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복수를 게을리 한 적은 없어.
약 10분 전.
“현석아? 지금 바로 나가면 안 돼?”
“일단 기다려. 아군이 되어줄 사람이 1명 있는 것 같으니까.”
“아군?”
“응.”
현석이랑 덤으로 아무 말 없이 있는 강민이라는 사람까지 3명이서 상황을 보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저 촌장이라는 녀석의 목을 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고 있었다.
감히 에리카한테 목숨으로 사죄하라면서 죽이려고 하다니...
심지어 내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저딴 짓을 해?...
너만큼은 반드시 박살낸다.
그 생각 하나로 머리가 가득찬 상태였다.
하지만...
현석이가 말렸기에 잠시 이성을 되찾고 확인해봤다.
마을 밖에서 어떤 엘프 1명이 에리카를 뒤따라갔고,
그 엘프를 주시하면서 상황을 지켜봤는데...
에리카의 앞에 서면서 촌장의 공격을 막으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현석아. 저 엘프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아니. 처음 보는 엘프라서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라.”
“그런데 도울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따라가는 모습부터가 누굴 걱정하는 느낌이었거든. 반쯤은 감이었지만, 누가 도와줄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지켜봐야지. 그래야 엘프 중에서 쓸만한 사람을 선별할 수 있잖아?”
“그렇겠네. 에리카를 돕는 엘프가 나오면 그 엘프를 대표자로 쓸 생각이었지?”
“응. 엘프에 대해서 들어본 걸 생각하면, 아예 구조개편이 필요하니까.”
“맞아. 필요하겠지.”
엘프는 무조건 나이 많은 사람이 왕처럼 군림한다.
한국에서도 장유유서라고 했던가?
어르신한테 잘 대해야 한다는 그런 문화가 있긴 했지만...
엘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엘프들은 나이가 계급이나 다름없고,
나이가 많은 쪽의 말이 절대적이니까.
왜 이딴 문화가 자리 잡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노인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버렸고...
문화가 감염이라도 되는 건지...
모든 엘프 마을이 비슷하게 노인이 지배자가 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랬던 탓에 마을을 버리고 탈출하는 엘프도 가끔씩 있지만...
드래곤이 무서운 것도 있고,
외부인을 배척하는 성향이 심각해서 대부분은 그냥 순응하고 사는 게 엘프의 인생이지.
그렇기에 그냥 그렇게 살라고 방치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겠지만...
현석이는 모든 종족의 통합을 노리고 있기에 개선이 필요했다.
지금의 엘프들의 문화로는 현석이가 만들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개선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방법은 간단해.”
“어떤 방법인데?”
“그냥 다른 종족들과 교류하면 끝이야. 반강제적으로 진행하겠지만, 다른 종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생각이 바뀌겠지.”
“그게 끝이야?”
“응.”
“그걸로 잘 될까?”
“100% 확신은 못 하지만, 어느 정도는 먹힐 거야.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변하겠지.”
“젊은 층?”
“노인들은 권력자 집단이니까. 권력을 포기하고 싶진 않겠지. 그러니 권력이 없었던 젊은 층을 중심으로 바뀔 거야. 누리던 게 없던 만큼, 변한 사회를 반길 테니까.”
“엘프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쉽게 변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유일신 아쿠아의 이름이 필요한 거야.”
“내 이름?”
“응. 아쿠아의 이름으로 타종족과 교류할 수 있는 문화권을 만든다. 그거라면 거절할 수도 없겠지. 게다가 저 마을 엘프들한테는 받아낼 게 있잖아? 협박용 소재는 충분하니까 마을을 뜯어고치는 것 정도는 쉽게 진행되겠지.”
“현석이 너... 그래서 에리카를 혼자 보낸 거야?...”
“어디까지나 에리카의 의견을 듣고 계획을 수정한 것뿐이야. 에리카를 환영해준다면 그걸로 좋지만, 결과적으로는 공격했잖아? 그럼 위자료 정도는 뜯어내야지.”
“위자료로 마을을 강제 개방시킨다는 거구나.”
“맞아. 그거 외에도 몇 개 더 있겠지만, 중요한 건 개방이지.”
“그래도... 그거 하나만 하는 거라면 조금 아쉬운데?... 결과적으로는 마을의 발전이니까. 복수라고 할 게 없잖아.”
지금도 에리카는 수많은 비난을 받고 있고,
공격까지 당한 상태다.
내가 준 물의 가호가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다칠 일은 없지만,
공격당했다는 일 하나만으로도 화낼 상황이지.
