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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마법 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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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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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8
추천수 :
564
글자수 :
219,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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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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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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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EP6. 구두장이

DUMMY

잘난 사람들이 저희끼리 결혼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역사적으로도 흔한 일이고, 당장 수백 년 전에는 왕족의 근친혼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권장되는 덕목이었다. 사람들은 부와 권력의 대물림을 위해서라면 유전형질의 장애쯤은 사소한 문제로 여겼으니까.


하지만 마법은 성격이 약간 다르다. 신성이나 고결함 같은 거짓말과는 달리 정말로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이다.


그런 귀한 피가 섞여 혼탁해져서는 아니 될 일이라.


대개는 다른 귀한 집안에서도 자질이 뒤떨어져 가계를 계승하지 못한 떨거지를 주고받았다. 나름 우수한 유전자를 돌려막되 기득권을 유출하지 않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그런데 이미르와 담시우는 이미 각각 집안의 후계였다.


둘이 맺어지면 결국 어느 한쪽의 집안에 편입할 테니, 두 집안 중 누군가는 자기 핏줄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자기 자식보다 우월한 자질의 소유자라도 찾아낸 게 아닌 이상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자칭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 모양새를 보고는 축사를 보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다음에는 폐기처분당하는 자식의 집에 찾아와서는, 그 부모에게 무궁할 영광을 축복했다.


마법사의 우수한 정신으로도 무던히 넘기기엔 퍽 버거워 보이지 않는가. 하물며 원래부터 불안정했던 이미르에게는 어땠을까.


나는 조금 앞당겨진 이야기를 다시 한차례 정리한 다음 말했다.


“내가?”

“네.”

“왜?”

“······네?”


이미르는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대저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애초에 저 대사를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저 말은 내 귀에 들어올 일이 없어야 했다.


처음부터 온통 잘못되었단 소리다.


“그러니까, 내가 왜?”

“그야······,”


이미르가 답지 않게 우물거리며 말을 짜내려고 시도했지만, 시도에 그쳤다. 평소 같았다면 신나서 이말 저말 떠들어댔을 계집애가 눈까지 피해 가면서.


“미르야.”


나는 잠자코 지켜보다가 말했다.


“너는 내가 널 ‘납치’해도 범죄가 아닐 거라고 했지만, 피랍자가 납치범의 무죄를 주장해도 법정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 어쩌다 승인된다 치더라도 비범죄가 될 뿐 합법이 되지는 않거든. 민사로는 소송이 가능하다는 소리지.”


물론 이건 마법사씩이나 되는 종족은 평생 서볼 일 없는 법정의 사정이다. 이들에게는 이들의 논리가 따로 있었다.


“거기서조차 그래. 그런데 협회에서는 어떻게 볼까. 더군다나 너희 아버지는? 웬 놈팡이가 혼사 앞둔 자기 딸내미 납치한 판국에 ‘아! 우리 딸이 많이 속상했구나!’하고 관대하게 넘어가 주실까? 정말로?”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이미르도 안다.

알 터였다.


당연히 써먹을 구석이 남은 딸내미의 사소한 반항쯤은 넘어가주겠지. 하지만 거기 연루된 나는 아니다. 길가의 돌처럼 널려있지는 않지만, 그보다 가볍게 걷어차도 되는 게 1위계 마법사였으니까. 다만.


“그래서 다시 묻겠는데.”


나는 저 계집애한테 갚을 빚이 있다. 심지어는 이미르가 어떠한 상황에 놓였는지, 당사자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짜고짜 저 요구를 받들자면 발생하는 거스름이 너무나도 막대했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가 왜 그 의뢰를 받아야 할까?”


이미르에게는 적어도 나를 설득할 의무가 있었다. 지금 당장 원래 그 말을 들었어야 할 사람에게, 아신에게 보내지 말아야 할 당위성을 제공해야 한다.


지금도 내 왼손을 힐끔거리는 저 계집애한테는 내 말이 매정하게 들렸을 수도 있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눈앞에 멀쩡하게 놓인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돌진하는 건 피학증 환자들의 소행이고,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잠시 기다리자 과연 이미르도 본인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듯, 입술을 떼려고 했다. 그때였다.


“······듣자 듣자 하니 말이 너무 심하군.”


고사에 적혀있기로, 청년들은 가끔 짝사랑하는 이성 앞에서 가오에 몸을 지배당한다. 내가 그랬듯 이미르 역시 저 수치스러운 작태에 딱히 관심을 주지는 않은 채로 말했다.


“그러면 방금까지 한 말은 잊어버리고 다시 들어줘요.”


그건 전혀 어려울 게 없는 요구다.


“방금 뭐라고 했길래?”


그러자 이미르가 한결 편해진 목소리로, 작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저희 다음 주에 어디 좀 놀러 가자고요.”

“나야 네가 가자면 가야지.”

“으음, 숙박인데 괜찮겠어요?”

“이상한 짓만 안 하면.”

“······쯧.”


거기서 혀는 또 왜 차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거면 됐다.


