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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우 님의 서재입니다.

천왕재림(天王再臨)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칠우
작품등록일 :
2014.04.23 08:20
최근연재일 :
2014.06.21 10:39
연재수 :
7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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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716
추천수 :
18,442
글자수 :
348,639

작성
14.04.24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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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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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
글자
19쪽

제 1장 납치(拉致)

DUMMY

마당에 가득찬 봄빛이 오히려 잔인하였다.

푸릇푸릇 올라오는 풀 이파리들은 보름전 무척이나 싱그러웠지만

오늘 적막이 홍건한 마당안에서 숨죽이며 멈추는 듯하다.

그녀가 없는 자리엔 차라리 봄빛 잔인하여 눈시려왔다.

털썩 ...

약초 망태기를 내려놓는다. 미시(未時: 오후 3시)까지만해도 그녀를 위해 귀중하게 품었던 망태기가 던져지듯 흙바람속에 파묻힌다.

지난 보름 동안 태령산맥 구석구석 뒤지며 캐온 천종삼(天種蔘)들이 함부로 들썩인다.

아아, 티끌처럼 살자했거늘 ... 팔자 도망은 못하는 건가 ...

약초꾼 사내가 내심 탄식하며 구석에서 침울하게 떨고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그래, 북천회(北天會)라고 하더냐?"

"...네, 북천회(北天會)라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어요, 훌쩍"

어린 약동(藥童)이 불안과 슬픔에 겨워 기어이 눈물 보이며 울먹인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참, 많이도 두려움과 슬픔을 참았겠지만 그녀가 그리 험하게 끌려가지는 않았는가보다.

겪은 일에 비해서 아이가 자뭇 의연함이 그녀가 끌려갈 당시 평온했음을 반증해준다.

"혹시, 의주(醫主)께서 남기신 말씀 있더냐?"

약초꾼 사내가 약동(藥童)의 눈을 고요히 들여다보며 그녀가 남겼음직한 의사표시를 물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유일한 의원이기 이전에 자신을 부활시켜준 은인이면서 또한, 운명에 의해 의남매를 맺은 의주(醫主), 조수빈(趙秀彬)은 이틀 전 납치 되었다.

북천회가 어디있는지, 어떤 곳인지는 모른다.

그때의 그 일이 있은 후 세상을 끊고 산 지 20년.

세상과 단절한 채 산에서 약초만 캐면서 살아왔었다. 산비탈 오르내리는 그저 흔한 흙바람 한 타래가 자신이라고 만족하였다. 봄볕에 깝치는 티끌 하나인들 어떠랴!

자신은 일체를 벗었으며 일체를 잊었다.

푸른 하늘 아래서 쪽빛 바람따라 산천을 거닐며 세상을 잊었던 것이다.

북천회.....?

이제와서 어찌할 수 없다. 사람은 납치 되었고, 이건 되돌릴 수 없는 사실된 바이다.

부활 이후 약초꾼 사내로서만 살아온 이정민(李正旻)은 어린 약동이 놀라지 않기를 바라며 고요한 신색을 유지하였다.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하라 하셨어요. 그리고, 기다리고 있겠다 하시며 ..."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그래그래,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라, 수빈(秀彬)! 부디 건강 잃지 말아다오. 세상을 벗어났던 내가 다시 세상속으로 들어가노라. 세상을 다 뒤져서 구해내마. 건강하게 살아 있으다오."

독백하는 약초꾼 사내, 이정민의 두 눈 깊이 무섭도록 차가운 불꽃이 착각인듯 피어 오르며 마당뒤로 이어지는 한재령(韓載嶺)으로 향했다.


* * *


"놓쳤다고?"

북천회 내밀한 곳 비찰각(秘察閣)의 각주, 이뇌삼안(二腦三眼) 심기평이 물었다.

오십대 중년에 이른 그의 경직된 얼굴 한켠에는 이번에도 역시 ... 라는 허탈감이 배어나왔다.

"네, 황하를 넘기 전에 어느 시골 의원집에 숨어 상처 치료중인 낙안수사(落雁秀士)를 덮쳤으나 이미 눈치채고 비밀통로로 탈출한 뒤였습니다."

