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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글자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와 두루미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틀린글자
작품등록일 :
2015.03.14 00:15
최근연재일 :
2016.02.23 00:32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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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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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51,747

작성
15.07.2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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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여우제국 폴시아.

영혼을 갈아넣었습니다.




DUMMY

"페하. 아니, 어머니. 어찌 가시려 하시는 겁니까."

황제의 관을 머리에 쓴 나탈리가 육미호를 붙잡았다.

"가야 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평화는 있을 수 없어."

젊었을 적에는 남편을 위해, 늙어서는 모두를 위해 희생한 육미호의 행동이 나탈리는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차여차 해서 황제가 되는 데 성공하고, 다섯 황자와 두 황녀를 얻았지만 막상 육미호가 진짜로 떠난다니 안타까웠다.

환생하신단다. 이 세계에 내려온 세 분의 신과 함께 반드시 개척자의 원흉을 제거하겠다는 목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그럴 권리도 없었다. 어머니는 역사상 최고의 여우요괴였고, 이 세계의 영웅이셨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육미호가 환생단을 먹고 쓰러졌다. 다른 영웅들도 망설임 없이 환생단을 삼켰다. 나탈리는 숙연히 고개를 숙여 그들의 환생을 기도했다.

두 분의 신도 환생단을 삼켰다.

완벽한 신으로서 권위는 레스토를 위해 지상에 강림했을 때부터 포기하신 것. 물리적인 육체를 지닌 그분들의 혼도 환생단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다만, 마지막 신은 영웅과 신들이 환생단을 삼켰음에도 미동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또옥.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고, 물과 물이 만나는 청아한 소리가 정적을 만든다.

"왜.. 삼키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순간, 나탈리는 괴이한 느낌을 느꼈다. 공간이 쭈욱 뒤로 늘여지는 환상을 볼 만큼 소름이 돋았다.

"끝났다..."

"예?"

"드디어 끝났다."

파앗.

신의 손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나탈리는 엄청난 광채에 황포를 둘러막았지만, 문제는 황후였다.

"아아!"

황후가 괴로워한다.

어째서?

거칠게 눈빛이 흔들린다. 또옥. 물은 파문은 이고, 물방울은 하염없이 떨어진다. 표정을 보아 황후를 죽일 것만 같은 기세다. 그 자비롭던 '신'이란 자가. 황후가 괴로워하기에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한 걸까.

감히 신에게 날카로운 얼음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역시 신일까. 그가 눈에 힘만 줬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벌써 온몸의 음의 마나가 역류한다.

"하아. 좋아, 좋아."

이상한 낌새를 느낀 영웅들의 영물들이 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 단번에 제압당했다. 신이 손을 튕겼다. 괴상한 균열이 생기며 집체만 한 검은 호랑이가 머리를 들이민다. 금단의 영역에서 탄생한, 세상을 사냥하는 흑호(黑虎). 신화속의 검은 호랑이.

"시작해라. 흑연호."

검은 호랑이가 울부짖었다. 고막이 터질 듯한 아찔한 울음소리. 천하가 진동했다.

"황후에게 무슨 짓을!"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네 내뱉었다. 흑연호가 움직였다. 이 곳은 폴시아. 평화로운 여우들의 세상.

"닥치는 데로 잡아먹을 거야. 몬스터든 뭐든."

신은 비웃었다. 아니, 신이 아니다. '그'는 비웃었다. 지금 '그'를 신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모욕적이다.

"지금 녀석을 멈추지 않으면 폴시아는 멸망할 거라고."

빠르게 머리를 굴렀다. 목적이 뭐지? 폴시아의 멸망? 아니야. 그럴 거라면 직접 손을 쓰겠지.

"황후에게 무슨 짓? 별거 아냐. 밤의 여우로 만들기 위해 조금 고통을 주는 거지."

"그 무슨!"

그는 황후의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올렸다. 황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 켁켁 되기만 했다.

"자, 밤의 여우가 돼라. 흑미호가 아닌 이상 저 녀석을 막을 방법은 없다. 선택하라고. 밤의 여우가 돼서 저 녀석을 봉인할 건지, 아니면 이대로 폴시아의 멸망을 지켜보던지."

