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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지오 디 오리진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0.12.18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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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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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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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51쪽

지오 디 오리진 -77화-

DUMMY

지오는 오하령의 안전을 확인한 후 윤소희와 한초롱을 데리고 미국으로 튀었다.


“뭐야? 이년은?”

“봐주라. 쫌.”


아들을 안고 남편을 마중한 강선아는 한초롱을 보자마자 눈을 부라렸다. 취향이 비슷한 둘은 친하면서도 만날 때마다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리는 기묘한 사이다. 친구 맞아?

그간의 사정을 들은 강선아는 한초롱을 쫓아내진 않았다.


“니년 인생도 파란만장하구나.”

“이참에 은퇴할까.”

“지랄! 관종년이 관심을 떠나 살 수 있을 거 같아? 넌 관심 받겠다고 자기 영정사진에 누드화보를 올릴 년이잖아. 죽어도 못 고칠 걸?”

“...인정.”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걸 넘어 살아있음을 느끼는 수준이었다. 선의든 악의든 관심에 중독되면 벗어날 수 없었다. 선오를 낳은 이후 아들 앞에선 말을 조심하려고 노력하던 그녀는 오늘만큼은 좀 치는? 언니로 되돌아갔다.

지오는 아내에게서 아들을 넘겨받았다.

낯설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지나친 우려였다. 하지만, 확실히 며칠 전보단 무거워졌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들의 가파른 성장세를 느꼈다.

저택 바Bar에서 웃고 떠드는 그녀들은 한국에서 일어난 테러를 놓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설마 그 중심에 내가 있었단 것은 까맣게 몰랐다.

아내가 알았다면 등짝이 남아나지 않을지도.

이택기에게 전화가 왔다.


“안 봐. 안 들어. 안 알랴줌.”

“...”

“당분간 연락하지 마.”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일상으로 돌아왔다. 남들은 하렘이 아니냐고 부러운 시선을 보내는데 전혀! 네버! 아니올시다. 이것들은 몸만 큰 애새끼였다. 특히 금발백치미를 자랑하는 우리 제니퍼는 손이 많이 가는 애새끼였다.

하루는 꽐라가 돼 경호원에게 업혀 온 적 있었는데 나보다는 아내가 더 크게 화를 냈다. 다 큰 처녀의 엉덩이를 찰지게 때리는 강선아를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뭐지? 체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듯한 분위기는? 폭행으로 부모도 고소하는 나라가 미국 아니었어?

에이프릴 강, 강봄의 가출팸뿐만 아니라 이씨자매도 강선아를 이 무리의 리더로 인정한 것 같다. 물론 먹이사슬 제일 꼭대기엔 그랜마 장미소 여사가 있지만 그녀는 회초리를 휘두르는 군기반장은 아니었다.

전쟁 같은 아침을 보내고 난 뒤 아들과 단둘이 남은 지오는 정원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낮잠 자는 것이 일과였다. 물론 진짜 자는 건 아니다.


-어거스틴 초심리학연구소는 CIA의 비밀연구솝니다.

-뭘 연구하는데?

-초능력과 비슷한 미스터립니다.

-뭐야? 거기도 엑스파일이 있어?


X-file로 불리진 않지만 그 비슷한 부서는 기관마다 하나씩은 꼭 있었다.


-냉전 당시엔 아주 대놓고 초능력을 연구했었죠. 심지어 초능력은 방송의 단골 소재였고 코믹스도 영화도 초능력을 주제로 한 작품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국이 한때 초능력에 미쳤다고는 들었는데...

-사이언스, 사이언스 떠벌리지만 지금도 신비에 미쳐있기는 매한가집니다. 슈퍼맨은 미국의 상징과도 같죠.

-그래서 요즘 영화는 죄다 쫄쫄이 히어론가?


제국에선 히어로 무비는 한물갔다. 왜냐면 진짜 초능력자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통일전쟁 당시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초능력자는 크게 두 패로 나뉘었다.

황제를 지지하는 초능력자와 스스로 왕이 되고자 세력을 일으킨 초능력자, 결과적으로 황제를 따르던 초능력자만이 살아남았다. 제국의 공식역사기록물과 달리 음지를 떠도는 야사野史에선 초능력의 발현이 황제로부터 비롯됐다는 얘기가 있다.


-맞아?

-모릅니다.

-야사에선 전 인류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벌였다고 해. 믿기 힘들지만 폐하라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

-뭔가 있어. 뭔가 있다고.


하필이면 황제의 등장과 더불어 초능력자들이 튀어나왔으니 연관이 아예 없다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황실은 그에 관해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황제야말로 모든 초능력자의 시초일지도.’


퍼스트 맨

퍼스트 뮤턴트

퍼스트 가디언

인간에서 신이 된 황제는 어떤 초능력자보다 강력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당시 전 지구를 지배하던 아브라함을 시조로 삼은 여러 종교는 황제를 적그리스도로 선포했다가 다시 구세주로 옹립하는 참극을 벌였었다.

제국일신교의 태동은 구세계 종교의 몰락을 예고했다.


-초인은 주인공 빼고는 없는 거 맞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주인공도 초능력자는 아닙니다.

-사소한 건 넘어가.


모든 것이 가능한 시뮬레이션이라면 모를까 이곳은 ‘리얼’이다. 옛 지구를 재현한 기술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확실히 리얼월드는 물리적인 제약이 상상의 발목을 잡았다.

미스터리? 신비는 무지의 다른 표현이다.


-초심리학 뭐시기 연구소에서 주인공을 연구하는 건가?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미스터리를 포괄적으로 분석합니다.

-돈과 시간이 썩어 넘치나 봐.

-책임자는 일라이자 레인입니다.

-허!


역시 통수의 달인답다. 통수를 못 쳐서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그녀는 끊임없이 사람을 시험했다.


-일라이자는 주인공을 초능력자로 의심합니다. 미래를 예견하는 예지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죠.

-...투자 때문이군.

-말도 안 되는 투자로 월가를 비롯해 전 세계 시장을 농락했으니까요.


아무리 광기로 가득한 시장Market이라지만 두 부자의 수익률은 투자의 신도 경악할 수치였다. 천운이 계속되면 그건 운이 아니다.


-관련된 설정이 따로 있었나?

-캐릭터 설정엔 통찰력으로 얼버무리긴 했습니다만 예지몽 비슷한 부연이 있는 것도 맞습니다.


내가 창조한 주인공이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세계관과 캐릭터를 만들며 별로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고 그 시작은 가벼운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돈벌이에 불과했다. 창작가놈들이 입바른 소리로 지껄이는 산고의 고통 따윈 모른다.

오늘 저녁은 이웃집에서 보냈다.

근처에 사는 이웃끼리 뭉쳐 바비큐 파티를 벌였는데 커뮤니티 활동은 암묵적인 문화? 관행 같은 거란다. 매우 귀찮은 짓이지만 평판이 중요한 양키사회에서 아싸는 반발을 사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몇 번 참여하고 때론 내가 주최하니 이런 교류도 썩 나쁘지 않았다. 예전에 겪었던 아파트 조기축구회와 비슷하면서 달랐는데 미국은 가족이나 부부가 함께하는 모임이 꽤 잦았다.

파트너가 없는 솔로를 이상하게 본달까.

시간은 흘러갔다.