대답하고 있는 찰영주(察令主) 엄상현의 얼굴에는 탈출자를 놓친 실수에 대한 자책감 보다도 뭔가 큰 일을 해낸듯한 성취감도 감도는데...

"그런데, 오음절맥(五陰絶脈)의 여인을 발견하여 데리고 온다는 말이렸다?"

"네, 그렇습니다."

"호오, 그렇단말이지..."

"뜻하지 않게 발견했습니다. 회주님께서 찾으시던 바로 그 체질 아닙니까?"

"그렇지 몇 년 동안 회주님께서 그렇게 찾으셨었지. 수고했네. 비록, 낙안수사는 놓쳤지만 다시 추적하면 될 일... 남의맹(南義盟) 권역에 넘어가기 전에 충분히 따라잡을 터이야 ..."

"회주님께는 따로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오음절맥의 여인 호송 소식에 무척 반가워하신답니다."

"그래, 그러시겠지."

"그런데 한가지..."

"음, 뭔가?"

"그 여인이 일개 의원 신분이었는데 호송 과정에 조금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응, 뭐라고 그랬길래?"

"아직 늦지 않았으니 자신을 원래 위치에 복귀시켜놓아라고 요구했다 합니다. 자신의 납치가 지속되면 곧 엄청난 일을 겪을 것이라며 얼핏 협박조였다고 합니다."

찰영주 엄상현이 말하며 자신도 모르게 피식 거렸다.

"그래? 그깟 시골 여자 하나가 뭐가 그리 대단하여서... 그 여인의 주변 파악은 해보았나?"

이뇌삼안 심기평이 그 특유의 버릇인 고개를 외로 꼬우며 되물었다.

"현재 가족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다만, 의원 내에서 약동으로 일하는 어린 사내 아이 하나와 주기적으로 약초를 캐다주는 이십대 후반의 약초꾼이 식구처럼 지냈다고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저 그런 시골 여자아니겠나... 의원(醫員)이라 좀 다를런가?"

전서구에 매달려온 보고서를 다시 보며 이뇌삼안 심기평의 고개가 좀 더 모로 숙여졌다.

모를 일이었다.

강제로 구인되는 상황에서 시골 여인 하나가 이렇게 침착한 태도를 유지 했다는 것이 무척 이례적이었다.

대체로 두려움에 떨거나 심하면 공황상태에 빠질 터인데 오히려 복귀시켜놓으라며 협박처럼 말한다면...

설마 돌발상황이야 있을라고...

"계속하여 낙안수사를 추적하고 오음절맥의 여인은 곧장 본회로 호송하라고 지시하게!"

"넷, 비찰각주님."

직감에서 오는 일말의 석연찮음을 털어버리듯 비찰각주 이뇌삼안 심기평은 고개들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강북제일의 지자(智者)로 공인되는 그가 털어버리기엔 충분히 가벼운 무게감이었다.

지금까지 북천회를 키워오며 순식간에 강북 무림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강남 무림까지 압박해가고 있는 그가 겪었던 관문과 역경에 비하면 시골 여자 의원 하나쯤은 아무 걸림돌도 안되었다.

다만, 오음절맥이라는 천형(天刑)이자 천혜(天惠)의 신체조건만 마치 천하를 앞 둔 승자(勝者)의 덤처럼 고려될뿐이었는데...

두 개의 뇌를 가진 듯 종횡무진 완벽한 계획을 세워 이뇌(二腦)가 되었고 천하통일을 앞 두면서 더욱 정밀해진 통찰력에 세개의 눈, 삼안(三眼)이 별호에 추가된 북천회 비찰각주 심기평은 비정한 지자(智者) 특유의 역삼각형 얼굴 위에 음침한 여유가 조금씩 흘러 나왔다.


* * *


밤이 되자 어둠내려 검은 고통이 더 비장하다.

한재령 골짜기골짜기에 잠겨오는 묵직한 어둠이 복부에 배어 나오는 핏물따라 소리없이 헐떡인다.

조수빈이라고 했던가?

시골 작은 마을에 의원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약이나 얻고자 몰래 들어간 곳에서 치료까지 받게 되었고 복부 깊숙이 쑤셔오는 통증이 신속하게 진정되자 낙안수사 차기현은 더욱 놀랐다.

보통 솜씨가 아니었고 보통 의원이 아니었다.

