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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입니다.

반전여신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벨라송
작품등록일 :
2019.12.23 21:10
최근연재일 :
2020.04.17 14:59
연재수 :
5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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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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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절대기타를 획득했습니다

DUMMY

「뉴 타이타닉?」


입으로 작게 선미에 적힌 글씨를 중얼거리고 나니 어릴 때 봤던 <타이타닉> 영화와 Ost 음악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영이 대신 들어간 노래수업에서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을 공부했던 기억도 소록소록 나고.

그땐 노래 선생이 워낙 깐깐해서 대리로 들어간 나조차도 한 노래를 완벽히 마스터할 때까지 부르게 했었다.

그러다 보니 이 노래만 몇 백번은 불렀는지 모른다.

게다가 기타 수업과 노래 수업의 합동 수업이 만들어져서 이 곡으로 기타까지 혹독한 훈련을 받았었지.

그땐 손가락이 정말······ 많이 아려서 끙끙 앓기도 많이 했었는데.

추억에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입체 조형물을 보는데 얼핏 그림의 배가 오래전에 침몰한 타이타닉 호와 정말 많이도 비슷하게 생긴 거 같기도 했다.

신기하다, 라고 생각하며 조형물 아래로 보이는 카드의 내용을 읽는데 글은 한국어도, 러시아어도 아닌 영어로 쓰여 있었다.


[친애하는 Unknown 씨.]


‘Unknown’?

수신인이 이상하네.

무작위로 보낸 행운의 편지 같은 건가?

싶다가도 묘하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연하장을 건네던 백수의 얼굴이 떠올라 진지하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성원에 힘입어 오랫동안 염원하던 저의 소원인 타이타닉 호의 복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이 거대한 여객선의 이름은 이름하야 ‘뉴 타이타닉 호’입니다.

······.

뜻깊은 시범운행을······.

구명보트를 포함한 최첨단 안전 설비를 갖췄으며 최고의 실력을 겸비한 관록 있는 선장이 운행할 예······.

······.

이 아름다운 신년에 실내 선상 파티로 당신을 아래와 같이 초대하오니······.

.

.

.

-일정 :

1월 9일 오후 6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출항.

1월 10일 오전 10시 헬싱키 도착 및 정박.

1월 10일 오후 6시 헬싱키 출항.

1월 11일 오전 10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착.


-출발 장소 : 상트페테르부르크 팰리스 피어 선착장#1


-복장 : 모더니즘을 모티브로 한 의상 또는 자유 복장


다시 태어난 뉴 타이타닉 호에서 클래식 영화와 같은 감동을 느끼시길 바라며 꼭 참석해······.


진심을 담아서,


아나똘리 뽀뽀프.]


카드를 다 읽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놀랍다는 생각에 카드를 접지 못한 채 들고선 생각에 잠겼다.

아나똘리 뽀뽀프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한 사람인가 보네.

아니, 그보다.

영화 <타이타닉>의 광팬인 거야, 아니면 타이타닉에 혹시 조상이 사고라도 당한 걸까.

내가 알기로 침몰한 타이타닉 호도 완공될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큼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여객선이었는데 그 배를 21세기에 복원하다니.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지만 실로 놀라워서 나는 선 자리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시에 백수가 나에게 이 연하장을 왜 주고 갔는지 언뜻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걸 나에게 주고 간 거지?

이해가 정말 안 되네.

선상파티라······.

파티. 사람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이잖아······.


‘참석하라는 뜻일까?’


생각하며 마침내 카드를 접어 봉투에 다시 집어넣는데 봉투 뒷면에 QR코드와 바코드가 나란히 박혀 있었다.

봉투를 뜯을 때까지만 해도 아날로그 느낌이 강했는데 내용물 담은 방식은 매우 모던한 스타일이네, 하며 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절로 공감이라도 얻고 싶은 마음에 동시에 고개를 잠깐 들었는데.