그는 다시 한 번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이, 최상의 욕구를 만족한. 극에 달한 쾌락을 맞본 이의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이상행동.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아니, 그런 사치스런 생각은 일단 접어둔다. 지금은 절규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니까.

"미쳤어. 너는 미쳤어!"

절규하는 나탈리를 밟고 그는 지나쳤다.

"모든 신은 미쳤어. 너희가 기준에는 말이지."

그는 음미하듯이 천천히 환생단을 삼켰다.

"와라! 쿤. 너의 시험에 참여해주마."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벌써 몇 번째일까. 몸이 으스러지는 고통이 정신을 지배한 것은. 그 고통은 뭔가를 자꾸 요구한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순간 뭐든지 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고통도 힘이 없어서 비롯된 것.

조금 어이없지만, 이 고통을 팔아서 힘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황후의 꼬리가 물들어간다. 한 없이 어두운 밤.

털 한올한올 검게 물들어간다.

죽을 것만 같은 고통. 혹시 금단의 고문, 마나 페인이란 것을 뚫는다면 이런 고통일까. 아니다. 마나 페인이 뚫린다면 비명조차 지를 수 없겠지.

이런저런 잡생각이 스쳐 갔다. 고통을 도외시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일지도 몰랐다. 그 고통 속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대로 죽는다면, 황제는 누가 치료하지.

누가 황제의 목숨을 연장하지?

내가 아니면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죽을 수 없다. 어떻게든 살아나서 황제를 치료할 수 있는 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싸아아.

반쯤 검게 물들었던 꼬리가 다시 순백의 색으로 되돌아간다. 고통이 멎었다.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

고통이 잠시 미뤄졌다. 이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황후는 흑미호가 된다.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까. 황후는 알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고통이 미뤄진 것뿐이라고. 언제라도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이는 황후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황후는 날뛰고 있는 흑연호를 응시했다.

지금 가장 위험한 녀석. 천재적인 능력으로 삼미호의 반열에 든 황후다.

쩌저저적.

거대한 얼음이 허공에 떠오른다. 얼음은 시뻘건 피를 입에 더럽게 묻힌 흑연호를 향해 다가갔다.

크워어.

단순하다.

그냥 포효를 질렀을 뿐인데 얼음 공격이 무산이 훑어진다. 단 한 수에서 절망을 느꼈다. 단순한 무력으로는 절대 제압이 불가능하다. 황후는 절망했다.

아니야. 봉인해버리면 돼.

황후는 재빨리 움직였다. 당장 뛰어가 황제를 부축하고 싶지만, 그렇다면 황제는 더욱 곤란해진다. 마나가 역류한 것은 남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 전에 흑연호를 처리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차앙!

영물들이 하나, 둘씩 정신을 차려간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거대한 은빛 독수리가 날아올랐다.

까아악!

검은 범과 은빛 매의 싸움.

콰앙.

그러나 은빛 독수리는 밀리는 듯싶더니, 큰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흑연호도 상당히 피해가 있었는지 처음 같지 않았다. 곧 뒤따라 다른 영물들이 달려들었다.

콰직.

그러나 흑연호는 생각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아니, 마치 봉인이 풀리듯 성장해갔다. 황후는 부적을 흩뿌렸다. 결계의 중심에서 화려한 손놀림과 함께 흑연호의 상황을 살폈다.

충격적인 결과였다.

"괴물 같은 놈!"

놈의 몸속에는 상당한 제어장치가 잠들어 있었다. S급 용병의 마나라도 10분이면 모두 빨아들이는 제어장치. 그런 걸 몸속에 여러 개나 박아 놓고서 움직인다. 그것마저도 놈의 극강한 마나에 서서히 녹아 가기 시작했다.

처참하다.

영물들이 전부 패했다. 녀석도 바닥에 내장을 질질 끌만큼 피해를 보았다. 황후가 입술을 깨물때, 드리운 은빛 독수리가 말했다.

"우리는 주인이 갑자기 없어져 약해진 상태다. 이 상태를 극복하려면 적어도 십수 년이 걸려."

어쩌란 건지 모르겠다. 저 말의 의미는 그냥 절망하라는 것인가.

