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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마법 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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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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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46
추천수 :
564
글자수 :
219,792

작성
24.01.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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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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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EP4. Libra

DUMMY

가을이었다.


단풍이 불긋하게 지지는 않았다. 지구온난화의 폐해였다. 벼는 고개를 숙이는데 나뭇잎은 파릇파릇 싱그러운, 기괴함과 모순의 미가 공생하는 계절의 한가운데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만.”


여기서 나는 대화 상대에게 지난 사정을 꽤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어느 요정의 사연부터 아신이 처한 곤경, 그밖에도 내 판단과 홍혜아가 내건 조건 따위를.


그 이야기가 방금 막 끝났다.


그녀는 다만 내 이야기보다도 막대기 두 개 달린 아이스크림을 쪼개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지금 당장 자살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이베라는 거기서 막대기만 쏙 빼서 나한테 건넸다.


가을이었다.



*



하나의 개념을 여러 다른 말로 표현하는 건 인류의 오랜 관습이다.


국가원수를 나랏님, 폐하, 각하, 혹은 개새끼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표절이란 낱말 또한 여러 가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복붙 혹은 파쿠리. 조금 점잖게는 모티브나 오마주라고도 하는데, 그보다 점잖아서 가장 널리 쓰이는 말은 벤치마킹이었다.


나는 홍혜아를 벤치마킹했다.


업종으로 흥신소, 인력사무소, 해결사, 심부름센터 따위로도 불리는 사적 제재 대리업을 고른 것도 같은 맥락이었지만, 되짚어보면 딱히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도무지 저 여자처럼은 못 해 먹겠으니.


“적당한 게···, 어디 보자. 아, 있다.”


홍혜아는 그런 소리를 하며 적당히 서류 더미를 뒤적거리는 척을 했는데, 생판 요식행위였다. 저 여자는 나한테 맡길 ‘일’을 이미 정해둔 다음 나와 마주했다는 티를 일부러 내고 있다는 뜻이다.


홍혜아는 서류 한 부를 나한테 건네며 말을 이었다.


“가출 소녀-, 는 아니고. 가출 아가씨? 음, 어감이 이상하긴 한데, 아무튼 이 아가씨를 집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돼. 간단하지?”


맞장구치는 건 쉽지만 일단 말을 아꼈다.


세상에 여섯뿐인 대마도사의 간단함조차 나한테 통용될지도 의문인데, 심지어는 그 이름이 홍혜아였다. 내가 알기로 저 여자는 자기 팔이 날아가도 ‘살짝 긁혔다’고 표현하는 터프한 문법의 구사자다.


게다가 저 묘사만으로는 당장 떠오르는 에피소드도 없는 마당 아닌가. 극단적으로 치우친 지식이 활용되지 못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다지 쓸모 있는 마법사가 아니다.


조금쯤 신중하게 굴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런 생각이나 하며 서류를 받아들기 무섭게 나는 거기 적힌 이름 석 자를 보고 잠시 시선이 멈췄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홍혜아는 이런 내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놓치지 않고 즉각 반응했다.


“···흐응.”


그러고서는 담뱃불을 비벼 껐다.


“그런 게 취향인가 보네.”


솔직히 앞뒤 맥락이 전혀 읽히지 않는 발언이었는데, 큰일이었다. 나한테는 저 복잡한 언어를 따로 해석할 시간이 주어지지도 않았으니까. 단지 저 말투가 뭔가를 추궁하는 투인 것만은 느껴지는바. 이럴 때는 대개 부정하는 게 올바른 판단인즉.


나는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만.”

“그래?”

“넵.”


그러고도 여전히 뭔가가 미심쩍은지 눈초리가 살짝 휘어지긴 했는데, 잘 넘긴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살짝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저게 다 눈가에 잔주름만 늘리는 짓 아닌가? 제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인간인 이상 별수 없이 어리석은 모양이지.


하여간.


나는 겸사겸사 이베라의 이름 석 자 옆에 붙은 사진도 확인은 했다. 부스스하고 정돈되지 않은 외모였지만, 소설 등장인물인 만큼 미인이기는 했다. 그리고 나이는 스물둘이었다.


특기 사항은 훌륭한 집안 딸내미인데도 마탑에 적을 올리지 않았다는 점. 거기에 의뢰인은 그녀의 아버지라는 정도였고 그 외에는 뭐가 딱히 없었다. 이 세상이 맞이한 첫 가을, 이베라의 이력은 내가 아는 것보다 상당히 온건했다.


“별거 없네요.”

“그렇지? 수고해.”


나는 ‘그럼 이제 가서 일 봐’라는 그 말의 의미를 조금도 곡해하지 않았다. 이만큼 간단한 일 하나 해드리고 도움받을 수 있다니 영광이라는 뉘앙스를 풀풀 풍겨가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대충 그랬다.


분명 홍혜아로서는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간단한 일을 맡긴 셈이겠지. 그런데 협회에 압력을 행사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권력이란 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만, 가지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휘두를 수 없는 칼이니까.


나한테는 그 칼자루가 없으니, 객관적으로 내 조건과 홍혜아의 조건을 저울에 올려보면 저쪽으로 약간 더 치우치긴 했다. 저건 나름의 호의로 해석하는 게 맞았다. 나도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그랬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마구마구 징징거리고 싶었다.


“안 먹어?”

“막대기를요?”

“빨아먹지그래.”

“······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 방금 내가 했던 소리를 되짚어봤다. 대뜸 자살해달라는 놈도 이상했지만 쌍쌍바 막대기나 먹으라는 식으로 대답하는 인간은 더 이상했다. 피차일반이다.


“얼른.”


말과 시선에서 음침한 압력이 느껴졌다. 가볍게 정신이 나간 것 같지만, 대충 무슨 짓인지도 짐작은 가는바.