서울에서 일어난 테러가 언론과 대중의 눈에서 멀어질 즈음 오채령 회장의 외동딸이자 성조의 공주님인 오하령이 날 찾아왔다.


“고마워요. 오 이사님.”

“...사람들이 참 입이 싸군요.”


그늘에 놓인 침대에서 낮잠 자는 아들을 유모에게 맡긴 지오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오하령을 테라스로 안내했다.


“커피? 주스? 맥주?”

“오렌지주스로 부탁해요. 미국도 델몬트가 유명하죠?”

“델몬트 본사가 캘리포니아에 있긴 합니다.”


한국인에게 오렌지주스 하면 델몬트고 그 델몬트는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미국기업이었다.


“엄마에게 들었어요.”

“입 싼 분이 우리 회장님이었네요.”

“...듣던 대로 화통한 분이네요.”


대大성조의 총수를 깔 수 있다니? 당황하진 않았지만 놀라긴 했다.


“유학입니까?”

“피신이요. 뭐... 사실은 쫓겨났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멀어졌지만 서울 테러는 한국에선 여전히 중요한 화두였다. 주인공과 불편한 관계에 놓인 곳은 이를 빌미로 성조를 압박하는 형세였고 청와대와 국회는 양쪽을 놓고 눈치를 봤다.

미국의 적극적인 옹호가 없었다면 주인공은 큰 낭패를 당했으리라.


“인터넷에선 활빈당이라고 추앙하더라고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사망자 정보가 인터넷에 폭로되며 잘 죽었다는 반응이 나오자 유족 측은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명예훼손을 거론했다.


“다들 당신이 누군지 궁금해해요.”


학살 중에 뿅! 나타나 본인들을 도와준 그가 누군지 정체를 궁금해했다. 처음 경찰은 특공대가 테러범을 제압했다는 듯이 발표했지만 살아남은 인질들의 입을 막기는 불가능했다.

의문의 복면영웅!

위기의 순간에 등장해 테러리스트를 제압한 얼굴 없는 영웅이 있단 소문은 금세 인터넷을 점령했다. 처음엔 헛소문인 줄 알았지만 명사名士가 입을 모아 떠드니 진실은 금방 드러났고 그 때문에 경찰은 다시 홍역을 치렀다.

국가에서 만든 인간병기!

국방부의 비밀프로젝트!

국정원이 키운 고스트!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보는 통제 중입니다.

-이런 꼬맹이도 알잖아?

-사용자의 정체를 아는 자는 채 열 명이 넘지 않고 아직은 통제 가능한 숫잡니다.


G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떠들고 다니진 마세요. 아가씨.”

“그 정도로 정신 빠진 년은 아니거든요? 아저씨.”


마지막 단어의 강한 악센트에 지오는 피식 웃었다.


“아가씨 소리가 불편한가요?”

“네. 많이 불편해요.”

“그럼?”

“실비아.”

“...”

“미국에 왔으면 미국 방식을 존중해야죠.”

“실비아? 흠. 실비아. 난 제이.”

“Good.”


엄마를 사랑하지만 가문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딸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인사치레는 마쳤는지 오하령은 금방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나중에 봐요. 제이.”


그녀는 쿨하게 떠났다.


-혼자 왔어?

-김세라와 함께 왔습니다. 사건 이후 친해졌죠.


힘든 시간을 같이 보냈으니 전우애가 싹텄을지도 모르겠다.


-김세라는 현재 강선아와 만나고 있습니다.


원래 친분이 있었다.

가나였던가? 육아전쟁을 치르다 보니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하나도 이 모양 이 꼴인데 이제는 둘째까지 생겼다. 아내는 다시 일을 줄이는 작업 중이다. 장모님은 노산은 위험하다 걱정했는데 강선아의 신체는 G가 만든 미래형 건강보조제로 말미암아 20년은 젊어졌다.

어려진 것이 아니다. 젊어졌다.

이웃과 교류가 늘면서 가끔 이웃집 딸자식을 보모로 고용했다. 청춘드라마에 나오는 10대 망나니는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만나기 힘들다. 미국식 교육이 자유분방한 건 맞지만 애새끼라고 봐주는 건 운전면허를 따기 전까지다.

10대 중반만 돼도 매우 엄격한 법률을 따랐다.

어쨌든 아들내미는 무럭무럭 자랐고 삶은 계속됐다.

해가 지나고 둘째를 얻었다.

둘째는 무려 딸이었다.

성별은 중요하지 않지만 딸은 소중했다. 선오도 선예를 신기해했다. 아, 둘째 이름은 오선예다. 장모님이 백방으로 수소문한 유명한 작명가를 통해 얻은 이름이다. 엄마랑 같은 돌림자라 엄밀히 따지면 개족보지만 요즘 세상에 무슨 족보타령이냐.

육아전쟁은 국지전을 넘어 대전大戰이 되었다.

일을 완전히 손에서 놓으려던 아내를 말렸다. 이제야 큰 명성을 얻었는데 커리어를 접기는 너무 아깝다. 살림 잘하는 남편이 있는데 굳이 훈련병이 참전할 필욘 없었다.

지오는 지역사회에서 나름 이름을 알렸다.

경찰을 도와 몇몇 사건에 도움을 주었고 이웃들과 교류하며 크고 작은 고민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교회를 나가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결손가정을 후원하는 등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아리엘은 시시때때로 찾아와 어려운 부탁을 건넸다. 뭐 아리엘 기준으론 어려운 문제지만 내겐 하품 나올 만큼 쉬운 문제다. 스토킹, 외도, 불륜, 사기, 꽃뱀 같은 치정사건이 대부분이다. 아, 가끔 과도한 욕망과 폭력이 관련된 강력범죄도 있었다. 성공한 연예인, 스타에겐 사람이 제일 문제다.

윤소희와 애들이 출연한 할리우드 거장 막스 도너의 작품이 오스카 5관왕을 이룩한 건 대단한 영광이었다. 덕분에 윤소희는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월드스타 자리에 올랐고 다른 애들도 A급 대우를 받았다.

질투가 심한 사내새끼들은 지오의 집을 하렘으로 불렀다.

담을 넘거나 몰카를 찍는 씹새끼들의 뚝배기를 깨는 건 즐거운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오하령은 은근슬쩍 근처에 숙소를 마련했다. 거기에 김세라와 한초롱은 덤이고 언제부턴가 한국에서 난다 긴다는 여배우들이 집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뭐야?

-윤소희의 할리우드 성공에 강선아를 엮었습니다.

-왜?

-윤소희가 그렇게 인터뷰했거든요.


월드스타 윤소희는 인터뷰에서 강선아를 특급칭찬했다.

제 딴에는 나나 아내를 돕겠다는 발상이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쪽은 아니었다. 윤소희와 더불어 감독과 출연자들이 연신 추켜세우자 한국에서 강선아의 위상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약속대로 이종천에게 일을 맡겼다.

지오의 목소리를 흉내 낸 G가 통신으로 업무를 컨트롤했다.


-둔재도 천재도 아닙니다. 노력하는 범재는 수재 근처는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큰 조직을 굴리긴 무립니다.

-도와주면?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요?

-그럴 자존심이 있었으면 내게 말도 안 했어.


이종천은 평범했다. 몸 쓰는 일도 센스도 평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본인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오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용기는 쉽지 않다. 그 덕분에 망나니 같은 과거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귀 닫고 좆대로 살았으면 여전히 망나니거나 박성식 일당의 복수 목표가 됐을지도 모른다.


