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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입니다.

반전여신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벨라송
작품등록일 :
2019.12.23 21:10
최근연재일 :
2020.04.17 14:59
연재수 :
5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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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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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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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2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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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러시아에서 만난 그 남자 (3)

DUMMY

● ● ●


생수를 받고 면접장을 좀비처럼 나와 무슨 정신으로 PT면접과 토론면접을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망했겠지?’


망했을 거야.

특히, 그 뿔테 안경 고필문 때문에.

꼭 회사에 똘기 충만한 상사가 한 명쯤은 있다더니. 나는 무슨 면접 때마다 만나냐.

머리 스타일은 꼭 둘리의 고길동처럼 9대 1로 가르마를 하고선 면접 중에 엄마 얘기를 그렇게 막 떠벌이다니.


‘아-. 고필문이 내 앞길을 막는 구나.’


하지만 오늘의 복병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왜 하필 그 자리에서 딸꾹질이-, 딸꾹질이 웬 말이냐고!

생전 잘 하도 않던 딸꾹질을 왜, 왜, 왜! 하필이면 면접장에서, 것도 백수도 있는데.

아직도 백수가 왜 거기 앉아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고. 물어보려도 연락처도 모르겠고.

하물며 이름도 모르는 구나.

아······. 기운 빠져.

진짜 이러기 있기 없기.

이건, 뭐, 나 혼자 외모도 스펙도 다 필요 없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거 같다.

살도 빠지고 예뻐지면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취직은 아직도 산 넘어 산이고.

뭘 어째야 되는 건데······.


‘으음, 이 향기로운 냄새는-!’


“체크아웃 다 되셨습니다. 뭐,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시죠?”


빵 굽는 향기 같은데?


“그럼 안녕히-.”

“잠시 만요. 캐리어 맡길게요. 뭘 좀 사가려고요.”

“네. 고객님. 캐리어를 데스크 끝으로 가져오시면 보관증 드리겠습니다.”


에메랄드 호텔 베이커리가 맛집으로 유명하다더니 맛있는 냄새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 왔다.



에메랄드 호텔 1층 베이커리.


“호두파이 두 판 포장해주세요.”

“고객님 죄송하지만, 파이가 방금 다 소진이 되어서 만들려면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는 기다리셔야 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래요? 잠깐만요.”


핸드폰으로 고속버스 예매 앱을 체크했다.

평일이라 버스가 매진될 일은 없겠고, 출발시간대도 많고 괜찮았다.


“기다릴게요.”

“네. 고객님, 완성 되면 두 판 포장해 두겠습니다. 계산은 파이 찾아가시면서 하시면 되십니다.”


이 집 파이가 정말 유명하긴 엄청 유명하나보네. 완판이라니. 세 판 살 걸 그랬나?

생각하며 창가 테이블에 앉아 밖을 바라보는데 열린 문틈으로 싱그러운 여름의 향기가 폴폴 날아왔다.

어제 도착했을 땐 밤이라 못 봤던 열대야 나무들이라니.

뭔가 되게 신기했다. 제주도도 아니고.

곳곳에 심어져 있는 처음 보는 나무들을 보니 호텔 정원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구두를 신긴 했지만 호텔 주변을 한 바퀴 휙 돌아보기엔 문제가 없어 보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부작거리며 산책로를 따라 한참 걷다 보니 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진 호수가 나타났다.

여름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로 연결된 작은 데크에 걸터앉아 다리를 까딱까딱 거리고 있자니 자그마한 무지개가 떴다.


‘눈부시게 예쁘네. 이런 무지개가 내 인생에도 언젠간 뜨겠지. 그 언젠가가 오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깝다. 나도 빛처럼 반짝반짝 빛날 수 있었는데.’


면접은 망쳤지만, 예쁜 풍경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평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 ● ●



산책을 마치고 호텔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마치 맛있는 냄새가 레드 카펫처럼 나의 길을 인도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로비는 고소함 그 자체였다.

베이커리에는 이미 주문한 갓 구운 파이가 포장을 위해 계산대 위에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다.