"저 검은 고양이를 봉인하기 위해서는 신.. 아니, 놈의 말대로 적어도 네가 흑미호가 돼야 한다. 그래도 네 생명력을 결계에 쏟아부어야 봉인할 수 있을 정도야. 부탁한다. 네가 결계와 부적 다루는 것이 또 다른 특기인 것은 알고 있다. 녀석을 봉인해다오."

대뜸 흑미호가 돼서 녀석을 봉인해 달라. 어이없었다. 너무 단도직입적이어서 더.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저 말이 진짜라면 저 방법밖에 희망이 없다.

잔인하다.

생각을 해보자. 죽어서 녀석을 봉인 했다고 하자. 그러면 황제는 앞으로 누가 독을 몰아내 주지?

황제의 독은 황후밖에 모르는 사실이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기에 황후밖에 치료해 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워낙 강력한 독이었기에 한 달에 한 번 몰아내 주는 게 다인 치료. 만약 그것마저 안 한다면, 한 번 이라도 음의 마나를 다른 곳에 쓴다면 황제는 고작 길어봤자 수십년안에 죽는다.

"모, 못해. 난 못해."

"해야 해! 녀석이 닥치는 먹어치우며 성장하면 놈을 막을 방법이 없어! 결국에는 네 황제까지 먹어치워 버릴 거야!"

황후는 몸을 떨었다. 이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은빛 독수리의 말대로 흑미호 상태로 온 생명력을 쏟아 붙는다면, 녀석을 봉인할 만한 봉인술을 실행시킬 수 있다.

이론은 된다. 그러나 쉽게 할 수는 없었다. 목숨을 버려야 하는 데, 그리고 황제의 목숨까지 같이 버려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결정해. 지금부터 우리 영물은 저 녀석과 장기간으로 대치할 거야.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다 해야 해. 저 녀석을 봉인하지 못한다면, 폴시아는 멸망한다!"

"그럼 지금 황제 페하는!"

"저 정도 마나 역류면 바로 잡는 데 하루는 걸린다."

황후는 떠올렸다.

흑연호와 황제의 독을 막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을. 자신만을 희생해서 모든 것을 막는 그 방법을 말이다. 황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이 급격한 재앙에 비명을 쏟아부웠다.

"... 흑미호의 제단. 황궁의 지하입니다. 그곳으로 유인해 주십시오."

옛날 흑미호의 제단을 찾을 때는 자신이 흑미호와 관련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해봤다. 황후는 흑미호의 제단의 위치를 은빛 독수리에게 알려줬다.

황제에게조차 알려주지 않은 장소인데..

황제를 모시고는 곧장 비밀 연구실로 향했다. 백성에서 황궁 최고 치료사의 자리까지 끌어올린 천재성이 만들어낸 지금까지의 결과물들. 황후의 마지막 연구가 시작됐다.

기억이 사라지고, 막강한 부작용을 가지지만 뭐든지 치료하는 물약에, 어떤 몸의 상태든 지속시키는 물약까지. 모두 황후의 손에서 나왔다.

그리고 흑연호의 봉인을 도울 두루미 제국의 지원까지.

'비록 이대로 잊혀져도 폐하는 평화를 지키시겠지.'

황제까지 비극에 참여시킬 생각은 없었다. 황후에 관한 황제의 기억은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일이 최소한의 피해로 끝나니까. 황제가 몰라야 황제의 독을 몰아낼 수 있으니까.

"봉인... 시작합니다."

황후의 비극은 끝에서 시작되었다.


#


드르륵.

공호는 일어섰다.

"어디 가?"

먼저 해야 할 것을 기억한다. 미루어야 할 것은 미룬다. 가족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공호에게, 상식을 대입할 수는 없었다. 겉과 달리 속으로는 뒤틀려 미쳐있으니까.

"볼일이 있어."

공호는 닭 다리를 뜯고 있는 섬천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먹고 있어."

파앗.

언제 나와 같이 신출귀몰하게 몸이 훑어져 사라졌다.


#


미뤄뒀던 칭호의 효과를 확인했다. 여러 알람이 정신없게 떠올랐다.


-흑연호의 천적(불안정): 신체가 닿은 생명체에게 심리적 고통을 심어줄 수 있다.


