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4화: 기사와 용병 (04)
“플로베크, 만약 하루라도 빨리 공을 세워 상급 기사가 되고 싶다면, 다음부터는 감히 주제 넘는 행동을 하지 말게. 자네 부친과의 친분을 생각해서 여기까지만 말하겠네.”
피디아스 군단장의 무서운 눈빛과 중후한 말투는 플로베크마저도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위엄이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보인 다음 막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피에토르에게 안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들려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피에토르는 이것저것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굳이 불만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플로베크 또한 그의 속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으나, 역시 말을 아끼고 명령 받은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정찰병을 내보내. 용병단이 지키고 있는 구릉지대로 가서 우리가 포진하기 좋은 지점을 찾아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이왕이면 언덕 기슭에 숨어서, 용병들도 적군도 우리를 못 보게끔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지만, 적어도 나를 비롯한 몇 명은 언덕 위에 있어야 한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각하께 내가 충실하게 명령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드려야 할 필요성이 있고, 전술적으로는 적이 내 모습을 보고 규모를 알 수 없는 기병대의 기습을 경계하여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제한 받게끔 만들고 싶다.”
플로베크는 자신의 의도를 숨김 없이 설명했다.
“그러니 너는 지금 당장 믿을 만한 정찰병에게 일러서, 내가 있을 만한 언덕 위의 장소와 나머지 아군 기병대가 숨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보라고 해라.”
피에토르는 즉시 고개를 숙여서 명령을 받은 다음, 시킨 대로 처리하기 위해 떠났다.
혼자 남은 플로베크는 주둔지를 가로질러 자신의 막사로 걸어갔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피디아스가 자신을 썩 좋지 않게 보고 있음을 다시 확인한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했다.
플로젠 왕국의 법률에 따르면, 정식 기사에서 상급 기사로 진급하려면, 무엇보다 성이나 요새를 함락시켜 왕국의 영토를 넓히는 공적을 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필수 조건일 뿐. 그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시킨 다음에는, 다른 상급 기사들의 추천을 받고 엄격한 심사를 통과하는 등의 까다로운 절차가 기다리고 있다.
다시 말해, 하루 빨리 상급 기사가 되고 싶으면, 피디아스 같은 영향력이 막강한 유력 인사의 눈에 드는 것이 유리한 것이다.
문제는 자신에게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상관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플로베크가 타고 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혀 배운 적이 없는 분야라는 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전공을 세우는데 전념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인 10월 15일, 한바탕 큰 전투가 벌어질 예정인 이날은 정말 날씨가 화창하고 좋았다.
플로베크는 피디아스가 있는 군단 본진과 선발대인 용병들의 중간쯤에 위치한, 전장을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 위를 골라서 자리를 잡았다.
부하들은 모두 말에서 내린 채 언덕 아래 으슥한 곳에 숨어 있었으며, 명령만 떨어지면 즉시 말에 올라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날씨 참 좋구나. 야유회를 하기에도 좋고, 공을 세우기에도 좋고.”
붉은색의 화려한 갑옷을 걸치고 긴 창으로 무장한 플로베크는, 이 일대 전장에서 그 누구보다 돋보이는 존재였다.
몸에 걸친 미늘 갑옷은 화창한 햇살 아래에서 마치 불이 붙은 듯 빛나고 있었으며, 2개의 작은 가지가 달린 창날은 평범한 철이 아니라 값비싼 페룸으로 만들어 마치 벌겋게 달아오른 숯 덩어리 같았다.
플로베크는 말을 타고 언덕 위를 한동안 오락가락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적군과 아군 모두에 최대한 노출시킨 다음, 말에서 내려 종자에게 고삐를 맡겼다.
그리고 안장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예전에 정식 기사가 된 기념으로 아버지가 소디아 행상인에게 좋은 말 몇 필에 맞먹는 거금을 주고 사서 선물해준 귀중품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솔직히 이곳 지형이 마음에 안 들어. 보이지 않는 곳이 너무 많단 말이야.”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구릉지대를 망원경으로 살피던 플로베크가 투덜거렸다.