이것이 바로 미친 비주얼이로구나.

나는 이미 눈으로 8조각냈고, 한 조각을 순삭했다.

냐미-.


“얼마에요?”

“4만 9천원입니다.”


카드를 내밀었다.


“고객님, 사용정지라고 뜨네요. 혹시 다른 카드는 없으세요?”

“네? 그럴 리가요. 한 번만 더 결제 해봐주시면 안 될까요? 그럴 리가 없어서요.”

“카드 다시 한 번 줘보시겠어요?”


방금 내밀었던 카드를 점원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고객님, 여전히 사용정지라고 떠요.”

“그럴 리가······. 그럼 이 카드로 결제해주세요.”


이상하네. 카드가 사용정지라니.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죄송하지만, 이 카드는 잔액부족이라고 뜨네요.”

“잔액부족이요?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내 눈에 비친 혼란을 읽은 건지 점원이 알아서 잡고 있던 카드를 다시 한번 카드기에 긁었다.


“잔액부족 확실해요. 다른 카드 있으세요?”


십년을 먹고 쓰고 자고 해도 남을 그 많던 돈이 도대체 어디로 증발했다는 거야.

할아버지와 엄마가 남겨준 소중한 유산인데······.

러시아에서 여행할 때 빼곤 소중히 아껴만 썼는데. 오히려 알바해서 용돈은 내가 벌어서 썼음 썼지, 허투루 쓴 적이 없다.

사실 100대만 생산한 LJ1을 전부 구매해도 남을 정도로 그렇게 많은 수백억대의 현금이,


‘어디로 증발했단 말인가.’


혹시 이모가 좋아하는 부동산에라도 투자한 걸까.

만약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충격에 목소리가 저절로 퍼석거리듯 나갔다.


“잠시······. 전화를···.”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뚜뚜.


이번엔 이종사촌 나영이에게 전화를 돌렸다.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뚜뚜.


그 편한 컨트롤 씨, 컨트롤 브이를 하필 이럴 때 만나네.

······잘못 걸었나? 번혼 맞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릿속으로 외우고 있던 번호를 눌러 두 사람에게 차례로 다시 전화를 했다.

여전히 없는 번호였다.


‘대체 어찌된 일이지?!’


카드정지에 잔액부족에, 정말로 없는 번호라니?

이모랑 나영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고객님, 뒤에 다른 고객님이 기다리셔서요. 더이상 다른 카드 없으시면 현금 결제하시겠어요?”


맞다, 결제해야지.

혼이 나가는 바람에 생각을 못했다.


“잠깐만요. 지갑 봐볼게요.”


지갑에는 천 원짜리 두 장과 만 원짜리 한 장뿐이었다.

이모가 하도 카드 사용을 권장하다 보니 현금을 잘 안 들고 다니던 게 화근이었다.

어쩐다······.

아 참. 오늘 면접보고 나오면서 받은 면접비가 있잖아.

팔에 걸고 있던 파우치 백에서 하얗고 길쭉한 소봉투를 꺼냈다.

5만 원 지폐 한 장.

됐다. 이거면.


“계산해주세요.”


그런데 파이는 어떻게 산다 쳐. 차비는?

아, 진짜 맹꽁이.

뒤돌아서는 점원을 말로 붙잡았다.


“아니. 저 잠깐만요. 죄송하지만, 파이를 못 살 거 같아요.”

“구매취소는 어-.”

“이 맹꽁이. 한국에서도 이러고 있네. 이걸로 계산해 주시죠.”

“······!”


중저음의 목소리가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화살촉처럼 귀에 꽂혔고.

동시에 상쾌한 시트러스 향과 함께 목옆으로 팔이 쑥 들어오더니 눈앞에 금색 카드가 불쑥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날선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아이 참, 카드는 뭐고. 또 어디서 들어선 맹꽁이래. 누군데······.”


소리치며 방금 전 귀를 놀라게 한 목소리와 금색 카드의 주인이 누군지 궁금해서 홱 뒤돌아섰다.

