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01화: 고원 지대의 풍운 (56)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이쯤 되자, 클리츠의 부하들도 점점 꺼림칙한 느낌에서 벗어나, 프리세아에게 깊은 흥미와 관심을 보이는 눈치였다.
그에 따라 날아오는 시선도 한층 더 징그럽고 기분 나빠지는 느낌이었다.
‘이럴 때는 왜 또 안 무서워하는 거야? 그냥 평상시처럼 다들 날 무서워하고 멀리하란 말이야!’
프리세아는 기가 막히고 황당한 와중에서도, 이제는 정말 깊은 절망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혔다.
대장에서부터 부하까지, 자신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이 불한당들의 표정에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존중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용병으로서 호위해야 할 손님을 바라보는 얼굴이 아니었던 것이다.
앞으로 무슨 나쁜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클리츠, 이 탐욕스럽고 무례한 사내는 절대로 자신을 무사히 플로젠 왕국 영내까지 데려다 줄 것 같지 않다.
지금부터는 스승으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괴로워하는 것조차 분에 넘치는 사치일 뿐이다.
어떻게든 무사히 살아남아서 스승과 재회할 방법만 고민해도 부족할 판이니까.
싫든 좋든 정신을 바싹 차려야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가망이 있는 것이다.
“클리츠 형님, 그만 하십시오. 이 아가씨는 엄연히 우리가 모셔야 할 손님입니다.”
그때 누군가 옆에서 끼어들면서 지극히 못마땅한 듯한 말투로 충고했다.
클리츠 일당은 다들 한창 재미있는데 분위기가 깨졌다면서 짜증스러운 눈초리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클라우스가 나중에 붙여준 카리르라는 부하였다.
“거기다 갈 길이 정말 먼데, 여기서 언제까지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겁니까?”
말투나 태도로 보아, 이 젊은이는 아무래도 클리츠와 진작부터 친하게 지내던 패거리는 아닌 것 같았다.
프리세아는 누군가 자신을 편들었다는 사실보다도, 그 바람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는 것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
“뭐야? 네가 감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해? 내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아?”
순식간에 실실 쪼개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진 클리츠가 버럭 화를 내면서 카리르를 노려보았다.
“잘 아시는 분이, 지난밤에는 그런 황당한 실수를 저지른 겁니까?
클리츠 형님이 지난밤에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술 마시고 놀다가, 이 바보들 하고 같이 인사불성으로 뻗어버리지만 않았더라도, 일이 이 지경으로 꼬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이 아가씨 일행을 어둠을 틈타 조용하고 안전하게 빼돌릴 수 있었을 거란 말입니다.
오늘 쓸데없이 이단 심문관 일당과 싸움이 붙어서 피를 흘리게 된 건, 따지고 보면 전부 클리츠 형님의 잘못이에요.
클라우스 형님이 딱 그 정도만 야단치고 넘어간 건 친동생이라서 많이 봐준 거라는 사실을 정녕 몰라서 그러십니까?
지난밤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으면, 여기서 쓸데 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맡은 일이나 잘 하십시오.”
카리르는 클리츠가 노려보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거침없이 입 바른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 건방진 놈! 감히 날 모욕해? 네가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형님이 정말 딱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술 마시고 노느라 실수한 게 벌써 몇 번째입니까?
실력만 따지면 클라우스 형님 못지 않게 좋은 분이 왜 자꾸 이러는 거예요?”
“이놈이 그래도 정말?”
클리츠는 씩씩거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칼자루를 손으로 꽉 움켜쥐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자기 형과 비교 당하는 것이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클라우스 형님과 제 아버지 모두 시도 때도 없이 클리츠 형님 걱정을 하느라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한 줄 아십니까?
그 분들을 특별히 싫어해서 일부러 괴롭히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이제 그만 철 좀 드십시오.
저 보다 나이가 많은 형님인데, 어째 하는 행동은 말썽꾸러기 동생 같은 겁니까?”
카리르는 전혀 겁내는 기색이 없이 자기 할 말을 다 한 다음, 상대방의 처분에 맡기겠다는 듯 가슴을 활짝 펴고 꼿꼿이 서 있었다.
