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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마법 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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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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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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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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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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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EP2. 하얀 말, 검은 말

DUMMY

그렇다.


몇 번이고 강조해도 모자라지만, 모든 마법사는 개인주의다. 개인의 영달을 위하자면 사회의 법규 따윈 엿이나 먹으라 외친다.


흔히 준법 시민을 선량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기준에 따르자면 전원이 사악한 것이다.


순수한 사악. 이것이야말로 내가 눈앞에서 깜찍하게 포크를 놀려대며 달아빠진 빵 쪼가리를 깨작거리는 빨간 머리 아가씨를 보며 떠올린 감상이었다.


“웅?”


세상 깜찍한 척 고개를 갸웃하는 이미르에게 신경 끄라고 눈짓한 다음 마른세수를 했다. 손가락 틈새로 말세가 비쳤다.


3층짜리 설탕과 밀가루 탑. 단언컨대 나는 저딴 흉물이 실재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가상의 상품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저딴 걸 좋아하는 히로인은 분명 심성도 고약할 게 분명하다며, 글줄로 읽었을 때는 작가의 악마적인 상상력과 표현력에 경외심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제는 더 이상 상상의 산물이 아니었다.


시간을 아주 잠깐 돌려보면 아까 전, 나는 마탑 한복판에서 서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뭣하다 싶어 일단 어디 좀 앉아서 대화하자고 제안한 다음 이미르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어떻게든 기분을 맞춰주고 돌려보낼 생각이었지.


나는 의외로 얌전히 따라온 이미르를 차에 태운 다음, 혹시나. 혹시나 기분을 맞춰주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네비를 찍어봤다. 그랬더니 그 흉물을, 이미르의 프로필에 적힌 ‘좋아하는 음식’을 파는 장소가 실제로 찍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름만 봐도 더럽게 고급져 보이는 호텔의 라운지. 척 보기에도 커다란 유리 벽면 너머로는 예쁘게 조경된 정원이 보이고, 안쪽으로는 샹들리에 따위가 장식된 호화로운 곳이었다.


그리고 나라는 병신은 옆자리에서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네비에 찍힌 호텔을 보더니 ‘와, 뭐예요?’ 히쭉거리는 이미르를 보고 난 다음에야 아차 싶었다. 그게 아차 싶을 건수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호텔.


아버지가 말씀하셨지. 엎지른 물은 마른걸레로 주워 담을 수 있지만, 말과 행동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나는 그 말씀을 뼈저리게 되새기며 울며 겨자 먹기로 액셀을 밟았다···.


그리고 시간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다행히 정도 이상으로 심각한 오해를 사지는 않았지만···, 나는 우아하면서도 전투적이고, 신속하게 스콘을 입에 털어 넣는 이미르를 보며 끔찍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ABC까지 있는 구성 중에 하필이면 제일 비싼 C로 주문할 건 뭐란 말인가. 저렇게까지 욱여넣어야 할 정도로 몸에 당이 모자라면 차라리 믹스커피에 밀가루를 타 먹으면 안 되는 걸까.


심지어 저 흉물─정확한 명칭은 애프터눈 어쩌고라고 하는 모양이다─는 분명 단품 몇 개를 합쳐놓은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인지 단품으로 각각 시키는 것보다 1.2배쯤 가격이 비쌌다.


그야말로 한계까지 찌든 자본주의의 폭력을 형상화한 오브제다.


그런데 이 라운지에는 저딴 걸 이 소름 끼치는 가격을 내고 먹는 인간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졌는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계산서가 내 앞에 놓여있다는 거지.


과연 이 고급스런 가죽 양장 속에 숨은 종이쪼가리에는 대체 얼마가 찍혀있을까? 머릿속에서는 순식간에 소비세에 서비스요금까지 계산이 끝났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보다도 끔찍한 건 이미르가 입 싹 닦고 저 설탕 덩어리만 퍼먹고 있다는 거였고. 이는 필시 본인의 심기를 거스른 대가가 고작 이거 한턱낸 걸로 상환되진 않을 거란 암묵적인 의사표명이겠지···.


