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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입니다.

반전여신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벨라송
작품등록일 :
2019.12.23 21:10
최근연재일 :
2020.04.17 14:59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4,956
추천수 :
158
글자수 :
40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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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3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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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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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6쪽

가자 (2)

DUMMY

「너. 나랑 가자.」


난롯불에 내 애간장이 형태도 없이 녹아버리기 전에 떨어져야겠어.

객실 문 앞에서 나란히 서 있던 이온에게서 조금이라도 떨어지기 위해 재빨리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어딜요?」

「여기 보다 좋은 데.」

「객실에 대한 선택권이 이제라도 주어진다면, ‘여기 보다 좋은 데’ 보다는. 보시다시피 지금 필요한 건 안전인 거 같지 않아요? 」


고개를 살짝 틀어 나를 사선으로 내려다보며 그가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 내렸다.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아니면 계략이라도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거기가 안전하기도 할 걸? 아마도.」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면 못가요. 차장 아줌마랑 그 슈퍼마리오 닮은 경찰 아저씨도 계속 순시 돌 거 같고. 크리스마스이븐데 빈 객실이 있을 거 같지도 않고요. 혹시 막 어두컴컴한 짐칸에 떠다밀려고 하는 건 아니죠?」

「아까부터 강제국제추방이며 강제노동 수용소며. 넌 무슨 영화를 보는데 생각하는 게 다 그 모양이냐. 영화 좀 끊어라. 도와주려는 사람 한 방에 나쁜 놈 만들지 말고. 이 맹꽁아.」

「맹꽁이 아닌데···.」


말도 못 끝냈는데 이온이 나의 등을 밀어 왔던 방향으로 재차 이끌려던 그 순간.

뭐에 신이 난 객실 아저씨들이 새롭게 시작한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며 우르르 좁은 복도로 몰려나와 먼저 이온을 치듯이 밀었고, 그 밀린 힘에 내가 튕겨나가듯 넘어지려던 찰나였다.


「어어어엄마야아아악-!」


내 뒤에 있던 이온이 꼬꾸라진 내 허리를 으스러지듯이 꼭 안는 게 아닌가.


「흡!」


내 뱃살 잡혔어억!

차라리 넘어지는 게 낫잖아!


「이거 놔요오오오옷!」


너무 놀라서 기차가 떠나갈 듯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아차, 싶어 입술을 입안으로 앙 다물었다.


「네가 더 시끄러우니깐. 조용히 해. 그리고 움직이지도 좀 마!」


꼭 집어서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거든요.

안 그래도 입도 꼭 다무는 중이고요.

하지만 그만 놓지.


‘내 뱃살!’


「바동거리지도 마. 진짜 넘어진다. 지금 중심 잡는 중이니깐.」


누가 이렇게 안은 건 처음이라······. 뉴뉴!

뱃살은 또 그렇다 쳐.

내 심장은 또 왜 이러는지.

무슨 드럼통에서 나는 소리마냥 하도 ‘두그두그두그두그두그두그’거려대서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찰 정도였다.

그 와중에 진격의 객실 아저씨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는 우리가 넘어지려는 반대 방향의 복도로 시나브로 작아지고 있었다.

무슨 전우의 동지라도 되나.

뭐가 저렇게 발도 착착, 노래도 착착, 마음도 착착 맞는 버디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보기는 좋았다. 다만, 기차라는 좁은 장소와 새벽이라는 시간만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만취 버디들의 노랫소리가 금세 다시 크게 들려왔다.


「다 됐어요? 다시 오는 거 같아요. 빨리, 빨리.」

「네가 가만히 있으면 금방 끝날 거 같은데.」


그가 한 팔로만 나를 잡고 다른 한 팔로 복도 벽을 집으며 천천히 나를 들어올렸다.


「······그냥 저를 버리세요.」

「내 인생에 버리는 건 없다. 쓰러져 넘어지는 것도 없고. 근데 너 몸에 힘 좀 빼면 안 되겠냐?」


이 악물고 배에 힘을 꽉 주고 있는 중이었는데. 줄일 수 있는 한 최대한 줄여보자는 마음으로.


「왜···요?」

「이 맹꽁이. 네가 힘을 주니깐 꺾인 상태가 유지되는 거잖아.」


아-.

그렇구나.

생각하며 힘을 빼던 찰나.

뚜둑.

그의 몸에서 나는 소리 같았지만 애써 무시하고 그가 한 팔로 꺾인 나를 확 재꼈다.

이윽고 우리는 오뚝이처럼 똑바로 설 수 있었다.

뒤돌아서 그를 보고 인사를 하려는데.

허리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랬던지 그의 얼굴이 피가 쏠린 듯 벌겠다.


