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검신-지지 않는다
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부수는 별빛 강기를 흑룡의 선수상에서 뿜어내며 돌진하는 흑룡호는 날아드는 포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삽시간에 가까워지는 거리.
그때 범선의 난간 위로 엘리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네가 올 줄 알고 있었다!”
엘리제가 그리 외치며 전력으로 기운을 일으켰다. 그녀의 도를 타고 오르는 맹렬한 사기(死氣)가 점점 커지더니 삼 장까지 늘어났다.
엘리제가 호기롭게 휘두른 사기와 흑룡호의 강기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꾸왕!
강렬한 충격에 엘리제는 위로 솟구쳤고, 그 힘에 흑룡호가 그 자리에서 멈췄다.
소위건은 하늘로 솟구친 엘리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혈면태경 낭전도 이 돌진을 막다가 뒤로 날아가 돛대를 부쉈는데 엘리제는 그 힘을 흘려내며 위로 솟구쳤다.
내상도 입지 않은 것 같은 모습으로 돛대 위에 내려선 엘리제가 손을 들어보였다.
“해룡! 다시 보니 반갑구나!”
소위건은 범선의 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을 보며 인상을 굳혔다. 저들은 불사의 저주를 받은 존재들.
죽지 않는다.
천랑검대원들은 이미 저들과 싸워봤기에 대응법을 알았지만, 역시나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특히 지금은 위백풍도 자리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소위건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임철군이 다가와 물었다.
“위 사제에게 들었지만,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예.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 쉬이 당하지는 않을 테니.”
임철군이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함악! 사해격랑진을 펼쳐라!”
함악이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소사해격랑진(小四海激浪陣)을 펼쳐라!”
함악의 외침에 다섯 명씩 짝을 지어 사해격랑진을 펼쳤다. 소규모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한 사해격랑진이 펼쳐지기 무섭게 엘리제가 소리쳤다.
“바다 위에서는 우리가 무적이라는 것을 알려줄 때가 왔다! 가라!”
엘리제의 외침에 범선 갑판에 있던 자들이 줄을 지어 도약했다.
“미쳤구나.”
송영걸이 코웃음을 치며 대뜸 검강을 일으켜 대해참경 일초를 펼쳤다.
횡으로 뻗어가는 검강이 뛰어내린 해적들을 토막 내려 할 때 거대한 도끼를 든 갑판장 샘의 도끼 위로도 선명한 사기가 맺혔다.
콰앙!
둘의 격돌로 샘은 다시 범선으로 돌아갔지만, 송영걸의 발이 갑판을 부수고 박혔다.
그러는 사이에 해적들이 배위로 내려섰다.
“막내! 나서지 마라! 네가 상대해야 할 건 저 여자다!”
“예!”
송영걸이 맡아줬으면 싶었지만, 그는 거대한 도끼를 든 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소위건은 잠시 숨을 고르며 갑판을 살폈다. 이미 갑판으로 내려선 자들과 천랑검대원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에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불사의 해적들의 무기에 깃든 사기가 눈에 띌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엘리제나 갑판장 샘에 비하면 부족할지 모르나 검기를 막아낼 정도가 되니 전처럼 쉬이 팔다리를 자를 수 없었다. 소사해격랑진의 진세가 없었다면 벌써 몇몇은 피를 뿌렸을 상황이었다.
새삼 엘리제가 한 말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다 위에서 저들은 전보다 더 강해졌다.
소위건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이곳을 부탁드립니다.”
“저 여인을 상대하려는 것이냐?”
“예.”
“저리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저 정도 범선이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타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잖느냐?”
“알고 있습니다.”
배에 대해서라면 소위건이 임철군보다 더 잘 알았다. 저만한 대형 범선이면 얼마나 많은 해적이 있을 지도 알았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을 끌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때 원종도가 입을 열었다.
“시간을 끌게.”
“시간을요?”
“저들이 삿된 존재들이라면 해가 뜨는 것만으로도 그 힘이 반감될 걸세.”
해가 뜨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소위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종도와 임철군을 바라보았다.
자애로운 사부와 존경하는 선장.
그 둘을 바라보던 소위건이 검례를 취했다.
“사형들과 흑룡호를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라.”
소위건은 곧장 갑판 위를 달리며 검을 휘둘렀다. 확실히 전과는 그 수준이 달라진 소위건의 검은 갑판 위에서 소사해격랑진을 상대하는 해적들을 빠르게 찔러냈다.