“으음, 으으음!”


저 봐라, 뭔지 모를 빵 쪼가리를 입에 넣더니 대놓고 귀여운 척을 떠는 저 가증스런 작태를. 나는 속지 않는다. 맹세컨대 저 거짓 기만에 당할 생각 따윈 요만큼도 없었다.


언젠가 내 스승이 말하길 사물의 본질을 보라고 했다. 한껏 아양을 떨고 있었지만, 이미르의 본질은 결국 내 지갑을 뜯어먹는 괴물인데, 더 자세히 들여보면 이 세계의 주인공을 손아귀에 쥐고 나를 겁박하는 테러리스트이기까지 했다···!


이딴 잡생각이나 해가며 빠르게 비어가는 접시를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접시를 유린하던 포크가 보이지 않는구나 싶더니만, 이미르가 포크 끄트머리를 앞니에 문 채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안 먹어요? 아저씨는.”

“그쪽 말씀대로 ‘아저씨’라서 밀가루가 몸에 안 받습니다.”


서글프지만 그랬다. 내가 아저씨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 너도 몇 년만 지나면 뼈저리게 깨달을걸? 지금이야 시간의 흐름이 우습겠지. 내 말을 듣고 피식거리는 것만 봐도 속이 뻔했다.


“뭐야, 아저씨라고 불러서 그래요? 그게 맘에 안 들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쪽하고 몇 살 차이도 안 나지 않습니까?”

“더 솔직히 말하면 그 몇 살 차이 때문에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죠? 아저씨.”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동시에 고등학생 때 군인들 보고 군인 아저씨라고 불렀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는 그 군인이 왜 슬퍼하는지 몰랐지. 정말이지 얼마나 억울하고 또 슬펐을까···.


“그리고, 왜 자꾸 그쪽이라고 불러요? 내 이름 알잖아요?”


찻잔을 기울이며 잠깐 시간을 벌었다. 여기까지 와서 모르는 체는 해봤자 시간 낭비다. 하지만 너에 대한 것쯤은 트라우마부터 성벽까지 모조리 다 안다고 할 수도 없지. 적당한 수준으로 답했다.


“예, 이가람 위원님네 아가씨시죠.”


그리고 그 이가람이 속한 위원회는 협회의 머리통이나 다름없다. 저쯤 되는 명문이라면 마법과 지위가 가문 단위로 이어지니, 말하자면 이미르는 국회의원 따님인 동시에 예비 국회의원인 셈이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당신에 대해 딱 그만큼 압니다.’라는 겸양의 뜻으로 말했더니, 이미르는 불편한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일부러 그래요? 이름으로 부르라는 뜻인데.”

“이미르 양?”

“양 빼고.”


허, 요것 봐라.


“그래, 미르야.”

“···허?”


이미르가 커다란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씨익 미소지었다.


“뭐, 그래요. 아저씨는요?”

“나?”

“네.”


당연한 수순이긴 한데, 그렇기는 한데···. 영 탐탁지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찔러나 봤다.


“미르야, 네가 그걸 꼭 알아야 할까?”

“아저씨는 날 아는데 난 아저씨가 누군지 모르잖아요? 이건 불공평하지. 안 그래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별로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대충 뭉개고 넘어가면 어떻게든 알아낼 거다. 약간 더 우울해졌다. 나는 어쩔 도리 없이 법인 세우고 신나서 새로 판 명함을 건넸다.


“천하인력 하이안입니다.”


천하인력 대표 하이안. 밑에 작은 글씨로 적힌 건 협회 공인 1위계라는 위치다. 마탑의 학부생에게는 위계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아마 지금 당장 위계를 부여받아도 이미르가 나보다 위겠지.


위계라 해봤자 어차피 협회 입맛대로 붙이는 숫자긴 하지만, 내가 본 이미르라면 내 명함에 박힌 초라한 숫자를 빌미로 비웃음이라도 흘릴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짐작이 틀린 모양이었다. 양손으로 내 명함을 건네받은 이미르는 굉장히 미묘한 눈초리를 만들고 있다.


