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검신-재회
재회
흑룡호.
해남파에서 특별히 건조한 최정예 전투함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바다로 나간 배의 속도는 잘 나지 않았다.
내력이 충만하고 평생 수련을 해온 이대 제자들은 조무사들보다 힘이 월등했지만, 호흡이 맞지 않았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호흡이 맞지 않으면 배에 속도가 붙지 않는다.
오히려 저항을 높여서 속도가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세 개의 돛을 펼치니 상당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소위건의 옆으로 다가온 송영걸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어떠냐?”
“뭐가 말입니까?”
“흑룡호 말이다.”
소위건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답했다.
“노대의 호흡만 맞으면 확실히 해남파 최고속의 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예. 돛만 해도 예전의 배보다 확실히 좋아졌는데요?”
송영걸은 물끄러미 소위건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에 불쑥 물었다.
“임 사숙의 훈련이 고됐냐?”
“예?”
“어쩐지 기분 좋아 보여서.”
소위건은 그 말에 뒤로 돌아 해남도를 바라보았다. 해남도가 아직 수평선 끝자락에 걸려 있어 그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정말 아낌없이 사랑받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고됐냐고.”
소위건은 송영걸을 흘끔 돌아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에 소위건이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소위건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위건의 시선이 송영걸을 향했다.
“최정예 전투함이면 천랑검대주님이 타시는 겁니까?”
“아니.”
해남파의 장로이자 천랑검대주인 위백풍은 해남파 내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당연히 흑룡호에 탈 줄 알았던 그가 타지 않는다는 말에 소위건의 시선이 송영걸을 향했다.
와카미츠 해적단의 다케다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한 명의 고수가 가지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내가 탔잖냐.”
“예?”
소위건이 빤히 바라보자 송영걸이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척척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일 장 정도 떨어져서는 소위건을 향해 돌아섰다.
송영걸이 씨익 웃으며 소위건을 바라보았다.
“우리 막내 사제. 다시 본 게 일 년 만이지?”
송영걸이 비스듬히 서며 검병에 손을 올린 순간 소위건은 자기도 모르게 검을 잡아 반쯤 뽑았다. 그러나 더 검을 뽑을 수 없었다.
검을 뽑는 순간 베인다.
소위건의 손에 땀이 배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 눈에 들어갔다. 왼쪽 눈이 따끔했지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송영걸이 검병에서 손을 뗀 순간 콱 막혔던 숨이 트였다.
“헉. 허억!”
소위건이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런 소위건에게 다가온 송영걸이 비단으로 된 수건을 건네줬다.
소위건이 받아서 식은땀을 닦아내는 사이 송영걸이 웃으며 말했다.
“막내 사제 실력이 정말 일취월장했네.”
“어떻게 한 겁니까?”
“마음에 검을 세웠다.”
심중검립(心中劍立).
임철군에게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단순히 마음에 검을 세운 것만으로 목 앞에 검이 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환상은 아니었다. 실제로 검을 뽑았다면 검이 채 뽑히기도 전에 베였으리라.
소위건이 땀이 밴 주먹을 쥐락펴락하자 송영걸이 그런 그의 옆에 서서는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해남제일검은 몰라도 해남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자신은 있다.”
“뭔가 위험한 발언인데요? 장로님들이 몇 분이신데···.”
“실력이 나이순은 아니잖냐.”
소위건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송영걸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대신 막내 사제만 알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대신 저 남해삼십육검 좀 봐주십시오.”
송영걸은 일대 제자 중 가장 검술이 뛰어났다. 차기 해남제일검이 확실시된 그에게 배운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걱정하지 마라. 그렇지 않아도 급히 데려오느라 임 사숙이 신신당부하셨다. 네 검을 봐주라고.”
소위건이 소영걸에게 포권을 취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송영걸은 얼른 소위건을 일으켰다.
