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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마법 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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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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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41
추천수 :
564
글자수 :
219,792

작성
23.05.25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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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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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EP2. 하얀 말, 검은 말

DUMMY

그러니까, 여름이었다.


붉은 저택에 태어난 아이는 여름에 비극을 겪었다. 겨울의 서늘함으로도, 가을의 서정적이거나 봄의 우울한 정서로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빨간 머리를 타고난 아이는 늘 여름에 그것을 겪어야 했다.


신기루처럼 왔다가 현실로 타오른다. 요약하자면 고작해야 그런 이야기가 되겠지만, 어린아이의 덜 여문 인격은 그 정도의 충격만으로도 간단히 고장 나버리고 만다.


붉은 저택의 마법사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불을 다루는 주제에 주변의 공기가 뜨거워질수록 어린 날의 충격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다루는 불길이 뜨겁고 거세어질수록, 다루는 이의 인격마저 함께 뒤틀려간다.


그러한 과정마저도 의도적인 교정이었다.


인격이라는 개념부터가 일종의 감옥이기에 거기 갇힌 채로는 격상할 수 없다는 정신 나간 신념의 발로였고, 그저 마법의 완성만을 위해 스스로 낳은 아이마저 망가트리길 꺼리지 않는 질병의 연쇄인 것이다.


다만 그 얽히고설킨 매듭에서 가장 서글픈 지점은 단지 피해자와 가해자가 따로 없다는 대목이다.


한때 피해자였던 아이는 반드시 자라 어른이 된다. 한 사람의 훌륭한 마법사로 거듭나 아이를 낳고, 다시 자신이 겪었던 것 이상의 비극을 선사하며 그딴 것을 교육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야말로 악의 대물림이겠지.


지면 너머에서 읽기로도 비극적이었던 혈통이다. 그 거리가 가까워져 눈앞에 닥친들 희극으로 변신할 리는 없었으니, 내 시야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참극일 게 분명했다···.


“일단 이쪽으로 편한 다리 한쪽 내주실래요?”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이미르의 손에는 아주 이질적인, 평범한 사람들은 실물을 볼 일이 매우 매우 드물지만, 그럼에도 그 생김새만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검은색 밴드가 쥐어져 있었다.


“······미르야. 물론 내가 너를 의심하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 일단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말씀하세요?”

“그거 전자발찌 아니니?”

“맞는데요?”


저 미친년이 ‘맞는데요’ 이러고 있다.


“아, 그런데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을걸요? 일주일에 한 번씩만 충전하면 된대요. 그 정도면 일하시는 데도 지장 없겠죠? 그죠?”

“없겠냐고···.”


초롱초롱 맑은 눈으로 올려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백번 양보해서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고 쳐도, 저딴 걸 차고 다닐 만큼 잘못하진 않았다는 것쯤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자니 이미르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으음, 그러면 곤란한데.”

“그게 무슨 소리니 미르야···.”


깜찍한 제스처와 대비되는 끔찍한 소리가 그 입술에서 튀어나왔다. 곤란하다니. 내가 전자발찌를 거부하는 게 왜 곤란한 일이 되는 걸까. 나로서는 도저히 그 상관관계가 짐작조차 되질 않았지만, 명석한 이미르는 친절하게도 그 의미를 풀어 설명해주었다.


“이걸 거부하시면 제가 하사장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 방법이 없잖아요?”


물론 듣고도 이해는 못 했다.

그래서 되물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네가 왜 알아야 하지···?”

“모르기 싫으니까요?”


어째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 같지만, 그런 게 아니다. 이미르는 거짓말을 쌓거나 둘러대는 화법을 선호하지 않았으니까. 저 정신 나간 계집애는 정말로 단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게 싫어서’ 나한테 전자발찌 따위를 채우겠다는 거다.


어지럽군. 그런데 그렇다고 저 대답에 이러쿵저러쿵 반기를 들면 ‘그야 사장님 제가 연락했는데도 무시하셨잖아요? 그건 잘못이고, 잘못을 하셨으면 벌도 받아야죠?’ 같은 말이나 돌아올 게 뻔했다.


이유 따위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이미르의 머릿속에서는 일단 내가 죄인으로 설정된 것 같았고, 내가 그 설정을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믿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이럴 때는 꼬투리를 더 붙잡고 늘어지기보다는 관심사를 돌리는 게 주효하겠지. 판단을 마친 나는 숙련된 맹수조련사처럼 이미르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그렇구나. 응,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미르야,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저녁은 먹었니? 아직이면 내가─”

“그래서 이거 안 차시겠다고요?”


개뿔. 턱도 없었다.


“꼭 그런 게 아니라. 미르야, 그래도 내가 일단은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런 걸 차고 다니면 사회 통념적으로 용서받지 못 할 짓을 저지른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잖니?”

“아니었어요!?”


뭔데. 왜 거기서 놀라는데. 나는 세금도 꼬박꼬박 내는 데다가 길거리에 쓰레기 한 톨 버린 역사가 없다. 길거리 흡연이네 음주운전이네는커녕 흡연도 음주도 안 하는 초특급 모범 시민이란 말이다.


“아니고말고.”


말을 받자 이미르가 살짝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실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병자의 행동에서 하나하나 동기를 찾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이 없지.