그러다 뭔가에 쿵하고 부딪혔다.

시트러스 향이 코를 강하게 자극했다.


“아얏!”


방금 박은 건, 철벽인가?

뭐가 이렇게 딱딱해.


‘아이, 아파.’


이마를 손으로 쓱쓱 문지르며 고개를 젖혀 올려봤다.

철벽은 인간이었고.


“어···어···어어?”


그만 나는 어버버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철벽’이 가벼운 한숨을 내쉰 후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밝혀왔다.


“러시아 백수다.”

“······.”

“기억하지? 요 맹랑한 맹꽁아.”


놀람이 가시지 않아 그저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일각에 하나의 놀라움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또 다른 놀람이 질문의 형태로 그 빈자리를 재빠르게 채웠다.

질문을 먼저 내뱉기 전에 문득 철벽이랑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 날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벽을 타고 넘을까 싶어 뒤로 두 발 물러서며 말했다.


“알아······ 봤어요?”


‘뭘 말하냐’는 그의 두 눈동자를 천천히 번갈아 쳐다봤다.

그저 궁금한 눈빛.

살 뺀 걸 인지 못했나? 설마······.

뭐 어쨌든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필욘 없잖아.

굳이 나서서.


‘난 그대론데.’


“아녜요.”

“그래. 네가 아니라면.”

“근데 여긴 어떻게?”

“러시아에서도 그렇게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더니. 면접장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얼굴에 지금 나 완전 ‘곤란해요’라고 울상을 짓고 있는데 어떻게 몰라보겠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데.”


상황들이 나를 알아보게 했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러시아에서 얼마나 많은 지점이 있었던가. 그가 나타났던······ 반전의 순간들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내 외모가 이렇게나 많이 바뀌······.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멍하니 말을 하지 않자 그가 혼자 대화를 채워갔기 때문에.


“오랜만에 보니깐 되게 어색한가보다.”

“······.”

“······그리고 맹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냐? 만약 있다면, 누군지 모르겠지만 맹꽁인 나만 부를 수 있는 거라고 앞으론 절대 부르지 말라고 전해라.”


그는 더이상 면접장에서 봤던 그 날선 분위기 깡패가 아니란 것을, 러시아에서도 그렇게나 묻히고 다니던 ‘몹쓸 매력’을 한가득 묻힌 자체 발광 입술로 증명했다.


‘그래. 바로 이랬어.’


러시아에서 만난 백수는.

말도 많았고, 사람을 놀릴 줄도 알았다.

그리고 웃기도 잘 웃었다.

지금처럼.

물론 모스크바에서의 세 번의 만남과 이름만 물으면 말이 없었던 것만 빼고.

성격도 그렇고 반전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는-.

백수는, 반전······.


“남.”


그가 내내 마주보던 눈을 옆으로 돌리며 어딘가 놀란 듯한 목소리로 ‘남. 남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입에서 말이 세어버렸구나. 저 입을 쳐다보다가.

나는 고개를 아주 세차게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아녜요. 그게 아니에요. 반전남.”

“반전남?”

“네. 반전남이요.”

“누구? 내가?”


앗. 실수.

충격의 도가니다. 오늘은.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사실을 말해 내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말은 벽을 넘었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반말은 쥐가 듣는데. 난 반말 같은 건 안하는 교양 있는 바른 소녀.

윽. 이 상황에서 셀프 칭찬은 좀 아니지 않나.

아무튼 까짓것, 뭐 어때.

낮말을 새가 들으면 최소한 칭찬은 받겠지.

그러나 생각보다 말은 기어들어갔고 시선은 아래로 떨구어졌다.


“······러시아 백수는······ 반전남 같기도 하고. ······ 또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가 하하핫, 웃었다.

말도 안 되게 크게.

그러다 불쑥 확인사살을 날렸다.


“그거지?”

“······?”

“오여수의 ‘운명의 남자’ 같은 거?”


영화 좀 봤네, 봤어.

모를 줄 알았더니.

어쩔 수 없이 횡설수설, 화제전환만이 살 길인가.