그렇기에 그냥 마을만 발전시키겠다는 의견에는 마냥 찬성할 수는 없었다.
현석이가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발전만 추구하는 방식으로는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랬는데...
“아쿠아. 내가 언제 복수를 게을리하는 거 봤어?”
“그건... 없던 것 같은데...”
“지금도 마찬가지야. 마을 분위기에 이끌려서 같이 욕하고 있는 마을 녀석들도 벌을 줄 거지만, 제일 중요한 건 저기 있는 촌장을 포함한 노인네들. 따지고 보면 저 녀석들이 모든 일의 원흉이자, 흑막이니까 가장 큰 처벌을 해줘야 시원한 기분이 들겠지.”
“그럼 어떻게 할 건데?”
“그건 비밀. 구경할 때의 즐거움으로 남겨둘게.”
“그렇다면야... 알았어. 나중에 봐줄게. 그런데... 슬슬 나갈 타이밍인가?”
“그런 것 같네.”
에리카가 날 친구라고 말한 시점에서 갈 타이밍인 거지.
친구라고 했는데 안 나오고 있으면 에리카도 뻘쭘할 테니까.
**
그리고 다시 현재.
“자 그럼 온 김에 말 좀 해볼까요? 제 소중한 친구한테 목숨으로 사죄하라고 했던 사람은 어디 있나요?”
복수는 현석이가 한다고 했지만,
난 나대로 인성질을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기에 촌장을 보면서 웃어줬고,
아까 전에 본인이 했던 말을 다시 되돌려주면서 도발해줬다.
“그...그건...”
“잘 안 들었나요? 제 소중한 친구 에리카를 죄인이라고 한 건 누구였죠?”
“그게...”
극도로 분노하던 촌장은 어디로 갔는지 없었고,
지금 있는 건 위축된 노인네 1명뿐이었다.
게다가 마을 엘프들도 하나 같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 모습을 바라보는 건 에리카를 도와줬던 엘프 1명뿐이었지.
그러니 보상을 해주고 싶지만,
그건 나중의 일.
이번 일이 끝나고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적절한 보상을 주면 될 일이지.
그렇기에 지금은 촌장을 갈구는 일에 집중했다.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요? 전부 보고 있었어요. 당신을 포함해서 여기 전원이 제 친구를 죽이려고 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봤어요. 그런데도 뻔뻔하게 죄를 부정하고 있나요?”
“부...부디 한 번만 용서를!!!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쿠아 여신님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저...저희도 사죄드립니다!!! 아쿠아 여신님의 친구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공격에 가담한 죄를 지었습니다!!!”
좋아.
일단 사과는 들었다.
그러니 잠시 에리카쪽을 보면서 어떻게 할지 의견을 구했다.
“에리카. 이제 어떻게 해줄까? 원한다면 여기 있는 전원에게 천벌을 내려줄 수도 있어.”
“......”
에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마을 엘프들 전원이 숨을 죽인 채로 보고 있었다.
에리카의 한 마디에 따라서 운명이 바뀔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자기는 잘못이 없다면서 따지고 싶은 엘프도 있겠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바로 목을 날려버리겠다는 느낌으로 살기를 내뿜고 있었기에 입도 뻥끗 못 하고 있었고,
숲은 한없이 고요함 그 자체였다.
그런 상태에서...
에리카는 고민을 끝내고 한마디 했다.
“나머지는 맡길게.”
“그거면 충분해?”
“응. 마을 사람들이 날 안 좋게 볼 거라는 건 예상했던 일이니까. 전원이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건 조금 충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아. 날 위해서 말해준 사람이 1명 있었잖아? 그거면 충분해.”
“그래? 알았어. 거기 있는 엘프.”
“네!”
난 손가락으로 에리카를 변호해준 엘프를 가리키며 말했고,
그 모습에 엘프도 화들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긴장할 필요는 없지.
지금 지명한 이유는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닌,
상을 주기 위해서니까.
다만...
아직 이름도 모르는 엘프였기에 몇 가지 물어볼 생각으로 말했다.
“이름이 뭐지?”
“이...이름이요?... 엘드란 디 엘핀이라고 합니다!”
“그럼 엘핀이라고 불러도 될까?”
“네! 영광입니다!”
“그래. 그럼 엘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지만, 우선 감사 인사를 전할게. 에리카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줘서 고마워.”
“네...네!”
“그리고 이왕이면 에리카와 친구가 되어줘.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같은 엘프 친구는 없으니까.”