정보를 캐기 위해 침투, 암약한 북천회 내에서도 이런 의원의 치료행위와 솜씨는 본 적이 없는 듯했다.

시골 구석에서 작은 의방(醫房)을 운영하며 자신의 위급한 상태를 넘기게 해준 그 미모의 여의(女醫)가 고마우면서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북천회의 추적자들이 의방으로 급습하기 직전에 자신을 빼돌리며 비밀통로로 탈출시키면서 통로를 무너뜨리던 그녀가 고마우면서 걱정되는 것이다.

한편, 정체도 궁금하다.

도대체 누구일까?

평범한 듯하면서도 비범한 면모들이 때때로 새롭다.

의방에 갖춘 비밀통로도 경탄스럽지만 그녀의 의료수준에 더 놀라면서 그럼에도 시골의 작은 약방주인이 틀림없는 것 같아 연이어 어리둥절해지며 그녀의 본신 내력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조직에 속한 냄새는 분명 없었다.

한편, 자신은 구체적으로 말했다.

치료 행위는 북천회의 추적자들에게 발각되어 빌미를 줄 수있으니 그냥 긴급한 의료품이나 나누어 달라며 분명한 위험을 예고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했더라?

자신은 의원(醫員)이며 환자가 누구이든 치료와 생生을 도모해 줄 뿐이라고 했었지.

그것이 자신의 의무이자 의원을 비로소 의원되게 함이라고 했었다.



한재령의 깊은 숲속에서 잠복한 지 이틀.

상처 입은 몸을 추스리며 남의맹 구출조를 대기하고 있는 깊은 밤.

쇄애액-

돌연히 달빛을 가르며 어깨쪽으로 칼날이 떨어져내린다.

아차, 놈들이다.....

"크으..."

화급하게 피하면서 필사적으로 구르며 핏물 터져오는 복부 대신에 가슴의 비밀장부를 움켜잡았다.

이건 낙안수사 차기현에게 굳어진 정보 세작활동 15년의 본능이었다.

어느 새 종적이 노출되었던가?

지독한 놈들,

끈질긴 놈들,

더러운 놈들...

천하가 음흉한 북천회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걸 막아야 한다.

내 품에 은닉한 비밀장부와 내용이 남의맹으로 전달되어 공표되면 천하의 민심이 비로소 진면목을 보일 것이다.

쑤아악-

급히 숙인 낙안수사의 고개 위로 칼날이 머리카락 몇 가닥 흩날리며 지나갔다.

놈들은 이제 말할 틈도 주지 않는다.

말 나누는 짧은 그 틈에 놓친 적이 벌써 몇 차례...

독오른 독사처럼 보자마자 치명적인 독니를 내보였다.

사실은 여기까지 온 것도 요행이리라.

급격하게 뒤트느라 찢어지는 복부 통증을 안고 낙안수사의 성명절기, 낙안비류공(落雁飛流功)을 펼쳤다.


휘리릭- 후룩 .....


숙인 상태에서 허리를 뒤틀며 대각선 방향으로 날아가듯 멀어지는 낙안수사.

언제나 통하던 멋진 그 경공술이 .....

"크하하하, 낙안수사 차기현! 너의 두 다리 먼저 자르고 얘기 들어보마."

낙안수사가 멀어지는 방향에서 붉은 낫 한쌍이 마주오며 흉소가 뒤따른다.

아아, 혈겸잔살(血鎌殘殺)마저...

어느 새 거마(巨魔)까지 동원되어 포위 되었구나.

북천회가 기어이 숨겨둔 흉살(凶殺)까지 공공연히 동원한단말인가.....

오늘 무사히 이 자리를 벗어나긴 글렀는가보다.

어린아이에게서까지 피맛을 본다고 알려진 혈겸잔살은 천의맹의 세력이 와해되며 북천회와 남의맹으로 양분되기 전 무림공적으로 쫓기며 20년전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북천회 소속으로 세상에 출현한 걸 알려지면 강호가 경동할 터...

60이 넘은 저 노마(老魔)가 어떻게 이 자리에 .....

그 짧은 순간에 붉은 낫의 흉험한 예기가 벌써 두 다리로 뻗어온다.

피할 수 있을까.....

이틀을 쉬었지만 격렬한 동작은 아직 무리였다.

