 본인의 인지도를 높이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꽃뱀?이다.


“복수네.”

“대상이 잘못된 거 아니야? 그건 그냥... 비즈니스였다고.”


내 알빠노! 로빈뿐만 아니라 스테이시도 살생부에 올랐으리라.


“보스한테 전화해.”

“자네 힘으론 안 돼?”

“오! 아리엘, 아리. 백악관이라고 백악관.”


물론 나도 방법은 많다.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G의 능력은 누구도 추적 불가능하니까. 그러나 백악관을 떠나도 해리 덩컨-브루스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지오는 복수에 눈 돌아간 아빠랑 싸우고 싶지 않았다.

나도 아빠니까.

내 새끼가 그렇게 죽었다? 난 아마 더 지독할 거다.


“미스터 브루스는 멈추지 않아.”


바비 폭스, 아니 딜런 웨스트는 약물과용으로 죽었다.

거기에는 어떤 음모나 은폐, 조작도 없다. 그 진실을 받아들이게 만들려면 대통령쯤 되는 인물의 보증이 필요했다. 이쪽에서 아무리 진실을 외쳐봐야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식을 잃고 눈 돌아간 부모를 누가 말릴까.

지오는 아리엘을 배웅했다.


‘주인공놈이 알아서 하겠지.’


제 절친인데 설마 못 본 척할까.


-J.

-응?


지오는 이제 슬슬 잠에서 깰 딸내미의 간식을 준비했다.


-바비 폭스는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오레오 봉지를 뜯던 손이 멈췄다.


-약물과용은 맞지만 자의는 아니었습니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분명 맹목적이지만 어떨 때는 소름 끼치도록 예민하고 정확했다.


-딜런 웨스트는 살해당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옳았다.

망할!

******




어느 날 갑자기 윤소희의 열애스캔들이 떴다.

[윤소희는 지금 열애 중?

-...톱스타 윤소희의 남자는 누구일까? 본지는 그녀의 잦은 미국행에 의문을 가지고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윤소희의 남자가 미국인이란 점과 그 남자가 유부남이란 것이다. 그렇다. 윤소희는 불륜을 저지르는 중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둘 사이엔 아이까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지는 또 하나의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 아시아를 넘어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한 톱스타가 유부남과 불륜을 저질러야 했을까? 거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우린 그녀의 과거에 주목했다...

...갑작스러운 장 대표의 실각과 함께 성조그룹의 PnC 합병에는 대중이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닐까? PnC라는 연예계 대표기업을 일군 장범수는 어째서 애지중지한 회사를 넘길 수밖에 없었을까? 본지는 당시 알게 모르게 퍼진 루머를 수소문했다. 그건 바로 경일그룹과 장 대표의 수상한 유착관계다...

...경일그룹, 이제는 껍데기만 남은 그 회사는 어쩌다 대기업의 위상과 지위를 잃고 추락했을까? 한때 방송가는 경일이 장악했다는 공공연한 말이 돌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경일그룹은 몰락했고 이젠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찢겼다...

...자살한 강승언 대표는 어떨까? 잘나가던 연예제작자, 강솔미디어는 경일만큼은 아니어도 미디어콘텐츠 분야의 공룡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연쇄살인이 발각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왜? 부와 권력을 쥔 그는 연쇄살인범이 돼야 했나?

...윤소희는 대한민국대표미녀다. 아름다운 꽃에 벌이 꼬이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경국지색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윤소희를 향한 남자들의 구애는 열렬했고 격렬한 경쟁은 대기업을 무너뜨릴 만큼 엄청났을지도 몰랐다. 이제껏 속 시원히 밝혀진 열애스캔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 봐도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는 이들이 얼마큼 강력한 부와 권력을 가졌는지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소희의 선택을 받은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사실대로 밝히면 윤소희의 불륜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본지는 지난 몇 년 간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사고에 그녀가 깊게 관련됐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맞다. 이 거짓주장은 대중의 관심을 모으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음을 인정하겠다...

...대한민국의 다른 이름은 재벌공화국이다. 국민들이 외면한 진실, 법 위에 선 재벌의 무소불위한 특권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었고 세월이 흐를수록 기득권은 더욱더 견고해졌다...

...활빈당 사건을 보라. 그건 민중의 마지막 발악이자 비명이었다. 못 가진 자가 가진 자를 상대로 벌이는 최후의 저항, 내 두 팔과 두 다리로 세상에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다...

