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검신-날아올라
날아올라
잔잔한 바다에서 해적선이 속도를 낼 방법은 노를 젓는 것밖에 없다. 바람이 거의 없는 바다에서는 노를 젓는 것만으로 내는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그래서 물살을 가르며 달려오는 흑룡호를 보면서도 그들의 대응은 화살을 쏘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날아온 화살은 원종도가 휘두르는 도에 모조리 튕겨 날아갔다.
콰앙!
압도적인 속도의 차이에 강기를 두른 채 달려드는 흑룡호가 측면을 들이받아서 해적선 하나를 두 동강 내고 지나가는 동안 목숨을 걸고 넘어온 해적들은 원종도의 도에 베여 죽었다.
“미친!”
바람과 파도가 없는 잔잔한 바다에서는 해적선이라도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속수무책이었다.
강기를 두른 흑룡호 앞에서는 아무리 튼튼한 배도 두 쪽이 날 수밖에 없었다.
화살은 모두 막혔고, 배를 탈취하려던 해적들은 모두 늙은이 손에 죽었다.
혈경호도 반파된 상황이라 곧 침몰할 상황.
또 한 척의 해적선이 침몰하자 남은 한 척의 해적선에서 백기가 올라왔다.
원종도가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침몰시키게.”
“예.”
만해방의 해적들을 살려둘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흑룡호가 강기를 두른 채 백기를 올린 해적선을 두 동강 내자 바다에 빠진 해적들이 살려달라고 악을 썼다. 소위건은 배를 돌려 혈경호를 향했다.
반파된 혈경호가 크게 기울어져 가라앉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천랑검대원들이 위험해지니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소위건이 그쪽으로 흑룡호를 몰았다.
갑작스러운 충격과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갑판의 변화에 위백풍은 오히려 앞을 막아선 해적들의 빈틈을 발견하고 베어 넘길 수 있었다.
네 명이 합격을 이루는 것이었기에 하나가 죽자 나머지는 쉬이 상대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배가 기울어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낭전은 저 멀리 강기를 두른 채 해적선들을 차례로 침몰시키는 흑룡호를 바라보고는 이를 뿌득 갈았다.
강기를 다루는 자가 있다면 저 돌진을 막을 수 있다. 자신이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아직 내상을 다 다스리지 못했는데 저 배에 강기를 둘렀던 놈은 벌써 회복하고 다시 강기를 두른 채 다른 해적선들을 차례로 침몰시킨다는 건가?
혈경단의 노련한 해적들은 배를 탈취하기 위해 넘어갔지만, 모두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낭전은 길게 숨을 토해내며 앞에 선 위백풍을 보았다.
기울어지는 갑판에서도 용케 중심을 잡고 선 위백풍이 검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저런 괴물을 데리고 있는 줄은 몰랐군.”
“죽이기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낭전이 코웃음을 쳤다. 죽기는 누가 죽는단 말인가?
혈경호가 침몰한다고 해도 가까운 곳에 태웅상단의 선단이 있다. 해적선이야 해적들만 타고 있으니 두 쪽을 내버렸다지만, 과연 저 상선도 그럴 수 있을까?
해남파의 놈들만 죽이면 상선을 탈취하면 될 일이었다.
“곧 죽을 놈이 가진 의문이라면 풀어줄 수 있지.”
“너희가 와카미츠 해적단을 움직여 백랑호를 습격했나?”
낭전은 그 물음에 낭아봉을 어깨에 걸치며 답했다.
“방주가 직접 내렸던 명령 말이군. 와카미츠 해적단과 관련된 일은 왕인명이가 했었지. 자세한 건 모르겠군.”
낭전이 낭아봉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살아남거든 왕인명을 찾아봐라.”
“고맙군.”
위백풍이 대답을 마치고는 기울어진 갑판을 박차고 낭전을 향해 달려들었다.
남해삼십육검의 격랑일관.
최고속의 찌르기에 낭전이 낭아봉을 들어 막았다.
쩌엉!
한점에 이른 위백풍의 찌르기를 낭아봉으로 받아낸 낭전이 비스듬히 흘려내며 왼발을 앞으로 뻗었다. 하지만 이미 위백풍은 검을 거두면서 해운중광(海雲中光)을 펼쳤다.
바다 위 떠 있는 구름에서 떨어지는 빛처럼 연달아 펼치는 찌르기였다.
