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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지오 디 오리진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0.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3.04.2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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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4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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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지오 디 오리진 -69화-

DUMMY

영화나 드라마에서 신데렐라가 잘 팔리는 이유는 명확했다.

남녀노소 누구든 일확천금이 최고니까.

로또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손에 쥔 행운을 싫어한다고? 그건 미친놈이거나 모자란 것이다. 물론 분에 넘치는 부와 권력, 인기를 얻은 후 정신없이 휘둘리다 패가망신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고 없이 다가온 행운은 마찬가지로 아무도 모르게 멀어졌다. 하지만, 제일 큰 바보는 자기 손에 쥔 것이 행운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바이탈은 안정됐습니다. 오래지 않아 깨어날 겁니다.”


지오가 성조의료원을 방문하자 병원장이 직접 한유현의 상태를 브리핑했다. 이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성조 본가나 직계로 착각했다.

굳이 정정해줄 맘은 없었다.


“혼자 있고 싶네요.”

“네. 그럼.”


이곳은 중환자실이 아니라 VVIP 특실이었다.

붕대를 싸맨 한유현을 내려다보았다.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오길강이 연락하기 전에는 떠올린 적도 없는 얼굴이다.


-명함을... 왜 안 썼을까?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한국에선 명함은 딱히 중요한 의미가 아니니까요.


이름과 폰넘버, E메일이 적힌 단출한 종잇조각이지만 내 개인명함은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바보 녀석.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은 나도 멍청이다.

똑똑-

병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두 사람이다.

과거 그가 구해줬던 윤가영의 가출팸, 근데 정작 윤가영 본인은 보이지 않는다.


“한희주, 이명준?”

“네. 안녕하셨어요. 아저, 오빠.”


아저씨라고 부르려다 황급히 오빠로 바꿨다.


“왜 둘뿐이지?”

“...”


윤가영을 빼더라도 더 많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금방 이해했다. 보육원 출신이란 과거를 지우고 싶으니 연락해도 안 받을 가능성이 있다. 걔들은 내 명함을 이미 버렸을지도 모른다.


“가영이는...”

“알아.”

“아세요?”

“내가 정말 너희한테 관심이 없다고 믿었어?”


사실 관심은 없었지만 진실을 말하는 건 역효과다. 한희주는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가수의 꿈을 꾸는 중이고 이명준은 카센터에서 잔심부름하며 기술자를 꿈꿨다.

윤가영은... 걔는 그냥 똥멍청이다.


-돈 많은 늙은이를 꾀어 유산을 상속받는다? 그게 정말 가능하리라 믿은 건가...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돈이 많은 건 돈이 많은 이유가 있고 부자는 하나같이 다 지독한 인간이다. 가난이 한이 돼 돈의 망령이 된 윤가영은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이용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물론 윤가영이 광화문에서 스트립쇼를 하든 말든 나랑은 관계없다. 내 명함을 버린 순간 우리 관계는 끝났으니까. 그러나 누군가 우리 사이를 알고 이용할 계획이면 큰 문제가 된다.


-최치수는 사용자를 적대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럼?

-약간 곤란한 정도?


영천그룹 주기영 회장과 관련해 경고했는데 그게 그리 기분이 나빴나?


-더 기분 나쁘게 해줘야겠네.

-...

-왜?

-달래는 게 아니라요?

-썩을 늙은이가 뭐가 예뻐서?


기분 나쁘다는 맘을 못 먹게 아예 대가리를 깨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뚝배기!


“한희주. 너 소속사 없지?”

“네? 네. 없어요.”


지오는 폰을 들어 안현진 PnC 엔터테인먼트 대표에게 전화했다.


“누나, 나야. 어. 나 지금 한국. 응. 응. 아니, 선아랑 선오는 미국. 응. 어. 알았어. 내일 중으로 찾아갈게. 아, 부탁이 있어. 지망생 하나 봐줘. 응. 맞아. 청탁이야. 실력? 실력 있지.”


노래를 잘 부르니 가수를 꿈꾸지 않을까? 믿는다. 한희주.


“알았어. 내일 데려갈게. 응. 내일 봐.”


폰을 내린 지오는 한희주를 바라봤다.