...나는 고발한다. 망가진 제도와 그것을 알면서도 수수방관하는 정치인, 지식인, 기업인 그리고 이기적인 국민을. 시스템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부패와 비리, 구태의연함이 나라를 좀먹고 있다.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 우리나라는 지금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제 더 지체할 여유도 시간도 없다...

...나는 제안한다.

이제 필요한 건 온건한 개혁 따위가 아니다.

우리는 당장 혁명이 필]


띠링-


모니터 구석에 뜬 메시지창 때문에 키보드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한채원의 손이 멈췄다.


→멈춰.

→누구?

→J


한채원의 눈동자가 커졌다.

J? 에이전트 J

그녀를 강승언에게 인도했던 의문의 해커.


→뭘 멈추라는 거지?

→지금 쓰고 있는 거 말이야. 윤소희로 어그로를 끄는 전략은... 그만둬.

→윤소희가 관계자란 걸 인정하는 건가?

→그녀는 태풍에 휩쓸린 피해자일 뿐이야.

→피해자? 아니, 맘만 먹었으면 진실을 폭로한 제보자가 될 수도 있었어.

→그거야말로 이기적인 개소리. 누굴 위해? 너를 위해? 아니면 나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서란 위선은 아니겠지?

→윤소희도 너도 범죄를 방조했어.

→박재우를 말하고 싶은 거면 그야말로 인과응보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박재우는 살인자야. 그것도 연쇄살인범, 그걸 성조에서 이창군을 이용해 묻어버린 거지. 맞지?

→서로 원하는 걸 얻었지. 이창군은 복수를 성조는... 조직의 평화를.


시한부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창군은 통쾌하게 복수했고 성조그룹은 연쇄살인범이 한때는 본인들 얼굴이었다는 진실을 조용히 묻어버렸다.

박재우는?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로 기억됐고 유족도 연쇄살인범의 가족이란 굴레를 쓰지 않았다. 죽은 박재우만 환장할 노릇이지 나름 해피엔딩이다.


→그럼 정의는?

→정의? 넌 설마 세상 모두가 올곧은 정의를 갈구한다고 믿어? 그리 믿는다면 그냥 접싯물에 코 박고 죽는 걸 추천해.


상대의 냉소에 한채원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당신은 악인가?

→넌 진짜... 안 되겠다. 기다려.


메시지창이 일방적으로 사라지고 불과 수십 초 후에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채원은 소름이 돋았다. 왜냐면 그녀의 등 뒤는 창문밖에 없고 여기는 12층이기 때문이다.

한채원은 인기척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상황이 믿기 힘들지만.


‘정말 초능력자야?’


그냥 해커로 보기엔 상대의 능력이 너무나 출중했다.


“저스티스?”

“그냥 제이로 불러.”


상대는 제집 안방인 듯 소파에 앉았다.

한채원은 그제야 오랜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남자다. 그것도 건장한 남자였다. 나이는 서른과 마흔 사이, 정확히는 모르겠다. 얼굴을 가릴 줄 알았는데 시원하게 오픈해서 진심으로 놀랐다.


“오... 지오?”

“못 알아보진 않네.”


당연히 알아보겠지.

가짜뉴스로 날 엿 먹이려 했으니까.

한채원 눈앞에 있는 남자는 대중의 어그로를 끌기 위해 윤소희와 엮으려던 거짓내연남이다. 그녀가 미국으로 취재를 간 건 진짜고 LA에서 이웃집을 밥 먹듯 들락거리는 윤소희를 확인한 것도 사실이다.

단지 불륜은 없었다.


“이봐. 한 경감님. 아니, 이제 한 변호산가? 아니다. 아니야. 넌 그냥 한 씨나 해라. 어이, 한 씨.”


지오는 짜증이 올라왔다.

불륜스캔들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는 G의 경고에 부리나케 달려왔는데 가짜뉴스 생산자가 다름 아닌 한채원. 이쯤 되면 얘는 히로인 후보가 아니라 평지풍파를 몰고 다니는 빌런이다. 빌런.


“피곤하게 살지 말자. 나도 당신도 할 만큼 했잖아?”


정의를 추구하는 공명정대한 히로인 후보.

설정할 땐 재밌었는데 이게 막상 작용하는 걸 보니 여간 피곤한 성격이 아니었다. 신념 있는 또라이는 적보다 더 귀찮다. 이걸 쓱싹 해치울 수도 없고.