나는 친구가 적어서 늘 우정에 목마른 사람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유일해진 친구가 놀러 가자는데 그걸 거절할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이 세상이라도 우정을 빌미로 책잡는 정신병자는 없겠지.


만약 그런 악당이 나타난다면 혼쭐을 내줄 준비가 되어있던 찰나였다. 정말로 그런 놈이 눈앞에 나타나서는 어버버 거리고 있었다. 담시우.


음습하게 우리 대화를 엿듣던 녀석이 덜덜 떨리는 동공으로 이런 소리를 내었다.


“아?”


고사에 적혀있기로, 청년들은 가끔 짝사랑하는 이성이 다른 남자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면 정신이 나가곤 한다.


그런 상태의 청년을 같은 대화에 참여시키는 건 너무나도 잔인한 행위인즉, 방송통신위원회가 본다면 대번에 심의 불가 판정을 내릴 터.


나는 결코 사춘기 애새끼의 망상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오로지 등급 판정을 받아내기 위해서 담시우를 무시한 채 말했다.


“그래서, 어디로?”

“하사장님은 어디가 좋은데요?”

“혹시나 해서 묻는데, 내 의견이 반영되기는 하니?”

“설마요.”

“···그럴 줄 알았지.”


너무나도 시원스러운 부정에 헛웃음을 터트리자, 이미르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알면서 왜 물어봤대요?”

“그러게 말이다.”


하여간 오늘 내 기억력은 저 계집애한테 사회성을 주입하느니 내가 사회적 동물이길 포기하는 편이 쉽다는 사실을 잠깐 잊어버릴 정도로 나빴다. 그런 설정이었다.


“이봐, 일단은 나도 당사자다만!”


저놈도 필사적이군. 하지만 필사적이기만 해서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보통은 유소년기에 깨우치는 법칙인데, 뒤늦게나마 가르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정말이지 이게 바로 먼저 태어난 사람의 소임이겠지.


떠받들어지기 위해 선생을 자처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나는 정말로 삶의 지혜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사실에 적잖은 충족감을 느낄 즈음, 이미르가 품에서 팔랑거리는 걸 꺼내 들었다.


“사실은 이런 걸 준비해 왔답니다.”


기다란 직사각형의 하얀색 종이 두 장.


나는 저게 나올 줄 알고 있었지만, 꿈에도 몰랐을 담시우는 거기 그려진 배 모양을 쳐다보고는 졸도 직전까지 갔다. 티켓을 건네받은 다음 적절한 반응을 보여줬다.


“거창하기도 하지.”

“적당하지 않아요?”


대문짝만하게 박힌 VVIP란 글자를 보고 그리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싶지만, 지금 이미르의 입에서 튀어나온 ‘적당함’이란 어휘는 그런 소시민적인 의미를 내포하지 않았다.


결국 저 계집애한테 필요한 건 약간의 유예였고, 바다 한가운데라는 환경은 본인에게 예정된 재난을 극복해내기에 적당한 유예를 보장할 테니까.


하지만 이게 정말로 적당한 선택지인가 하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


“글쎄다.”


분명 저 둘의 혼담이 확정되면 이미르는 우리에 갇혀 태반의 기능에만 충실하도록 재가공된다. 마법과 그에 관련한 기억을 도려내는 처리가 행해진다. 그리하여 인생의 대부분을 들어내면, 당연히 인격조차 연속되지 않는다.


요컨대 살아서 죽는다.


이미르는 그리되지 않고자 맞서고 있었다. 이렇게 벌어낸 시간 동안 유능한 사람들을 통해 내막을 조사하고, 대책을 세우려는 생각인 셈이다. 당차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 점이 거창했다.


활자로 볼 적에도 그런 감상이 들었다.


이미르는 자신에게 닥친 재난에는 맞서지만, 정작 그 재난을 빚어낸 사람에게는 맞서지 않았다. 가해자가 명백한 상황에서 대책을 찾기 위한 유예를 선택했다.


“으음, 마음에 안 들어요?”


당연히 마음에 안 든다. 내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보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다음에 예정된 이야기는 이미르만의 것이 아니었다.


“한 장 모자란 것 같아서.”

“아, 저번에 그 애요?”


그 애라는 대명사는 참으로 신묘해서 여러 인물을 지칭할 수 있다. 눈이 하나만 남은 요정 애새끼를 가리킬 수도 있고, 한겨울에도 땀 뻘뻘 흘려가며 칼질하고 있을 애새끼를 가리킬 수도 있다.


내가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미르는 재빠르게 품 안에 손을 집어넣더니 같은 종이를 한 장 더 꺼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제 안 모자라죠?”

“그러네.”


이즈음 ‘어? 나는?’ 비슷한 환청이 들린 것도 같았지만, 늘 그래왔듯 가뿐하게 무시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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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P5. 어차피 이 세상은 +1 24.01.15 65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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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P4. Libra +2 24.01.10 109 13 12쪽
31 EP4. Libra +1 24.01.08 94 1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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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5.12 205 14 9쪽
12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5.05 219 16 12쪽
11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5.02 225 18 10쪽
10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27 248 19 10쪽
9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25 244 1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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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17 370 1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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