-살펴봐.

-네.


에밀리야 코르센코처럼 삶이 굴곡진 드센 여자를 그가 감당할 수 있을까. 러브스토리 끝이 해피일지 새드일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과 딸을 어쩔 수 없이 보모에게 맡긴 지오는 오랜만에 유럽으로 넘어왔다.

영국 런던

한때는 세계수도를 자처했던 도시는 지오의 관점으론 우중충한 회색이다. 고상한 교양이라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냥 구렸다.

런던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빌딩의 화려한 집무실, 알렉산데르 반돌프 공작은 지오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제이.”

“미스터 반돌프.”


반돌프 공작의 측근 몇몇과 눈으로 인사하다 뜻밖의 얼굴을 마주했다.


“헬렌?”

“제이.”


헬렌 드뷔시, 장 끌로드 드뷔시의 외동딸.

지오는 헬렌과 알렉산데르를 번갈아 쳐다봤다.


“흠흠. 그렇게 됐네.”

“그렇군요! 라고 끝내기엔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닙니까?”


지오가 알기론 거의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났다. 아무리 나이 차이에 관대한 코쟁이들이라도 스무 살은... 도둑놈이다. 만약 내 딸이 스무 살 많은 수컷을 데려온다면 더블배럴로 대갈통을 날려버릴지도 모른다.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거의 답보상태네.”

“망명이 받아들여진 거 아니었습니까?”

“막대한 투자를 약속했고 이행했기에 시민권은 금방 나왔네. 근데 중국과의 외교 때문에 약속한 혜택을 주는 건 망설였지.”


지오의 유럽행은 한 통의 부고 전화 때문이다.

스티븐 천, 천영석 전前 동방그룹 회장이 죽었다. 그것도 딸과 함께 그의 집에서 피살당했다. 누가 봐도 동방그룹을 해체하고 영국으로 망명한 것에 대한 잔혹한 보복이다.


“중국이 배후라고 확신합니까?”

“용의자들은 전원 중국인이야.”


외교적으로 민감한 거물의 죽음에 런던 경찰은 재빠르게 움직였고 며칠 전 입국한 중국인들이 용의자로 거론됐다.


-G?

-암살자는 중국인이 맞지만 배후는 중국이 아닙니다.

-그럼?

-타이완입니다. 정확히는 홍가회, 타이완 마피압니다.

-홍가회면...

-천가영 아니, 홍가영의 외가죠.


납치사건 이후 아버지와 화해한 홍가영은 다시 천가영이 됐다. 런던 경찰과 반돌프 공작은 천가영을 부수적인 피해로 봤지만 G는 암살목표가 천영석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왜?

-중국 쪽에서 천영석을 통제하려 시도한 건 맞지만 동방그룹 사업의 낙수를 받아먹고 살아가던 타이완 출신도 많죠. 단순히 원한의 크기를 따지면 중국보다 그쪽이 더 큽니다.

-돈줄이 끊겨 난리 났겠구먼.

-동방그룹 자리를 차지하려고 군소조직과 기업들이 항쟁을 벌였으니 많은 사람이 손해를 봤죠. 물론 중국도 완전히 관련 없진 않습니다.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

그래도 말이 안 되는데?

어쨌든 천영석이 목표여야 말이 된다. 그런데 G는 천가영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녀가 그룹 해체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답은 의외로 쉬웠다.

천가영은 미국 예일대에서 MBA를 딴 재원이다.


-돈세탁?

-검은돈을 굴리는데 천부적이었죠. 동방그룹도 그녀의 클라이언트였습니다.

-의절했었다며?

-부녀 사이가 나쁜 건 나쁜 거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죠.


천가영이 홍가영이던 시절 그녀는 한국에 살았지만 전 세계를 누비던 비즈니스맨이다. 아프리카에서 납치당했을 때도 봉사만 하러 간 건 절대 아니었다. 삼합회 우두머리를 부친으로 뒀으니 보고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홍가영의 특기는 검은돈을 세탁하는 것이다.

맞다. 그녀는 아프리카 독재자, 부패한 정치인과 관료를 대상으로 자금세탁 서비스를 영업했다.


-홍가회는 그 중간에서 수수료를 챙겼죠. 그런데 갑자기 홍가영이 천가영으로 돌아선 겁니다.


검은돈은 권력자면 누구든 감추고 싶은 비밀이다. 천가영이 된 홍가영이 은퇴를 선언했어도 고객 입장으론 갑작스러운 망명에 의문과 의심,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혹시 검은돈의 비밀이 폭로된다면?

아프리카 독재자는 코웃음 치고 말고 삼류국가의 부패한 정치인과 관료는 약간 곤란하고 말지만 세계 많은 나라는 기본적으로 법치를 추구했다.

검은돈이 발각되면 패가망신이다.


-천가영의 망명을 받아들인 영국이 이를 국제정치분야에서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밤잠 설친 클라이언트가 한둘이 아닐 겁니다.

-이용했어?

-영국은 천 회장에게 집중했습니다. 딸은... 그냥 딸이죠.


아무도 몰랐지만 사실 딸이 더 큰 거물이었다.


“용의자를 잡아달라는 겁니까?”

“국경이 봉쇄됐으니 용의자들은 영국 경찰이 잡겠지. 난 보복을 원해.”


파리 회동 이후 영국으로 망명한 스티븐 천과 반돌프 공작은 끈끈한 유대를 쌓았다. 반돌프 공작이란 공식 신분으로든 킹 비알이란 비공식 신분으로든 스티븐 천의 망명을 지지했고 보호를 천명했었다. 그런데 아랑곳없이 천영석을 암살했다.

이번 사건은 알렉산데르 반돌프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대로 넘어가면 그의 명성과 평판을 의심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

추락한 권위보다 무서운 건 반란 가능성이다.


“압도적인 타격을 원해.”

“너무 흥분했어요. 미스터 반돌프. 헬렌도 좀 말리죠. 아니, 쟝은 어디 뭐합니까?”

“아빠는 영국 총리랑 만나고 있어요.”

“그도 동의했습니까?”

“네.”


이거 두 코쟁이가 쌍으로 눈 돌아간 것 같다. 하긴 자기 안방에서 어디 건방진 아시안이 설치는 걸 두고 보겠는가. 주인공도 유럽에 처음 진출했을 땐 거센 저항을 받았다.

영국 총리와 접견을 마친 쟝 끌로드 드뷔시가 돌아왔다.


“제이, 마이 프렌드.”


포옹 대신 악수를 받아주는 선에 인사를 끝냈다.


“중국이랑 진짜 싸우려고요?”

“그 작자들은 명백히 선을 넘었어. 스티븐은 우리 친구고 우린 친구의 억울함을 구경만 하지 않네.”

“전에도 말했죠. 난 파워게임에 관심 없다고.”

“알아.”

“내 답이 궁금합니까?”

“...한결같구먼.”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이상한 겁니다.”

“그래도 이렇게 와준 걸 보니 아예 거절은 아닌가 봐?”

“애들은 지켜드리죠.”

“고맙.”

“단!”


지오는 드뷔시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다 엘에이로 넘어오는 조건입니다.”

“나쁘지 않군. 그래. 차라리 미국이 안전하겠어. 자넨 어떤가?”