클리츠는 한참 동안이나 칼자루를 붙잡고 씩씩거리다가, 마지막 순간에 한끝 차이로 간신히 폭발하지 않고 화를 참는데 성공했다.
“그래, 좋다. 클라우스 형과 네 아버지 프리오 아저씨의 얼굴을 봐서 이번만은 참는다.”
겨우 화를 억누르긴 했지만, 클리츠는 무서운 표정으로 카리르를 윽박지르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조심해라. 같이 다니는 동안은 내가 대장이라는 걸 잊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물론입니다. 일만 잘하시면 저도 군소리 없이 복종할 겁니다. 일만 잘하시면요.
그러니까 어서 빨리 출발하십시다. 곧 날이 저물 겁니다.
이 와중에 이단 심문관이 카스트레아 정규군을 데려와서 추격하기라도 하면, 형님한테 복종하기도 전에, 저까지 포함해서 우리 모두 다 죽은 목숨입니다.”
카리르가 다시 한번 재촉하자, 클리츠도 결국 짜증스럽게 부하들을 돌아보면서 명령했다.
“얘들아, 짐 챙겨라! 이 놈 잔소리가 듣기 싫으니 그만 떠나야겠다.”
클리츠 이외의 다른 부하들도 노골적으로 이 잔소리꾼을 적대시하면서 따돌리는 듯한 분위기였다.
좀 전에는 심지어 자신들을 도매금으로 바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다들 투덜거리며 각자의 짐을 챙기는 가운데, 카리르는 프리세아에게 다가와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걱정 말고 함께 가시지요, 아가씨. 제가 최선을 다해서 안전하게 남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프리세아는 과연 이 젊은이를 믿어도 좋을지 몰라서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입 바른 소리를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카리르 또한 기본적으로는 화산 용병단의 일원이 아닌가?
이 무례한 불한당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약자가 되어버린 처지인 만큼, 지금 주변의 용병이란 용병은 전부 불신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든, 장난 삼아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목숨이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니까.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프리세아는 카리르를 따라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절대적인 약자로 산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아주 어렸을 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에게 버림 받고, 혼자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어찌어찌 스승을 만나서 겨우 살아남은 일이 있었지?
스승 곁에서 한동안 편하게 지내면서 옛날 기억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이제는 다시 그때 당시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스승과 재회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한편, 클라우스에게 호되게 당하여 엉망진창인 몰골로 허둥지둥 도망치던 이단 심문관 페트루스는, 해가 거의 저물 때까지 무작정 북쪽을 향해 말을 달리고 또 달렸다.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악착같이 쫓아오는 듯한 공포심에 한번 사로잡히자, 제 아무리 신앙심이 깊은 심문관이라고 해도 자기 자신을 제대로 통제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더 이상 아무도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데도, 가지고 있던 전투 도끼 같은 건 진작에 잃어 버린 채, 그저 무작정 달리고 또 달릴 뿐이었다.
“아, 내가 살았구나! 내가 살았어!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페트루스는 어딘가 깊은 숲 속에서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마치 지독한 악몽에서 간신히 깨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해가 저무는 방향으로 보아 자신이 현재 북쪽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은 맞는 듯했는데, 큰 길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 때문에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와 있다는 불안감 같은 건 금방 사라져 버렸다.
“나는 살아있다. 그러므로 나는 옳다. 나는 살아있다. 그러므로 나는 옳다.”
페트루스는 입버릇처럼 종종 되뇌곤 하는 이 말이, 이번만큼 절실하게 와 닿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터진 그 난리로 인해 다른 수도사들이 다 죽고 자신만 살아 남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 무장 수도사들은 사실 어려서부터 죄를 많이 짓고, 그 무거운 죄를 조금이라도 씻어 보겠다면서 정교회에 들어온 자들이다.
그런 음흉한 속셈을 지닌 자들의 신앙심이라는 게, 절대로 진심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 위대한 불의 신께서는 누가 진실한 신앙을 지녔고, 누가 거짓된 신앙을 지녔는지 정확하게 구분하여, 엄정한 심판을 내리셨던 것이다.