더군다나 마음먹고 후려오는 혈겸의 쌍날이 뜻밖이라서 무거운 몸이 미쳐 대응을 못하고 있다.

아직 다리가 잘리지도 않았지만 아려오는 듯하다.

세상이 갑자기 깜깜해지는 것일까?

혈겸의 붉은 빛에 세상이 아득하여 온다.

다리를 잃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낙안수사 차기현은 다리를 오무리며 왼쪽 어깨를 내밀었고 차마 볼 수 없어서 눈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다리 대신에 왼쪽 어깨를 포기한 것이다.

그때였다.


쉬이익-

투캉.. 챙......!


"형님, 소제가 왔습니다."

왼쪽 어깨를 파고들기 직전의 낫 한쌍을 아슬아슬하게 걷어낸 도끼가 되돌아오자 허공에서 잡아채며 거구의 사내가 장내에 떨어져내렸다.

"아앗, 네 놈은 패월부(覇鉞斧) 하상태!"

다잡은 물고기로 알며 득의만만한 웃음을 막 입에 물은 북천회의 추적특명조 추혈대(追血隊) 대장 관중일도(關中一刀) 배현승은 흠칫 놀라며 인상을 썼다.

남의맹의 낙안수사 구출조였던 것이다.

다 된 밥에 재뿌리듯 이런 때에 도착하다니 .....

관중일도 배현승이 아쉬움과 분노를 삼켰다.

"형님,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막겠습니다. 뒤에서 좀 쉬십시오."

부상이 도진 낙안수사를 뒤에 감춘 거구의 패월부 하상태가 연이어 고함친다.

"이놈들, 이익을 쫓아 의로움을 저버리는 비천한 것들... 칼 들 자격이 없는 너희들을 징치하겠노라."

"하하하, 네 놈이 남의맹에서는 오룡 중 패룡(覇龍)이라고 불리우면서 어깨에 힘 좀 줬다만 마침 잘 되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동안의 천둥벌거숭이 작태도 종말을 맞으리라."

크게 한 번 웃은 후 혈겸잔살을 향해서 깊이 읍을 한 관중일도는

"호법님, 저 애송이가 그동안 우리에게 성가시게 굴던 바로 그 놈입니다. 혈겸의 무서움을 보여주십시오."

"크흐흐... 낙안수사도 잡고 저 덩치 큰 어린 놈도 잡고... 오늘이야말로 밥값을 제대로 하겠군."


투챙... 채앵... 이야얏......!


뒤이어 장내에 도착한 북천회의 추혈대 대원 20명과 남의맹의 구출조 10명 역시 서로 도검을 꺼내며 증오의 각오로 마주 휘둘러 갔다.

이제 자신이 죽으리라 여기면 살 것이요,

살리라 여기면 필경 죽을 것이다.


채앵 챙 .....

이정민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야심한 밤 공기에 서늘한 피비린내가 칼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실려 왔다.

소리는 약하지만 꺽어지는 급박함이 생명을 촌각으로 다투는 듯 불규칙하게 튀어 나오자 반나절을 추적하던 이정민은 눈을 빛내며 칼부림 소리가 나는 곳으로 내달렸다.

어둠은 나의 것,

광명(光明)함이 나의 것이 되었을 때 어둠도 나의 것이었다.

세상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번거로움으로 보아서 미련없이 등질 무렵 비로소 소중하게 인식한 그녀, 조수빈.

의남매를 맺으며 그녀 평생의 행복을 지켜주리라 내심 다짐했었다.

그녀를 납치해 간 세상의 무리는 차츰 알게 되리라,

빛과 어둠 그 어느 한 자락도 허락되지 않음을.


한편, 싸움의 현장에서 패월부 하상태는 낭패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출혈이 제법 깊어진 것이다.

바닥을 뒹굴듯이 화급하게 물러선 패월부 하상태가 입술을 깨물었다.

혈겸의 괴이독랄함이 치명적인 변초에 종횡하였지만 더 무서운 건 가벼운 낫에서 오는 묵직한 힘이었다.

패룡(覇龍)으로 만들어준 도끼의 무거움을 가지고 이따금 정면으로 부딪쳐도 끄덕없는 낫을 보며 항상 호탕하게 살아온 패월부 하상태는 형국의 심상찮음을 느꼈다.