“제 가족은 제가 지킵니다... 만, 애들은 이참에 미국에서 공부해도 좋겠네요.”


드뷔시가 건넨 질문에 반돌프 공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엘에이에 저택이 있어. 그곳을 숙소로 정하지. 자네도 캘리포니아에 땅이 있잖아? 공작.”

“엘에이가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 있습니다.”

“그런가? 이참에 하나 사지 그래.”

“흠. 그러죠.”


가끔 잊고 살지만 맥스콤 회장과 스웨덴 공작은 엄청난 부호였다. 지오가 사는 주택도 꽤 거금을 주고 구입했지만 저들이 언급한 집은 화장실만 한 20개씩 딸린 대저택이다.

미친 부자놈들!

헬렌은 반돌프 공작 옆에 남기로 했다.

그녀를 빼고 드뷔시에게 가족이 있었나? 이혼한 전처를 챙길 위인은 아니니 남은 건... 애인들이다. 애인이 아니라 애인들이다. 들.


‘노인네가 정력도 좋네.’


전용기에 줄줄이 입장하는 젊은 여자들은 서로를 잘 아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봐! 좆같은 내연녀! 우린 지금 피신하는 거야! 하고 쏴붙이고 싶지만 내 바지를 붙잡고 늘어진 반돌프 공작가家의 악동들 때문에 정신없었다.


“꺄륵꺄륵!”

“꺄르르르!”


디아블로! 남의 아이는 악마 그 자체다.

미국행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룩하자마자 일라이자의 전화가 왔다.


“얍.”

“끼어들 생각은 아니지? 제이.”

“놉.”

“다행이네.”

“혹시 그쪽에서 제거한 거 아니야? 둘을 싸움 붙이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유럽과 중국이 싸우면 우리도 난처해.”

“백악관의 대중국 기조는 강경 아니었어? 좋다고 삼바를 출 거 같은데.”

“쥐새끼를 너무 궁지로 몰면 죽기 살기로 덤빌지 몰라. 우리도 진짜 전쟁을 원하는 건 아니거든. 그래서 드뷔시와 반돌프가 어떻게 움직일 거 같아?”

“압도적인 타격을 원하더군.”

“...”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중국기업과 중국인을 사냥할 거야. 아마 현지인을 포섭하겠지. 다른 지역은 몰라도 아프리카에선 불어가 잘 먹히니까.”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프랑코포니-불어문화권은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맹위를 떨쳤는데 이 아프리카 독재정권과 부패한 정치인, 관료 뒤엔 프랑스가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독재고 인권이고 자유고 나발이고 프랑스기업과 프랑스인이 아프리카에서 이익을 얻으면 그만이었다. 어떤 면에선 양키가 착해 보일 정도로 라이미와 바게트의 비열함은 도를 넘었다.

자국에선 정의로운 활동가인 척하다 유럽을 벗어난 순간 야만의 탈을 쓴 짐승으로 돌변했다.


“중동으로 불똥이 튀면 곤란한데...”

“북아프리카 쪽은 위험하긴 하겠네. 그 양반들 눈이 돌아가긴 했는데 그렇다고 이쪽을 완전히 쌩까진 않겠지. 조율해봐.”


세계를 향한 미국의 관심은 언제나 에너지였다. 차세대에너지 연구가 활발하지만 향후 100년은 석유를 버릴 순 없다. 엄청난 물적 인적 손해를 보면서도 중동에 매달리는 이유도 결국은 그 땅에서 솟아나는 막대한 원유 때문이다.


“더.”

“더? 흠. 내용은 모르겠고 영국 총리랑 합의를 본 것 같던데?”

“그건 따로 알아볼게. 또 해줄 충고는 없어?”

“어거스틴 초심리학연구소.”

“...”

“비밀이란 게 참... 어떨 땐 비밀 같지도 않아. 그치?”

“...”

“내가 알 정도면 우리 보스도 눈치챘을 거야.”

“오해가 있어. 제이.”

“난 딱히 널 책망하는 게 아니야. 일라이자. 그냥 비밀을 만들 거면 좀 더 신경 쓰라는 조언이지. 하지만, 예산을 타 쓰는 기관에서 완벽한 비밀은 어렵긴 해. 딜레마야.”


무슨 청문회만 열려도 CIA 국장 팬티 색깔까지 밝혀지는데 비밀연구소가 있다는 걸 완벽히 은폐하는 건 불가능했다.


“초능력이 있다고 믿어?”

“...아니.”

“그럼 해커집단이 있다고 믿는군.”

“증거는 없지만... 너도 해커집단을 부리지?”

“노코멘트.”


해커집단은 없지만 해킹을 잘하는 AI가 있었다. 일라이자는 주인공에게 펜타곤을 해킹해도 안 들킬 엄청난 능력의 해커집단이 있다고 믿는 듯싶다.

이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나? 답은 No.

실컷 오해하게 놔두자.

미국에 도착하자 드뷔시와 반돌프의 수행원들이 알아서 일행을 챙겼다. 지오가 한 일은 숙소로 정한 대저택을 둘러보는 것뿐이다. 보안? 그건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겠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딸에게 젖을 물리는 중이었다.


“아침에 런던이라고 하지 않았어?”

“당신 보려고 일찍 왔지. 까꿍! 우리 선예, 맘마 맛있어용?”


남의 새끼는 악마지만 내 아이는 오줌을 갈기든 똥을 싸든 무조건 천사였다. 아내와 아이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면서도 지오의 머릿속은 이번 사건에 쏠렸다.


-영국과 프랑스, 아니 유럽 정상들이 드뷔시와 반돌프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가 뭐야?


아무리 돈이 많고 명성과 평판이 높아도 드뷔시와 반돌프는 민간인이었다. 나라를 이끌고 질서를 만드는 지도층에겐 거슬리는 존재였다.


-유럽은 주인공에게 무릎 꿇은 적 있죠.

-알아.

-그들은 항상 주인공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와 결과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

-주인공은 한국 내 중국자본과 중국폭력조직을 무자비하게 때려잡았습니다.


그 선두에 이상택과 국제파가 있었다.

국제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암흑가는 여전히 알게 모르게 이상택과 주인공의 통제를 받았다.


-어떤 일은 국가가 나서서 할 수 없습니다. 뭐 조폭을 때려잡는 정도는 가능해도 박멸은 어렵죠. 하지만, 같은 조폭이라면 칼질하든 총질하든 법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어차피 오늘만 사는 하루살이니까. 자기가 받을 형량을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정부가 재벌을 해체한다? 할 수는 있습니다. 대신 엄청난 역풍이 불어닥치겠죠. 그러니 정권을 창출하고 계속해서 이어가야 하는 정치인에겐 자살행위나 마찬가집니다.


할 순 있지만 정치생명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일을 저질러도 꼭 성공하리란 장담은 할 수 없었다. 자칫 실패한다면 국민으로부터 거의 국가반역자 취급당할지도 모른다.

그런 용감한 정치인이 지금 있을까?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지금 한국에는 없고 미국에도 없고 유럽에도 없었다.


-유럽 정상들은 드뷔시와 반돌프, 특히 반돌프 공작이 주인공과 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초인이 되길 바랍니다. 왜냐면 유럽에 산적한 문제 가운데 제일 큰 문제는 여전히 지역사회를 장악한 지주와 귀족, 깡패거든요.