진실한 신앙을 지닌 나는 살아 남고, 거짓된 신앙을 지닌 수도사들은 다 죽어버린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앞으로 수도사를 다시 뽑게 되면, 좀더 진실한 신앙을 지닌 자들을 제대로 뽑도록 해야겠다.
페트루스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지켜주신 신의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위대한 신의 가호가 자신과 함께 한다고 느끼는 순간, 어둠이 점점 내리 깔리는 숲 속에서 혼자서 말을 타고 터벅터벅 앞으로 나가고 있음에도, 갑자기 모든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오히려 잠시나마 신의 가호를 잊고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말이 한 걸음 내딛자마자, 몸이 앞쪽으로 확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이 꺼지면서 사람과 말이 동시에 깊은 땅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오, 신이시여!”
페트루스는 놀란 외침과 더불어, 타고 있던 말과 함께 그대로 깊은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곧이어 말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함정 바닥에 잔뜩 꽂혀 있던, 나뭇가지를 뾰족하게 깎아서 만든 수많은 가시에 찔렸던 것이다.
아무래도 누군가 일부러 파 놓은 사냥용 함정인 것 같았다.
그래도 충성스러운 말이 일종의 고기 방패 노릇을 해준 덕분에, 거기에 타고 있던 이단 심문관은 또 한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신앙심 깊은 주인을 감싸고 대신 죽는 것이야말로, 태어나면서부터 이 말에게 주어져 있던 위대한 신의 사명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 죽는 행복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법.
그렇게 생각하면, 이 말은 절대로 불쌍한 게 아니라, 오히려 많은 피조물들의 부러움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나는 살아있다. 그러므로 나는 옳다. 나는 살아있다. 그러므로 나는 옳다.”
페트루스는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다시 한번 신께서 자신을 지켜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안도했다.
어렸을 때 집에 불이 나서 가족들이 다 죽고 자기 자신만 살아남은 이후, 신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신 가호의 증거는 실로 차고 넘칠 지경이었다.
과거에는 화재에서, 아까 전에는 창칼에서, 지금은 또 가시 함정에서 자신을 보호해주시지 않았는가?
이렇게 거듭해서 신께서 자신을 지켜주고 계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는데, 어떻게 자신이 신의 가호 속에서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자신을 거듭 지켜주신 위대한 신께 더더욱 봉사와 헌신을 바치기 위해서는 우선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페트루스는 이런 곳에서 신을 위해 헌신할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황급히 깊은 함정을 기어오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함정 바닥에서 신의 사명을 다하고 죽어가는 충성스러운 말의 몸을 밟아서 일종의 받침대로 삼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어떻게든 함정에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가 않았다.
“위대한 불의 신이시여, 저를 지켜주소서! 저를 지켜주소서!”
페트루스가 거듭 신께 기도를 드리면서 안간힘을 쓰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함정 위에서 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람들 여럿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함정 속으로 밧줄이 내려왔다.
이단 심문관은 다시 한번 신의 가호가 확인되었다는 기쁜 마음으로 냉큼 그 밧줄을 부여잡았다.
이어서 사람들이 힘주어 끌어올려준 덕분에, 그는 겨우 함정 밖으로 빠져 나오는 데 성공했다.
“잘했다, 잘했어.
너희가 신의 뜻을 충실하게 받들어 본관을 구해주었으니, 위대한 불의 신께서 충성스러운 너희들을 축복······”
페트루스는 함정 밖으로 나오자마자 신의 뜻에 따라 자신을 구해준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최대한 성의를 갖추어 축복을 내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일순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차림새가 어딘가 굉장히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가만, 이들의 특이한 모습은 예전에 심문관 교육을 받을 때 책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왜 빨리 생각이 나지 않는 거지?
그런데 놀란 것은 페트루스 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함정 위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느닷없이 놀라워하는 외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놈은 이단 심문관이다! 이단 심문관이다!”
아마도 엉망진창으로 찢겨지고 더럽혀진 이단 심문관 제복을 누군가 알아본 것 같았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