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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글자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와 두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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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글자
작품등록일 :
2015.03.14 00:15
최근연재일 :
2016.02.23 00:32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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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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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51,747

작성
15.03.21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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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글자
25쪽

섬천(剡天)

영혼을 갈아넣었습니다.




DUMMY

섬천은 우선으로 정보창에 등록된 이름을 바꾸었다. 공천에서 섬천으로. '공천'은 과거에 형에게 쌓았던 죄를 조금이라도 씻기 위해 쓰던 이름이었다. 죄책감을 돌리기 위한 일시방편의 걱정인형과 같았다.

'이제 이 이름을 쓸 이유따위는 없다.'

모든 것을 다 갚아줄 테니까.

섬천은 그제야 공호를 올려볼 마음이 생겼다. 얼굴을 들어 올렸다. 다시 한 번 눈과 눈이 마주친다. 가시가 돋아난 공기를 들이쉬는 기분이다.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난 죽었고 이렇게 되살아나 형을 본다. 내 눈으로 직접 본다. 형제는 거대한 거북이 등껍질 위에 앉아 고요한 달빛을 느꼈다. 해안가의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서 흩어지는 소리까지 전부 들려왔다. 감성이라기 보단, 멍해진 머리는 그것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섬천은 마음을 쓸어내렸다. 공호가 S급 신체라는 것에 안심했다. S급 신체는 최후의 날까지 살아남고, 미치지 않은 이들의 것이다.


죽은 줄 알았다.


붉은 달의 떠오르고 1년째 되는 날, 형은 분명히 20차례 넘는 칼침을 맞았었다. 일반적인 인간 소년의 몸으로 버틸 수 없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났을까.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아서? 형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섬천은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는 기분이었다. 분명 기쁜 일인데 무엇이 감정을 서툴게 만들까. 섬천이 눈을 내렸다. 그 모습에 공호는 한숨을 크게 쉬어 착착한 마음을 밖으로 내뱉었다.

상당히 어색했다.

감정이 한 번 휘몰아치고 나니 그 찌꺼기들이 어색함을 만들었다.

하아, 차가운 대기에 사연을 담은 김이 퍼져나갔다. 김은 곧 예쁜 눈의 결정으로 변하며 떨어진다. 어색함을 깨고, 공호는 인벤토리에서 사과를 꺼내어 섬천에게 건넸다.

"일단 선물이야."

공중에 던져진 사과가 매끄럽게 빛을 머금었다. 실로 싱싱한 사과다. 무슨 뜻 일까. 섬천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섬천은 슬쩍 웃었다. 공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난이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했었다. 섬천은 사과를 잡아 한입 베어 물었다.


상황은 뒤집혔다.


그가 누군지 모른다. 또 그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나와 동생을 이간질 했다. 동생임을 못 알아봤다면, 만약 이렇게 쑥 커버린 섬천을 못 알아 봤더라면. 나는 이 아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공호의 머릿속에서 마치 그림을 그리듯 상황이 짜맞춰졌다.

헬든 대장간으로 갔을 때 마주쳤던 집단. 그리고 그곳에 있어 무력을 지녔던 섬천과, 공호를 이용해서 그 섬천을 제거하려던 누군가.

공호는 그틴의 '목숨'을 들었다. 미완성이지만, 예기를 갖고 있는 '목숨'. 그 목숨을 섬천에게 넘겼다.


나는 여기서 선택해야 했다.


동생을 무조건 보호해서 세상 모든 위험물에서 벗어나게 하던가.

동생의 손에 피를 묻히고 위험에 직면하더라도 주체적으로 해결능력을 기르게 할 것인가.


아니. 정정한다. 내 선택이 아니다. 나에겐 아무런 강제 권한이 없다. 선택은 녀석의 것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아마... 가봐야겠습니다."

맞다. 이 녀석, 조금 멋진 놈이었다.


#


그틴은 땀을 닦아내며 운치있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만월인가. 오늘은 달이 밝군."

구름이 달을 가리며, 그림자가 그틴을 물들였다. 자글자글 주름이 있는 그틴의 눈가에 운영(雲影)이 드리웠다. 구름이 달을 삼켰지만, 미세한 달빛이 구름사이를 비집고 내려왔다. 오늘 밤은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 오려나.


오늘은 뭔가 좀 특별했다.


