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검신-왕인명
왕인명
같이 달려가던 중에 소위건은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 가장 먼저 뛰어드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이 되는 것이 좋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나아간 소위건이 단번에 오 층 전각의 벽을 차고 뛰어올라 허공에서 몸을 틀며 열린 창문 안으로 들어갈 때 훅하고 주향이 밀려왔다.
순간 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한 주향이 퍼져 나갔는데 소위건은 잠시 호흡을 멈추고 뛰어들었다.
그런 소위건을 향해서 날아든 것은 사기 가득한 망치였다. 그제야 그가 누군지 파악한 소위건은 창틀을 박차고 베인을 뛰어넘었다.
단숨에 그를 뛰어넘자 뒤쫓아 들어오던 송영걸의 검이 그런 베인을 노렸다.
베인의 실력이 샘보다는 윗줄이지만 송영걸도 그때의 송영걸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았다.
소위건은 곧장 언월도를 든 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
간단히 웃음을 터트린 왕인명이 언월도를 휘둘렀다. 언월도를 휘두르는 그사이에 도강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확실히 초절정에 이른 고수였다.
소위건은 그렇게 달려들던 자세를 뒤집어 날아드는 도강을 피해냈다.
그 모습에 왕인명의 눈이 커졌다.
창문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짐작도 못 했는데 그곳에서부터 지금 허공에서 몇 번이나 방향을 꺾고 있었으니 그 경신 재간에 놀란 것이었다.
소위건의 검이 그제야 발검했다.
무엇도 두르지 않은 채 그저 빠르게 나아가는 검.
하지만 그걸 본 왕인명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황급히 언월도를 틀어서 도면에 강기를 불러일으킨 왕인명과 소위건의 검이 맞닿았다.
콰앙!
강렬한 경력이 사방으로 몰아치고 그 충격에 왕인명이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소위건이 재차 도약하려 할 때 옆에서 단창이 날아들었다.
“피해라!”
왕인명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소위건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스걱.
단창이 베이며 그 뒤에 선 오두백이 뒤로 넘어질 듯 쓰러져서 베이지 않았다. 오두백이 있던 자리 뒤로 벽면이 그대로 소위건의 검이 그린 궤적을 따라 잘려나갔다.
소위건은 오두백을 따라붙지 않았다. 문을 부수고 복도로 밀려난 왕인명을 향해 달려들었고, 뒤늦게 창문을 넘은 함악이 오두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쩌저정!
잘린 단창으로 함악의 검을 다급하게 막아내는 오두백이 비명을 내질렀다.
“부방주! 살려주십시오!”
왕인명은 소위건이 달려들어 내지르는 검을 받아내면서 반대편 방문을 부수고 날아가며 소리쳤다.
“미친놈아! 나도 죽게 생겼다!”
소위건은 왕인명의 실력이 예상보다 윗줄이라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송영걸이나 다른 이들에 비해 강하다는 것을 인지했기에 그를 몰아쳐 전장에서 떼어놓았다.
소위건은 그제야 호흡을 가다듬으며 왕인명을 향해 다가갔다.
왕인명은 단 두 번의 격돌에 옷이 넝마가 된 상태였다. 경력의 소용돌이에 찢겨 나간 옷을 갈고리고 걸어서 뜯어낸 왕인명이 길게 숨을 토해냈다.
“잠깐. 통성명이나 하자.”
소위건은 그의 앞에 걸음을 멈추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소위건.”
“해룡?”
왕인명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와. 이거 실화냐? 지금 흑의무복을 입고 야밤에 기습이라고? 명문정파인 해남파가?”
왕인명이 내력을 담아 소리치고 있지만, 그 소리는 외부로 전해지지 않았다. 소위건이 내력으로 그 소리를 모조리 막아버렸으니까.
그걸 깨달은 왕인명이 기가 차다는 듯 소위건을 바라보았다.
“네가 정말 해룡이냐?”
소위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는 지금도 요란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그렇게 불러주신다고 들었다.”
“미치겠군.”
왕인명은 그리 말하고는 언월도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래. 씨발. 명문정파라고 헛바람 든 것보다는 전쟁 중에 이렇게 싸우는 게 맞지. 이런 일도 오랜만이라 피가 끓네.”
왕인명의 기세가 돌변하는 것이 보였다. 백교언월이라 불린다더니 정말 거대한 상어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려는 것 같았다.
하긴 이만한 심상을 품은 자이니 만해방의 부방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이겠지.
뿜어내는 기도를 보니 결코 엘리제 밑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소위건은 심상수련으로 엘리제를 확실히 꺾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뭔데?”
