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88화: 고원 지대의 풍운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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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왜 그래? 많이 다쳤냐?”
크로토스는 플라테스가 넘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얼른 자기 친구의 다리를 살펴보았다.
그는 왼쪽 발목을 삐었을 뿐만 아니라, 넘어지면서 얼떨결에 오른쪽 무릎으로 땅을 짚는 바람에 그곳에 타박상과 찰과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잠깐, 잠깐, 잠깐만 숨 좀 돌리게 해줘.”
당사자인 플라테스는 발목의 통증이 너무 심한 나머지 한동안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물론 엄청난 중상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양쪽 다리에 모두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문제였다.
가뜩이나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이렇게 다치기까지 했으니, 이제 당분간은 전혀 걸을 수조차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난 여기 버려놓고 너희들끼리 도망 가! 놈들의 주된 표적은 바로 너야.
그러니까 나 혼자라면, 이단 심문관에게 붙잡힌다 한들 설마 죽기야 하겠냐? 기껏해야 평생 감옥에서 썩을 뿐이겠지!”
플라테스는 고통스러운 듯 계속 숨을 헐떡이면서 완전히 인생 다 포기한 사람처럼 말했다.
“아니, 이 놈아! 우리가 그래도 몇 년을 친구로 지냈는데, 이런 산중에 다친 널 내버려두고 어떻게 혼자만 도망가란 말이냐!
나중에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간다고 해도, 최소한 어디 사람 사는 곳까지는 함께 가야 할 거 아니야?
맥 빠지는 소리 하지 말고, 제발 힘을 좀 내 봐!”
크로토스는 절대로 버리고 갈 수는 없다면서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말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플라테스를 업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 멍청한 놈아! 날 업고 어떻게 이 밤중에 산길을 가겠다는 거야? 그만둬!”
플라테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사코 업히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렇게 잠시 실랑이가 벌어지자, 보다 못한 프리세아가 옆에서 자기 스승을 말리고 나섰다.
“스승님의 체격이 아무리 건장하다고 해도, 플라테스 교수님을 업고 한밤중에 산길을 가는 것은 불가능해요.
조금만 실수해도 환자가 둘로 늘어날 수 있다는 걸 모르세요? 진정하시고, 일단 이 주변에서 어디 숨을 곳을 찾아봐요.
조금 쉬다가 날이 밝으면, 주변 지형을 살펴서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요. 네?”
프리세아가 워낙 맞는 말을 했기 때문에, 크로토스도 결국 자기 친구를 업고 한밤중에 산길을 걸어가려는 무모한 생각을 버렸다.
그 대신,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나서서 근처에 숨을 곳이 없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 캄캄한 밤중에 어디서 갑자기 숨을 곳을 찾는단 말이야? 너희 둘 다 바보가 된 거 아냐?
날 내버려두고 어서 멀리 도망치라니까!”
고통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닌 것일까? 주저 앉은 플라테스는 듣는 사람 힘 빠지는 소리만 계속 늘어놓고 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얄미우니 그만 좀 하라면서 한 소리 했겠지만, 지금은 나머지 두 사람 모두 깨끗이 무시했다.
어둠 속에서 온 신경을 집중해서 숨을 만한 곳을 찾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크로토스와 프리세아는 희미한 달빛과 별빛에 의지하여, 손으로 여기저기 더듬어 보기도 했고, 기다란 나뭇가지로 빈 공간이 없는지 이리저리 쑤셔 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둘 다 손이 엉망진창으로 긁히고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있어요! 있어요! 숨을 곳이 있어요! 여기 토굴이 있어요!”
다행히 프리세아가 멀지 않은 곳에서 우연찮게 작은 토굴 입구를 발견했다.
“정말이네! 너 저런 걸 어떻게 찾았냐?”
얼른 다가와 토굴 입구를 확인한 크로토스가 감탄하면서 말했다.
언뜻 봐서는 찾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토굴이었는데, 그야말로 기적 같은 발견이었다.