달빛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손에 잡힐듯한 달빛이 아름다웠다. 그 달빛을 새벽공기 마시듯 밤공기와 함께 들이셨다. 이상한 감각과 함께 정신이 몽롱했다.

황홀감? 그건 아니다.

눈언저리가 빙빙 돌며 고거 참, 뒷마당에 묵혀둔 천화주(天花酒)라도 한 잔 들이킨 기분이다. 그거 내가 아끼는 건데 말이다.

캉!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에서 놓친 망치가 모루를 강하게 때리며 퍼진 쇳소리였다.

우웅웅, 쇠의 물방울 같은 울림이 주변을 퍼졌다. 또옥 하는 물처럼 맑진 않았지만, 쇠치고는 합격점에 들만큼 아름다운 소리였다. 웅웅. 계속 그 소리가 울렸다.

그 달콤한 소리를 듣으며 그틴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올렸을 뿐이었다.

어? 하는 의문이 들며 뭔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검은 의복을 입은 레스토들이 둘러싸고 서 있었고, 바닥에는 날카롭게 세워진 수십의 검들이 늘여뜨려 져 있었다. 그틴은 표정변화 없이 헤헤, 하고 웃더니 자의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그틴은 달라진 눈빛으로 그들의 발 밑둥이를 자세히 흩어 보았다.

그틴은 계속 실없는 소리를 내며 헤 하고 입을 벌리길 한참,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움직이면 되나?"

"2R이나 하는 물건이다. 기억을 모두 잃겠지. 행여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폭매는 언제나 깔끔한 처리를 좋아하니까 말이다."

그틴은 미간을 찌뿌렸다. 폭매, 상당히 위험한 이름이다. 10명에 가까운 B급 용병의 간부로 이뤄진, 티에든에 거점을 둔 인간의 제국 거대 불법조직.


제국도 꺼려하는 놈들이다.


일반적인 용병이 맡을 수 없는 암살과 마약을 밥 먹듯 다루는 집단이다. 그런 단체와 대화를 나누는 이를 그틴은 의외로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거냐.'

대화를 나누던 그는 그란딜 대장간의 그린이었다.

"으..나는 관 자리를 찾아서 들어가는 레스토는 아니어서. 이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만 해주면 20R 은 약속대로 건네지."

검은 의복 사내가 코웃음 쳤다.

"걱정도 많군. 이 일에 여기 폭매의 최고 간부 2명이 붙었다. B급 용병 수준이 2명이나 있으니, 설령 A급이 온다 하더라도 의뢰주하나 안전하게 도망치게 못 할까. 우리는 어둠이지만, 신뢰는 변치 않는다."

섬뜩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꼬리털 하나 빼지않고 온몸의 털이 곧게 뻗었다. 무지 막지막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을 때.

타다다닷.

대장간의 내부에서 누군가의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폭매의 일원은 어둠 속에 녹아든다. 주변에 동화하는 자벌레처럼 그들은 완벽히 어둠에 동화하여 기척을 죽였다.

그틴조차 그들의 그림자에 집중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쾅!

문짝이 떨어져 갈 듯한 소리가 나며 누군가 벽에 부딪힌다.

"분명 소리가 들렸는..."

우직한 목소리가 어둠에 흘려들어 온다. 그틴은 그 목소리에 순간 정신이 핑 돌았다.

"이런 젠장."


아들 녀석이라니.


이런 위험한 현장에 아들놈이 끼어들다니. 그틴은 흥분해서 몸을 일으켰다. 탁, 그러나 즉시 시야가 끊겼다.

"그린! 젠장. 자식 키우기 정말 힘들..."

마지막까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맴돌 뿐이다.

"덩치가 크니 효과가 지금 올라왔나? 어차피 기억을 모두 잃을 테니 걱정 마라."

그틴의 아들, 그론은 주위를 둘렀다. 정신을 잃어가는 아버지. 검은 의복의 괴한들. 그론은 모든 일들에 눈에 빨려들어 가듯 이해하며, 한 번에 이게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

"뭐하는 짓이냐!"

그는 어설프게 검을 집었다. 검을 잡는 자세에서 대장장이의 습관이 묻어났다. 그론은 앞뒤 안가리고 달려나갔다. 분노한 그는 차후 생각없이 검을 들어 괴한의 목에 정확히 겨누었다.

일반 레스토의 기준에서는 상당한 육체 능력이었다. 검이 적들의 지척지간까지 다가갔다.