방금 전까지 바로 지척에 서 있던 할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몸을 움직여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러시아 현지인으로 보이는 몇 몇 행인들만 오고다닐 뿐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이상하게도 심장이 단단한 돌멩이로 한대 맞아 와르르하고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인사도 없이······.’


섭섭함과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다.

입 밖으로 ‘아주머니’를 불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치 재래시장에서 모르는 사람 둘이 기타와 코트를 그저 물물교환을 한 것 같은 일상적인 상황 같았지만, 내 마음은 어딘가 간질간질하는 아스라한 느낌이 남았다.

잠시 멍하니 아주머니가 사라졌을지도 모를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밍크코트 잘 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그리고 꼭 집에 좀 들어가세요. 가족들이 걱정해요. ······아주머니.’


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는 말을 마음속으로 전하며 그녀가 주고 간 기타가방의 단단한 끈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한 번 쓸어내렸다.


● ● ●


아주머니와 헤어진 후.

백수가 무슨 마음으로 초대장을 준 건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초대’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뉴 타이타닉 호가 입항하는 항구에 가기로 급 결심을 하고.

다시 캐리어 정리를 해 팔만한 옷가지들과 캐리어를 세컨드 샵에 헐값에 내다팔았다.

쥐꼬리만 한 돈이라도 주머니에 넣고 나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어디를 갈까하다 여객선이 들어오는 저녁 7시까지 호텔에서 또다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갈 곳이 없으니깐······.

호텔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 껌뻑껌뻑 눈만 뜨고 있자니 시간이 너무도 가지 않았다.

아침부터 옷 팔러 가려고 새벽에 일어나 피곤했다.

잠도 올만한데 상황이 워낙 좋지 않다보니 잠은 오지 않고 그저 몽롱한 피곤함과 걱정과 함께 몰려올 뿐이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연휴 끝 무렵이라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로비도 북적북적했다.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서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댄 채 오가는 투숙객들을 구경했다.

다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거나 최소한 함께 걸어가는 모습들이었다.

나도 이제 돌아가고 싶다.

집으로.

하지만······.

이모와 나영이는 아직도 연락이 안 되고.

어쩌다보니 새 코트도 기타랑 바꿔서 결국 쓸만큼의 급전조차도 만들지 못했으니 꼭 백수를 만나야 했다.

선상 파티에 가면 백수를 만날 수는 있을까?

하지만 백수가 오지 않으면 어쩐다지.

연하장은 보통 한 사람에게 하나씩만 발송되지 않나?

그런데 그 하나를 나한테 준거라면······.


‘백수는?’


불현듯 눈앞이 깜깜해졌다.

주황색 쫀득이 과자를 불판에 올렸을 때처럼 심장이 쭈글쭈글 쪼그라드는 기분도 들었다.

쫀득이 과자 구워먹으면 맛있는데······.

아, 이게 아닌가.

아무튼······ 그가 못 올 수도 있단 거잖아.

선상 파티는 무슨 선상 파티야?

백수가 파티에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가지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할까?


「······.」


고민하는데 잠시 잠깐 뇌를 쉬게 하는 ‘멍 때릴 수 있는 기회’만을 줬을 뿐 내 머리에 떠오르는 방법은 1도 없었다.


‘일단 여객선까지 가는 일정은 변경하지 말자.’


다만 핸드폰에서 러시아에 있는 한국 대사관 주소와 전화번호를 종이에 메모해 주머니에 넣어두기로 했다.

메모를 넣어두고 손을 빼려는데 코트 주머니에서 또 백수가 준 초대장이 손에 잡혔다.

은근 내 손에 찰떡같은 초대장인지 착착 손에 감기네, 싶어 꺼내 들다가 문득 길에서 봤던 QR코드가 떠올랐다.