“내일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딜요?”

“피앤씨.”

“피앤씨요? 피앤씨! 정말 피앤씨? 헙!”


한희주는 비명처럼 외치다 여기가 병원인 줄 인식하곤 자기 입을 막았다.


“내일 안현진 대표랑 만날 거야. 안현진이 누군지는 알지?”

“헉!”


놀라 기절할 것만 같은 얼굴이다.


“명준이 넌 하고 싶은 게 뭐야?”

“저요? 저는...”


이명준은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평생 볼 일 없는 VVIP 특실도 들어와 보고 과거 자길 구해줬던 형이 엄청난 사람이란 사실을 되새겼다. 그 덕분에 보육원 애들은 미국 땅도 밟아봤다는 얘긴 들었는데 솔직히 큰 감흥은 없었다.

방금까진 말이다.


“저는...”


자동차 수리를 배우려는 건 먹고살기 위해서다. 내 꿈은?


“공부하고 싶어요.”

“공부?”

“그냥 책이 좋아서...”


이명준은 딱 봐도 모범생 스타일이다.

옛날엔 왜 가출했을까 싶지만 틴에이저는 패거리에 휩쓸리기 쉽다. 윤가영은 여왕벌이고 이명준은 평범한 일벌이다.


“공부해. 학비랑 생활비는 내가 줄게.”

“어, 어... 그래도 될까요?”

“사내새끼가 고개 좀 들고 허리 펴! 이럴 땐 그냥 뻔뻔하게 나가는 거여. 알간?”

“윽!”


지오는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이명준의 등을 손바닥으로 쳤다.


“희주 너도 레슨비든 생활비든 뭐든 줄 테니 알바는 관둬.”

“넵!”


한희주는 눈치 보는 이명준과 달리 생글생글 웃었다.


“단!”


조건 없이 퍼주는 건 아니다.


“오늘 오지 않은 애들이랑 연을 끊어.”

“알았어.”

“어...”


단박에 답하는 한희주와 달리 이명준은 말끝을 흐렸다. 지오는 꿀밤을 먹였다.


“악!”

“대답.”

“네? 네, 넵!”


연을 끊으라고 했지만 그리 쉽게 끊어지진 않을 것이다. 한희주와 이명준이 호구? 하나를 문 걸 알면 뭐 얻어먹을 게 없을까 기웃거릴 것은 뻔했다.

그러라고 이러는 거니까.


-굳이 불필요한 공작을 벌일 필요가 있습니까?


한희주와 이명준을 후원하는 걸 G는 이해하지 못했다. 대단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둘을 키워 한 사람 몫을 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윤가영 때문에 최치수를 찾아가는 건 그 영감탱이가 원하는 바야. 보육원 원생 출신을 이용해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건지도 몰라.

-최치수를 응징하고 싶다면 방법은 많습니다.

-알아. 하지만, 넌 너무 치트키라고.


노인네를 보내버리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다.


-종천이에게 일을 맡겨볼까 해.

-최치수를 말입니까?

-한희주와 이명준 그리고 한유현.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지켜볼 생각이군요.

-정보는 곧 사람이니까.


앞으로 이종천이 배워야 할 지식은 교과서에는 없었다.


-만약 녀석이 톱에 설 자질이 없으면 계획을 바꿔야 해.


원래 이종천은 이상철의 각성을 위한 제물에 불과했고 다른 캐릭터 설정 따윈 없다. 이 세계를 창조한 지오에게도 완벽한 미지였다.

한희주와 이명준에게 사람을 붙였는데 둘은 오늘 인생의 전환점을 돌아 환골탈태할 것이다. 후원하려면 화끈하게 해야지. 한희주와 이명준은 오늘 자본주의를 제대로 맛보게 되리라.

정장을 빼입은 이종천은 그동안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바라던 대로 샤프해졌다. 미남은 과분하고 훈남은 된다. 에밀리야가 좋아할 스타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의 취향은 제각각이다.


“힘드냐?”

“안 힘든 일이 있을까.”

“그러게 왜 사서 고생이야. 세상에 여자가 반이다?”

“...에밀리는?”