곧 있으면, 아주 작은 시간만 있으면 검은 놈들의 목에 닿을 것만 같았다.


오만하리만큼 무모하였다.


깡, 검이 부러졌다. 부러진 검의 파편이 빙글빙글 돌며 그의 머리칼을 가르고 지나쳤다. 놀라 눈을 돌려 머리카락을 보길 잠시, 쥐도새도 모르게 좌우에 레스토가 한 명씩 나타났다.

동공이 커지기도 전에 온몸에 괴상한 자국과 함께 움푹 파였다. 눈을 깜빡인 사이 무언가 날라가는 게 보였는데, 그게 부러진 이라고 깨닷기에는 별로 오래걸리지 않았다. 시야가 잠시 검해졌다 밝아지더니, 머리가 뒤로 홱 밀려나있었다.

파바바박!

피떡이 되기는 순간이다. 자이언트 터틀을 때려 잡는 것이 B급 용병이다. 그론의 정신을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새끼 손가락을 써서 딱밤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론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아주 작은 일순간이었지만 처참하게 의지가 꺾여버렸다.


온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그론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론은 꿈틀거리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사람의 내적 강함은 성격만 보고 알 수 없다던가. 놀라울 정도의 강인한 정신력.

두 다리가 흉하게 비틀어졌다. 뒤늦게 고통이 찾아온다.

"으으윽."

난생처음 겪는 고통. 신음이 절로 흘렀다. 콰득, 이미 부서진 다리를 누군가 밟았다. 미칠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놈이 발을 억세게 비비적거렸다. 뼈가 갈리는 비명이 울리며 그론의 눈동자가 위험한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대장장이가 손을 다치면 안되지. 그래서 손은 봐준 거야."

이 목소리는 분명히 녀석이었다. 그란딜 대장간의 그린. 항거할 수 없는 분노에 눈물로 섞인 흙을 꽉 쥐었다. 철을 다루는 대장간의 바닥은 거칠다. 흙 속에 날카로운 쇳조각이 들어있었다. 쇳조각에 손바닥 대부분이 너덜해졌다. 마치 즙을 짜는 것처럼 강하게 쥔 주먹 아래로 피가 뚝뚝 흘렀다.

조금은 정신이 돌아왔다. 그린이 왜 여기 있는 것인가? 답은 한 번에 나왔다. 극심한 분노에 머리 위의 뿔이 자라난다.

개가 짖는 것 보다, 파리가 웽웽대는게 더 짜증나는 법. 그론은 몸을 꿈틀거리며 저항했다. 손톱으로 할퀴고 이로 물어뜯고 침을 뱉었다.

아들이라는 명목은 내가 이리 처절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단순 생물학적인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와도 같았으니 더 그랬을 지도 몰랐다.

그린은 손톱이 빠지도록 아무나 잡히는 대로 긇었다. 주먹에 내려찍히고 광대가 함몰해도 그린은 멈추지 않았다. 그건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 생존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조금만... 아니, 얼마나 더 버텨야 될지는 몰라. 오늘 중에는 꼭 들어오겠지. 개자식. 안들어오면 사람새끼도 아냐. 아버지아텐 따박따박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이럴 때 안 오면 어쩌라고.'

한 사내가 그론의 머리칼을 손에 빙빙 꼬며 들어올렸다. 콰득, 놈은 그 상태 그대로 손에 마나를 몰고 주먹을 날렸다. 머리카락이 뜯겨나가며 머리는 농구공처럼 튕겨지며 돌바닥에 박혔다. 끔찍한 신음소리가 잠시 흘렸다.

그린은 그에게 소리쳤다.

"대충하고 가자고. 아, 걔는 죽여서 그틴 옆에 둬. 목을 친 다음에 그 검은 손잡이만 깨끗이 닦아서 그틴 손에 쥐어두고."

진짜 나쁜 새끼들.

그론은 피를 토하며 일어섰다. 머리 어디가 다쳤는지 상황판단능력조차 떨어졌다. 그의 시야에는 이미 검은 세상 속에 빨간 점 하나만 찍혀있었다. 그론은 줄이 꼬인 마리오네뜨처럼 덜그럭거리며 움직였다. 사내가 휘두른 검에 그론의 목이 흐릿한 동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날아간 목에서 벗꽃잎처럼 피가 휘날리며 쓰러져 있는 그틴의 얼굴을 적셨다. 그린은 그 피를 손에 찍어발라, 그틴의 입속에 손가락을 쏙 집어넣었다.