유럽인은 문명인이니 다들 진취적이고 진보적이며 관대하리라 믿고 싶지만, 천만의 말씀. 유럽의 인종차별과 집단화된 범죄심리, 가속된 우경화, 부활한 나치즘으로 말미암아 온갖 죄악이 넘쳐나는 소돔과 고모라로 변한 지 오래다.

국가와 공권력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 봉건영주들은 사법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더욱더 막강한 영향력과 힘을 기르고 있었다. 그 끝이 어디냐면 중남미를 장악한 카르텔이다.

마약 대신 다른 것을 파는 카르텔.


-유럽 최고위층은 차라리 전쟁이 터지길 바랄 겁니다. 그러면 명분이 생길 테니까요.

-통합의 단물은 다 빨았으니 이젠 분열할 때인가.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는 건 유럽의 전통이죠.

-미친놈들이야. 미친놈들.


어째 제정신인 놈이 한 놈도 없다.

유럽과 중국이 전쟁을 벌이든 말든 지오는 아들과 딸의 기저귀를 열심히 갈았다. 태어난 지 이제 햇수로 3년이 넘은 선오는 빨빨거리면서 여기저기를 잘도 뛰어다녔다.

불안할 때도 많지만 넘어져도 씩씩하게 다시 일어섰다.

오늘은 선오가 좋아하는 제니퍼 이모를 만나러 나왔다.

첫 영화에서 대박을 터트린 이후 제니퍼의 필모는 차곡차곡 쌓였고 오늘에 와서는 할리우드 대표 미국인 여배우 TOP 30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30명에 드는 일이 뭐가 대수냐 싶지만 미국에서 활약하는 여배우 숫자를 고려하면 신인치곤 대단한 성공이었다.


“우리 썬!”


제니퍼는 선오를 안아 올렸다.

누가 보면 본인이 낳은 아들인지 오해할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선오는 LA패밀리 모두의 아들이다. 마찬가지로 선예 역시 그녀들의 딸이었다. 어찌나 유난인지 하루라도 단톡방에 그날 찍은 사진을 올리지 않으면 지랄염병을 떨었다.

이게 바로 타락한 맘카페인가.


‘이 폰맘들이 진짜...’


아이가 좋으면 결혼해서 낳든가.

참고로 일리야 로빈은 자식, 자식 노래를 부르더니 딸을 얻었다. 물론 결혼은 하지 않았다. 한국이라면 난리가 날 사건이지만 미혼 출산이 흔한 미국은 일주일쯤 떠들썩하고 끝났다.

아이 엄마가 누군지 알면 골때리는데 예전에 파파라치 남자친구와 짜고 사기를 치려던 옛 애인 캐럴 브린이다. 양키놈들 감성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양성애 취향을 이해해주는 파트너를 만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일리야 로빈에게 캐럴 브린은 자길 이해하는 완벽한 이성 친구인 셈이죠.

-그럼 동성 친구는?

-양성애자는 소수자 사이에서도 기피당합니다.


언제부턴가 일리야 로빈의 동성애 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그것을 캐럴 브린을 통해 해소하려고 했다. 파파라치 남자친구 사건으로 일리야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었던 캐럴 브린은 아리엘의 제안을 어렵게 승낙했다.

내 아를 낳아도!

그녀는 일리야의 아이를 낳았다.

진실이 밝혀지면 소중한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받겠지만 일리야에게 혼외자가 있음을 알게 된 언론과 대중은 동성애 의혹을 그저 루머로 치부했다.

아리엘의 의도가 적중한 것이다.

이게 이렇게 넘어간다고? 혼외자가 있는데?

어메이징 아메리카!

하긴 경찰과 범죄자의 고속도로 추격전을 스포츠 중계방송처럼 내보내는 미국이니 미혼 출산 따윈 별 이슈도 아니었다.


“성공했네.”


촬영장에 주차된 제니퍼의 트레일러는 주인공답게 크고 넓었다. 지오가 기억하는 서울 원룸보다 더 크고 넓었다. 선오를 끌어안고 소파에 앉아 놀아주던 제니퍼는 지오의 지나가는 감탄에 우쭐했다.


“어때? 반했어?”

“네네. 어서 남자친구나 만드십시오. 수녀님. 몸에서 사리가 무럭무럭 자라시겠어요.”

“칫!”


제니퍼 카윈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섹시아이콘.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연애젬병이었다. 젬병은 귀여운 표현이고 속된 말론 고자, 연애고자다. 어떻게 저 얼굴과 저 몸매로 연애를 못 할까 의심스럽지만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혼자가 편했다.

제니퍼는 사교성이 없진 않았다.

단지 낯을 매우 가렸다. 그게 사교성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변명하자면 사교성이 제로는 아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배우를 하냐고 물으면... 제니퍼는 뛰어난 얼굴과 몸매 이상으로 연기를 잘했다.

할리우드 거장 막스 도너는 오스카 각본상을 받으며 제니퍼의 연기를 극찬했다. 미국인 프리미엄 때문에 더 주목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실력이 없었다면 립서비스에 그쳤으리라.

윤소희와 이씨자매, 얼떨결에 참여한 사카가와 세리나도 일약 스타덤에 올랐으나 제니퍼는 그야말로 빵! 떴다. 할리우드 금발백치 계보를 잇는 새로운 섹시아이콘이 탄생한 것.


“언제 끝나?”

“배고프지? 미안. 썬. 이모가 금방 끝내고 올게.”


선오를 소파에 앉힌 제니퍼는 아들과 눈높이를 맞추고는 속삭였다.


“이따 이모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그녀는 갸웃하는 선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빨리 끝내버리겠단 의욕을 앞세우며 트레일러를 나섰다.


-알아봤어?

-촬영에 문제는 없습니다.


오늘 제니퍼를 찾은 건 그녀의 부탁을 받아서다.

표면적인 이유는 선오가 보고 싶다는 부탁이지만 고작 그런 일로 오라 가라 할 제니퍼는 아니다. 아메리칸 금발미녀의 전형이지만 백치까진 아니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애슐리 터너와 자주 연락합니다.

-...


애슐리 터너

한때는 LA패밀리에 속했던 강봄의 가출팸이었다. 사고를 치기 전까진 말이다. 지오의 후원으로 삶이 안정된 그녀들 중엔 케이트와 제니퍼처럼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미래를 준비하는 친구도 있고 애슐리처럼 적응 못 하고 떠나간 친구도 있다.

애슐리는 갑자기 우등생?이 된 친구들이 낯설었다.

그리고 자유로 착각한 방종을 그리워했다. 지오가 그녀들에게 요구한 건 딱 세 가지다. 약은 멀리할 것, 외박하지 말 것, 집으로 남자를 끌어들이지 말 것. 어려운 요구일까? 나머지는 잘 지켰다. 단 두 명만 빼고.

애슐리와 미셸.

둘은 LA에 도착하자마자 남자친구를 만들었다.

사귀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그녀들 애인이 범죄자란 사실이다. 멀끔하게 생긴 놈들은 자길 오디션에 도전 중인 신인배우로 속인 뒤 여자를 등쳐먹었다.

놈들은 먹잇감으로 삼은 애슐리와 미셸의 친구들이 좋은 집에 함께 산다는 얘길 듣자마자 온갖 핑계를 만들어 저택에 들어오려고 시도했다. 경호원이 사전에 차단하지 않았으면 뭔가 사단이 일어났을 것이다.