따다다다당!
위백풍이 옆으로 돌면서 펼친 해운중광을 받아내면서 낭전은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제야 낭전은 위백풍이 무슨 생각으로 검을 펼치는지 짐작했다.
강기공을 펼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고수이지만, 강기를 쓸 기회조차 주지 않고 승부를 보겠다는 뜻이었다.
쾌를 중시하는 자들이 펼치는 수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낭전은 자신에게 이런 수작을 부린 자를 처음 보았을 뿐이다.
강기공을 펼칠 수 있는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가 이렇게 싸움을 걸어온 적은 없었으니까.
낭전은 낭아봉을 짧게 잡고 공격을 받아냈다.
주륵.
강력한 일격이 아니지만, 기울어진 갑판의 높은 곳으로 몸을 돌리며 뻗어낸 위백풍의 검격을 받아내느라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이 새끼 봐라?”
선상전(船上戰)이 해적만큼 익숙한 자는 없다고 여겼는데 위백풍이 펼치는 검은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해남파라고 해봐야 섬구석에 처박힌 촌놈 정도로 여겼는데 지금 보니 그리 간단히 볼 문제는 아니었다.
사해검제도 아니고 비천쾌검 정도가 이렇게 애를 먹일 줄이야.
낭전은 오히려 뒤로 물러나며 낭아봉을 휘둘렀다.
후웅!
강력한 경력이 일어 위백풍을 노렸다. 위백풍은 그 공격에 앞으로 미끄러져 오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으로 낭아봉이 일으킨 경력을 피해 들어와서는 좌장으로 바닥을 찍어 몸을 일으키며 그 회전력을 이용해 검을 휘둘렀다.
남해삼십육검의 대해참경.
푸른 파도와 같은 검기가 낭전을 베어왔다.
허를 찔러온 공격이었지만, 낭전도 이미 휘둘렀던 낭아봉을 멈추고 내리찍어왔다.
낭전의 독문무학인 태경철봉(太鯨鐵棒)의 붕산파(崩山波)였다.
꽈앙!
검기와 낭아봉에서 뿜어진 경력이 부딪치며 사방으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고, 위백풍은 오히려 그 상황에서 검을 휘둘러 밀려오는 경력을 베어내고는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좋구나!”
한번 문 상대를 놓지 않겠다는 집념이 느껴지는 공격에 낭전도 내력을 크게 돌렸다. 가뜩이나 붉은 얼굴이 피처럼 검붉어지며 두꺼운 팔에 근육이 바짝 일어선 낭전이 바닥을 찧었던 낭아봉의 끝을 발로 차내며 앞으로 뻗었다.
붕산파에 이은 분쇄격(粉碎擊).
낭아봉의 끝에 뭉친 경력이 회전하며 다가오는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내는 일격.
위백풍도 그 강격에 인상을 굳힌 채 벽파참룡을 펼쳐 분쇄격을 마주쳤다.
쩌엉!
수직으로 떨어진 검격이 분쇄격을 찍어 눌러 방향을 틀게 했고 그 반동으로 위백풍은 위로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낭전이 그 모습에 씨익 웃었다.
자신이 그린 모습대로 판이 흐르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발을 뗀 이상 피할 곳이 없다.
낭전이 재차 몸을 빙글 돌며 쭉 뻗었던 낭아봉을 휘감아 돌릴 때 갑자기 다가오는 기운이 있었다. 위백풍을 노리다가는 자신이 당할 판이라 시선을 돌리니 송영결이 검강을 두른 채 찔러오고 있었다.
“정파란 작자들이!”
검강을 두른 찌르기에 위백풍을 결단 내려 했던 절초 대신 회선벽(回旋壁)을 펼쳤다. 경력이 회전하며 강기로 변했다.
강기의 벽이 만들어져 송영걸의 검강을 막아낼 수 있었다.
쩌엉!
한점으로 집중한 검강이 어찌나 날카로웠는지 강기벽이 뚫릴 뻔했다. 그러나 막아냈고, 송영걸이 달려들던 속도보다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낭전은 순간 소름이 쭉 돋아 올랐다.
반사적으로 회선벽을 틀어 머리 위로 올린 순간 허공에 떠올랐던 위백풍이 몸을 회전하며 뻗어낸 해공비운 일초가 검강을 품고 날아들었다.
꽈앙!