“군단장 각하께서 이미 주변을 철저하게 정찰하라고 하셨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글쎄. 정찰병도 쓸만한 놈들은 전부 니나레스로 불려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 아니던가?”
플로베크는 지형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망원경을 돌려 양쪽 군대의 전열을 최대한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쪽저쪽 모두 정면으로 힘 싸움을 한번 해보자는 듯 기세를 올리고 있었는데, 용병단쪽이 조금 더 높은 곳에 포진해 있어서 일단 다소 유리해 보였다.
반면, 무법자들은 보병을 중앙에, 기병을 좌우 날개에 배치하고, 용병들이 내려와서 정면으로 덤벼들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화산 용병단과 황야 무법자들의 대결이라, 이름만 들으면 싸움깨나 하는 놈들끼리의 멋진 한판 승부가 될 것 같은데, 이건 완전히 거지와 거지의 싸움 같은데.”
플로베크는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용병단과 무법자 집단 모두 대부분 갑옷과 무기가 낡고 초라했다. 적을 죽이고 약탈한 물건을 그대로 사용하는 건지, 장비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도 않았다. 다만, 전문 싸움꾼들답게 사기는 높고 기세도 흉흉하기 그지 없었다.
“대장님의 그 비싸고 화려한 갑옷에 비하면 저나 우리 기병대도 거지 같아 보일 겁니다.”
피에토르가 이번에도 빈정대는 말투로 플로베크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다.
“무법자 일당은 도대체 왜 이런 가난한 곳으로 쳐들어온 걸까? 남쪽, 서쪽, 심지어 북쪽으로 가도 훨씬 더 부유한 땅이 있을 텐데······”
“글쎄요. 무슨 원대한 전략 같은 게 있을 리는 없고, 단지 우리가 가장 만만해 보였을 뿐이 아닐까요?”
플로베크는 문득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피에토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만하다니, 너, 우리 왕국에 군단이 몇 개 있는 줄 아냐?”
“물론이죠. 수도에 있는 근위 군단까지 포함해서 21개 아닙니까?”
“모두들 피땀 흘려 고생해 가면서 많은 군단을 유지하고 있는데, 무법자 놈들이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있다면, 그 이유가 뭘까?”
“말씀하셨잖아요? 가난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이유는 또 뭘까?”
“사방이 적국이라 수시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교역도 그다지 많이 하지 않는데다가, 인구에 비해 많은 병력을 유지하느라 힘이 드니, 나라가 가난해지지 않을 턱이 없지 않겠습니까?”
플로베크는 자신이 태어나서 충성을 바쳐야 하는 나라가 이렇게 가난하다는 게 최근 들어 굉장히 서글프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거듭된 전쟁을 통해 영토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전체적으로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는 상황. 과연 이대로 정복 전쟁을 계속하는 의미가 있을까?
지금까지는 전투에서 공을 세우는 일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당연히 아직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런 가난한 나라에 관심이 있는 외부인도 있나 보군요.”
그때 피에토르가 멀리 떨어진 절벽 위를 가리켰다. 사람 몇 명이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씩 햇빛이 무언가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망원경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플로베크는 망원경을 그쪽으로 향했다.
“소디아 행상인들 같은데, 이 망원경으로는 더 이상 자세히 안 보여. 틀림없이 자기네들만 좀더 배율 좋은 망원경을 쓰고 있겠지? 저놈들 속은 도대체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가끔씩 신기한 물건을 팔아주는 건 좋은데, 전투가 벌어졌다 하면, 뭣 때문에 저렇게 구경하러 오는 걸까?”
“성 실레지아 신전을 관리하는 소디아인들은 문명의 감시자로서, 대륙 전체의 정세를 살피고 대협정의 준수를 감독할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네들 말에 따르면요.”
“뭐? 대협정의 준수? 그딴 걸 누가 신경 쓰나? 아, 그러고 보니, 저 북쪽에서 새로 즉위한 여왕이 대협정 시대로 돌아가자는 소리를 하긴 했다지?”