“아이고. 그거 절대, 절대 아니고요. 아까 면접 때 못 알아본 거 맞죠? 정말 아주 까암짝 놀랐잖아요. 백수가··· 그러니깐, 왜, 거기 있었냔 말이죠.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어요?”

“그건 당연-.”

“진짜 스토커 아니에요? 러시아에서부터 아무 때나 불쑥불쑥 나타나질 않나. 구해주질 않나. 이 면접도 사기 아닌가요?”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지만 차라리 꿈이나 사기였으면.

좋겠다. 뱉은 말도 웃으며 안녕하고, 면접도 원점으로 돌릴 수 있을 테니깐.

잠깐 생각을 하느라 생긴 틈으로 그가 반격을 해 들어왔다.


“구해주는 건 스토커랑은 거리가 멀지 않나. 면접은 사기 아니고 리얼이고. 이름뿐이겠냐. 너의 신상명세서까지 다 꾀고 있다면 어쩔래. 그리고 네 이름 한 두 번 들은 게 아니야. 넌 모르겠지만. 또 아까 면접 때 너 알아보고 생수도 줬잖아. 진짜 딸꾹질을 어찌나 심하게 하던지. 잊을 수가 없다. 민망해서.”


이건 뭐.

따발총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나는,


“끝났어.”

“뭐가 끝나, 이 맹꽁아. 몸 좀 비비 꼬지 마.”

“면접 너무 못 봤잖아요. 딸꾹질에다가. 너무- 바른 말만 해댄 거 같아서요.”


난 바르고 교양 있는 소녀니깐 바른 말은 어쩔 수 없었지만.


“어. 진짜 못했지. 너. 눈 뜨고는 차마 못 볼 정도로.”


얄미운 표정으로 그가 사실만을 콕콕 짚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완벽히 인정할 수 없었다.

눈 앞에 있는 면접관의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난 나대로 LJ1의 광고 카피만은 마음에 들게 대답한 거 같아서.

그래서 속으론 흥, 칫, 뿡을 외치고 눈은 가늘게 뜬 채 살짝 흘겨보며 대꾸했다.


“더 이상 취준생의 꿈을 짓밟진 마시죠.”


작게 웃음을 토해내고선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화를 전환시켰다.


“언제 올라가냐?”


그 순간.

불현듯 잊고 있었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이모. 나영이.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안 되는데.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빨리 서울 올라가 봐야 해요.”

“왜?”

“이윤···. 말 못할 그런 게 있어요.”


여전히 은은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그가 물었다.


“그래. 그럼 돈은 있어? 뒤에서 보니깐 많이 없어 뵈던데. 러시아에서처럼.”


그러고 보니 러시아에서도 인생 최대의 금전적 위기가 있었구나.

그때도 어떻게 잘 모면했으니깐.

이번에도 괜찮을 거야.

그나저나 파이는 주문을 했으니 구매는 해야 할 테고.


‘한 판만 살 걸.’


그래도 세 판 안 산 게 어디야.

이번엔 그가 웃음기를 쏙 빼고 물었다.


“없는 거냐, 진짜?”

“완전 없는 건 아니고요. 한 만 삼천 원?”

“서울까진 일반도 2만은 넘을 텐데?”

“정확히 2만 8천원이거든요.”


내 입으로 아이 씨앗을 뱉을 순 없고.

진짜 ‘요옥’이 나오려 한다.

욕은 언어순환이 맛이지.


“아이셔. 어쩐다지.”

“아이셔?”

“아이셔 몰라요? 맛있는 젤리 있어요. 새콤달콤한 젤리가 엄청 땡기네요, 갑자기.”

“‘아이씨’를 못 말해서 ‘아이셔’란 거지? 아이씨가 욕도 아니고.”

“어허. 예의 없이. 교양 있는 저는 아이셔가 좋거든요. 교양 있는 제가 딱 5만원만 빌릴게요. 아니······. 빌리는 김에 좀만 더 빌리죠. 10만원. 콜?”


백수가 쿡, 웃음을 내뱉었다.