애슐리와 미셸은 지오의 강경한 대응에 반항해 애인을 따라 집을 떠났다. 강봄은 그녀들을 설득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이제껏 뭘 하고 살았데?

-미셸은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고 애슐리는...

-애슐리는?

-에스코트 서비스 소속입니다.

-에스코트 서비스? 그러니까... 콜걸?


하아! 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제니를 찾은 이유는?

-50만 달러를 빌려달라 부탁했습니다.

-왜?

-회사에 빚이 있습니다.

-콜걸 회사에 빚이 있다고?

-한마디로 팔린 겁니다. 남자친구라는 놈이 50만 달러짜리 채무를 그녀에게 떠넘긴 거죠.

-그건... 인신매매잖아?

-채무를 설정할 때 명의를 빌려 연대보증을 세웠습니다. 채권은 회사에 팔고 수수료 일부를 챙기는 방식이죠.

-이건 내 실수군.


강선아와 결혼하기 전의 나는 강봄 빼곤 가출팸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챙기지 않으니 G도 자연히 신경 쓰지 않았다. 미리 알았으면 벌레가 달라붙기 전에 박멸했을 것이다.


-통화를 분석한 결과 제니퍼는 애슐리에게 50만 달러를 줄 생각입니다. 다만 돈을 줘도 애슐리가 무사히 회사를 떠날 수 있는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용자의 도움을 바랍니다.

-에이전시는 알아?

-모릅니다.


에이전트란 새끼들이 대체 뭐 하는 걸까.

비싼 연봉을 받아 처먹었으면 일을 해야지.


-이 새끼들은... 일을 안 해?

-에이전시와 계약 파기할까요?

-담당자만 바꿔.

-얍.


SNK라고 모든 직원이 사명감에 불타진 않았다. 미국은 야근문화가 없다고 착각하는데 직종마다 달랐다. 할리우드 에이전트도 나름 극한직업이다.

G는 애슐리가 접근하기 전에 충분히 차단할 여유가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릴리 에드먼드 때문이다.

두 달 전 자살한 그녀는 제니퍼가 할리우드에서 사귄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파티가 끝나고 웃으며 헤어졌는데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뉴스로 비보를 접했다.


-너무 착해도 탈이야. 작년에 얼마를 기부했지?

-대략 800만 달럽니다.


1200만 달러를 벌어 8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물론 기부하면 세금혜택이 있지만 드라마틱하게 줄어들진 않는다. 오드리 헵번처럼 휴머니즘에 눈떴나 싶지만 또 그건 아니었다.


-케이트는 의료봉사를 다니지.

-노숙자와 정키가 우글거리는 우범지역에 말이죠.


간호사가 된 케이트는 의료봉사를 자처했다. 누군 돈지랄이고 누군 스릴을 즐겼다. 순수한 마음에 우러나온 선한 행동임은 알지만 위험한 건 위험한 것이다.


‘이 어리석은 중생들을 어찌할꼬.’


이해한다. 내 손으로 뭔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성취를 맛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열정! 패기! 꿈을 향해 달려가는 20대의 행동력은 거침없었다.

몸도 마음도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은 매력적이고, 매력적인 사람은 페로몬을 풀풀 풍기며 이성을 유혹한다. 그녀들 주변엔 발정한 짐승이 항상 어슬렁거렸으니 경호원만 죽어났다.

제니퍼를 기다리며 아들과 놀아주던 지오의 머릿속에 경보가 울렸다.


-촬영 중에 트러블이 발생했습니다.


오! 심심한데 잘됐군.

미국식 좆밥싸움을 볼 수 있는 걸까.

******




한국은 스타감독 아니면 톱배우가 촬영장의 왕이면 이 나라는 제작자가 왕이다. 감독이든 배우든 제작자 앞에선 다 좆밥에 불과했다. 막스 도너쯤 되는 거장이 아니면 제작자가 까라면 까야 한다.


“왜 못 찍겠다는 거야! 어렵지도 않은데 일단 찍어! 찍자고! 찍고 나서 살릴지 날릴지 나중에 편집하면 되잖아!”

“배우가 찍고 싶지 않다잖아!”


감독과 제작자가 설왕설래하는 경우는 대부분 제작비 때문이다. 좋은 장면을 얻고픈 감독은 수정에 수정을, 촬영에 촬영을 거듭해 비용을 오버했고 제작자는 뻥튀기된 영수증을 받고 길길이 날뛰는 것이 순리다.

그러니 배우를 옹호하는 제작자와 장면을 수정하고 싶은 감독의 대립은 흔하지 않았다.


-제니퍼의 트러블은 아닙니다... 시무룩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러면 내가 끼어들 명분이 없잖아.


-...여기는 사용자의 놀이터가 아닙니다.


냉정한 새끼!

어쨌든 제니퍼와 관련 없는 문제였다. 지오가 슬그머니 다가오자 제니퍼의 에이전시 스태프는 알은척했다.


“감독의 예술병이 도졌나봅니다.”

“유명합니까?”

“독립영화 쪽으론 유명한 감독이랍니다. 상도 여러 개 받았을 겁니다.”


예술가 특히 세간에 천재로 불리는 족속은 남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소시오패스가 대다수다. 이름 모를 저 천재도 예술이란 불치병에 걸린 환자였다.


“제니에게 지랄하진 않아요?”

“못 하죠. 감히 우리 카윈 양에게 지랄한다? 내일 당장 감독이 바뀝니다.”


제니퍼의 위상이라기보단 SNK의 영향력이 맞다.


“사실 진짜 장면을 바꾸려고 저러는 건 아닙니다. 협상의 한 방법이죠. 진짜 바꾸려고 맘먹었으면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항의하진 않을 겁니다.”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거군요.”

“저 감독이 의외로 여웁니다. 권모술수에 능하죠.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독립영화로 가능성을 보여줬더라도 단숨에 메이저 감독이 되는 게 어디 쉽겠습니까? 정치력이 없으면 불가능해요.”


저 화내는 모습은 일부러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한테? 배우와 스태프, 촬영장을 오가는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말이다.


-왜?

-직접적으로 터치는 못 해도 간접적으로 자기 위상을 높이려는 겁니다. 제작자는... 감독에게 호응하고 있군요.

-할리우드는 제작자가 왕 아니었어?

-모르죠. 감독이 저 제작자의 변태 비디오나 사진을 가지고 있을지도.


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제작자와 거칠게 토론하는 감독의 행동은 포장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업계나 여론의 동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배우와 싸우면? 이유야 어쨌든 무능하게 보일 확률이 높다.

이 트러블은 감독과 제작자가 공모한 퍼포먼스다.

문제는 도구로 이용된 신인배우다. 고래 싸움에 낀 새우, 딱 그 꼴이다. 신인배우를 도구로 이용한 건 이리저리 다 계산하고 뒤탈이 없겠단 확신이 있어서다.


-무섭네.

-잔혹한 세계죠.


하지만, 저놈들은 우리 제니퍼의 열정을 과소평가했다.


“그만들 하세요!”


허리에 양손을 척! 올린 제니퍼는 가짜 분노와 광기를 연기한 감독놈과 제작자놈이랑 달리 진짜 화난 것 같다.


“두 분 때문에 촬영 밀린 거 안 보이세요? 싸움은 촬영장이 아니라 사무실 가서 하세요! 몇 시간 째 대기 중인 배우와 스퍂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요! 부끄러운 줄 아세요!”