일단 시키는 대로 해봤다.


그러자 본래 맛일 터인 초콜릿 단맛보다도 나무막대의 피톤치드가 도드라지는 기괴한 미각적 경험이 내 혀를 강타했다. 맹세컨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맛있네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면 자살해주시겠습니까?”


-라고 하기 무섭게, 이베라는 내 입에서 막대기마저 뺏어가서는 자기가 물었다. 음침하면서도 사나운 눈동자로 나를 꼬나봐 가면서.


“압수.”


나는 그 행동을 보면서 세상의 진리를 또 하나 깨우쳤다.


쓰레기로 사람을 상처입히는 방법은 많겠지만, 그중에서 제일은 줬다 뺏는 거라는 진리를. 그런 가르침을 내려준 이베라는 내 감상이야 알 바냐는 듯 나한테서 뺏어간 쓰레기를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마치 상처 입은 건 자기라는 것처럼 툭 말을 뱉었다.


“······애초에, 왜 그 얘기 결론이 내가 죽는 걸로 나는데.”


아, 그거라면 이유가 대략 세 가지 있다. 하지만 첫 번째는 말할 수 없고, 두 번째도 말할 수 없었다. 세 번째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 대충 지어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람이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삶이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죽는 게 차라리 행복한 사람도 있죠.”

“그래서, 내가 후자라고.”

“아닙니까?”


우리 사이에는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불리한 화제에서 튀어나오는 침묵은 대개 긍정이다. 무심결에 침묵해버린다면, 그건 대놓고 고개를 끄덕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 긍정에 깊은 안도를 느꼈다. 여기 있는 이베라는 내가 아는 것보다 어리고 무해하지만, 여전히 ‘사는 건 괴로운데 그렇다고 죽기는 싫다’는 기적적인 감수성의 소유자가 맞았다.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쥐면 곧잘 세계대전 같은 게 벌어지고 그런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가 시간여행에 성공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아기 히틀러를 죽일 의무가 있다. 집안에 박혀있을 줄 알았던 이베라가 눈앞에 나타났다면 죽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다.


“······백번 양보해서 그쪽 말이 맞다고 치자. 내가 죽는 편이 행복할 비관론자에 사망예찬론자라고 해보자고.”


저울눈을 맞춘답시고 백만 명을 죽일 마녀가 한숨을 푹 내쉬고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정말로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이상하지 않아···?”

“어느 부분이 이상한가요?”

“그건-, 그야. 그러니까, 나는 그쪽을 오늘 처음 보는데···?”

“우연이네요. 저도 오늘 처음 봅니다.”


이베라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사람 말을 하는 개를 보면 딱 이런 표정이 지어지지 않을까? 싶은 수준으로.


“그런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말의 맥락이 잘 이해되지 않아서 되물었다.


“제가 한두 마디만 말한 게 아니라 ‘그런 소리’라고 줄여 말씀하시면 알아듣기 힘듭니다만. 대체로 어떤 소리 말입니까?”

“······?”


이제 이베라의 안면에는 ‘아니, 도대체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파렴치한 놈이?’라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 의미를 읽어낸 다음에도 물론 이베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조금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역시 사람과 사람은 절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사이에 놓인 몰이해의 대양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다시 가슴이 찢어질세라 아파 왔지만, 내가 뭘 어쩔 수 있을까. 현실의 칼바람이란 늘 냉혹하고도 무자비한 것이었다······.


“······잠깐만. 내가 잘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혹시 지금 이상한 건 난가?”

“아마도 그렇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자살해달라느니, 그게 내 행복이라느니 신나게 말해댄 그쪽이 아니라?”

“제가 알기로 행복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얻는 유일한 자격입니다. 자유의지라는 말도 그걸 위해 태어났고요. 우리한테는 무려 행복을 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누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가?”


그럴 리가 있나.


행복은 살아서 누리는 개념이다. 죽어서 행복해지다니, 그래서야 순서가 거꾸로 아닌가. 어차피 사람은 죽으면 죄다 지옥에 쳐박히게 되어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라도 행복해야 하는 거다.


‘그럴 능력이 된다면’이라는 상당히 어려운 가정이 붙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베라는 머지않아 그럴 능력을 가지게 된다.


‘날 괴롭히고 인정해주지 않은 세상’에 화풀이하며 흥겨워하던 모습은 퍽 인상 깊었더랬지. 정말이지 그때 펼치던 복수관의 지리멸렬함이란─, 아동학대와 학교폭력을 근절할 또 하나의 근거로 삼기에도 적당할 정도였다.


“그런 건가···?”


벌써부터 동공이 흔들리는 모습이 살짝은 안타까웠다. 만약 이베라가 마법사 수준은커녕 멀쩡한 성인 수준의 이성만 갖추고 있었어도 당장 ‘개소리 말라’고 일갈을 내질렀을 터였다.


그런데 참 안타까워라.


사람이 집구석에 10년쯤 틀어박혀 살면 대인기피증도 생기고 반사회적 성격장애도 생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이성이 옅어지고 보편적인 사회적 인지능력을 상실한다.


그렇게 세월이 쌓이다 보면 완전히 바보가 된다.


타고난 지성이 얼마나 반짝거리건 그딴 건 하등 상관없다. 그저 자기를 괴롭히지 않고, 정중하게 대해주는 사람의 말이라면 믿기지 않을 만큼 쉽게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이베라가 처한 건 바로 그런 상태였다.

가스라이팅 하기에 최적의 상태.


“······아니지?”

“맞습니다.”

“맞구나···.”


쌀쌀한 가을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이베라가 손에 쥐고만 있던 아이스크림이 뚝 하고 녹아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짓고 다시 말했다.


“그러면 이제 자살해주시겠습니까?”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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