자연적으로 생긴 건지, 아니면, 예전에 누군가가 은신처로 쓰려고 파 놓은 건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몸을 피할 곳이 생겼다는 게 중요했으니까.
몸집이 작은 프리세아가 먼저 토굴 안으로 기어 들어가서 이리저리 더듬으며 상태를 살펴보았다.
별로 넓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세 사람이 웅크리고 들어가서 숨어 있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답답하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밤이슬을 피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릴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였다.
거기다 입구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점도 안심이 되었다.
플라테스는 다른 두 사람에게 거의 질질 끌리다시피 하면서 토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통증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건지, 여전히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고 부정적인 소리만 계속 늘어놓았다.
“이 바보들아! 너희들 지금 큰 실수하는 거야! 나를 여기 내버리고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갔어야지!
날이 밝으면 틀림 없이 후회하게 될 거라고! 그때 가서 날 원망하지 말란 말이야! 알아 듣겠어?”
크로토스는 자기 친구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것을 들으면서, 안타까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여러 차례 타이르고 또 타일렀다.
“제발 그 입 좀 닥쳐라.
여기다 널 버려두고 가면, 평생 죽는 것보다 더 크게 후회하게 될 것 같아서 이러는 거란 말이다.
만약 너였다면, 내가 다쳤다고 혼자 도망칠 수 있겠냐?
부탁이니까, 입 다물고 조금이라도 기운 차릴 궁리나 하란 말이야! 제발!”
“젠장, 이놈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착한 척을 하는 거야. 젠장.”
플라테스도 자기 친구의 정성에 감동했는지 마침내 눈물을 글썽이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도 말소리를 내지 않았다.
여행의 피로가 워낙 심하게 쌓였기 때문일까?
컴컴한 어둠 속에서 사방이 조용해지자, 이런 급박한 와중에서도 다들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7월 14일 이른 아침,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산길 저편에서, 갑자기 여러 사람이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잠깐 잠이 들었던 세 사람은, 그 소리에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저기 넘어진 흔적이 있다! 그 배교자 놈이 멀리 도망치지는 못했을 거다!”
어지럽게 떠들어대는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 퍼뜩 이런 문장이 똑똑히 귀에 들어왔다.
이단 심문관 일행이 여기까지 뒤쫓아온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당장 머리를 스쳤다.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한 일이었다.
걱정했던 일이 막상 현실로 닥쳐오자, 플라테스조차 그러니까 진작에 자기를 버리고 도망쳤어야지 하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크로토스 그 놈을 찾지 못하면 모두 이 산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해라!”
곧이어 들려오는 또 다른 말소리는 더 섬뜩한 내용이었다.
세 사람의 머리 속에는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러나 추격해 오는 목소리가 너무나 빠르게 가까워졌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숨을 죽인 채 토굴 안에서 계속 웅크리고 있는 것이 최선일 듯했다.
“그 더러운 배교자 놈을 추적하느라, 우리 모두 그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했다!
오늘, 반드시 그 놈을 잡아서 고생을 끝내야 한다!”
누군가 이를 갈면서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토굴 앞에서 가슴 떨리는 인기척이 났다.
크로토스가 밖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아주 조심하면서 슬쩍 내다보니, 정말로 카스트레아 정교회 소속의 무장 수도사가 쫓아온 게 맞는 것 같았다.
언뜻 보이는 사람의 복장과 무기로 미루어 거의 틀림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잠시 후, 토굴 앞의 인기척은 여러 명으로 늘어났다.
무장 수도사들이 사방팔방을 이 잡듯이 수색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아무도 이 토굴 입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기적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배교자 크로토스를 잡으면 큰 상을 받을 수 있다!”
“명심해라! 놈을 찾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산을 내려가지 못한다!”
“모두 죽을 각오로 힘을 내라!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고생하자!”
그래도 무장 수도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서로 열심히 격려하면서 일대를 악착같이 수색했다.