-불안정한 흑연호를 사냥했기 때문에 칭호 '흑연호의 천적'이 불안정 상태입니다.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놀라운 우연! 흑미호 상태와 칭호 '흑연호의 천적'이 조화를 이뤄냅니다. 칭호 '흑연호의 천적'이 '고통의 천적'으로 진화하였습니다.


-고통의 천적:축적된 고통을 스텟으로 전환할 수 있다.


-현제 축적된 고통: 5031. 전환율은 10:1 입니다.


-흑연호 슬레이어(불안정):신체능력이 5% 상승한다.

(부작용으로 인하여 일주일에 한 번 효력을 잃는다.)


-바람을 밟는 자: 하루마다 10분 간 민첩을 30% 상승시킬 수 있다.


천천히 칭호의 효과를 읽어내렸다.

전부 그럴듯한 효과를 지닌 칭호들. 봉인 상태의 흑연호를 죽여서인지, 불안정 상태의 칭호를 받았다. 그리하여도 막강한 효과다.

특히 고통의 천적이란 칭호가 눈에 들었다. 이독제독. 고통이란 놈을 이용해 상대를 죽일 수 있다. 물론 고통은 아프겠지. 하지만.. 이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잃는 것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소년은 냉정했다. 그리고 미쳐버린 것 만큼 행동력이 강했다. 시퍼런 단도가 품속에서 나타난다. 거침없이 약지를 내려그었다.

서걱.

잔인하리만큼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마치 고통이 없다 해도 믿을 정도다. 레벨이 오르며 자동으로 상승하는 극강의 방어력 덕에, 공호의 힘으로도 새끼 손가락은 전부 잘려나가지 않았다.

뒤따라오는 S급 신체의 재생능력. 그것 역시 믿기 어려웠다. 소년의 약지가 새살이 돋듯 솟아나기 시작했다.


-고통이 1만큼 축적되었습니다.


손가락 전단이 1의 고통. 적다. 하지만 공호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페인의 고통에 비하면 장난이니까. 이번에는 둔갑술을 썼다.

우두드드득.


-고통이 4만큼 축적되었습니다.


손가락 절단을 1이라고 가정했을 때의 공호의 예상과 맞아들였다. 흑미호의 둔갑술은 기본적으로 근육과 뼈를 뒤틀어 찢어버린다. 한 마디로 정말 아프다.


-축적된 고통을 스텟으로 전환하시겠습니까? 현재 최대 스텟 포인트 503까지 전환 가능합니다.


스텟이 쌓인다는 것 만으로도 기쁘지만, 다르게 생각한다면 엄청난 거였다. 개척자가 죽었을 경우 분명 레벨이 절반으로 떨어지고, 육체등급과 레벨에 따른 스텟포인트가 떨어진다. 다시 말해 축적된 고통은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이야기.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한시가 급할 때. 흑연호와 같이 스텟포인트를 분배할 시간을 잃고 전투를 한다면 무용지물. 할 수 있는 건 미리 다 해 놓는 게 안심된다.

"축적된 고통을 503 스텟포인트로 전환."

503의 스텟포인트. 민첩은 충분히 올렸다. 힘과 순발력, 육감에 차례로 부여했다.

허무하기도, 막강하기도 한 정보창.

안으로는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쿤이란 녀석은 마치 어린이 같은 게임 시스템으로 조롱하는 기분이다. 이제 곧 밖으로 나간다. 가족을 볼 수 있다.

과연, 지킬 수 있을까.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그들을 지킬 수 있을까.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짓을 하고 있는데도, 산불 앞의 촛불처럼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그 확증 없는 불안감이, 다시 말해 확증되지 않은 미래가 고통으로 다가왔다. 이제껏 그럴수록 강해지기 위해 발버둥 쳐왔다.

불에 맞서오는 맞불.

둘 다 모두 뜨겁기는 마찬가지다.

확증되지 않은 미래도, 비정상으로 힘을 추구하며 변하는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녀석을 볼까 두렵다. 실수를 집요하게 집어내 하얀 공간에서 순백의 심판을 내리는 그 녀석.

언제나 비교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열등감이 몰려온다.