소위건이 지나간 자리로 기괴한 미소를 지은 해적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소위건이 달려간 길에는 해적들이 쓰러지며 시신의 길을 만들었다.
소위건은 그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달렸다.
선수에서는 송영걸이 거대한 도끼를 든 샘과 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샘은 소위건이 달려오자 그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소위건은 그를 처리하느라 힘을 낭비하지 않았다.
소위건의 발이 선수를 박차고 곧장 대형 범선의 갑판에 내려섰다.
검을 내린 소위건이 갑판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이미 불사의 해적들이 도를 꺼낸 채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뒤편.
타륜을 잡은 조타수와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거구의 사내는 사람의 몸통만 한 크기의 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 뒤로 갈색 긴 머리의 여인이 두 손으로 간신히 들 수 있는 장검을 쥐고 있었다.
돛대 위에 서 있던 엘리제가 훌쩍 뛰어내려 그들의 뒤에 내려섰다.
“인사해. 이쪽은 우리 항해사 벤자민. 그리고 이쪽은 부선장 베인.”
장검을 든 여인 벤자민과 거대한 망치를 든 베인.
소위건은 그제야 엘리제가 흑화련을 습격할 때 전원이 공격해 온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벤자민이나 베인이나 송영걸과 싸우는 샘에 비해 전혀 부족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아마 이 범선을 지키고 있었을 이들.
게다가 갑판에도 족히 서른 명은 넘어 보이는 해적들이 무기를 뽑아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제는 소위건이 말없이 검을 비스듬히 내린 채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씨익 웃었다.
“설마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소위건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엘리제는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열어보더니 중얼거렸다.
“대충 이 각 정도 남았는데. 그 시간을 끌 수 있겠어?”
소위건은 대답 대신 검을 들어올렸다. 검으로 정확히 해적들 뒤에 서 있는 엘리제를 가리켰다.
“왜 태웅상단의 상인들을 모두 죽인 거냐?”
엘리제는 그 물음에 씨익 웃으며 답했다.
“다 너희 때문이지. 그러게 왜 만해방을 건드렸어. 방주가 화났잖아.”
소위건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특한 말을 지껄이는 걸 보니 사부님 말씀이 하나 틀린 것이 없구나.”
“꽉 막힌 정파 놈들이라고 하더니 정말이네? 해군들 보는 줄 알았잖아.”
엘리제가 그리 말하고는 품에서 술병을 하나 꺼내며 말했다.
“뭐하니? 잡아와.”
그 말에 갑판에서 무기를 뽑은 채 대기하던 자들이 달려들었다. 소위건은 그들을 향해 마주쳐 나가면서 파랑삼본검을 펼쳤다.
내력의 회복 속도가 빠르다고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의 전력이 생각 이상이었다. 최대한 힘을 아껴야 했다.
해가 뜬다고 이들이 죽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자들에게 혈채를 받아내야 하는 것은 소위건이 직접 검을 들어 행해야 할 일이었다.
전에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간 송영걸과의 비무로 경험을 쌓았고, 화산파, 무당파, 소림의 무공을 견식했다. 제대로 펼치기도 전에 승부가 갈렸지만, 어떻게 제압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소위건의 걸음걸음마다 기괴한 미소를 지은 채 쓰러지는 해적들이 쌓여갈 뿐이었다.
바다 위에서 만난 불사의 해적은 전과는 다르게 사기를 더욱 강하게 불렸지만, 그래 봐야 도가 소위건에게 닿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수많은 해전으로 경험을 쌓은 그들이 곧 합격을 펼치기 시작했지만, 소위건은 그조차 간단히 베어 넘겼다.
해남파의 기본검식인 파랑삼본검.
그러나 기본이 곧 모든 것이듯 소위건의 파랑삼본검 앞에서 일반 해적들은 짚단처럼 쓰러질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항해사 벤자민이 입을 열었다.
“선장님 말이 진짜였네요?”
베인이 그 말에 이를 드러냈다.
“당연한 소릴. 갑판장도 봤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어디 믿을 수 있어야 말이지.”
벤자민이 가볍게 투덜거리고는 어깨에 걸친 바스타드 소드를 내리며 말했다.