위에서 떨어져 내린 검강을 받아내느라 낭전은 바닥을 부수고 그대로 떨어졌다.
“크윽!”
검강에 이른 고수 둘의 합격에 내상을 입어 왈칵 피를 토한 낭전이 이를 뿌득 갈았다.
“비겁한 새끼들아!”
낭전이 아래층 바닥을 박차고 위로 솟구쳐 오르며 낭아봉을 크게 휘둘렀다.
전력을 다한 폭렬격(爆裂擊)이 침몰해가는 혈경호의 갑판을 휩쓸었다.
콰콰콰쾅!
갑판이 산산이 조각나며 반파될 정도의 위력.
하지만 위백풍과 송영걸은 모두 앞으로 치달려 공격을 피해냈다.
“하!”
적이지만 확실히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둘이서 합격을 펼치는 데 있어서 손발이 저리 잘 맞는 것이 정파의 힘이다. 무맥을 이어온 자들이 이뤄낸 힘.
지금까지 바다 위에서 그런 자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낭전은 이를 뿌득 갈고는 내력을 일으켰다. 내상을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연달아 일으킨 내력에 단전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위백풍과 송영걸이 동시에 펼치는 격랑일관이 인중과 명치를 노리고 날아드는 모습에 낭전은 회선벽을 펼쳤다.
둘이 펼친 검강이 허공에 떠 있는 낭전의 회선벽을 강타했다.
그 충격에 낭전이 크게 뒤로 날아갔다. 바닥에 발을 딛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낸 두 가닥 검격에 실린 힘을 이용해 바다로 표표히 날아갔다.
낭전의 성명절기는 태경철봉이지만, 태경이라는 별호에 어울리게 그는 수공(水功)도 일절이었다.
이대로 바다에 들어가 후일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크하하하하! 두고 보자! 비겁한 놈들아!”
바다로 뛰어들던 낭전은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응?”
침몰해가는 혈경호를 향해 돌진해서 동문들을 구하러 가던 소위건은 강기가 휘몰아치는 전장을 보았다. 이제 지척이었는데 자신이 도울 것이 없을까 싶었을 때 낭전이 뛰어오르며 무시무시한 강기를 쏟아냈다.
휩쓸리면 죽을 정도의 위력.
“선장님!”
“왜?”
“선수를 눌러주실 수 있으십니까?”
원종도는 되묻지 않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쭉쭉 뻗어간 그가 훌쩍 뛰어올라 흑룡호의 선수상 위에 올라섰다.
천근추를 펼치자 흑룡호의 선수가 수면을 꾹 눌렀다. 노대에서 비명이 들릴 정도로 선수가 가라앉았다.
새삼 원종도의 내력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작은 체구에서 중형 쾌속선을 선미가 들릴 정도로 무게를 줄 수 있는 것만 보아도 그가 절대 위백풍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두 가닥 검강이 낭전을 향했고, 그가 낭아봉을 휘둘러 강기벽을 만들어내 받아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검강을 받아낸 충격으로 몸이 솟구쳤다.
해적들은 보통 수공에 뛰어났다. 해적단의 두목이라면 수공이 무척이나 뛰어날 터.
이곳이 바다 한가운데라고 해도 이대로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한 소위건은 여의일기공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코에서 왈칵 선혈이 쏟아졌지만, 소위건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깊이 눌렸던 선수가 솟구치는 힘을 빌려 소위건은 전력으로 강기를 일으켰다.
흑룡호의 선수상에서 강기가 솟구쳤고, 선수가 솟구치는 힘을 빌려 그대로 떠올랐다.
높이 날아오른 것은 아니지만, 선수가 완전히 들려 비스듬히 솟구친 상황. 선미가 간신히 수면에서 뜰 정도였지만, 상선에서 그걸 본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치 배가 날아오르는 것만 같은 모습.
그렇게 솟구친 흑룡호의 선수에 맺힌 강기가 바다로 도망치던 낭전을 덮쳤다. 낭전이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흑룡호를 보았지만, 이미 피하거나 막기에는 늦었다.
흑룡호가 뿜어낸 강기가 낭전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끄악!”
한줄기 비명과 함께 찢겨나간 낭전이 피비가 되어 바다 위로 쏟아졌다.
촤아악!
흑룡호의 솟구쳤던 선체가 수면에 떨어지며 일으킨 물보라에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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