혈겸잔살이 북천회의 추적대에 함께 하리라곤 남의맹 수뇌부 회의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혈겸잔살 같은 흉마가 북천회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파악되지 않은 정보였었고 추적대 최대치의 전력을 추혈대 대주 관중일도 배현승이라고 예측했었는데 전대(前代)의 흉마 혈겸잔살은.....


회루룩-!


"이크..."

잠깐 딴 생각하느라고 패월부 하상태의 눈밑으로 붉은 빛이 지나갔다.

다시금 급히 고개를 젖히지 않았더라면 낫 끝에 눈알이 걸렸을 것이다.

또 한번 패월부 하상태의 등으로 식은 땀이 흘러 내린다.

언제까지 대치할 수 있을까...

지금 상황에서는 낙안수사의 구출은 커녕 곧 있으면 버티는 것도 한계가 될 듯하다.

발 빠른 정명수호단 단원 한명과 낙안수사를 묶어서 탈출시키고 남은 전원은 퇴로를 확보하며 산화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알았다.

이익을 위해 의로움을 더럽히는 세상에서 불꽃처럼 산화하리라 맹세하였다.

하지만 그 날이 이리도 빨리 올 줄이야.

멀리 남경에 있는 남의맹(南義盟) 정명수호단 본부에 남은 필승의 행운을 빌면서 마지막 작전명령을 떠올리며 낙안수사를 보는데...

가만 낙안수사 차기현의 표정이 이상하다.

가장 비현실적인 현실을 보는 듯, 표정에서 현실감이 지워진 채 놀란 표정 그대로 고정되어 있다.

저 예리한 형님에게 마치 백치(白痴)같은 표정이 왠일일까...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여태껏 낙안수사를 핍박하던 관중일도 배현승의 왼쪽무릎 아래 족삼리 혈도를 으깨듯 밟고 배현승이 칼을 든 오른 팔을 뒤쪽으로 꺽어서 바깥 방향으로도 돌려놓은 저 허름한 차림새의 사내는 누구지?

좀 전 까지도 없었는데, 언제 나타난 것야.....

마치 산길에서 흔하게 만나는 약초꾼 같은 차림의 젊은 사내가 어느 틈엔가 장내에 등장해 있었다.


"크아악....."

너무나 처절한 비명이 싸움터에 울려퍼졌다.

본래가 칼과 칼이 난무하고 피와 피가 튀는 장소에서 비명소리 또한, 예사롭겠으나 셀 수 없는 격전장에서도 처음 듣는 듯한 소름 쫘악 끼쳐오는 비명소리에 한 순간 싸움이 멈추는 듯했다.

"끄으으....."

아까 보다 더 낮으막한 비명소리임에도 마치 뼈를 긁어오는 듯한 공포가 달빛 아래 소리 없이 흘렀다.

관중일검의 뇌리가 얼어붙은 듯이 느껴졌다.

모든 사고 기능이 마비되었음은 물론, 감히 움직일 생각조차 나지도 않았다.

어디서 나타났는 지부터 알 수 없었다.

불쑥 나타나서는, 그렇다... 불쑥이라고 표현해야 할 듯하다.

그렇게 나타나서는 자연스럽게 왼쪽 무릎 아래 족삼리 혈도가 그에게 밟히면서 내력이 끊어지며 기력이 흩어졌고 장난처럼 칼을 든 오른 팔이 돌아가며 꺽일 때 고통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족삼리의 혈도만을 밟혔을 뿐인데도 무릎 아래가 저려오면서 순식간에 온몸으로 마비가 오며 내력이 흩어지는 수법은 듣도 보도 못했었던 것이다.

비현실의 당사자가 된 관중일검이 이제서야 현실로 돌아오며 고통을 끔찍하게 호소하여오자

"네, 이 노옴 ... "

혈겸잔살이 피칠갑 된 패월부 하상태를 남겨둔 채 만월(滿月)을 가로지르며 약초꾼 차림의 젊은 사내에게 들이닥쳤다.


혈겸쇄혼십이식(血鎌灑魂十二式)!

쓰아악- 쉬익...