“걱정하지 마. 애인은 없어. 아직은.”


언제까지 남자친구를 안 사귈지는 에밀리야 본인만 안다.


“내가... 잘못하는 걸까?”

“왜? 사랑이 식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이래서는 빠르게 목표를 달성할 수 없어. 에밀리 앞에서 당당해지려면 10년도 모자라.”

“전에 말했지. 넌 회장님과는 다르다고.”

“그 말을 했을 때 형이 날 깔본다고 생각했었어.”

“널 깔본 적은 없어. 종천아. 넌 회장님과 같은 코스를 밟아선 에밀리에게 닿을 수 없을 거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거든.”

“그럼 어쩌지?”

“한국에선 죽도 밥도 안 돼. 할 거면 미국에서 시작해. 내가 도와줄게.”

“형이?”

“에밀리가 제일 믿는 사람이 누굴까?”

“...형.”

“맞아. 나야. 왜? 그 애가 필요한 걸 해줄 능력이 있어.”


제너럴 코르센코를 추종했던 가신들은 에밀리야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녀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부친을 죽게 놔둔 그들을 무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코쉬 대주주로서 에밀리야가 내려야 할 수많은 결정에 조언하는 것이 지오의 업무였다. 뭐 대부분은 지오의 목소리를 변조하고 3D 모델링으로 얼굴을 위장한 G가 폰이나 화상회의를 통해 조언했다.

그녀는 내게 도움을 받는다고 철석같이 믿겠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거다. 종천아.”

“아버지에겐 뭐라고 하지?”

“당당하게 나가. 안 되면 내 이름을 팔든가.”

“고마워. 형.”


결심을 굳힌 이종천은 자리를 박차고 떠나갔다. 올 때는 축 처졌던 등이 갈 때는 곧게 펴졌다.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 사랑은 역시 없던 용기도 북돋는다.

아내에게 한국 일정을 보고하고 액정 너머 아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긴 하루를 마무리했다.

Good night!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지오가 모닝커피를 즐기는 동안 하루 사이에 환골탈태한 한희주가 찾아왔다.


“짜짠! 나 어때?”

“돈을... 아주 처바르셨구먼. 처발랐어.”


백화점과 미용실, 피부과와 에스테틱을 풀코스로 내달린 한희주는 꽤 봐줄 만하게 변신했다. 존나 비싼 옷과 더 비싼 화장품, 존나 비싼 액세서리와 더 비싼 핸드백으로 중무장한 그녀의 몸에 값을 매기면 억 단위는 그냥 뚫지 않을까.


“신용카드 받았어?”

“응.”

“연계된 계좌로 한 달에 천만 원씩 입금될 거야. 이미 천만 원이 들었으니 이번 달은 그걸 쓰고. 아, 너 쓰던 원래 계좌도 그쪽으로 옮겨.”

“응.”

“집은... 아파트로 할래?”

“아파트도... 돼?”

“어제도 말했지만 그냥 뻔뻔하게 나가. 당당하게! 맑게! 자신 있게!”

“아파트로 할래.”

“Good. 강남 쪽으로 알아보마.”


한희주는 안 믿긴다는 표정이다. 아무리 대범하고 영악해도 밑바닥 출신은 어쩔 수가 없다. 돈지랄에 익숙해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름이?”

“채서윤입니다. 이사님.”


한희주에게 붙인 사람은 천나래의 소개를 받았다. 아마 전미란을 모시는 고애란의 수하 중 한 명일 것이다.


“당분간 고생해줘요. 서윤 씨. 노파심에 말하지만 불륜 같은 건 아닙니다. 위에 잘 좀 말해줘요.”


혹시나 오해하면 곤란했다.

한희주보다 요구가 적은 이명준은 숙소를 옮기고 학비와 생활비를 보조하는 것이 전부였다. 녀석은 정말 책을 좋아했다.


“갈까?”

“으, 떨려.”


오늘 만나기로 한 안현진은 지오에게는 동네 누나에 불과했지만 스타를 꿈꾸는 연예인 지망생에겐 구름 위의 존재나 다름없었다.


-PnC가 이제 국내 원톱인가?

-엔터주 시가총액으론 그렇습니다.