「얼굴이. 얼굴이 빨게요. 괜찮은 거예요? 좀 무거웠죠. 그러니깐 내가 버리라고 했잖아요.」


손을 올려 식혀주려고 하자 그가 얼굴을 피하며 딴소리를 해댔다.


「안 다쳐서 다행이다. 잘못하면 얼굴 깨져.」

「깨질 것도 없어요. 허리에서 소리 났는데 괜···.」


말하려는 사이, 우리 쪽으로 다시 가까워진 만취 버디들이 진격을 멈추지 않자 이온이 뒤를 돌아보며‘어서 꺼져’로 시작하여 화려한 러시아 언어를 구사해 버디들의 혼을 쏙 빼놓는 게 아닌가.

그러자 화들짝 놀란 만취 버디들이 연신 미안하다고 외치며 객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렇게 혼미한 복도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러시아어 정말 잘 하시네요?!」

「감탄이 절로 나오지? 언어 쪽에 관심이 많기도 하지만 다른 것도 난 뭐든 빨리 배우거든. 일종의 자연산 AI랄까? 그래서 다들 나를 알파 L-.」


그의 자랑이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나가는 사이 문득 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 절망감은 어마무시하게 커 입으로 새어나가 버렸다.


「내 첫 백허그를······ 그러니깐. 지금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뺏긴 거야? 아니지. 이건 내 생애 첫 허그나 마찬가진걸?!」


내 말을 들은 그는 그 나름대로 황당해 하며 입을 열지 못했고.

나는 나대로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일각이 흘렀고 그가 먼저 어이없는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그렇게 울상 지을 정도로 심각한 일이냐. 어느 세상에 백허그를 기념하는 사람이 있을까. 첫 키스도 아니고. 멍해 있지 말고 아까 있었던 차장실 쪽으로 걸으면 돼.」

「첫 백허그. 제겐 중요하거든요.」


쏘아보며 단호하게 말하자 그가 이상한 말을 했다.


「네 말대로 그렇다 치자. 만약에 맹꽁이 네가 정의하는 허그가 남자와 안은 행위들을 총칭하는 거라면. 내 장담컨대 이게 네 인생 첫 백허그는 아닐 거다.」

「무슨 소리에요?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라는 노래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불현듯!」


그러나 그도 어딘가 말을 뱉어놓고 당황한 눈치인지 말을 추가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너 말야. 아기일 때. 엎어져서 잔 적 많지? 그때 네 아버지도 너를 뒤에서 안아 올렸을 거란 말이지. 뭐 그 윗대 어르신들도 있을 수 있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내가 말한 백허그는 그런 의미의 백허그가 아닌 줄 진짜 모르나?

성인이?


「연인의 백허그를 기다···.」


참나. 생각해보니 방금 전 허그는 연인의 백허그랑은 완전 거리가 먼 거잖아.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며 인공호흡한 거랑 같은 이치인 것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뱉은 겨.

내 무덤을 내가 팠네.


「아, 됐고요. 가자는 그곳으로 일단 갑시다. 앞장서시죠.」

「이상한 생각 좀 그만하라고, 이 맹꽁아.」

「맹꽁이 아니라니깐요.」

「내가 멈추랄 때까지 앞으로 걸으면 돼. 캐리어는 나한테 주고.」

「여하튼 감사합니다. 캐리어는 끌면 되니깐 신경 쓰지 마세요.」

「또 걸려 넘어지기 전에. 그냥 주지.」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순순히 캐리어를 넘겼다.

다시 또 있을지도 모를 민망한 신체적 접촉을 예방하기 위해서.



한참을 걷다 차장실 바로 옆 칸에서 그가 멈춰 섰다.


「어··· 여긴.」


아까 본 1등실이었다.

그래서 내가 차장실에 끌려간 걸 알고 구해줬구나.


「빈자리가 한 자리 남았어. 너 하나 충분히 앉고 누울 공간되니깐 안심해도 돼.」

「빈자리가 남았단 말이에요? 아깐 매진이라며 매표소 직원이 남녀혼용석만 된댔는데? 이거 완전 사기잖아.」

「사기? 매표소 직원이 크리스마스 연휴에 바빠 죽겠는데 거짓말을 하겠냐.」

「그건 또 그러네요. 표에 기입된 여권 번호도 틀리게 적어서 별 일을 겪었더니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튼 사기는 아니겠죠. 당연히.」

「뭘 또 바로 인정해. 내가 예매한 자리다. 2인실이고.」

「다른 일행은 없어요?」

「어. 나 혼자.」

「그럼 혼자서 2자리를 예매한 거예욧!?」

「어.」

「어머. 님의 쓸데없는 낭비 덕분에 자다가 보드카에 절어진 아저씨 셋에게 압사 당 뻔했네요.」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

「뭐. 조금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도와주시긴 했지만 그래도 남녀 둘이 한 곳에서 편히 잠을 잘 수 있을까요?」


말과 함께 객실엔 들어가지 않고 이리 저리 재고만 있자 그가 완연한 웃음을 흘렸다.