혼이 놀라듯 붉은 기운을 뚝뚝 떨어대는 흉악한 낫 한쌍이 혈겸잔살과 한 몸이 되어 관중일도 배현승을 잡고 있는 정체불명의 약초꾼 차림 사내에게로 날아갔다.

아아... 저것이 20년 전 강호를 무자비하게 유린하였다는 혈겸쇄혼!

소문보다 더 붉어진 핏빛 뭉치가 낫에 실리며 약초꾼 차림 사내의 목줄기 경동맥으로 짓쳐들었다...

저걸 누가 막을까?

처음부터 저 수법을 썼으면 내가 바로 당했겠구나 하며 거구의 패월부 하상태도 진저리를 치는데


왼손으로 관중일도 배현승의 오른 팔 곡지혈(曲池穴)을 잡은 채 미동도 않던 약초꾼 차림의 사내가 붉은 빛이 쏘아 와도 자신과 무관한 듯 모르는 듯 서 있다가

목 앞까지 날선 혈기(血氣)가 짓쳐오자 솟아나듯 오른 발을 직선으로 차올렸다.


뜨컹...


마치 그런 소리가 들리듯 약초꾼 차림 사내의 목젖까지 짓쳐들어간 혈겸잔살은 목이 오히려 부러지듯 뒤로 급격하게 꺽이며 허공에서 일순간 정지했다.

분명히 붉은 낫이 더 빨랐고 곧 약초꾼 차림 사내의 목줄기가 베어지며 핏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는데 왜 천년만년 가만이 있을 것 같았던 약초꾼 차림 사내의 오른 발이 사라졌다가 혈겸잔살의 목젖에 꽂혔을까!

그로 인해 목덜미가 뒤로 꺽여진 상태에서 혈겸잔살의 육중한 몸이 허공에 정지하게 되었는지 보면서도 모를 일이었다.

비현실적 낯설음이 급속도로 쌓이는데...


털푸덕... 털썩...


피거품을 문 혈겸잔살이 땅바닥에 엎어진 채 자잘한 경련에 떨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조금 전 격렬하게 칼을 부딪친 싸움터가 괴괴한 적막으로 수렁처럼 빠져들었다.

피아(彼我)가 칼부림을 멈추었고 숨조차 멎는 듯 하였다.


모두가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두려움에 몸이 묶인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감정이 비로소 느껴지며 기분이나마 조금씩 움직이려할 무렵,

허름의 옷차림의 사내가 북천회 추혈대 무사들을 향해 고요하게 말했다.

"귀하들이 납치해간 아래 마을 의원, 조수빈은 어디에 있습니까?"

조수빈?

조수빈을 찾아나선 이정민에 처음으로 따라잡힌 북천회의 도객(刀客)들은 약초꾼 차림 사내의 말 속에 내재해 있는 기세에 형언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조금씩 밀려들었다.

단 한마디가 고요하게 울려퍼졌지만 알 수없는 위압감에 몸이 경직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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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제 10장 신위神威 2 +8 14.05.31 5,342 199 8쪽
61 제 10장 신위神威 1. +2 14.05.31 5,242 168 9쪽
60 제 9장 귀백鬼魄 11 +4 14.05.31 4,793 156 9쪽
59 제 9장 귀백鬼魄 10 +6 14.05.30 4,597 154 10쪽
58 제 9장 귀백鬼魄 9 +2 14.05.30 4,732 155 8쪽
57 제 9장 귀백鬼魄 8 +6 14.05.30 4,981 181 7쪽
56 제 9장 귀백鬼魄 7 +7 14.05.29 4,993 171 9쪽
55 제 9장 귀백鬼魄 6 +3 14.05.29 5,173 203 10쪽
54 제 9장 귀백鬼魄 5 +2 14.05.29 4,985 177 7쪽
53 제 9장 귀백鬼魄 4 +4 14.05.28 4,789 253 10쪽
52 제 9장 귀백鬼魄 3 +1 14.05.28 4,956 160 8쪽
51 제 9장 귀백鬼魄 2 +6 14.05.28 5,607 173 9쪽
50 제 9장 귀백鬼魄 1 +4 14.05.27 5,709 195 10쪽
49 제 8장 기습奇襲 10 +4 14.05.27 6,004 205 16쪽
48 제 8장 기습奇襲 9 +3 14.05.26 5,628 16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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