“와카미츠 해적단을 이용해 해남파의 백랑호를 습격하는 것에 네가 연관되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맞나?”
왕인명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건 왜 묻나?”
“백랑호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왕인명이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뭐야? 소문경 장로 아들이었어? 아, 소위건이라고 했지.”
“그래. 그러니 물으마. 해왕의 명령이었나?”
왕인명은 그 물음에 씨익 웃었다.
“이걸 답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왕인명은 슬쩍 왼발을 앞으로 내밀며 허리를 틀었다.
“궁금하면 덤벼라.”
소위건은 그 말에 검을 들어 올렸다. 성큼 내딛는 일보에 뻗어 나가는 격랑일관 일초.
심상합일을 이룬 채 뻗어 나가는 일검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왕인명이 언월도를 내리쳤다.
쩌엉!
왕인명은 소위건의 검에 담긴 힘을 읽고는 인상을 굳혔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심상합일에 이른 검이었다.
고작 저 나이에 이런 것이 가능한가?
심상합일을 이룬 자들은 이미 격을 이룬 자들.
칠패주의 주인들처럼 왕의 이름을 얻거나 구주오검제처럼 제의 칭호를 얻는다.
아직 그들에 비하면 부족하다 해도 초절정에 이른 왕인명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왕인명은 손이 저릿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자연스레 갈고리를 휘둘렀다. 갈고리가 그린 궤적을 따라 날아드는 날카로운 도기에 소위건은 성큼 다가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번에는 내리치는 일검.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는 일검에 왕인명이 자세를 낮추며 언월도를 들었다.
쩌엉!
도강을 두르고 있지 않으면 검력을 견딜 수 없다.
왕인명은 충격을 받는 순간에 바닥이 무너지며 사 층으로 떨어졌다.
“루주! 뭐하냐! 손님 죽는다!”
왕인명의 외침에 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달려드는 자들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달려드는 자들. 무정객들이다.
소위건이 왕인명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뒤로 몸을 날렸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마치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달려드는 자들의 검을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달려들던 자들이 토막나는 사이에 왕인명이 곧장 창문을 부수고 뛰어내렸다.
“크하하하! 날 잡아봐라!”
소위건은 그 말에 다시 땅을 박찼다. 바닥이 무너져 내릴 정도의 강력한 진각과 함께 튀어나간 소위건은 왕인명을 단숨에 따라잡았다.
왕인명도 이미 예상하였는지 허리를 틀며 언월도를 뻗어내고 있었다.
왕인명도 전력을 다해 뻗어낸 일도. 그의 심상인 거대한 상어가 달려드는 느낌과 함께 밀려오는 도강을 향해 소위건이 검을 뻗었다.
왕인명은 밀려오는 바닷물에 형편없이 휩쓸려 나가는 자신의 심상을 읽었다. 바다의 제왕이라 할만한 거대한 상어를 심상으로 삼고 무서울 것 없이 달려왔던 왕인명이었지만,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아무리 바다의 제왕이라고 해도 저 거대한 바다 앞에서는 미물에 불과할 뿐.
심상의 상성에서도 압도당했고, 쌓아온 격조차 낮으니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다는 도강이 저렇게 반듯하게 잘려나가는 것이겠지.
왕인명은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언월도에 내력을 밀어 넣으며 갈고리를 덫대 소위건의 검을 막아냈다.
콰앙!
왕인명은 크게 내상을 입었지만, 어쨌든 소위건의 일검을 받아냈다. 다만 사 층 높이에서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내상을 입은 상태라 제대로 내력을 운용하지 못해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바닥이 움푹꺼지며 그 중심에 처박힌 왕인명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어나왔다. 소위건이 그대로 떨어져 내리며 끝을 보려 하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악의에 몸을 틀며 검으로 중심을 막았다.
콰앙!
순간 오 층 전각을 대각선으로 부수며 떨어져 내리는 자가 있었다.
베인이 거대한 망치를 소위건에게 휘둘렀다. 소위건은 인상을 미미하게 굳혔다.
베인의 눈이 시커멓게 변했고, 그가 휘두르는 망치에 깃든 사기 또한 전과는 비할 수 없이 강대했다. 게다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악의. 지부에 덮쳤던 그 의념을 일부지만 품고 있었다.
품은 사기의 양만 따지면 전에 만났던 엘리제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로 강해질 수 있는 건가?
베인이 이렇게 강하다면 송영걸이 당했을 수도 있다.