크로토스를 추적하느라 다들 어지간히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떠들어대는 소리들마다 하나 같이 깊은 한이 서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 사람은, 꼭 찾아내고 말겠다는 무서운 다짐들을 생생하게 들으면서, 숨을 죽인 채 토굴 안에 계속 숨어 있었다.
어떻게든 찾아내려는 자와 끈질기게 숨어 있는 자. 양자 사이의 인내심 싸움이 지겹게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날이 훤하게 밝아왔다.
“발자국이 이 근처에서 끊어져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거지?”
무장 수도사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올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다들 며칠 동안 잠을 못 자서 피곤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부주의해서 그런 건지, 의외로 아무도 세 사람이 숨어 있는 토굴 입구를 쉽게 발견하지 못했다.
크로토스, 플라테스, 프리세아 모두 숨을 죽이고 가만히 앉아서 공부를 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거기다 다른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그저 꾹 참고 기약 없는 숨바꼭질을 계속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기기만을 막연히 기다리면서.
“배교자 크로토스! 이 나쁜 놈아! 어서 나와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더 흘렀을까?
해가 제법 높이 솟았을 무렵, 갑자기 무장 수도사 한 명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근처에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당장 나와서 자수하지 않으면, 네 놈을 도와준 이 노인과 그 일가 친척을 모조리 다 죽여버리겠다!”
세 사람은 인질로 잡혀 있는 사람의 얼굴은 당연히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도와준 노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벌써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세 사람이 마음 속으로 그 늙은 마부가 아니길 간절히 빌고 있는 가운데, 어떤 남자의 처절한 비명이 산 속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고통과 공포에 물든 끔찍한 소리였지만, 아무래도 굉장히 귀에 익은 목소리인 것 같았다.
거기다 비명 소리에 이어서, 울부짖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선생님들 죄송합니다! 접니다. 여기까지 태워드린 그 미천한 마부입니다. 제발 자수해 주십시오!
제 조카네 가족과 제 친구들이 전부 붙잡혔습니다. 지금 다들 이리로 끌려오고 있어요.
선생님들이 자수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한 명씩 다 처형당하고 말 겁니다!”
역시나 그 친절한 늙은 마부의 목소리가 틀림 없었다. 세 사람 모두 깊은 절망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자수해 주십시오.
저는 선생님들의 신뢰를 배신한 나쁜 놈이라 죽어 마땅합니다만, 불쌍한 제 조카네 가족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어린 것들까지 다 죽게 생겨서 그럽니다. 어서 나오세요! 제발!”
“세상에!”
크로토스는 늙은 마부가 인질로 잡혔음을 확신하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라테스와 프리세아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착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 착한 노인의 간절한 호소를 무시하고 이대로 그냥 숨어서 버틴다는 것은, 이들 세 사람의 성격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떡하지? 여기 영원히 숨어 있을 수도 없고, 지금 나갈까?”
플라테스가 나직하게 물었다.
“당연히 나가야죠. 저런 착한 사람을 저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요?”
프리세아는 평소 같지 않게 단호한 말투였다.
“물론 우리가 나가서 자수한다고 해도 저놈들이 마부 양반을 살려줄 리는 없겠지. 지금 나가면 결국 다 죽을게 뻔해.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고 저 불쌍한 노인이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이거 우리 모두 감정에 눈이 멀어서 지극히 비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생겼는걸.”
크로토스도 씁쓸하게 웃었다.
“어차피 여기서 버틴다고 해도 조만간 들켜서 끌려나가고 말 거에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착한 사람 목숨이라도 구하려고 시도하는 게 낫지 않아요?
설사 나가서 다 죽는다고 해도, 한번 시도는 해 봐야죠. 그게 왜 비이성적인 판단인가요?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에요.”
프리세아가 이렇게 말하자, 플라테스는 기가 막힌 듯 웃었다.
“너희들은 이런 와중에서도 뭐가 이성적인지 분석하고 있냐? 참 대단하다, 대단해.”
물론 세 사람 가운데 아무도 나가서 자수하자는 것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그만 뜻밖의 일이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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