“만파구검을 일 년 만에 그 정도 수준까지 익힌 것을 보니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송영걸과 소위건의 사이로 부드러운 해풍이 스쳐 지나갔다.
광동성 광주.
광동성의 성도로 주강(珠江)을 통해 바다와 연결된 곳으로 화성(花城)이라고도 불렸다.
일 년 내내 꽃이 피어있다고 알려진 광주에 흑룡호가 들어섰다.
돛을 접고 이제는 어느 정도 손발이 맞는 이대 제자들이 젓는 노만으로 부드럽게 항구에 들어가는 중에 소위건은 처음 보는 배들의 위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것들은 뭡니까?”
원종도가 소위건의 물음에 손에 들린 나뭇조각을 조각하던 것을 멈추고는 답했다.
“서역에서 온 배들이군.”
“서역이요?”
“그래.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배들이지.”
천랑호보다도 큰,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함선들이다. 네 개의 돛을 가진 함선을 바라보던 소위건은 곧 항구에 나와 있는 해남파의 제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의 이들이 많았다.
광동 지부에는 천랑검대의 열 개 단 중 여섯 개의 단이 나와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나와 있는 것은 천랑검대의 부대주 함악이었다. 항구의 부두에 흑룡호를 대고 배에서 내리니 함악이 웃으며 다가와 소위건의 두 손을 잡으며 반겼다.
“막내 사제 오랜만이네.”
“함 사형. 오랜만입니다.”
함악은 소위건의 위아래를 바라보더니 씨익 웃었다.
“일 년 사이에 키가 더 큰 것 같군.”
“조금은요.”
송영걸이 그런 소위건의 옆에 서며 말했다.
“함 사제. 긴장해야겠어.”
함악이 돌아보자 소위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을 이었다.
“이러다 천랑검대 부대주 자리 빼앗기겠어.”
“무슨 소립니까? 전 해무각 소속입니다.”
소위건이 얼른 부정했지만, 함악은 새삼스럽게 소위건을 바라보았다. 송영걸이 그리 말할 정도로 소위건이 성장했다는 것 아닌가?
소위건이 입문한 지 고작 일 년이었다. 그사이에 그만큼 성장했다면 기대가 됐다.
“지부로 가자.”
“예.”
마중 나온 천랑검대원들이 흑룡호를 지키기 위해 올랐고, 배를 타고 온 이들은 함악의 안내를 따라 광주 시내를 지났다.
소위건은 송영걸의 뒤를 따르며 광주 시내를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서역의 거대한 함선들을 본 것도 신기했지만, 이곳에 돌아다니는 이들은 더욱 놀라웠다.
검은 피부에 짧은 머리.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곤륜노는 물론이고, 큰 키에 새하얀 피부의 사내들도 있었다.
송영걸도 피부가 하얗지만, 저들은 뭔가 달랐다. 게다가 푸르거나 초록의 눈은 마주칠 때마다 움찔거리게 했다.
그런 그들을 지나 도착한 곳은 한 장원이었다. 안에 세 개의 전각이 준비된 거대한 장원.
장원의 중앙에 서 있는 전각의 대전에는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천랑검대주 위백풍.
현 해남파 광동 지부의 지부장.
송영걸이 대표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서 포권을 취했다. 그 뒤를 함께 온 이들이 모두 포권을 취했다.
“다녀왔습니다. 사숙.”
“그래. 고생했다.”
위백풍은 성큼성큼 걸어와 송영걸을 지나 소위건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송영걸이 황당하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응? 사숙?”
송영걸의 부름을 듣지 못한 것처럼 위백풍은 소위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잘 왔다. 흑룡호는 어떻더냐?”
소위건은 허탈해하는 송영걸을 흘끔 보고는 위백풍의 질문에 답했다.
“좋았습니다.”
“그래. 잘 됐구나. 흑룡호는 네가 없었다면 아예 기획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예?”