-많이 컸네.

-엔터주 대장이던 경일이 거꾸러졌으니까요. 반사이익을 누린 셈이죠.


주인공은 여전히 대한민국 기득권층과 전쟁 중이었다. 기득권의 손발이 되었던 전국의 깡패들은 이상택과 그의 아이들에게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베스타 글로벌이 움직일 필요도 없다. 대한민국의 제너럴 코르센코인 이상택의 무력 동원력은 아시아 한정으론 주인공보다 뛰어났다.


-이상택은 아들의 미국행을 허락했습니다.

-조만간 연락이 오겠어.


안현진과 약속을 잡은 장소는 장모님이 운영하는 비즈니스 빌딩 중 한 곳이었다. 꼭대기를 포함한 몇 개 층은 보안이 철저한 프라이빗 룸으로 호텔급 음식과 음료를 제공했다.


“강남에 이런 곳이 있었어?”


안현진은 프라이빗 룸을 둘러보며 놀라워했다.


“쓰고 싶으면 써. 내 이름으로 예약하면 돼.”

“오! 그럼 고맙게 쓸게.”


자리에 앉자 기본 정찬 코스가 나왔다.


“이쪽은 한희주. 인사해. 희주야.”

“안녕하세요. 대표님. 한희줍니다.”

“둘이 무슨 사인데?”

“보육원 동생이야.”

“선아도 알아?”

“알지. 설마 내가 바람이라도 필까 봐?”


지오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어지간하면 합격인데... 그래도 테스트는 봐야 해.”

“영 아니다 싶으면 솔직하게 말해줘. 그래야 얘도 딴 직업을 알아보지.”

“실력 있다며?”

“전문가 소견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


안현진은 묘한 눈빛으로 한희주를 바라봤다. 이제껏 지오에게 청탁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이쪽에서 부탁했으면 했지. 신기하기도 하고 의심되기도 했다.


“소희는 돌아올 생각이 없대?”

“둘이 연락 안 해?”

“하는데... 할리우드에 눌러앉을 생각인가 보던데?”

“영화 한 편 찍는 건데 너무 나간 거 아니야?”


할리우드 거장 막스 도너의 은혜 갚기가 아니더라도 윤소희는 경쟁력 있는 배우다. 시간이 문제였을 뿐 언젠가는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했을 것이다.

뭐 대고려가 빵! 뜨면 안현진의 잔소리도 줄어들겠지. 2000만 관객이란 금자탑을 쌓을 대작에 출연했다는 경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


“소정이가 걸리니까 그렇지 뭐. 그 둘은 전생에 부부나 원수였을 거야. 아주 지지고 볶고 난리여. 누가 보면 자매끼리 연애하는 줄 알겠어.”


윤소정도 이제 성인인데 윤소희의 동생걱정은 여전히 과했다.


“제너퍼 카윈은 누구야?”

“응? 본 적 없나?”


안현진은 봄이의 가출팸을 만난 적 없던가.


“SNK에서 키울 정도면 대단한 신인인가 봐?”

“예쁘긴 해. 걔도 돈을 엄청나게 처발랐다고.”

“니 돈?”

“내가 보호자니까.”


한희주가 처바른 돈은 할리우드 미용과 비교하면 애교 수준이다. 작정하고 가꾸면 어지간히 추남·추녀가 아닌 이상 충분히 잘생기고 예쁘게 보일 수 있다.

현대과학기술의 정수이자 자본주의의 승리다.


“희주 씨는 앞으로 네가 스폰하는 거야?”

“어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젊은 여자애를 데려오니 오해를 안 할 수 있나.”

“재능 있는 애들을 응원하는 거지. 보육원 출신이라고 그 훌륭한 재능을 썩히는 건 국가적 낭비야. 낭비.”

“언제부터 애국자에 휴머니스트가 됐어? 우리 동생.”

“이렇게 공덕을 쌓아야 내 자식에게도 행운이 오지 않을까.”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 부모.

비싼 부적을 사서 몰래 자식 지갑에 넣는 부모.

미신을 신봉하는 그들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이 이해된다. 내가 선행을 쌓으면 내 자식들이 혜택을 보지 않을까 기대했다.