그리고 나는 쓸데없는 호기심에 심력을 낭비하기보다는 대책을 찾는 게 낫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요는 문제의 단순화다.


“하여간, 미르 너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되는 거지?”

“그건, 으으음. 아무래도 그렇긴 한데요······.”


도중에 말꼬리를 늘어트린 이미르가 우수에 찬 눈으로 초특급 범죄자의 꼬리표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말을 맺었다.


“결국 하사장님은 이게 싫다는 거죠?”

“그렇게도 볼 수 있지.”

“으으으음······.”


그렇게 쳐다봐도 그것만은 절대로 안 찰 거다.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이미르도 내 굳은 결의를 느꼈는지 더 강압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잠깐 고민하더니 시원스레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손 주세요.”


아, 그래. 우리 말에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분명히 있기는 하지. 그런데 미르야, 우리 조금만 더 생각해볼까? 팔에 건다고 그게 전자발찌가 아니라 전자팔찌가 되는 건 아니거든? 그 본질은 같거든?


──라고, 설득할 틈도 주지 않고 이미르는 내 왼손을 낚아챘다.


가히 프레스기를 연상시키는 악력.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몸뚱어리로는 감히 항거할 수도 없는 폭력이 나를 덮쳤다.


심지어 그 위로 무자비한 사형집행인과도 같은 눈길이 쏟아지기까지 하자, 이 뒤로 이어질 참혹한 광경을 감당해낼 만큼 용맹하지 못했던 나는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라?”


어둠 속에서 가장 먼저 내 감각을 습격한 건 바로 이 깜찍한 감탄사였다. 집 나갔던 정신이 그 소리를 듣고 돌아와 살짝 일러주었는데, 두 번째로는 조금 다른 감각이 내 육신을 덮치는 중이더랬다.


위화감. 대비했던 팔의 압박감과는 궤를 달리하는 그 기묘한 감각에 눈꺼풀을 스리슬쩍 들어 올리자, 현실 세계에서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도 아득히 기괴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게 왜 안 들어가지.”


······내 눈에 비친 시각정보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자면 그건 전자발찌가 아니었고, 전자팔찌도 아니었다.


그것을, 그러니까 당장 내 머리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략하게 언어화하자면, 애초에 이미르가 나한테 달라던 게 팔이 아니라 손이었던 이유의 형상물이었다.


내 시야의 정중앙. 그곳에서는 자그맣고 동그란, 동시에 차디찬 금속 재질 한가운데 붉은 보석이 박힌 무언가가─, 어째서인지 내 약지 첫마디를 통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

“?”


그 꼴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이미르의 안면에 갈고리가 떠올랐다. 아마 내 면상에는 이미르보다 먼저 그 기호가 떠올랐을 테다.


하지만 각자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른 이유는 저 하늘의 달과 땅의 거리보다 멀겠지. 다시금 집을 나가려는 정신을 어렵사리 붙들어 맨 나는 아폴로 11호의 기적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지껄였다.


“···미르야.”

“네?”

“내가 뭐 하나만 더 물어보려고 하는데.”

“말씀하세요?”

“그거 혹시 반지 아니니?”

“맞는데요?”


저 똘끼 어린 언행에 새삼스레 감탄할 여유도 없었다. 이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이미르는 우악스레 내 손을 붙든 채 약지 입구에 반지를 꾹꾹 욱여넣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하사장님, 이게 왜 안 들어갈까요?”


······우선은 그걸 왜 거기에 끼우려고 낑낑대는지부터 말해줄래 미르야, 하는 식으로 말을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혹은 조금 더 어른스럽게. 그건 말이지, 호수가 안 맞기 때문이란다 미르야. 하는 식으로 잠깐은 모면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식으로 빙 둘러봤자 대화가 맞물리지는 않는다. 무해무익한 공회전이고, 그딴 걸 즐기는 건 단상에서 시간을 때워야 하는 정치인들 외에는 멍청이들뿐이다.


내가 아는 이미르는 절대로 멍청하지 않다. 멍청하지 않은 인간의 행동에는 나름의 논리와 타당성이 존재한다. 답지에 적힌 답에 대고 이유를 캐물어봤자 정연한 해와 공식만 튀어나오기 마련이겠지.


비효율은 즐거운 사치지만 공회전은 공연한 낭비다. 들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공식을 파고드는 것도, 그렇다고 문제집을 덮어놓고 놀러 나가는 것도 낭비에 속했다. 이처럼 낭비를 싫어하는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답지를 그대로 베끼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나는 목구멍을 비집고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씹어 삼켰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다음, 이미르에게 손을 내밀어 그것을 건네받았다.


옥염. 붉은 저택의 마법사의 징표. 일찍이 이미르의 약지에 자리했고, 아신에게 주어졌을 그 홍옥이 박힌 반지는 지금 내 새끼손가락에 끼워졌다.


“이러면 됐지?”


그러자 이미르의 양 볼이 사정없이 부풀어 올랐다. 뭐지. 자기가 복어인 줄 아는 건가. 아니면 혹시 이게 정답이 아니었나? 모호한 리액션 때문에 찰나 불안에 빠진 나였지만, 이어진 답변에 마음이 놓였다.


“······지금은 뭐, 그 정도면 됐어요.”


그렇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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