봉투에서 카드를 꺼내 핸드폰 QR코드 리더기를 코드에 대자 뷰튜브로 연결되며 영상 하나가 자동재생되었고 큰 음악소리가 로비를 급작스럽게 울렸다.

한국에서 전화가 올까 싶어 소리 모드로 되어 있었던지라 순간적으로 소리에 깜짝 놀라 급하게 핸드폰 오른쪽 버튼을 미친 듯이 눌러 음소거를 했다.

그러곤 진정하고 화면을 보니 연하장 카드에 삽입되어 있던 입체 그림과 똑같은 뉴 타이타닉 여객선의 실사 모습을 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360도 파노라마 뷰로 웅장한 외관을 보여주더니 이내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화면에 담아두었다.

영화에서 봤던 그 모습처럼 고풍스러운 오크 원목으로 꾸며진 아름답고 우아한 페리.

이렇게 똑같을 수가.


‘정말 타이타닉 호잖아. 대단해.’


동영상을 시청을 마치고 잠시 잠깐 봤던 화면들을 떠올렸다.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아무래도 연회장이 아닐까 싶었다.

뒷모습으로 서 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서 있던 연회장으로 가는 그 계단도 걸어볼 수 있을까.

또한 그 유명한 뱃머리 씬도 떠올랐다.

불그스름한 석양을 향해 두 팔을 뻗던 케이트 윈슬렛의 바닷바람에 날리던 붉은 머리카락도 생각이 나면서 왠지 호텔에 앉아 죽치고 있기가 시간이 아까운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출항 준비를 위해 배가 부두에 벌써 정박되어 있을 지도 모르는데.

지금 시간이··· 벌써 2시네?!

오래 앉아 있긴 했네.

출항은 6시.

항구까지 가는데 지하철로 40분 정도 걸리니깐.

지금 가면 딱 괜찮겠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할 일 없는 백수도 미리 와 있을지도 모르고.

나는 보스턴백과 기타를 챙겨 호텔을 나섰다.


● ● ●


항구에는 꽤 큰 대합실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하지만 이 소리는 크리스마스 연휴 기차간에서 들었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서로를 반기는 소리라기 보단 작게 속삭이면서도 무언가를 의논하는 목소리들이었다.

주변을 살펴보자, 사람들의 목과 손뿐만 아니라 바닥에도 다양한 크기의 카메라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뉴 타이타닉 호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로 보였다.

하기야 이 또한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까.

19세기에 침몰해 흔적만 남은 바다 속 유령 배가 21세기에 그 놀라운 자태를 다시 지닌 채 초호화 여객선의 모습으로 살아 돌아왔으니, 어이 기자들이 빠질쏘냐.

생각하며, 자리를 잡으려고 빈 벤치로 다가가는데 역시 취재기자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소리가 작지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영국 기자인지 영어 악센트가 꽤 셌다.


「······원조 타이타닉은 당시 3년 동안 7백 50만 달러를 썼다지?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4억불 정도. 이번엔 얼마나 썼대?」


4억불이면.

환율을 1달러당 천원으로 칠 때 4000억 원이잖아.


‘뭐. 나도 이 정돈 가지고 있지만.’


어쨌든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어마한 돈이긴 하다.


「아나똘리 뽀뽀프가 대단하긴 해. 이번엔 2년 정도의 건조 기간 동안 두 배에 달하는 돈을 썼다는데?」


아나똘리 뽀뽀프?

······익숙한데.

아-.

초대장 카드의 마지막 발신인 이름에 적혀 있던 이름이잖아.

아나똘리란 사람이 뉴 타이타닉 호의 오너인 모양이구나.


「그럼 8억불 정도? 어마한 돈을 썼네.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야.」


옴마?

8억 불이나?