안현진의 시선은 앞에서 깨작거리는 한희주에게 향했다.


“한희주 씨.”

“희주라고 불러주세요. 대표님.”

“아아. 호칭은 우리 회사에 들어오면 바꾸는 걸로 하고... 테스트에 대비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바로 해도 됩니다.”

“의욕은 좋지만 난 정말 냉정하게 볼 거예요. 그러니 준비를 잘해요. 으음. 어디 보자. 한철이한테 맡기면 되겠네.”

“유 과장?”


아는 이름이 나오자 지오가 끼어들었다.

유한철

안현진이 대표가 된 이후 강윤태가 윤소희팀의 새로운 총괄이 됐다면 유한철은 트레이닝센터로 옮겼다. 축구팀으로 보면 유스본부랄까. 테스트에 합격하지도 않았는데 트레이닝센터를 이용할 수 있는 건 엄청난 특혜다.


“이젠 유 본부장이지. 한철이한테 얘기해둘 테니까 내일부터 그쪽으로 보내.”

“알았어.”

“감사합니다! 대표님.”


엉덩이를 들썩이며 일어나려는 한희주를 말려야 했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만큼 흥분한 한희주를 먼저 보낸 둘은 그제야 속내를 털어놨다.


“되겠어?”

“흠. 예쁘장하게 생긴 게 가수가 안 되면 배우나 모델을 시켜도 되겠네. 얘는 왜 키우려는 거야?”

“과거를 칼같이 잘라낼 순 없거든.”

“...보육원이 말썽이야?”


지오는 고아란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의 주변인은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신경 쓰고 배려받았다. 아내와 장모님이 크리스마스에 보육원 애들의 초대에 열성인 것도 지오를 배려했기 때문이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변이 더 난리다.


“가끔 분수를 모르는 것들이 있어. 연습생 중에도 이미 스타가 된 것처럼 으스대는 연놈들이 있거든. 그럴 땐 딴생각 못 하게 잡아 굴리고 굴려야 해.”


어째 일리야를 갈구는 아리엘이 떠올랐다. 연예인과 매니저의 관계는 어디든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원생 출신의 우상을 만들 생각이구나?”

“화려하게 보일수록 열광하는 건 고아든 누구든 똑같아. 사촌이 땅을 사도 배 아픈데 사회 최하층을 전전하던 같은 밑바닥 인생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을까?”

“잔인한 구석이 있어. 너...”


보육원 출신의 S그룹 임원은 어린 원생들의 시선으론 확 와닿는 느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텔레비전에 나온 스타나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매우 직관적이다.

단순히 돈 몇 푼 주는 건 지오에겐 쉬운 일이다. 그 지원을 어떻게 쓸지는 각자 선택이지만 눈앞에 성공사례가 있다면 좀 더 현명하게 판단하지 않을까? 미래를 향한 희망과 향상심을 품은 인간은 죽을힘을 다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노력이 귀찮으면 협박하고 빼앗으려 달려들겠지.


-최치수가 보육원에 사람을 붙였습니다.

-내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걸 알았구먼.

-조치할까요?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때까지 놔둬.


최치수는 야망에 불타는 윤가영을 모르는 척 받아준 것뿐이다. 날 곤혹스럽게 만들고 싶었다면 반쯤은 성공한 셈. 어쩌면 노인네는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풀이로 지르긴 했는데 막상 마주할 결과가 두려울 테니까.

한유현이 깨어났다.

당분간 안정이 필요했지만 영구적인 후유증은 없단다. 성조의료원으로 이송했다는 소식에 회사에서 득달같이 찾아왔지만 병원 보안팀에게 쫓겨났다.

그룹 법무팀을 보내 고용계약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공장의 일개 직원 일로 성조 법무팀이 찾아왔으니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검찰에도 투서를 보내 사주와 그 가족의 비리를 제보했다.

그쪽은 대충 마무리한 지오는 한유현을 팬 사채업자 일당을 찾았다. 옛날에 비하면 추심업종도 깨끗해졌다는데 구태를 못 벗고 폭력을 앞세운 양아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은 악인가? 문명화된 시민의 관점에서 폭력은 지양해야 할 행위다. 그러나 문명과 폭력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법과 질서를 지키는 공권력 자체가 개인을 압도하는 폭력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말로써 상대를 설득할 수 없을 때 동원되는 것이 힘이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순수한 폭력.