“흑룡호는 모두 무인으로 이뤄진 최정예 전투함이다. 선원 하나하나가 모두 정예 무인이어야 했지. 그러니 사공을 맡아줄 네가 필요했다.”
소위건은 그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조무사까지 본문의 무인인 것은 맞는데 선장님은요?”
“응? 그래서 원 노야를 모시고 온 거잖느냐.”
“예?”
소위건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광동 지부의 대문을 뒷짐 진 채 걸어들어오던 원종도가 소위건과 시선이 마주치자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선장님이 무인이시라고요?”
위백풍이 그 말에 씨익 웃었다.
“몰랐구나. 원 노야의 실력은 진짜다.”
소위건은 저 멀리서 태연히 걸어오는 원종도를 보며 기억을 떠올렸다. 여의일기공을 얻어 뛰어나진 기감으로도 종종 그의 기척을 놓쳤다는 것을.
“모두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가서 쉬어라.”
“예.”
함욱이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위백풍이 다가온 원종도를 데리고 집무실로 가 술을 꺼내들었다.
“큰 결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종도는 술잔에 채워지는 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답했다.
“뱃사람의 마지막은 바다에서 맞이해야 하기에 나섰을 뿐이네.”
원종도가 잔을 쭉 비우고는 말을 이었다.
“가르쳐 보고 싶은 아이도 있고.”
위백풍이 다시 잔에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건이 말입니까?”
“그래. 그 아이 말일세.”
위백풍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해남의 아이입니다.”
원종도가 두 번째 잔을 쭉 비우고는 웃었다.
“무공이 아니라 바다를 가르쳐 줄 걸세.”
위백풍이 활짝 웃으며 다시 잔에 술을 채웠다.
“그거라면 제가 부탁드리고 싶군요.”
원종도는 술잔에서 시선을 거둬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고전하고 있나 보군. 흑룡호까지 만든 것을 보면 말일세.”
“만해방 놈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왜구들도 슬슬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곤란한 상황입니다.”
“고작 전투함 하나로 해결이 되겠나?”
위백풍이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걸이가 벽을 넘어서 가능해졌습니다. 지부를 제가 지키면서도 놈들을 타격할 수 있게 됐죠.”
원종도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이로군.”
“전 아직 안 밀려났습니다.”
위백풍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술잔을 들어 올렸고, 둘은 동시에 술잔을 비웠다.
소위건이 자신에게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고는 방을 돌아보았다. 방 하나가 아버지와 지내던 해남도의 집보다 더 큰 느낌이었다.
소위건이 잠시 방을 돌아보다가 파랑검을 허리에 차고 문을 나서자 함악이 마침 복도를 걸어오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불렀다.
“막내 사제. 손님이네.”
“손님이요?”
소위건은 무슨 말인가 싶었다. 살면서 해남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찾아올 손님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래. 따라오게나.”
소위건은 순순히 함악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함악은 광동 지부 뒤편의 연못에 있는 정자로 그들을 안내했다.
정자에는 한 여인이 뒤돌아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곁에 팔짱을 끼고 선 사내가 있었다. 시선을 잡아끄는 사내는 팔 척의 장신에 갈색 수염이 한가득 난 벽안의 사내였다.
흑포를 걸친 사내가 씨익 웃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니 소위건도 반사적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검을 쥔 송영걸과는 다른 야수와 같은 느낌. 야성의 기운에 마주 기세를 일으키니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잠깐만요!”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소위건과 사내 모두 기세를 거두었다. 소위건은 그제야 여인을 볼 수 있었다.
흑색의 무복을 걸친 여인이 소위건에게 다가오며 반가워했다.
“정말 은공이군요!”
일 년 전 마지막 보았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자신감이 넘쳐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은 여인.
유설화를 보며 소위건이 포권을 취했다.
“유 소저. 다음에 만날 때는 그리 안 부른다 하셨습니다.”
유설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절 잊지 않았군요?”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유설화도 마주 예를 취했다.
“오랜만이에요. 소 소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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