「나야말로. 계획을 들어보니 1년 정도 개인 소유하다가 대형 선사를 건립해서 여객선을 굴릴 모양이야. 뉴욕도 가고. 뭐 세계 어디든 갈 모양이던데.」

「1년은 시범 운행 기간인가보네. 이름 그 자체로도 워낙 안전에서 예민한 배니깐 필요한 부분이긴 하지. 좋네. 누군 돈 많아서.」

「그런가 봐. 그리고 시범 운행이 안전하게 끝나면 뉴 타이타닉 호를 7호 라인까지 늘린다고 했었지?」

「나도 그렇게 들었어. 그리고 타이타닉 호를 러시아 사람이 복원한다고 발표했을 때 영국 정부의 반발이 이만저만도 아니었지.」

「하기야. 뒤에서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로비를 꽤 했다지, 아마?」

「아나똘린데 뭔들 못하겠냐.」

「마자. 배는 5시나 돼야 들어온다는데······.」

「꽤 늦네. 6시 출항인데 우리 같은 짬밥 기레기한텐 기회도 안 주네.」

「아냐. 5시면 취재하고 영상 담기엔 시간이 넉넉하긴 한데······.」

「하기야.」

「문젠 그게 아냐. 내셔널 지오그래픽 팀들은 배에 승선하는데다 엔떼베(НТВ) 방송국 쪽도 뭐 선주랑 친분이 있어서 국장급부터 밑에 웬만한 애들 다 이번에 초대 받았다는데.」

「땡잡았네. 초대장도 하나 없는 우린 뭐 배 앞에서 구경꾼이나 인터뷰하란 거지. 심지어 뷰튜버 몇몇도 초대받았어. 몰랐지?」

「그래? 존심 상하네. 이거.」

「담배나 피러 가자.」


묵직한 카메라 가방을 메고 있던 남자가 주머니에서 투명한 녹색 라이터를 꺼내 흔들며 대화를 나누던 남자에게 고갯짓을 했다. 둘은 함께 게이트로 향해 걸어갔다.

이들 외에도 대합실 곳곳에서 대기 중인 기자들이 모여 속닥이는 소리들 덕분에 귀가 대나무 숲에 있는 거처럼 거대해졌지만, 잘 들리진 않았다.

두 기자들이 사라지고 완전히 빈 벤치에 앉아 있자니 몹시 심심해졌다.

기타는 등에 메고 보스턴백은 어깨에 둘러메며 일어나 대합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길게 뻗은 복도를 만났다.

한참 걸어가는데 그 끝에 야외 선착장과 바로 연결이 되어 있으면서도 그 자체가 바다에 떠 있는 돔 모양의 반원형 건축물이 나타났다.

양문형의 문이 활짝 열린 채라 거리낌 없이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사방이 바다의 반사된 햇빛을 모으기 위한 것처럼 크고 작은 창문들로 이루어져 있어 밝았으나 겨울 햇빛은 그리 세지는 않았다.

한편으론 걸을 때마다 발자국 소리가 유리와 벽을 튕겨 나에게 메아리처럼 다시 돌아오는 것이 흡사 동굴에 있는 느낌도 들었다.

소리를 내어보았다.


「아-.」


‘에코가 심한 룸이네.’


마치 한강의 ‘플로팅 스테이지’와 같은 수변무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게다가 방이 크고 넓어 500명의 사람도 너끈히 수용할 수 있어 보였고 곳곳에 대기 의자처럼 보이는 수많은 철제 접이식 의자들이 벽마다 적재되어 있었다.

시간도 넉넉하겠다 싶어 의자 하나를 꺼내 펼쳐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집에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 때문일까 바다가 어둡고 깊어 보였다.

아까 기자들 이야기에 따르면 초대장 없으면 뉴 타이타닉 호에 승선을 못한다는 얘긴데.

백수가 두 장의 초대장을 받았을 리는 없을 테고.

초대장 없는 백수가 여기에 올까?

내가 백수라면······?

어쩌면 구경하러 올지도 모르겠다. 세계가 주목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니깐.