이제 너도 그 피를 먹었으니 공범이야.

"으하하하."

그린은 건물이 울리는 웅장한 웃음을 토했다. 오랜 숙원이 쌓인 광기였다. 폭매는 뒤에서 얼굴하나 찌뿌리지 않으며 묵묵히 지켜봤다. B급 실력자인 사내는 머리속으로 수지타산을 하고 있었다.

'뭐지?'

그러던 중 사내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척추의 골수가 꼬리뼈를 통해 빠져나오는 긋한 그 섬뜩함. 그는 검을 즉시 육감이 알려주는 곳으로 저었다.

휙, 뭔가가 검을 피했다. 어둠속에서 2개의 구슬이 활활 타오름을 보았다. 살기가 터져나오는 두 눈은 충분히 노했지만 사내가 따라가지 못할 빠르기는 아니었다. 사내는 검을 아래로 그었다.

티디디딕!

교묘한 힘에 검로가 틀어졌다. 순수한 백색의 분노가 보였다. 검이 틀어지는 사이, 옆에서 검이 비집고 들어왔다. 마치 계산된 듯한 소름돋는 움직임.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그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거대한 기압과 함께 검의 진로를 수직으로 바꿨다. 마나를 쓰지 않아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게 그의 실수였다.


'마나야, 남김없이 손에 가라.'

다가오던 검의 속도가 순간 빨라졌다. 그의 목이 부웅 뜨며 날아갔다. 인지회로에 장애를 주는 그 상황에 모두가 멍했다. 곧 그의 목을 뺏어간 자가 나타났다.

"쓰레기 새끼."

나직하게 그 말을 내뱉은 섬천이였다. 섬천은 손에 마나를 밀어넣고 검을 아래로 내렸다. 이어 공간을 장악하는 살기를 도드러지게 뿜었다. 살기에는 광기가 베어있었다. 죽고 죽이는 격양된 단지 감정속에서 나오는 감정이 아닌, 정말 미친놈들을 보게 스며든 광기. 1년이지만 지옥에서 배워온 그 살기. 이 살기란 것이, 아스페티아에서 두드라진다. 주위에 있던 두 사내가 움찔했다.

"죽여라! 아, 아니, 나부터 보호해라!"

그린이 소리쳤다.

대부분의 인원이 섬천에게 달려들었다. 하나, 진정 격노한 섬천 앞에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쉬식, 공중에서 매가 비상을 한다. 매서운 눈빛을 감고 먹잇감을 찾아 눈을 굴린다. 뒤따르는 한줄기의 섬광 앞의 모든 것은 먹이로 돌변한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 속에서 정확하게 먹이만을 잡아낸다.

한번 두번. 뜨겁게 타오르는 화로의 불빛을 받아 한줄기의 검광을 남긴다. 검 끝은 먹이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망설임도 없었다. 하늘의 황제를 매라 한다면, 섬천은 매가 맞았다. 속도나 힘을 B급 용병에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그것을 분노와 예기있는 검술로 메꾸었다.

그는 그린을 남긴고 폭매를 모두 베었다. 불가능한 일을 분노를 들먹이며 너무도 가볍게 성사시킨다. 제어 못할 분노에 손만 떨리지 않았더라면, 섬천의 몸이 걸레 짝처럼 변하진 않았을 것이다.

섬천은 맹수처럼 그런 몸을 이끌고 그린을 향해 다가갔다.

싸아아, 살기가 흡사 형태를 이뤄 섬천의 등 뒤에서 매의 날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불안한 눈으로 섬천을 위아래로 수십번을 흝었다.

"의, 의뢰주를 공격해서 의뢰가 실패하면, 폭매가 너를 놓치지 않을 거야. 조,조용히 물러나면 나도 이번은 입 닫고 넘어가지."

섬천이 동공을 키웠다. 이마에서 흐른 피가 눈에 들어감에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독한 놈.'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자 그린은 억지에 가까운 이야기를 꺼내었다.

"포, 폭매의 보스가 B급을 넘어 A급을 바라볼 용병이라는 소문도 있어. 그래도 나, 날 죽일거야?"

섬천은 여전히 앞을 향해 걸었다.