“매우 교양 있어. 완벽한 교양이야. 좋아. 빌려줄게. 내 차 타고 가면.”

“지금 서울 가려고 빌리는 건데···.”


그가 등을 밀어댔다.


“내 차 타고 가.”

“잠깐만요. 파이. 호두 파이는!”

“그건 문제될 거 없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깐. 그러니깐 내 차 타고 가.”


완전 자기 마음대로야.

나도 마음이란 게 있는데. 미안한 마음 같은 거.

받은 게 너무나 많았다. 그 짧았던 러시아 여행 중에.

그래서 앞으로 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주고 버텼지만 몸이 가볍게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거대한 벽에 밀리고 있는 나약한 인간이라. 나는.

하지만 밀리면서도 지지 않으려고 입을 움직였다.


“또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요. 러시아에서도 그렇게 도움을 받았는데 갚을 기회도 안 줬잖아요. 우연히 만나자고 해서 연락처도, 이름도 안 알려줬으면서.”


그의 움직임이 일순 멎어 우리는 마치 ‘人’자를 그린 듯 서 있게 되었다.


“기억하네.”

“기억하죠, 그럼. 우연히 만나자고 그랬잖아요. 그리고 진짜-. 우리 진짜 지금 이렇게 우연히 만났네요. 러시아에서처럼, 한국에서도.”


등 뒤에 있는 그는 대답이 없었다.

표정도 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 우연이란 놈이 정말 많았었네요. 정말로 우리 사이엔. 그런데 어떻게 된 게 그 와중에도 전 아직 연락처도 이름도 모르네요.”


그가 나를 바로 세워준 후 내 앞에 섰다.

우리는 ‘川’자처럼 공기를 물처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했다.


“핸드폰.”

“왜요? 이제와서 번호 찍어주게요? 제 신상명세까지 다 안다면서. 필요할 때 전화하면 되잖아요.”


그는 길고 하얀 예쁜 손을 불쑥 내게 내밀었다.


“줘봐. 직접 찍어주고 싶었어.”


‘필요할 때 걸면 되지’를 불평하면서도 나는 핸드폰을 건넸다.

잠시 후.

그의 핸드폰 벨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 Dreams are my······. (꿈은 나의······.)


이 벨소리-.

이 목소리-.

백수가 서둘러 통화 거절버튼을 누른다. 잔잔하게 울리던 노랫소리가 뚝 예고편처럼 돌연 끊겼다.

짧았지만, 반주 없이 흘러나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익숙하다.

마치 내 목소리 같이.

놀라 핸드폰에 있던 시선을 그에게 옮겼다.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착각일까?


“이온.”

“네?”

“이름.”

“아······.”


평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름이 이온이라니.

온······.

따뜻할 ‘온’ 일까?


“예쁘네요. 이름.”

“예쁘단 말 많이 들어.”

“네. 근데 그 벨소···.”

“시간 없다며. 가자.”

“아니에요. 덕분에 파이 안사도 되서 충분히 서울까지 혼자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러니.”

“가자.”


러시아에서처럼 그의 ‘가자’ 본능이 ‘on’한 모양이다.

나쁜 의도보단 돕고자 하는 의도가 크겠지.


“오늘만 마지막으로 신세질게요. 진짜 다 갚을 게요. ······나중에 언젠가.”

“그건 두고 봐야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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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신은 알바 중 (1) 19.12.31 140 4 15쪽
8 가자 (2) +1 19.12.30 168 4 16쪽
7 가자 (1) +2 19.12.29 166 4 16쪽
6 왜 이렇게 애볐냐? 19.12.28 188 5 16쪽
» 러시아에서 만난 그 남자 (3) +1 19.12.27 218 4 17쪽
4 러시아에서 만난 그 남자 (2) 19.12.26 238 4 15쪽
3 러시아에서 만난 그 남자 (1) +1 19.12.25 300 6 19쪽
2 반전 시작 (2) 19.12.24 364 6 16쪽
1 반전 시작 (1) +3 19.12.23 695 7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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