“저...저 같은 게... 친구여도... 괜찮은 건가요?...”
“괜찮아. 오히려 이쪽에서는 부탁하고 있는 거니까.”
“응. 나도 부탁할게. 날 위해서 나서준 엘프는 엘핀이 처음이었어. 그러니까... 친구로... 지내도 괜찮을까?...”
“오...오히려 영광이야! 치...친구 좋지! 나도 꼭 친해지고 싶었어! 노예로 팔려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찾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정말?”
“처음부터 에리카한테 관심이 있었구나? 오히려 좋네. 알았어. 나머지는 나중에 느긋하게 이야기하자.”
“네! 아쿠아 여신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래.”
잠깐 가볍게 대화하려고 했을 뿐이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괜찮은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리카가 노예였을 때부터 찾았다는 건 구조할 생각이 있었다는 거니까.
처음부터 작정하고 에리카를 만나려 했던 엘프.
더 나아가 구조하려고 했던 아이라면 신용할 수 있겠지.
그러니 친구로서는 합격.
나머지는 에리카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렇기에 난 마을 쪽에 집중했다.
사과하긴 했지만, 사과로 끝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사과조차도 잘못되었기에 바로잡아줄 생각이었다.
“이제 당신들과 대화해볼까요?”
“아...아쿠아 여신님... 제발 용서를...”
“용서를 구할 대상은 제가 아니라 에리카 아닐까요?”
“아...아이고 에리카님! 지금까지의 일 모두 사죄하겠습니다! 제발 용서를!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용서를!”
“어쩔 거야? 에리카?”
“처음 왔을 때 사과했다면 그걸로 끝낼 생각도 있었어. 하지만 공격했고, 사과로 끝내기엔 늦었어.”
“그렇다는데?”
“제...제발 자비를!!!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용서를!!!”
“사죄는 벌을 받은 뒤에 해.”
“제발 용서를!!!”
촌장은 비굴할 정도로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저...저희는 촌장을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러니 관계없습니다!”
“마...맞아요! 죄인이라는 것도 촌장이 정한 거잖아요! 저...저는 안 믿었어요!”
본인은 잘못이 없다고 말할 뿐이었고,
그저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무시하는 정도였다면 몰라도,
촌장한테 마나를 넘겨주면서 같이 공격한 순간부터는 공범이지.
그리고...
에리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용서가 없었다.
“다들 똑같아.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누구 한 명 나한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거나, 도와준 적 있었어? 하다 못해 무시라도 했으면 이해라도 했을 거야. 하지만 어땠어?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욕하고, 내 집을 부수고, 먹을 것도 불태웠어. 그런 너희들이 용서를 구할 자격이 있어?”
“그...그건... 촌장이 시켜서...”
“마...맞아... 우린 잘못 없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걸로 좋아. 어차피 처벌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에리카는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저 정도로 분노하진 않았지만,
지금의 에리카는 명백하게 화난 상태였지.
게다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꽤나 쌓인 게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감정을 보는 능력 때문에 쌓인 게 폭발한 거겠지.
이전까지는 마법의 효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괴롭혔던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증오를 부추기는 마법이 해제된 상태였다.
그런 상태였는데...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전혀 바뀌질 않았지.
그러니 마법이 없더라도 똑같은 짓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겠고,
그게 화낸 이유겠지.
어쩔 수 없이 괴롭힌 게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괴롭힌 거라는 걸 알아버린 거니까.
그렇기에 단호하게 말했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던 현석이한테 말했다.
“1명 빼고는 전원 빨간색이야. 날 처음 보는 어린애들은 노란색일 때도 있었지만, 날 공격하려는 순간 모두가 한마음으로 빨간색이 됐어. 그걸 봤더니 미련 따위는 없어졌어.”
“그 말은 전원 처벌이라는 거지?”
“응. 화해하는 건 포기했어. 나머지는 알아서 해줘. 난 신경 쓰지 않을게.”
“알았어. 속이 시원할 정도로 깔끔한 복수를 해줄게. 그게 내 전문이니까.”
현석이는 자신만만한 상태로 웃으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 남편이긴 하지만...
복수할 때의 광기 어린 미소는 섬뜩할 정도야.
지구에 있을 때도 복수할 땐 회사의 명운까지 걸어가면서 철저하게 했던 남자였지.
그렇기에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과연 어떤 복수를 해줄지.
- 작가의말
남 조질 때 한없이 진심이 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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