전쟁은 문명의 최선이자 최후수단이었다.


“병원비와 합의금을 받는 선에서 끝내세요.”

“알겠습니다.”


양아치를 잡아다 보복해도 사채를 끌어다 쓴 공장장놈만 좋을 뿐이다. 뭐하러 남 좋은 일을 시키나.

머리카락을 빠짝 깎은 군대 머리.

100일 휴가를 나온 김지석은 그날과 달리 밝은 미소를 띠었다.


“좋아 보이네요. 지석 씨.”

“감사하다고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뭐.”

“그래도 감사합니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악몽은 안 꿔요?”

“정신없이 굴려지느라 꿈꿀 시간도 없습니다.”

“바쁜 게 최고긴 해요.”


해외로 배낭여행을 나갈 정도면 어느 정도 진취적인 사고를 한다는 뜻이다. 김지석이 당한 일은 평생 한 번 겪기 힘든 악몽이지만 떨치고 일어난다면 더 강한 정신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듯 내가 만들지 않은 캐릭터의 숨은 이야기가 재밌다.

도련님이 해병대에 자원한 것도 평범하진 않았다.


-재밌는 녀석일세.

-명단에 올릴까요?

-어.


이런 녀석이 변수로 작용할 확률이 높다.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견실함도 재능이다. 김지석은 세상의 지독함을 겪었음에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김형철이 주인공에게 전향한 이유는 이 빛나는 청년이자 하나뿐인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아닐까 싶다.

창작자의 눈으로 봐도 매우 독특한 캐릭터다.

우리는 많은 얘길 나눴다.

해병대를 전역하면 다시 배낭여행에 도전하고 싶단다. 부모가 허락할까 싶지만 설득은 본인의 몫이다. 내 아들도 그처럼 밝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김지석과는 다시 보기로 약속했다. 지오는 좋은 사람으로부터 받은 좋은 기운을 안고 또 다른 만남을 이어갔다.


“왔어?”

“파리만 날리는 거 아니야?”

“낮에는 원래 장사 안 해.”


아내와 함께 골D미드단의 한 축이었던 절친 이은미는 교사를 때려치우고 와인바를 차렸다. 골D미드단의 단톡방은 그녀를 술집 마담이라고 놀리기 바빴는데 악의는 없었다.


“선오는 잘 커?”

“사진 볼래?”

“선오 사진은 너보다 내가 더 많아. 선아가 매일 톡방에 올리거든.”


내 아들에겐 사생활은 없었는데 특히 아랫도리를 까고 목욕하는 사진이 제일 인기 있다. 지못미! 미안하다. 아들아. 아빠는 네 적나라한 누드를 지킬 수 없었단다.


“애인은?”

“그런 거 안 키워.”

“안 키우는 거치고는 주변에 남자가 너무 많은 거 아님?”


전에도 말했지만 골D미드단은 하나같이 사납고 흉폭한 가슴을 가졌다. 가슴만 위협적이냐? 아니다. 몸매 비율이 전체적으로 훌륭했다. 장담하건대 이은미가 교사로 근무하던 학교의 남학생 상당수는 그녀를 딸감으로 삼았을 것이다.


“장난감이지. 장난감.”

“어이쿠야. 팜 파탈 놀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남성에게만 성적 환상이 있는 건 아니다. 도리어 억압된 여성이 더 파격적인 환상을 품었다. 교사 이은미는 어떤 여자였을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교사라는 직업상 가벼운 언행은 극도로 자제했을 것이다.

억눌린 욕망이 마침내 활화산처럼 폭발했을지도.


“나... 미친년 같지?”

“집에서는 뭐래?”

“왜 결혼 안 하냐고. 매해 선이나 보라고 난리였는데 이제는 학교도 때려치우고 술집을 열었으니 거의 의절 직전이야.”

“결혼 안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

“시간이 없었다는 건 너무 어처구니없는 변명일까?”

“어.”