“당신이 정말 저스티스라고?”

“믿으면 복이 와요. 복이.”

“...완전히 성조에 놀아난 꼴이네.”

“오해하진 마. 성조랑 그렇게 깊은 사이는 아니야. 서로 이익을 위해 거래하지. 수평적인 관계랄까.”

“사외이사면서 같은 편이 아니라고?”

“주식은 안 샀거든.”


주가에 일희일비하는 주주는 아니니 성조 입장을 대변할 필욘 없었다.


“증명해봐.”

“뭘?”

“당신이 성조랑 깊은 관계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나는 정의를 원해.”


이 정도면 정의병? 말기환자다.


“당신이 협력해줬으면 좋겠어.”

“누굴 처넣고 싶은데?”

“오지오.”

“나?”

“당신 말고.”


지오는 진지하게 한채원의 눈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어? 눈이 완전 맛이 갔다.

이거 진짜 흑화한 거 같은데?


“성조 부회장?”

“그 작자를 법정에 세우고 말겠어.”

“어떤 미친 검사가 그를 기소해? 제정신이면 그럴 리.”


지오는 말을 중간에 끊었다.


-한중겸 요즘 뭐해?

-현 법무부 장관이 한중겸입니다.

-와우!


요건 몰랐네.


-부녀 사이는 나빠진 게 아니었나?

-본인들의 적을 상대하려면 동맹이 필요하죠.

-적?

-한채원은 박재우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려고 합니다. 한중겸은 자신을 궁지로 몬 정적에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누구?

-현 대통령입니다.

-다들 스케일이 어마무시하구먼!


딸은 대한민국 최고재벌, 아비는 대한민국 최고권력자를 상대로 혈전을 준비 중이라니 이걸 응원할지 말려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근데 장관은 대통령이 지명하는 거 아니야?

-대통령이 지명하죠.

-다들 제정신이 아닌가봐. 정적을 장관에 그것도 법무부 장관에 지명하다니.

-정치는 타협의 결과물이니까요.


선거철엔 죽일 듯이 달려들어도 끝나면 서로 으쌰으쌰!하는 것이 정치인이었다. 청문회에선 멱살 잡고 싸운 국회의원끼리 사돈인 경우도 있고 한 다리 건너면 친척에 동문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따지고 보면 정의병 말기환자인 한채원도 이 나라의 단단한 기득권층 가운데 한 명이다.


-한채원이야 설정이 그랬다고 쳐. 한중겸은 왜 그래?

-대선 실패가 큰 충격이었나봅니다.

-하긴 원래 청와대 주인이 됐어야 할 사람이지.


한중겸은 절대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치재능과 권력욕이 없다면 애초에 국회의원을 몇 번이나 해먹을 리 없으니까.


-한채원이 성조저격수로 나서면 이택기의 반응은 어떨까?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최악의 경우 제거될 겁니다.


주인공의 예스맨 젠슨 리는 보스를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다. 암살? 아이는 몰라도 여자를 죽이는데 죄책감 따윈 없으리라. 이택기는 그렇게 설정된 캐릭터다.

어디서부터 일그러졌을까.

죽었어야 할 윤소희가 살았을 때부터? 아니면 아들의 죽음(이종천은 죽지 않았다)으로 미쳐버렸어야 할 이상택이 멀쩡해서? 이야기는 이미 어그러질 때로 어그러졌다.


“왜 그렇게까지 해? 도대체 왜?”

“그게 옳으니까. 상대가 누구든 원칙이 무너져선 안 돼.”

“원칙? 그걸 누가 정해? 너 뭐 돼? 넌 아무것도 아니야. 니 부친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주제 뭘 정하는데.”

“...”

“사람은 죽어. 어디서든 어떻게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은 죽어나가. 활빈당을 예로 들까? 국민의 반은 그들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나머지는 살인자로 혐오해. 넌 그걸 민중의 마지막 발악이자 비명이라고 말했어.”


분명 법과 원칙이 금하는 복수를 행했다.


“우리사회는 대상이 악인이라도 사적 제재를 허용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 좀 솔직해져볼까? 그날 호텔에서 일어난 끔찍한 처형식에 대중은 도리어 환호했지.”


그 죽음을 보며 사람들은 열광했다.