자기보다 두 배는 더 산 제작자와 20년 뒤 할리우드 거장이 될지도 모를 천재감독에게 일장 훈계를 쏟아냈다.


“그리고 레이첼!”

“네? 네, 넵!”


감독과 제작자 사이에 껴서 안절부절못하던 신인배우 레이첼 하그리브스는 제니퍼의 부름에 즉각 반응했다.


“이리 와.”

“넵.”


레이첼은 군기 바짝 든 신병처럼 제니퍼 옆에 섰다.

제니퍼는 감독과 제작자를 노려봤다.


“10분! 10분 안에 정리하고 촬영하지 않으면 팀에게 전화할 거예요! 좆같아서 못 찍겠다고!”


SNK의 세 거두 중 한 명인 팀 레이튼이 나서면 천재감독이고 거물제작자고 나발이고 다 땅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다.


“10분! 넌 따라와!”

“옙!”


레이첼은 어미를 따르는 새끼처럼 제니퍼를 졸졸 따라갔다.

일격을 당한 감독과 제작자는 어이가 없는지 서로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저 두 놈을 뺀 나머지는 입을 열어 말하지만 않을 뿐 통쾌한 표정이다.


‘That's my girl!’


지오는 저도 모르게 뿌듯한 얼굴이었다. 감독이고 제작자고 다 좆까라고 해!

그는 애들에게 항상 말했다.

원치 않는 트러블이 생겼을 땐 날 믿고 당당하게 나가라고. 살인만 아니면 해결할 수 있다. 아니, 살인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G라면 테러조차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

10분 후 촬영은 정상적으로 진행됐다.

졸려서 눈을 비비는 아들을 안아 들자 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미스터 스트라스버그.”

“제니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게.”

“팀이 알았습니까?”

“노발대발하더군. 누가 보면 자기 딸인 줄 알겠어.”


현장에 있는 제작자는 정확히 말하면 제작사 간부 즉 이 영화의 투자 및 배급을 맡은 오라이온 인스트루먼트의 이사진이었다. 회사의 주인인 칼 스트라스버그의 대리인인 셈.


“할리우드에서 제작자는 왕이라고 하던데... 대리인이 감독에게 질질 끌려다니더군요.”

“잭? 잭은... 청탁에 약한 편이야. 아마 몇몇 배역을 꽂느라 감독과 거래했겠지. 알아. 불공평해. 하지만, 그 정돈 아랫사람의 재량일세. 모른 척 넘어가도 되는 수준이야.”


대리인은 감독과 거래했다.

대리인이 바보도 아니고 영화를 망칠 만큼 엉망진창인 배우를 꽂진 않았다. 영화가 망하면 대리인의 커리어도 망가진다. 제작자가 배역을 꽂을 순 있어도 감독이 좆같이 굴면 좋은 씬은 찍지 못한다.

망하는 영화는 둘 중 하나가 엇나가거나 아니면 둘 다 좆같이 구는 경우다. 이인삼각을 떠올리면 정답이었다.


“제니는... 내가 잘 달래죠.”

“땡큐.”


일리야 로빈과 칼 스트라스버그는 이젠 더는 견원지간이 아니었다. 제시카 허몬 살인사건의 진실을 아리엘에게 알렸지만 그는 은폐를 택했다. 그리고 칼 스트라스버그와 거래했다.

마누라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스트라스버그는 불편한 과거는 잊고 SNK와 전면적으로 협력했다. 일리야 로빈은 여전히 칼을 싫어했지만 먼저 시비를 걸진 않았다.

미국에서 사는 동안 지오는 SNK와 관련된 부탁을 들어줬고 거기에는 스트라스버그와 관계된 일도 많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제 버릇 남 못 준다.

노인네는 여자를 밝혔고 제시카 허몬 살인사건이 다른 이슈에 묻히고 세월에 쓸려 잠잠해지자 슬슬 마음이 동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성공이란 탐욕에 이끌려 몸과 마음을 던지는 여자는 차고 넘쳤다.

칼 스트라스버그를 욕할 수 있을까?

윤리와 도덕의 기준으로 보면 욕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를 밝히는 것이 범죄는 아니었다. 혹시 병일 수도 있잖은가.


-노인네가 밝히는 걸 보면... 조만간 복상사하겠어.

-칼 스트라스버그는 화이자 대주줍니다.

-화이자면... 비아그라?

-미국은 바이애그라로 부릅니다.


Viagra

발기부전치료제는 탈모약과 더불어 중년과 노인의 희망이었다. 섹스 없는 삶은 얼마나 허망한가. 성행위는 천박한 얘기가 아니다. 도리어 가정에서부터 조기교육이 필요한 민감한 주제였다.

아내와 교육에 관련한 얘길 나눈 적이 있다.

이제 3살, 1살인데 무슨 교육이냐 싶겠지만 부모 마음은 그렇지 않다. 내 자식한텐 최고로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것이 부모였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 부모는 없었다.


-아니, 있나...

-부모 같지 않은 부모놈이 많습니다.


가출팸만 해도 쓰레기 같은 부모를 뒀다. 아내의 부친만 해도 책임감 없는 쓰레기였으니까.


“끝났다!”

“쉿.”


촬영을 끝내고 달려온 제니퍼는 곤히 잠든 선오를 보곤 급히 자기 입을 막았다. 어서 자기한테 달라고 손짓하는 그녀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넘겼다.

이모의 향기가 좋은지 선오는 제니퍼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하지만, 지오는 아들놈?의 음흉한 속내를 진즉 파악했다.


-새끼... 내 아들이 맞아.

-사용자도 가슴을 좋아하죠.

-가슴만 좋아하는 건 아니고... 다 좋지.


이런 나도 색정광? 아니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남자는 여자의 몸을 좋아한다. 소수자를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본 영상을 1위부터 30위까지 선정하면 장담하건대 전부 포르노가 차지하리라. 농담이 아니다. 그만큼 성적 환상과 호기심은 문명을 관통하는 거대한 아이디어다.

문명은 섹스로 시작해 섹스로 끝난다.

이성의 관심을 끄는 모든 행동이 문명을 이룩한 원동력이었다. 아니라고? 반박시 니 말이 맞다.

격식을 갖춘 레스토랑은 본래 유아는 출입할 수 없지만 오늘은 예외다. 왜냐면 제니퍼에게 사과를 전한 스트라스버그가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렸기 때문이다.


“맛있다! 썬이도 맛있어?”

“웅.”


선오에게 스테이크 한 점. 그리고 제니퍼 본인에게 스테이크 한 점. 아들놈은 금발미녀가 건네는 고기를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이렇게 좋은 레스토랑도 빌려줬는데 일리야는 칼 아저씨를 왜 싫어할까?”

“수컷끼리는 친해지기 힘들어.”

“팀이랑 제이는 친하잖아?”

“그래 보여?”

“응. 아리나 칼 아저씨랑도 친하고.”

“넌... 눈치가 별로구나. 하긴 연기를 잘한다고 눈치도 잘 보는 건 아니지.”

“나? 아닌데? 나 눈치 잘 보는데?”

“아니야. 넌씨눈.”

“우씨!”