“하이안···?”


이미르가 내 이름을 되뇌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이미르가 무언가를 골몰히 고민할 때 종종 나오곤 하던 버릇이다. 그것도 대단히 진중한 장면에서 자주 나오곤 했던 버릇.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설마. 위원 집안쯤 되면 뭔가 아는 게 있었나.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처리하며 체내의 마력로를 돌렸다. 트렁크는 가져오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대처하는 것쯤은 가능하도록.


“하이안, 하이안···.”


이내 이미르의 시선이 명함에서 떨어져서 나를 향했을 때 나는 이미르의 손가락에 집중했다. 아직 사춘기의 영향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이미르는 마법을 시전할 때 손가락을 튕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내가 그 새하얀 손끝에 시선을 두기도 잠시─,


“······하얀. 풉, 아하핫! 어떻게 사람 이름이 하얀이래? 게다가, 이름은 하얀인데 왜 옷은 시커멓게 입고 다녀요? 네?”


망할 계집애 같으니. 지옥에 계실 우리 아버지한테 사과해라.


그래도 차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열심히 깔깔대는 이미르한테 차마 그런 소리까진 못하겠는지라 그냥 뚱하게 한마디 했다.


“사람 이름으로 놀리는 거 아니다?”

“큽, 그래요. 그래. 내가 미안해요. 그래서 아저···, 으음. 하사장님이 아신 그 친구 찾은 거, 후원 관련이라고 했죠?”


훅 들어오는군. 저걸 내가 직접 알려준 기억은 없었지만, 외부인이 마탑 학부생을 지목해서 찾을 이유라고는 그게 전부긴 하다. 굳이 빙빙 돌아가고 싶진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상머저리래요? 차라리 나한테 하지.”


그 말을 듣고 잠깐 상상해봤다. 나보다 몇 살은 어려서 나를 ‘아저씨’ 취급하는 묘령의 여학생에게 금전적 지원을 건네고, 그 대가로 감정적 교류를 가지는 내 모습을. 와, 자살하고 싶어졌다.


“풉, 농담이에요.”

“···농담 두 번 하면 간 떨어지겠어.”


이건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럴 거다. 내 면허증에는 도너 스티커가 붙어있고, 저 끔찍한 농담 때문에 자살하면 술 담배 하나 안 하는 내 깨끗한 간은 정말로 떨어져 기증될 테니까.


“뭐, 결국 면회도 거부당했죠?”

“그렇긴 한데···.”

“당연히 그랬겠죠. 늙은이들은 4위계 미만의-···, 저위계 분들은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주제에 누구 뒤를 닦아주냐면서.”


그런 배경 설정이 있었나. 작중에서 홍혜아가 아신의 후원을 서는 장면을 보고 따라 해본 거였는데, 되새겨 보면 홍혜아도 6위계의 대마법사였더랬다.


작가가 직접 알려주지 않으면 알 방법이 없었던 설정도 신기했지만, 더 신기한 건 따로 있었다.


방금 저 성질머리 더러운 이미르가 대화 상대를 배려했다. 인격교정, 그러니까 가정사를 비롯한 개인사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주인공 면전에 대고도 ‘머저리’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던 그 이미르가.


1위계 주제에 마탑 학부생을 후원하겠다며 나설 재력을 무슨 수로 확보했는지도 묻지 않았다. 왜 아신을 후원하려고 했느냐는 물음에 내가 대답하지 않으니 캐묻지도 않았다. 4위계 미만의 ‘머저리’들을 저위계 분들이란 어휘로 둥글게 표현했다.


······이야기의 흐름에 불필요한 균열을 일으켜 버린 걸까.


거기까지 나가면 비약이겠지만. 내가 기억하던 이미르와 눈앞의 이미르 사이에 적지 않은 간극이 있는 것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아주 자그마한 변화도 다 내 책임이다. 그 책임감을 가슴속에 남겨놓으며 나는 쓰게 웃었다. 그야말로 초라한 위계를 적시당한 떨거지 마법사처럼 한심하게.