백수도 나와 같은 생각이면 좋을 텐데······, 생각하며 기지개를 쭉 펴는 순간 의자에 기대어놓은 기타가 쿵 하고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악-!」


내 기타. 깨진 건 아니겠지.

당황해서 얼른 기타를 주워 이번에는 안전하게 맞은 편 벽에 세웠다.

안전은 예방이라는데 사람만 해당되는 게 아닌데.

미리 벽에 잘 세워둘 걸.

바라보면서 기타에서 손을 뗐다가 다시 기타를 잡았다.

할아주머니가 그래도 선물이라고 주셨는데 한 번 열어보기라도 할까. 어쩌면 궁여지책으로 길거리 돈 벌이가 되어줄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실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만난 할아주머니가 주셨으니 집에서 굴러다니던 기타를 가져 나와 나처럼 팔려고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죽 가방에서 기타를 꺼내들었다.

그 순간.

뭐지. 심해에서 구르고 구르다가 어쩌다 육지에 상륙한, 겉이 허름한 조개에서 어마한 진주를 발견한 이 부자 된 기분은.

내가 연습하던 합판 기타랑은 차원이 다르다는 게 방금 꺼낸 기타의 외관만 봐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기타는 단연 뛰어났다.

기타 선생님으로부터 말로만 듣던 하이엔드 기타.

무겁지 않아 기타를 허공에 들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자 반질반질 윤이 나는 기타가 잘게 부서지는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났고, 후판 나무의 나이테가 숨결처럼 아름다운 결을 이루고 있었다.


「와-!」


그저 입에서 감탄이 절로 튀어 나갔다.

기타 후면 바디와 목이 연결된 부위에는 영문 흘림체로 B라는 이니셜 하나가 적혀 있었다.


‘할아주머니의 이니셜일까?’


고개를 잠깐 갸웃거리다가, 궁금해도 막상 확인할 방법도 없단 생각에 기타를 가슴에 안아들고 자리에 앉았다.

페그를 움직이며 기타 음을 조율했다.

중고등학교. 밤을, 그냥 밤은 아니고. 뜨거운 밤을 너무도 사랑하는 나영이를 대신해서 이모 몰래 배웠던 기타.

이모는 내가 대학 과방에서 원 없이 기타를 연주한 건 아직도 모르겠지.

사브르 인턴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하며 과방에 잘 나가지 않으면서 한동안 안 쳤으니.

거의 2년 만에 처음 잡아보는 기타에 심장이 마냥 어린 아이처럼 두근거렸다.

검은색 피크를 잡고 다운 스트로크를 한 번 했다.

트링-.

이번엔 업 스트로크.

트링-.

가벼운 손목 스냅에 응답하듯 기타의 울림이 깊고 은은했다.


「오 마이 갓.」


트링, 트링.


「사랑해, 기타야.」


트링.

트링 트링. 트링.


「아주머니, 사랑해요.」


조율을 마친 순간 날것의 진솔한 말이 입에서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나갔고.

할아주머니의 얼굴이 구원의 천사 같은 후광을 받고 유리창에 둥둥 떠다녔다.

왜냐하면 기타 소리가 미치게 좋거든.

이 울림.

이 현의 튕김.

이 얄삭하게 잘 빠진 바디와 목리인.

기타가 내게 착 감겼고.

요물 같은 기타가 내 가슴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었다.


‘노래 한 곡 부르지 않고는 못 베기겠지?!’


안 그래?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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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왜 이렇게 애볐냐? 19.12.28 189 5 16쪽
5 러시아에서 만난 그 남자 (3) +1 19.12.27 218 4 17쪽
4 러시아에서 만난 그 남자 (2) 19.12.26 239 4 15쪽
3 러시아에서 만난 그 남자 (1) +1 19.12.25 300 6 19쪽
2 반전 시작 (2) 19.12.24 364 6 16쪽
1 반전 시작 (1) +3 19.12.23 697 7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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