「맹꽁아. 내가 오히려 무서워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9등신 몸매 봤냐? 수많은 눈들이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는 걸 넌 모르지?!」


뉘 집 자식인지 모르겠지만 참 잘생기긴 했지만서도. 아까부터 무슨 놈의 자랑을 그렇게 알아서 잘도 하는지.

민망하지도 않나.

유치원생 셀프 장기자랑은 이젠 좀 그만하라는 레이저를 눈빛으로 강렬히 조준.

발사!

피용, 피용-.


「이런 야심한 밤에 그런 저돌-. 그런 시선은 그만두지. 내가 아무리 잘생겼어도 그렇지.」


진짜 한 마디로.

멍-.


「들어가자.」

「그럽시다. 진짜 이 야심한 밤에 제게 무슨 옵션이 더 있겠어요. 아! 밤을 새는 것도 방법이긴 하겠네요.」

「그러든가.」


객실 안은 아늑했고, 깨끗했고, 넓었고. 화장실 냄새도 나지 않았다.

미리 예매만 했어도 나도 1등실에서 편히 가는 건데.

사실 내 잘못이긴 하지. 즉흥적 여행을 선택한 여행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랄까.

그렇게 우리의 새벽은 기차와 함께 아침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객실 침대와 침대 사이의 테이블에 앉아 날을 새기로 했다.

이온도 잠이 안 오는 건지 오는데도 참는 건지. 눕지 않고 벽에 기대 앉아 무릎을 세워 한 팔을 올려놓은 자세로 무표정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시선도 주고받지 않는데 왜 그렇게 어색한지.

학교 도서관 새벽. 아주 크고 넓은 공간에서 나와 한 남학생만 남아 시험공부를 하던 일을 제외하곤 남자 사람과 밀폐된 공간에서 함께 있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공부라도 하면 딱 좋겠다 싶었다. 그럼 집중하느라 어색한지도 모를 텐데.

숨 넘기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뭔 말이라도 나누는 게 마음이 편할 거 같았다.


「고마워요. 덕분에 위기도 잘 넘기고. 편히 갈 수 있게 되어서.」


말을 꺼내자마자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손목에 찬 짙은 파란색 스마트워치를 빼 책상에 얹고는 침대에 누워 등을 돌렸다.


「어. 먼저 잔다. 잘 자라.」


갑작스러운 차가움에 조금 당황은 됐지만 잔다고 하니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주무세요.」


그러고선 시간이 조금 흘렀을까.

모스크바에서 맞은 눈비에 젖었던 옷과 신발들이 불편해져 왔다.

조용히 일어나 캐리어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고 침대 밑에 넣다 보니 기차에서 주는 일회용 실내화가 보였다.

이제껏 젖은 부츠에 발이 불편했는데.

등 돌리고 자는 그가 한 번 더 고마웠다. 직접 준 건 아니지만 1등실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덕분에 받게 되었으니깐.

화장실에서 눅눅한 옷도 갈아입고, 실내화도 갈아 신었다.

머리는 이미 히터에 말려져서 빗는 걸로 만족했다.

모든 게 호텔만큼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몸도 마음도 편안해졌다.

소리를 최대한 줄여 다시 객실문을 열었지만 그가 뒤척거리며 천장을 보더니 깍지를 끼고 머리를 받혔다. 뒤이어 자연스럽게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선 내 쪽을 봤다.


「······내가 깨웠어요? 안 깨우려고 조심했는데.」

「이렇게 시끄러운데 잠이 오겠냐?」

「죄송해요. 이제 다 했어요. 딱 5분만.」

「너 말고. 기차. ······기차가 시끄럽다고.」


그러고 보니 기차가 참 많이도 덜컹거리네, 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러시아는 왜 왔냐?」

「······.」

「보통 러시아는 여름에 많이들 오고, 겨울엔 동남아시아로 가던데.」

「일종의 추억여행으로 온 거에요.」

「첫사랑?」


얼굴 없는 드라이버.

내 첫사랑이자 짝사랑.

날짜도 잊지 못한다. 3년 전 수능 다음 날 우연히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보게 된 이탈리아 몬자 F1 그랑프리 경기.

그는 최고였다.

차로 난다는 게 그런 말일까 싶었다.

결국 그는 그해 FI 우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우승 다음 날 그는 돌연 은퇴했다.