"나를 죽이면 너도 죽는다니까? 폭매의 레스토들이 B급 용병의 실력자를 2명이나 잃고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이번에도 섬천은 일절 주춤거림도 없이 걸었다. 그린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래. 좋아. 어디 죽여봐. 같이 동반자살 하자고. 폭매가 그틴 새끼까지 건들여도 몰라, 이 새끼야."

섬천이 움찔한다. 그러나 잠시뿐이다.

쉬익.

그런 섬천의 뒤에 공호가 나타났다. 어디를 다녀 왔는지, 공호의 왼팔과 배에 끈적한 피가 다량으로 흘렀다. 치덕치덕 흐른 골수가 다리 밑으로 흘려내려 있었다. 거의 호러물 수준으로 다친 공호였다. 쭉 주위를 눈에 빨아들인 공호는 마지막으로 섬천을 응시했다. 공호는 입을 닫은 채 인벤토리에서 상당한 덩치의 시체를 꺼내 그린 앞으로 툭 던졌다.

터덕, 그린의 얼굴색이 시체에 못지않게 시퍼레졌다. 왜? 얘가? 폭매의 보스가 왜? 그리고 쟤는 또 왜 여기있어?

"그게 얩니까?"

그것도 잠시. 괴물 같은 회복력에 피가 멎어갔다. 공호는 섬천의 선택을 기다렸다. 푹,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심장만을 노리고 들어간 검격.

허!

그린은 숨을 급히 들이쉬며 절명했다. 공호는 눈을 감았다.

말리지 않았다. 그 말은 즉, 동생에게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허용했단 말과 같았다. 과연 동생에게 지금와서 까지 손을 더럽히게 만든 것이 옳은건가.

'내가 죽였으면, 섬천은 이를 갈았을 거야. 그리고 지금 이 만남은 폭포로 떠내려가는 단돗배와 같겠지. 그래, 젠장. 생색낼 거 없다. 앞으로 언젠게 또 수백번은 있을 일이고, 몬스터까지 본다면 수억번은 있을 일 일지도 모른다. 그때가서는 이런 생각도 들지 않겠지. 이미 물들어버린 백지니까. 제기랄. 알았어. 그렇게 된거야. 잘못한 놈을 벌 준것 뿐이야. 그게 전부야.'

섬천은 쓰러진 그린을 넘어 그론에게 다가갔다. 섬천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목이 잘린 그의 맥을 짚어본다. 그의 잘린 목에서 피가 줄줄 세는 데도 섬천은 진지하게 맥을 짚었다.

공호는 그 모습을 담담히 지켜봤다.

그는 죽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그런데도 저런 눈을 진지한 눈으로 섬천은 맥을 짚었다. 그게. 진지한 눈이라는 것이 더욱 소름이 돋았다. 이 순간만큼 마치 과거 지옥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매서운 바람이 분다. 섬천이 손벽으로 눈을 지긋이 눌렀다. 손벽 옆으로 사이로 물기가 세나온다. 그의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공호는 어찌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섬천은 소리없는 절규를 토해냈다.


피로 가득 얼룩진 대장간에 허연 통짜 담배의 연기가 올라왔다. 그틴이 피우던 담배를 죽어버린 아들 그론의 입에 물려주었다.

"아버지는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들은 죽고. 그럼 일어나도 아들이 죽었다는 것도 기억 못하겠고... 미친, 하하하. 미친..."

이때만큼은 섬천은 특유의 말투도 버렸다. 공호는 속으로 자책했다. 이곳을 먼저 들렸어도 됐다. 그렇다면 아들은 살았을 것이다. 섬천이 담배를 물려주기 위해 굽힌 무릎을 다시 폈다.

"형."

서로 무섭도록 같은 표정,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살아남아 본 사람만 아는, 그 나날의 이야기를 해주는 듯 한 눈빛. 반복된 경험에서 나오는 말. 감정조차 죽인 그 표정은 기묘했다. 공호가 무거운 고개를 뒤로 돌렸다.

"....."

성급한 움직임은 화를 낫는다. 설 건드리면 안 건드린 만 못했다. 개도 성난 놈은 피해가는 법이다. 그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덜그럭 거리며 무장을 한 수천의 인원들이 대장간 주위를 메었다. 모두 무장을 하고 짙은 살기를 피었다. 그들의 무장은 제각각이었지만 문양만은 모두 같았다. 매의 꼬리에 걸린 폭풍.