이은미는 정말 결혼이 싫은가보다.


“그냥... 하고 싶지 않았어.”

“싫은데 이유가 필요 없긴 해. 싫은 건 그냥 싫은 거니까.”

“친구년들이야 운명의 남자를 못 만났다고 위로하는데 나는 나를 알아. 남자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가 있어. 아, 오해하지 마.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이은미는 본인 입으로 이성애자라고 밝혔다.


“남자가 좋거든. 근데... 같이 살라고 하면 그건 또 싫어.”

“그러니까 남자는 좋은데... 한 남자랑 같이 사는 건 싫다?”

“응.”

“새로운 남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응.”

“그리고 어리면 어릴수록 좋고?”

“응.”

“시발년이네.”


지오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솔직한 마음을 고백했다.


“아니, 개쌍년인가? 허허!”

“허허!”


이은미는 화내는 대신 같이 따라 웃었다.

흐흐! 크크! 시발년을 시발년으로 부르는 놈이나 욕 처먹고 따라 웃는 년이나 둘 다 보통은 아니었다. 지오가 보기에 이은미는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 것이 편한 사람이다.

가족은 어떻게 참고 버텼을까? 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가족이니까 참아 넘겼겠지.


“섹스하고 싶으면 아무 남자나 꼬셔?”

“노! 노! 아무나 꼬시진 않아. 딱 보면 매력 있고 매너 좋은 남자를 알 수 있어. 특히 술 한잔 들어가면 남자는 본성이 드러나거든. 아, 얘 괜찮네 싶으면 확! 물어버려.”

“그러다 언젠가 된통 당한다.”

“도와줄 거지?”

“...벌써 당했구먼.”

“한 번 자줬다고 날 제 애인인 줄 알더라고.”

“경찰에 신고했어?”

“법원에서 접근금지까지 나왔는데 영 정신을 못 차려.”

“좋은 남잔지 개새낀지 딱 보면 알 수 있다면서?”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궁색한 변명이다.


“경호원은?”

“그런 쪽은 잘 몰라.”


지오는 가게 밖에서 대기 중인 수행원을 불러 경호원 셋을 추가로 계약해 이은미에게 붙였다.


“불편해도 당분간 같이 다녀. 비용은 신경 쓰지 말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지오를 붙잡았다.


“그냥 가려고? 이름도 모르잖아?”

“다 아는 수가 있어요. 아줌마. 아, 술값은 이걸로 퉁치자.”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만 아내의 절친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손해다.

가게를 나선 지오는 곧바로 탐색에 들어갔다.


-누구야?

-...

-G?

-선호 캐피탈 진태형 부사장입니다.

-왜... 익숙하지?

-전에 윤소희 배우에게 스폰 넣으려다 까이고 작품으로 압력을 행사하려다 사용자에게 까인 적이 있습니다.

-아아!


누군지 기억났다.

아들 이름이 결정됐을 때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 원흉이다.


-부사장? 상무 아니었나?

-승진했습니다. 사용자로부터 경고받은 후 여배우에게는 불필요한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 열정을 일에 투자했죠. 덕분에 선호 캐피탈의 성장은 가팔랐습니다.

-봐! 내가 좋은 일 했잖아.

-근데 연예인 대신 일반인에게 추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

-영화로 예를 들면 새로운 장르로 갈아탄 셈이죠.


놈은 더 쉬운 먹잇감을 찾아 헤맸다.

영리하다고 칭찬해야 하나? 진태형은 나름 진화했다. 리스크가 있는 연예인보다 일반인을 다루는 것이 부담이 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지석도 그렇고 요즘 재밌는 녀석이 참 많다.


-그놈 낯짝이 보고 싶은데?

-진태형은 현재 선호 캐피탈이 투자한 영화 촬영에 동행했습니다.

-멀어?

-남한산성입니다.


어지간히 삽질하지 않는 한 대형사극은 최소한의 흥행은 보장되는 장르다.


-PnC에 소속된 배우도 출연 중입니다.

-오!


PnC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로 현장을 찾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깽판을 치러 가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까? 민폐를 끼치는 진상이 되고 싶진 않다.


-아몰랑!

-...


남한산성 렛츠기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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