“저대로 뒀다가는 애들 다 죽겠네. 그럼 나 먼저 간다.”
벤자민이 그대로 달리다가 도약해 머리 위로 높이 든 바스타드 소드로 사기를 몰아넣었다.
검은빛의 사기가 솟구치는 것을 보고 베인이 인상을 굳힌 채 자신도 배틀 해머를 쥐고 달렸다.
소위건은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벤자민과 정면에서 돌진해 오는 베인을 보며 왼발을 내디뎠다.
쿵!
만근보를 펼쳐 자세를 굳건하게 한 소위건이 벽파참룡을 펼쳤다.
밀려오는 파도도 반으로 가를 수 있는 수직 베기와 함께 별빛 검강이 떨어져 내렸다.
도약해서 내리치던 벤자민과 정면에서 돌진해 오던 베인도 검강을 보고는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콰앙!
베인은 뒤로 밀려나 계단을 부쉈고, 벤자민은 허공에서 우아하게 회전하며 내려섰다.
그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낸 소위건이 길게 숨을 토해냈다. 그의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소위건의 심상이 외부에 발현되는 것을 보며 엘리제가 헛웃음을 흘렸다.
“안 본지 얼마나 됐다고 저리 강해졌지?”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알아. 너희가 쉽게 죽지 않으리라는 걸. 그러니 가서 잡아와.”
소위건은 벤자민과 베인을 밀어내고는 검으로 원을 그렸다. 소위건을 향해 달려오던 해적들이 반으로 잘려 죽었다.
갑판 위에는 소위건과 그가 지나온 길에 기괴한 미소를 지은 채 죽은 해적들의 시신만이 가득했다.
벤자민은 단번에 승부를 낼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깨닫고는 가볍게 뛰어 베인의 옆에 섰다.
“보통내기가 아닌데?”
베인은 가볍게 목을 좌우로 풀었다. 힘으로 정면에서 부딪쳐 밀린 게 얼마 만인가?
그만큼 소위건의 검이 품고 있는 힘은 강했다.
“어이. 이름이 뭐냐?”
베인의 물음에 소위건은 담담히 답했다.
“해남파 일대 제자 소위건이다.”
“난 해골분쇄기 베인이다.”
벤자민이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자기소개 시간이야? 난 여명호 항해사 벤자민. 참살자라고 불리지.”
유창한 한어를 지껄이는 벽안인들을 바라보던 소위건은 대답 대신 검을 들어올렸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검날.
소위건은 숨을 들이마셨다.
불사의 해적단이 바다 위에서 강해진다?
과연 바다 위에서 자신보다 강해질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소위건의 분위기가 일변하는 것을 본 베인이 씨익 웃었다.
얼마 만인가?
대영제국에 쫓길 때는 직접 무기를 맞대는 자들은 없었다. 그런 자들은 모두 머리가 깨져 죽었으니까.
그렇다고 불사의 저주에 걸린 그들끼리 싸울 일은 없었다. 서열 정리가 된 이후로 서열을 뒤엎기 위해서 덤빌 만큼 발전하는 놈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저자는 달랐다.
죽을 수도 있다.
그 사실 하나에 미친 듯이 가슴이 뛰고 있었다.
“내가 정면이다.”
“그러시든지요.”
베인이 갑판을 박차고 돌진하자 벤자민이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벤자민이라면 충분히 틈을 비집고 들어와 승패를 가를 수 있으리라.
베인이 달려들며 배틀 해머를 쭉 뻗었다.
어른 상체만한 해머의 머리가 그대로 소위건을 노리고 날려 들었다. 검강은 사기로 받아낼 수 있으니 그렇다면 무기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에 펼친 찌르기에 소위건은 격랑일관으로 마주쳐왔다.
저 얇은 검으로 자신의 배틀 해머를 막아내겠다니 우스울 따름이었다.
사기를 짙게 두른 배틀 해머와 검강을 두른 소위건의 검이 정확히 마주쳤다.
한점으로 집중한 격랑일관의 한 수는 단번에 사기를 뚫고 들어와 배틀 해머를 때렸다.
콰앙!
베인이 뒤로 날아가 벽을 부수고 사라지는 모습에 격돌의 순간을 노리고 달려들려던 벤자민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소위건은 검을 뻗은 자세 그대로 숨을 고르며 확신했다.
바다 위에서라면 자신은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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