폭매의 일원들이었다.

"짜증 난다. 진짜."

섬천은 온몸이 난자당한 고통에서도 그냥, 아주 편하게 그런 말을 툭 던졌다. 공호도 섬천도,아직 몸이 회복되는 중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적어도 오백이 넘는 숫자다.

섬천의 손이 쇠로 된 검의 손잡이를 조금 파고들어간다.

"더럽게 짜증이 난다니까."

공호도 단도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기세로 쥐었다. 감정이 격양된다. 잃었던 감정을 가족의 곁에서 더 찾아간다. 개인적인, 알 수 없는 분노. 자신의 목숨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냥 올라오는 분노. 나 의외의 사람과 공유하는 분노.

섬천이 먼저 움직였다. 서걱, 소년의 검에 한 레스토가 양단 당했다. 그걸로 성이 안찼는 지 그 놈을 발로 밀어찼다. 쿠웅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철갑을 입은 놈의 내장이 전부 터져나가며, 놈의 전신은 쭈욱 밀려나 뒤의 레스토를 넘어뜨렸다.

공호도 달려들었다.

'이건...'

이제 더이상 동생의 살인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일이 끝나면 적어도 백 이상은 녀석의 손에 죽어났을 것이다. 이미 덧붙여 할 말도 없었다. 심사고거. 생각이 끝났으면 이제 행동력이 필요할 때다. 몸으로 보여주면 된다.


공호는 손을 쥐었다. 대기가 쇠를 긇는 듯한 울음을 토하며 얼어갔다.

'음의 마나란 건 신기하다.'

공호가 음의 마나를 처음 쓸 수 있었을 때는 거대한 나무를 얼릴 정도의 능력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 거대한 나무 만큼의 얼음을 만들어 낼 정도의 위력이 생겼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3000개의 창을 허공빙결로 생성할 능력이 되었다.

음의 마나를 가진 이들이 전부 다 그런 걸까?

아니. 그건 아닐 거다.

묠드는 이것을 재능이라는 말로 포장했다. 하지만, 공호는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평가했다. 결국은 적응을 하냐, 못하냐의 문제다. 그것을 단지 음의 마나의 재능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소년인 공호가 몸으로 지옥을 견뎌내게 했던 재능이 그거다.


무한적응능력.


모든 재능에 적응하는 재능.

그 재능이 공호에겐 있었다. 음의 마나? 적응해버린다. 생존? 적응해버린다. 고통? 역시 적응해버린다. 남들의 모든 재능에 적응하는 것이 그의 능력이었다.

아주 미세한 수천개의 얼음 조각들이 규칙성을 갇고 두둥실 떳다. 밝은 달빛에도 몇몇 반짝이는 얼음조각을 제외하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순간, 공호의 뇌는 그 자잘한 얼음 조각들을 하나하나 컨트롤하며 연산한다. 초당 10^11 개의 수식이 공호의 뇌를 거쳐가며 강타했다. 공호는 그와 동시에 고요한 검은 동공으로 주위를 한 번 흝었다.

화악, 얼음조각이 퍼지며 그들의 몸을 난도질했다.

섬천은 공호의 얼음조각을 한번 바라보며 '연산은 내 특기인데.' 라며, 적을 베어 붉은 피로 둥근 동선을 만들었다. 섬천은 즉시 고개를 숙여 코끝을 스치고 간 둔기를 피하고 귀신같이 달려들어 허리를 단 번에 끊어 놓았다.

나이 열 넷, 열 다섯이 하기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이해할 수 없는 무서운 짓을 저 둘은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렇게 정신없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덤벼들기만 하였다. 폭매라는 단체의 위엄이나 실력을 뒤로 두고 철저하게 얼마나 더 많이 죽이나에 중점을 두었다. 이성적 행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도 섬천은 이길 수 있으리라 확정짓고 덤볐다. 지금 이길 수 없다면 섬천이란 소년은 깔끔히 물러간다음 어떠한 계략으로든간에 이들을 멸살했을 것이다.

콰득.


-짧은 시간안에 1,000명이 넘는 레스토를 죽였습니다. 칭호:학살자를 획득하셨습니다.


달이 져갔다.