와규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제니퍼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조용히 칼질하던 레이첼은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촬영장을 한바탕 뒤집은 감독과 제작자의 거친 신경전을 단박에 제압한 제니퍼의 박력에 밀려 따라오긴 했는데 불륜이나 외도 현장으로 보기엔 너무나 당당하게 아이를 안고 있었다.

뭐지?

레이첼의 눈알이 쉴 새 없이 굴러다녔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레이첼?”

“아, 네. 네.”

“이쪽은 아빠야.”

“네?”


금발백인미녀의 아빠가 아시안? 신인은 모르는 업계 은어인가? 레이첼의 혼란한 머릿속을 구해준 건 지오였다.


“후견인이에요. 후견인. 제니의 부모님이 좀... 그렇죠.”

“아.”


레이첼도 잡지를 통해 알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입지를 다진 제니퍼와 관련된 가십이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녀의 불행한 가정사와 기레기놈들의 자극적인 제목이 만나니 클릭수가 폭발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내 부모가 아니야. 내 아빠는 제이야.”

“오빠라고 해주면 안 될까?”

“오빠는... 써니가 싫어해.”


강선아는 오빠금지령을 내렸다. 이 정도면 금지령이 아니라 계엄령 아닌가? 마흔도 안 먹었는데 아빠라니... 억울하다!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렸는지 레이첼은 자기 얘길 했다.

레이첼 하그리브스

영국계 미국인인 그녀의 부모는 두 분 다 교사였다.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에 속했고 대학 입학 때까지 할리우드에 연기자로 도전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레이첼의 인생이 바뀐 건 재밌게도 거장 막스 도너의 영화이자 제니퍼의 출세작을 관람한 이후다.


-무슨 영화였더라?

-...

-아니, 극장에서 좀 잘 수도 있지.

-미국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블록버스텁니다.


이민자의 삶 어쩌고 하니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기 쉽지만 액션 블록버스터 맞다. 뻔한 소재를 재밌게 버무리는 능력을 보면 거장은 역시 거장이었다.


“에이전시는?”

“없어요.”

“그럼 혼자 다 준비하는 거야?”

“네.”


오디션 준비는 전투를 대비하는 군인과 같다. 적절한 훈련, 적절한 휴식, 적절한 보급이 없으면 군인은 제 전투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연기는 경험이고 무대에 서면 설수록 닭대가리가 아닌 이상 연기력은 는다.


“다들 그렇게 시작해. 제니.”

“난...”

“넌 운이 좋은 거고. 그러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지?”


마음 약한 제니퍼는 누군가의 간절한 기회를 뺏은 건 아닐까 안타까워했다. 칼 스트라스버그의 대리인이 감독과 거래했듯 이 바닥은 원래 주고받는 비즈니스가 흔했다.

실력?

전 세계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먹는 미국에 연기천재가 한둘일까. 너도 천재고 나도 천재고 얘도 천재고 쟤도 천재다.

고상한 레스토랑을 나온 우린 제니퍼가 사랑하는 치미창가 맛집을 찾았다.

알럽 치미창가.

스테이크도 좋지만 역시 근본은 숨길 수 없다. 군대 입맛과 노숙자 입맛은 비슷했다. 누가 제니퍼를 노숙자였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미국에 와서 좋은 점은 세계의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인 입맛에 맞게 어레인지된 음식이 대부분이지만 식도락이란 좋은 취미를 얻게 됐다.

애들이 학교에 다닐 즈음엔 캠핑카를 끌고 아메리카를 누비는 계획을 세웠다. 알래스카부터 아르헨티나까지 오직 자동차로 종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캠핑카 업체를 알아보는 중이다. 미리 제작하고 익숙해져야 6만 km가 넘는 대장정을 버틸 수 있다.

LA→샌프란시스코→알래스카→캐나다→뉴욕→워싱턴D.C.→마이애미→휴스턴→멕시코→중미→베네수엘라→수리남→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페루→중미→멕시코→샌디에고→LA

아메리카 일주!

한 2년 걸리려나? 넉넉잡고 3년으로 계획하자. 애들도 고학년보단 저학년 때 경험해야 즐거운 추억을 남길 것이다. 대입이 가까워지면 긴 여행은 어렵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이후 항상 미래를 고민한다.

오래전엔 나도 하루살이였다. 내일은커녕 오늘만 사는 미친놈, 전쟁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렸다. 삶과 죽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 자길 아낄 리 없잖은가.

이제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나는 이 세계를 살아가야 했다. 가벼운 유희, 여분의 삶이자 인생이 언제부턴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이것이 가장의 무겐가.


-경고! 신체 위협!


G의 경보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동시에 나이트-프레임의 엘리미네이션 모드와 디펜스 모드가 활성화됐다.


“응?”


치미창가를 걸신들린 사람처럼 흡입하던 제니퍼가 헤! 입을 벌린 채 날 쳐다봤다.

!!!

레이첼의 머리 위에 느낌표가 마구 떠오른 기분이다.

어깨가 무겁다.

가장의 무게? 아니, 어깨에 진짜 충격이 느껴졌다.


“악!”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내 어깨를 힘껏 내려친 놈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과 함께 손을 놓자 요란한 금속음을 내며 날아갔다.


“퍽! 맨!”

“왓 더!”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내려쳤는데 때린 놈이 손을 부여잡고 주저앉자 깜둥이 몇 놈이 칼을 뽑았다. 총이 아닌 칼을 뽑다니 대단한 전문가 아니면 갱단에 입문도 못 한 양아치란 방증이다.

깜둥이가 내 옆구리에 칼을 찔렀다.

푹! 소리 대신 칼이 튕겨 나왔다. 지오는 순간 고민했다. 사람이 칼을 튕겨내다니 방송에 나올 기사奇事지만 언제나 그랬듯 과도한 관심은 곤란했다.


-충격감소!

“악!”


칼을 맞은 척 바닥에 쓰러진 지오는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중구가 시키드나!”

“...”


하지만, 튕겨 나간 칼을 본 사람이 너무 많은 걸 확인한 지오는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하하. 이거 불량이네. 불량.”


땅에 떨어진 칼을 검지와 중지에 끼워 힘주자 댕강! 부러졌다. 그러자 깜둥이놈들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뺐다.


“Fuck!”


급기야 다른 놈이 총을 뽑자 더는 어설프게 대응할 수 없었다. 아닛! 내 아들이 있는데 감히 총을 겨눠?


“컥!”


바닥을 굴러다니던 찌그러진 야구방망이를 힘껏 걷어찼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알루미늄 막대가 총 든 깜뚱이의 중심부를 강타하자 눈알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용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지오는 깜둥이가 떨어뜨린 총을 가게 구석으로 찼다.

거품을 물고 기절한 깜둥이를 뺀 다른 깜둥이는 벌써 도망친 지 오래다.


“퉷!”


지오는 침을 뱉었다. 새끼! 내 아들을 위협하면 네 아들도 좆되는 거야!

저 멀리 경찰 사이렌이 가까워진다.


-알아봐.

-롸져.


날 공격했지만 날 노린 건 아니다. 만약 날 향한 공격이 계획됐다면 G가 놓쳤을 리 없다. 아마 계획단계에서 좌초됐으리라. 하는 짓을 보니 우발적인 강도는 더더욱 아니었다.


‘제니도 아니야.’


G의 감시명단에 올랐으니까.

그럼?


‘남은 사람은... 레이첼?’


레이첼 하그리브스뿐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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