그걸 깨달은 소위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허공이라 제대로 검에 힘을 실을 수 없는 상황. 소위건은 날아드는 베인의 사기를 검으로 내리쳤다. 정확히는 검을 가져다 댄 후에 베인이 휘두른 힘을 이용해 몸을 회전하며 검을 위로 그어 올렸다.
몸을 가로로 눕혀 펼친 대해참경.
바다를 가르는 검격이 그대로 베인을 향해 나아갔다. 베인은 그런 소위건을 향해 허리를 접으며 거대한 망치를 내리쳤다.
보통 인간이 저렇게 급격하게 몸을 틀었다면 뼈가 부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베인은 아무렇지 않게 거대한 망치의 방향을 틀어 소위건의 검을 맞이했다.
쯔가각!
사기가 잘리고, 거대한 망치가, 베인이 그대로 두 쪽이 났다. 그에 그치지 않고 창해루의 이 층부터 시작한 금이 오 층까지 그대로 이어지더니 전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르릉.
바닥에 내려선 소위건이 인상을 굳힌 채 주위를 살폈다.
베인이 달려들었고, 그를 상대하는데 걸린 시간은 한 호흡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왕인명이 사라졌다.
소위건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각 방향을 돌아보았다. 함악이 송영걸을 부축한 채 잔해를 뚫고 나왔고, 반대쪽에서 오두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투성이가 된 오두백이 바닥에 내려서는 것을 보며 소위건이 곧장 몸을 날렸다.
함악이 함께라면 송영걸은 일단 무사하다. 그렇다면 하나라도 더 적을 베는 것이 옳다.
소위건이 삽시간에 다가가 검을 뻗는 걸 보고 오두백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소위건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뻗어가던 검을 틀어 날아오는 비수를 쳐낸 소위건이 멈춰 서자 맞은편 지붕 위로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이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과 손에 든 비수.
하오문의 정예인 무정객이었다.
그리고 그런 무정객 사이로 비쩍 마른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이거 웃기는 놈일세. 너 뭐하는 새끼인데 본문의 거점 하나를 박살 낸 거냐?”
소위건은 답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정객을 데리고 다니는 자를 구악이라 부른다고 했다. 조금 전 날아든 비수에 담긴 경력을 생각하면 칠악 환요희 매봉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자였다.
“백교언월을 데리고 있나?”
“어. 본문의 손님인데 그런 식으로 패대기를 치면 쓰나? 조금만 늦었으면 송장 치울 뻔했잖아.”
소위건은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뒤에서 함악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상이 깊다.”
소위건은 심각해 보이는 목소리를 듣고 검을 들어 앞에 선 사내를 가리켰다.
“백교언월을 내놓아라.”
“크흐흐흐. 내가 살다살다 이런 협박도 다 받고.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비쩍 마른 사내가 훌쩍 뛰어 오두백의 앞에 내려서더니 말했다.
“대형의 말을 듣고 와보기를 잘했군. 물러가라.”
“감사합니다.”
오두백이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앞에서 사내가 씨익 웃으며 자기 소개했다.
“난 삼악이다.”
소위건은 대답 대신 삼악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삼악이 코웃음을 치며 마주하다가 인상이 딱딱하게 굳으며 다급하게 비수를 교차해서 앞을 막았다.
쩌엉!
소위건의 검을 막아낸 삼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 담벼락을 부수며 사라졌다.
소위건은 삼악을 치우고 곧장 오두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쩌엉!
어느새 달려온 왕인명이 소위건의 검을 언월도로 받아냈다.
“치사한 새끼. 이렇게 날 불러내?”
소위건의 쾌검이라면 아무리 왕인명이 날고 기어도 도달하기 전에 오두백은 죽었으리라.
소위건은 오두백을 이용해 불러낸 왕인명을 바라보았다. 왕인명이 인상을 굳힌 채 소리쳤다.
“몸을 피해라!”
“부방주님!”
“닥치고 물러나! 삼악! 오두백을 부탁한다.”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입가에 피를 흘리며 나온 삼악이 인상을 구긴 채 말했다.
“뭔 개소리냐? 우리 둘이면 충분히 죽일 수 있다.”
“아니. 내 군사를 부탁한다. 꼭 살려라.”
삼악은 잠시 왕인명을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오두백을 붙잡고는 그대로 몸을 빼냈다. 오두백이 애타게 왕인명을 불렀다.
“형님!”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다. 새끼야. 방주에게 전해라. 대업을 함께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소위건은 무심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왕인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왕인명은 가볍게 목을 좌우로 꺾더니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퉤 뱉어냈다.
그리고는 언월도를 비스듬히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와라! 내가 만해방의 부방주 백교언월 왕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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