“확실히. 윗분들이 보기엔 그럴 수도 있겠네.”

“표정 뭔데요.”

“양극성 장애 1형을 앓는 환자가 하루에 백오십 번쯤 짓는 표정?”

“아하, 조울증.”

“그렇게도 부르지.”


그놈의 지병이 살짝 도진 것도 사실이었다. 공인 마법사 자격만 따놓으면 어떻게든 되리라고 여겼던 게 문제였을까. 1위계만 따놓으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란다.


그리고 여느 학위가 그렇듯 마법사의 위계 역시 위로 올라가려면 올라가려 할수록 눈에 띄는 연구성과나, 본인에 대한 더 확실한 증명이 필요하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제대로 된 연구나 논문을 작성하려면 최소한 년 단위의 작업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정말이지, 한가하게 종이쪼가리에나 몰두하고 있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별로 바람직하진 않지만, 이렇게 된 이상 아신에게 접근하는 건 비공식적인 루트를 활용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 우연을 가장하면서 의심받지 않게 노력하는 건 또 새로운 고생이 될 거다.


물론 그건 전부 이다음에 생각할 일이지.


우선은 이 자리를 어떻게 끝맺을지부터 정해야 한다. 다행히 이미르가 나한테 악감정을 가지지는 않은 모양인데, 일단은 잘 달래서 집에 돌려보낸 다음 고민을 계속해보도록 하자···.


“그런데 하사장님.”


내가 잠깐 정신줄을 놓은 동안 이미르가 쏙 고개를 들이밀었다.


“응?”

“정말 안 먹어요? 여기 마카롱 되게 맛있는데. 달콤한 게 아마 우울한 데도 좋지 않던가? 이게 마지막 하나에요?”

“···그걸 온전히 하나라고 볼 수는 있고?”


내 말에 이미르는 자기가 한입 베어 문 마카롱을 과시하듯 흔들더니 흐흥, 웃음을 흘렸다.


“그럼 하나 빼기 한입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아까도 말했을 텐데. 나는 아저씨라서 밀가루가 몸에-,”

“마카롱에는 밀가루 안 들어가요.”


거짓말하지 마라. 세상에 그런 과자가 어디 있다고.


“이번에는 세상에 밀가루 안 들어가는 과자가 어디 있냐는 표정이네. 그런데 정말이거든요?”

“그럴 리가···?”

“믿기 싫으면 말든가. 그냥 달콤한 걸 싫어하는 건 아니고요?”


거기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그건 아닐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믹스커피거든.”

“······아주아주 엄밀히 따지면 믹스커피도 음식이긴 하죠. 그런 걸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믹스커피는 아주아주 엄밀히 따지지 않아도 음식인데?”

“그래요 그래.”


이미르는 믹스커피가 음식이라는 지나치게 당연한 진실을 어째선지 인정하기 어렵다는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더니 이내 무언가 악마적인 발상을 떠올렸다는 것처럼 불길하게 웃었다.


“근데 하사장님. 그거 알아요? 우리 뇌는 같은 음식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는 사실.”

“해골물은 알지.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를 왜?”

“그러니까 평소에 안 좋아하던 것도 다른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섭취하면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거죠. 예를 들면···, 누가 먹여준다든가.”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사람의 입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혹시 이미르의 정신병에 동조돼서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싶었는데, 어째서인지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자, 아앙-.”


이미르는 정말로 자기가 한 입 먹은 마카롱을 내 입에 들이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한 입 베어 물어 잇자국이 그대로 남은 과자를. 내 입에 넣어주려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왜?


문장의 구성요소를 낱낱이 뜯어 해체해봐도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나름 명석할 터인 내 머리였지만, 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조금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건 뭘까. 시간의 흐름은 참으로 잔혹해서 내 이해가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동안에도 멈춰주질 않아, 기어코 이미르가 나를 재촉하도록 허락하시고야 말았다···.


“뭐해요? 팔 떨어지겠어요.”

“······미르야, 우리 잠깐 이성적으로 생각해볼까.”