육체적인 통(痛) 보다는 정신적인 고(苦)가 더욱 압박했다.


콰드드득.

잔인하게 인간과 비슷한 몬스터의 목을 뜯어버린다. 생물의 마지막 발악인 듯 공호를 향해 튀어오른 피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땅으로 비참이 떨어지고, 공호는 다른 놈의 심장에 손을 박았다.

정신이 들면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뭐든 사냥하고 있었다.

이건 병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병.

불안감에 쫓기다보면 최악의 상황을 항상 머릿속에서 대입하곤 했다. 그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S급 신체를 지닌 99명의 개척자. 또 다른 경험자. 확실히 그들은 지구에서 정신력 하나는 가장 최상위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선인'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정신력이 강한 것뿐. 미친 전장에서 살아남았던 것은 매한가지. 만약 그들과 역인다면.. 최악의 상황에서 그들과 마주했을 때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이제 곧 만난다. 가족. 거침없이 심장이 뛰었다. 그 생각만으로 심장이 도망가버릴 거 같다. 차가웠던, 이제 껏 있었던 것과는 다른 긴장이 몸을 덮쳤다.


촤아악.

이제와는 다른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완전히 놓아버렸던 정신에 피가 튀기는 것을 막지 못했다. 공호는 가만히 아래를 응시했다.

뜯겨 있는 어린아이의 몸. 처참히 파괴된 작은 여우요괴 마을. 극도로 공포심에 몰려있던 얼굴의 아이 시체, 빠져나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알려주는 핏자국.

"아.. 아아."

또 이렇다.

가차 없이 죽여버렸다. 알지 못하는 사이 죽였다. 죄책감이, 죄책감이 들지 않는 다는 죄책감이 공호를 사로잡았다.

이들을 왜 죽였을까.

간단하다.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황후는 왜 도왔을까.

역시 간단하다. 도움이 될 인물이었으니까.

여우요괴를 죽인 것은 사람을 죽인것과 다름 없었다.

이기적이고, 광적이다. 스스로에게 구억질이 나왔다. 그렇게 해매다가 다시 '가족'이란 것이 떠올랐다. 흑미호가 된 이후로 후회도 하지 말고, 가족을 고통받게 하지 않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고 한 맹세가 떠올랐다.

방금 나는 왜 약해진 거지? 뭐에 죄책감이 든 거지? 공호의 반쯤 감긴 눈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다리가 풀리고 공호는 무릎을 바닥에 부딪쳤다.

이기적이야. 아니야 옳은 거야.

옳지 않아. 또 잃을 거야?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그걸 찾다가 잃어버리고 말아.

해하면 안 돼. 어째서 안 돼?

맞아. 틀려.

아니야, 맞아. 역시 틀려.

옳아. 약해...

끝없는 혼란 속에서 미약한 기척이 소년을 휘감았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을이 파괴된 현장이 들키면, 황제와 사이가 나빠질 수도 있고 그럼 가족을 찾을 시간이 지연될 수 있다. 그러면 안 돼. 증거를 남겨선 안 돼.

그래서 또 죽였다. 본능적으로 죽였다.

공호의 손이 어린아이의 배를 파고 들어간다.

푸욱.

이기적이고, 추악하다. 그러나 수치상으로는 옳은 일이다. 세포 포인트가 쌓였고, 그것은 나를 강하게 만드니까. 엄마와 아이가 서로의 손을 쥐고 고스란히 심장이 얼음에 꽤뚫려있다. 그 아이의 얼굴이 마치 미친놈을 본 표정과 극도의 공포가 함쳐진 듯 했다.

어머니. 그리고 애원하던 아이.

그 아이가, 내가 죽인 그 아이가. 지옥에서의 나와 너무 닮았다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애원하고, 증오하고, 두려웠던 그때 그 지옥에서의 감정.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지 않은가. 이 아이에게.

공호는 고개를 들었다.

우연히 비친 거울의 나는, 검은 눈물을 흘린. 괴이한 얼굴의 표정. 영락없이 지옥에서 두려워하던, 그 미친놈의 얼굴이었다.


작가의말

인기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심리묘사는 꼭 하고 싶었습니다.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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