이용하라고 만든 법을 잘 이용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온 악질이 어디 그들뿐일까? 냉소적인 지식인은 법이 있는 자만 대변한다고 비판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법은 있는 자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자가 법을 잘 이용하는 것뿐. 법은 그저 도구에 불과했다.


“네가 방금 쓰던 글 중 하나는 동의해.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시스템은 어딘가 망가졌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높은 시민의식의 함양은 단순히 고학력자가 많거나 문맹률이 낮다고 달성하는 목표가 아니다. 그건 지식이 아닌 지혜의 영역이며 오랜 사유와 통찰 없이는 도달할 수 없었다.

대의代議와 함의含意, 철학적인 사고가 단순히 많이 배운다고 가능할까? 카페에 놓인 타인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고 시민의식이 높은 걸까? 늦은 시간에 골목을 거닐 수 있다고 안전한 나라일까?


“너는 지금 착각하고 있어. 한 씨. 넌 네 입으로 이 나라의 시스템이 망가져 작동하지 않는다고 떠들면서 그 망가진 시스템에 의지해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잖아.”


망가진 시스템의 정의는 과연 온전한가?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미국에서 보고 느낀 게 뭔 줄 알아?”


한국인의 정서가 없는 내가 미국인이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생활의 첫인상은 그리 좋진 않았다.


“세계최강대국, 최강대국 그러니까 뭔가 대단할 줄 알았는데 막상 살아보니 존나 실망했어.”


관공서의 서류작업도 존나 느리고 짭새도 처음엔 내가 아시안이라고 존나 차별했다. 만나는 사람도 열에 일곱은 존나 멍청했고 심지어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병신도 많았다.


“근데 신기하게도 어떻게든 나라는 굴러가.”


뭔가 존나 멍청하고 이상한 병신이 넘쳐나는데 국정은 나름 잘 돌아가는 듯싶다. 그리고 미국은 세계최강대국이 맞다.


“어떻게 그러냐고? 왜냐면 거긴 어설프게 태업하고 남을 괴롭혔다간 진짜 뒤지거든.”


음주운전? 최소 5년에서 10년형이다.

마약 빨고 강간? 최소 15년이나 무기징역이다.

학교폭력? 형사미성년자든 아니든 개망신 확정이다.

고소와 고발의 나라 미국에서 법을 개좆같이 알았다간 진짜 개좆같은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다. 뭐 변호사 빵빵하게 써서 징역을 피해갈 순 있지만 성난 피해자의 샷건도 피할 수 있을까?

미국에서 법이 만능이 아닌 이유는 시민불복종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활발한 덕분이다. 자기 빼고 모든 게 불만인 프렌치 이상으로 양키 역시 반골DNA로 가득했다.


“대한민국은 너무 평화로워서 잘못했다간 뒤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없어. 그러니까 남을 쉽게 등쳐먹는 거지. 괴롭히고 모함하고 속이고 억지를 부려.”


한국에서 예의를 차리는 이유와 미국에서 예의를 차리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야 많은 교육 덕분에 예의가 학습된 거고 미국에선 예의 없이 굴었다간 진짜 뒤질 수도 있다.

그 공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한 거다.


“미국에서도 총기사고는 잘 일어나지 않아. 근데 한번 일어나면 누군가는 확실히 뒤지지. 그나마 국가시스템이 돌아가는 건 사명감? 자부심? 그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살고 싶다는 생존본능이야.”


미국이 지역 커뮤니티를 강조하고 여러 이웃집과 친하게 지내는 건 생존본능 때문이다. 어떤 위험이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니 주위를 철저하게 경계하는 것이다.

이건 사회활동으로 포장된 일종의 자경행위다.


“어이, 한 씨. 잘 들어. 부회장은 법정에 서지 않아. 네 앞에서 사람을 쏴 죽여도 그를 법정에 세우는 건 불가능해.”


주인공이 쌓은 인맥의 정점들. 이 친절한 이웃들은 온 세계의 권력을 움직일 힘이 있고 한채원 따위야 벌레 잡듯 밟아죽일 수 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내가 이미 한번 살려줬어. 널.”


국제파 보스 박성식, 아니 안현민 뒤를 캐던 한채원을 은폐하지 않았으면 벌써 골로 갔을 것이다.


“두 번은 없어. 그리고 다음에 널 찾는 사람은 내가 아닐 거야.”


이래도 알아듣지 못하면 그녀의 운명도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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