주변에 시산혈해가 펼쳐져 있었다. 공호와 섬천은 그틴은 방에 눕히고, 그론은 대장간의 마당에 묻어주었다. 굴곡진 무덤에 허연 통짜 담배가 꽂혀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연기를 만들며, 바람은 나릇나릇 퍼지는 연기를 하늘로 올려보낸다.

섬천은 무덤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얌전히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풀어 무덤에 꽂았다. 이건 그의 것이였다. 더는 그틴의 아들이 될 자격따위는 없었다. 그틴의 검이 가야 할 곳을 찾아간다.

'그래. 애초에 개척자와 같이 있었단 게 문제였어.'

그의 아들도 섬천이 나타남으로서 뭔가 서운함을 느꼈을 거다. 그래서 조금 미움받긴 했다. 그렇다고 죽일 놈같이 원수같은 미움은 아니었다. 형제간에나 나올듯한 순수한 서운함이려나. 그런것이었다.

'차라리 다 잘됬어. 다.'

섬천은 이제 그만 갈길을 갔다. 공호도 섬천을 뒤따라 걸어갔다. 폭매의 시체가 산같이 쌓여있다. 곧 여기는 제국의 특수 수사대에 휩사일 것이다. 더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걸어가며 둘은 각자의 의미로 섬뜩한 각오를 다졌다.

"형님, 사냥갑시다."

"어. 가자."

그리고 그 둘의 목표를 위해 할 일은 서로 같았다.


#


티에든과 멀지 않은 어떤 항구도시.

한 소녀가 백사장에 있는 바위에 앉아 있었다. 소녀는 멍하니 달을 올려보고 있었고 소녀의 시선 밑으로는 파도소리가 밀려왔다. 엉덩이를 모래에 붙인체 조그라 앉아 있는 소녀의 긴 머리칼은 비단결과 같이 내리웠고, 상당히 긴 나머지 허리를 넘어 모레에 닿았다. 소녀의 머리카락은 달빛을 받아 잔잔히 빛나 신비스러워 보였다. 그 덕에 하얀 피부의 아름답던 소녀가 저 달에서 온 월궁항아를 떠올리게 까지 만든다.


밀려온 파도가 소녀의 발까지 적시곤 다시 돌아간다. 소녀는 신경쓰지 않고 변함없이 생기있는 눈으로 달을올려본다. 수백번 파도가 오고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어디선가 나타난 파란머리 소년이 소녀를 툭친다. 소녀 못지 않은 신비로움을 뿜내는 소년이었다.

"응. 알았어."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모레를 털며 일어난다. 소녀가 뒤를 돌아볼 때였다. 싸아, 밀려온 파도가 소녀의 발목까지 차고 들어왔다. 소녀는 팔목에 느껴지는 이질적 느낌에 고개를 내렸고, 발목에는 어떤 무늬가 그려져있는 천조각이 우연히 걸려 나풀대고 있었다.

"어?"

소녀는 숨을 확 들이키며 놀란다. 황급히 천조각을 집어올린 소녀는 그 천조각에 있는 문양을 멍하니 바라봤다. 파도가 쓸어간다. 쓸려왔던 물이 전부 빠진다. 그 짧은 시간에 이 천조각을 발견한건 대단한 우연이었다.

'무늬도 우연이겠지. 설마..'

소녀는 천조각 주머니에 눌러넣고 파란머리 소년을 총총 따라 걸었다.

스르륵, 돌아서는 그 둘의 볼에 각자의 문양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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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리셋 +4 15.04.12 1,397 51 15쪽
27 리셋 +6 15.04.10 1,250 40 11쪽
26 리셋 +7 15.03.27 1,712 44 23쪽
25 리셋 +6 15.03.22 1,716 41 9쪽
» 섬천(剡天) +2 15.03.21 1,493 39 25쪽
23 섬천(剡天) +3 15.03.20 1,767 54 14쪽
22 섬천(剡天) +1 15.03.19 1,667 43 13쪽
21 섬천(剡天) +2 15.03.19 1,657 46 14쪽
20 섬천(剡天) +5 15.03.17 1,596 49 14쪽
19 섬천(剡天) +2 15.03.17 1,563 50 23쪽
18 섬천(剡天) +3 15.03.17 1,854 52 11쪽
17 전환점 +4 15.03.14 1,696 60 13쪽
16 전환점 +3 15.03.14 1,654 50 9쪽
15 전환점 +2 15.03.14 1,635 5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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