갑자기 나타난 빛처럼 갑자기 또 그렇게 사라졌지.

이름도 얼굴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의 경주 이전과 이후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쳐다보지도 않던 차를, 특히 스포츠카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깐.

한번은. 꼭 한 번은 그처럼 달리고 싶다.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의 경기를 뷰튜브로 시청하곤 하지만 인터넷 포탈을 통해 그를 찾아보기도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러나 그의 프로필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정보 없음을 뜻하는 ‘Unknown’이라고만 기입되어 있다.

만날 수나 있을까?

······설령 만난다고 해도.


「첫 백허그는 없지만 첫사랑은 있다라-. 플라토닉한 사랑이었나 보다?」

「첫사랑과의 추억이라곤 안 했어요. 첫사랑은······ 아마 결코 네버 추억을 만들 수 없는 관계거든요.」

「뭐 그런 게 첫사랑이냐. 짝사랑이네. 짝. 사. 랑. 아니면. 그저 동경이거나. 존경이거나.」


‘동경?!’


머리를 한 대 얹어 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첫사랑이라기보다는 동경이 맞겠구나.’


뭔가 맞는 말을 들었는데도 이율배반적으로 기분이 나빠져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가볍게 흘겨봤다.


「너 아까부터 계속 눈에 쌍심지 켠다. 꺼도 돼. 밝으면 못 잔다.」

「눼눼.」

「······.」

「그러는 은인은 어쩌다 이 한 겨울 꽁꽁 언 러시아까지 오게 된 거에요?」

「추운 게 좋아서.」

「나두 좋아해요. 추운데서 자는 거 특히. 이불 속은 따뜻한데 얼굴 표면은 차가운 그런 느낌이 좋아요. 왠지 그러면 따뜻한 게 배가 되는 느낌이 들어서요.」

「이불 밖은 위험하니깐?!」

「하하. 맞아요. 얼른 침대 속으로 쏘옥 들어가야겠네요.」


말하며 나도 천장을 보고 침대에 누웠다.

기분 좋게 따뜻했다.


「너-. 대학생이지?」

「어? 어떻게 알았어요. 대학생이긴 한데 이젠 취준생이죠. 한 달 후면 졸업하거든요. 은인은요?」

「백수들이 하는 일.」

「아······. 남일 같지 않네요. 저도 곧 백수가 될지 모르거든요. 전 백수 말고······ 백조겠네요.」

「백수나 백조나. 근데 취직 못 했어? 아직?」

「아픈 델 콕콕 집으시네. 네. 아직요.」


이온은 생각이라도 하는 듯 꽤 시간이 흐른 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금방 할 거 같더니.」


금방?

말이 헛나갔나?

그래도.


「고맙네요. 말이라도.」


이온이 다시 벽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몇 시냐? 테이블 위에 시계 좀 봐주라.」

「자기가 보면 될 것을.」

「네가 물건 올려두면서 네 쪽에 더 가깝게 뒀잖아.」


아-.

이불 밖으로 빼꼼히 팔을 내밀어 시계를 잡아 오른쪽 버튼 중 하나를 빠르게 눌렀다.

평소 습관적으로 핸드폰 켜듯이 두 번, 따딱.

하지만 켜진 화면은 까맣게 변하고 그 위로 도드라지는 하얀 숫자들만이 타이머인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보여줄 뿐 현재 시간은 직관적으로 알 수 없었다.


‘뭐지? 녹음 기능이라도 켜진 건가?’


남의 물건이라 혹시 몰라 따로 조작은 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리곤 일어나 테이블 아래 충전 중인 핸드폰을 꺼내 올려 시간을 봤다.


「음······ 4시 조금 넘었어요.」

「잠꼬대는 안 된다. 코 고는 건 더더욱. 자연산 AI라 잘 때도 굉장히 예민하다고.」


뭐래?


「자연산 광어도 아니고 자연산 AI? 뭔 그런···.」

「아까 말했잖아. 자연산 AI라고. 잘 자라.」


긴 다리를 구부린 채 백수 이온은 뒤척임도 없이 금세 잠들었다.

러시아 기차 안의 새벽은 어둡고 길었다. 마치 긴 기차 터널 같이.

내 인생 같기도 하고.

계속되는 상념과 기차 바퀴가 만들어내는 덜컹거리는 소음에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밤을 새야 할 것 같았지만, 나의 ‘슬리핑 센서’는 이 모든 것을 이겼고.

새벽은 지나갔다.

나는 낮게 깔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또다시 잠에서 깼다.


「여어. 오여수.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착 5분 전이다. 일어나지. 안 일어나면 슈퍼마리오 닮은 경찰 부른다!」


● ● ●


저음의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부른다.


“여기야. 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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