그러는 동안, 전장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제대로 된 군악대 같은 건 당연히 없었고, 이쪽저쪽에서 사기를 높이기 위한 함성 소리가 서로 경쟁하듯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놈들이 배신하면 정말 다 죽이러 가실 겁니까?”
피에토르가 문득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아무리 거지꼴을 하고 있어도, 저놈들은 싸움에 이골이 난 놈들이야. 우리는 겨우 200명뿐인데, 용병 1천명을 다 죽이려 들면 희생이 얼마나 크겠나?”
“그렇다면 명령을 거역하실 겁니까?”
“기다려 봐. 내 생각으론, 최소한 카라만이 오늘 이 자리에서 배신할 것 같지는 않아.”
“카라만을 신뢰하십니까?”
“적어도 불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카라만의 동생 칼루스는 믿지 않아. 어쩌면 그 자가 자기 형의 뜻을 거스르고 마르칸과 내통하여 카디르를 넘겨주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어.”
“저도 칼루스, 그 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칼루스가 배신했을 가능성은 일단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고. 지금 중요한 건, 카라만이 성질이 좀 급하긴 해도 바보는 아니란 점이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자가 오늘 이 전투에서 배신할 이유를 떠올릴 수가 없어.”
플로베크는 망원경으로 카라만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등에 두 자루의 묵직한 철창을 엇갈려서 짊어진 채 말에 올라 적진을 노려보고 있는 그는, 과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때 뜻밖에도 무법자들의 전열에서 누군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저기 누가 나왔나 한번 보십시오.”
피에토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플로베크는 이미 망원경으로 그쪽을 바라보면서 웃고 있었다. 투구도 쓰지 않고, 소매 없는 가죽 갑옷만 걸친 소녀가 자기 키보다 더 큰 언월도를 들고 힘차게 휘두르면서 말 위에서 용병들을 도발하는 중이었다.
“아, 저게 그 유명한 마르칸의 딸이겠지? 어렴풋이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름이 뭐라던가?”
“아마도 카렐리나일 겁니다. 싸움마다 종종 나와서 상대방을 도발하고 자기네 패거리의 사기를 올리는 역할을 맡는다고 들었습니다.”
“카렐리나? 왜 동부인 같은 이름이지?”
“밀레디아 왕국이 멸망할 때 반란에 휩쓸려 죽은 엄마가 동부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외모도 중부인보다 동부인 쪽에 가깝다고 하니, 마르칸이 일부러 그런 이름을 붙여준 거 아닐까요?”
“설마 자기 부인을 추모하는 의미는 아니겠지? 저 늙은 무법자가 그렇게 정이 많을 리가······”
플로베크는 잠시 망원경을 돌려서 적진 한가운데에 있는 마르칸의 커다란 대장기를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낡고 찢어진 옛 밀레디아 왕국의 대장군 깃발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악명이 높긴 하지만, 적어도 이미 망해버린 자기 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만큼은 진짜인 것 같았다.
“마르칸이 마흔 넘어서 낳은 딸인데다, 자기 어머니를 닮아서 제법 미모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저 무법자 놈들 사이에서는 완전히 공주님 같은 존재랍니다.”
“공주님 좋아하네. 마르칸이 싸움터에서 사기를 올리려고 예쁜 딸을 이용하는 거겠지. 올해 나이가 몇이래? 혹시 알고 있냐?”
플로베크는 그 대담한 소녀 쪽으로 다시 망원경을 돌렸다.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성인식을 치렀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16살 정도가 아닐까요?”
그러는 동안 마르칸의 딸 카렐리나는 한참을 뭐라고 뭐라고 신나게 소리치더니, 아예 말에서 내려서 용병들 전열 쪽으로 성큼성큼 몇 걸음 걸어왔다.
그걸로도 모자라, 언월도를 땅에 꽂아 놓은 다음,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 있으면 덤벼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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