당황한 기색을 다 숨기지도 못했더니 이미르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저 앙큼한 계집애. 날 놀리느라 즐거운 건 알겠지만, 즐거워도 좀 지나치게 즐거워 보였다.


“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나이에서 네 나이를 뺄셈하면 꽤 차이가 있을 거거든? 그러니까 지금, 음. 이런 건, 좀, 그렇지 않을까?”

“언제는 아저씨라고 부르면 싫어하더니?”


젠장.


“그랬지. 분명히 내가 그러긴 했는데.”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떠오르긴 했는데 입 밖으로 뱉기가 수치스러웠다. 나는 윤리의식이 투철한 소시민이란 말이다. 나는 나보다 훨씬 어린애한테 플러팅당하며 즐거워하는 취미는 없다고, 그 플러팅하는 어린애한테 직접 말하긴 너무나도 쪽이 팔렸다···.


“내 호칭하고는 별개로, 미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볼까?”


이미르는 내가 뱉은 ‘상식’이라는 단어를 작게 되새기더니 풉, 하고 웃으며 말했다.


“네, 말해봐요.”

“자, 우선 우리는 오늘 초면이지.”

“그렇죠?”

“그리고 ‘이런’ 건 일반 상식에 비춰봤을 때, 초면이 사람들이 나누는 정서적 교류에 해당하지 않고?”

“아하아, 그랬던가요?”


조금의 가감도 없이 ‘그럼 오늘 처음 만난 여자를 호텔에 데려오는 건 말이 되고?’라는 뉘앙스였지만, 저건 결국 동년배한테나 통할 말장난이지. 가볍게 무시했다.


“그래. 그러니까 상식인인 나로서는 그 상식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지르는 게, 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거든?”

“그 말은 구면이면 ‘이래도’ 된다는 뜻이네요.”

“······그렇게 들렸으면 내가 말을 잘못한 것 같은데.”


아, 이젠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이 기묘한 분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까. 애초에 내가 아는 이미르는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단 말이다.


나는 이런 애 모른다···!


“뭐, 좋아.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내가 철벽의 의지를 과시하자 결국 이미르가 생글생글 웃으며 운을 띄웠다. 조건부라. 이 타이밍에 조건부라면 오히려 환영이었다. 요컨대 조건을 듣고도 거절한다면 포기해준다는 말 아닌가?


나는 지금껏 내가 쌓아온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꽤 많은 걸 포기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현금을 준대도 인간성이 수반되지 않은 부란 공허하기 마련이지.


자, 나는 어떤 제안에도 거절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는 봐주는 게 예의란 거다. 동방예의지국의 모범 소시민으로서, 나는 어디 말이나 해보라며 고개를 까닥였다.


“이거 먹으면, 아신. 여기로 불러줄게요.”


내 인간으로서의 긍지가 꺾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0.1초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80 노스텔스
    작성일
    23.04.19 21:30
    No. 1

    작가님 참으로 재밌는데 역시 요즘 장르소설판엔 대중적이지않은 필체네요...
    저 여자애도 뭔가 회귀자느낌도나고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21 가차
    작성일
    24.01.10 20:52
    No. 2

    긍지가 너무 약해..!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32 ijason05
    작성일
    24.02.04 16:46
    No. 3

    중간중간의 개드립을 나름 핀포인트로 여기고 보니까 작품이 더 잘 드러나도록 읽히는 것 같아요! 재미있었습니다. (돌려까기 진짜 아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2 ijason05
    작성일
    24.02.04 16:46
    No. 4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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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5.05 219 16 12쪽
11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5.02 225 18 10쪽
10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27 248 19 10쪽
9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25 243 15 9쪽
8 EP2. 하얀 말, 검은 말 +3 23.04.20 266 16 12쪽
» EP2. 하얀 말, 검은 말 +4 23.04.19 280 15 18쪽
6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4.18 336 20 14쪽
5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17 370 19 10쪽
4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4.14 428 25 11쪽
3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13 606 23 15쪽
2 EP1. 은사 +6 23.04.12 1,012 29 19쪽
1 EP1. 은사 +2 23.04.12 1,499 46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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