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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마법 포식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현대판타지

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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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43
추천수 :
564
글자수 :
219,792

작성
24.01.16 23:43
조회
77
추천
13
글자
9쪽

EP5. 어차피 이 세상은

DUMMY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항거해서는 안 되고, 애초에 할 수도 없다.


과거라면 혁명이라도 일으켜서 윗놈들을 단두대로 보냈겠지만, 현대의 기득권들은 역사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 건방진 물건은 박물관에 쳐박아서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단두대의 부재.

그건 옛날보다 요즘이 훨씬 더 부조리한 이유였다.


하여간.


결국 내가 군말 없이 꽤 값비싼, 진짜 더럽게 비싸게 주고 산 차를 손 벌벌 떨어가며 새로 내어놓자 담시우는 딱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고는 찻잔을 옆으로 치우더니 이렇게 말했다.


“참아줄 만은 하군. 여전히 별로지만.”


나는 사람 좋은 웃음을 한껏 머금은 채 회사 다니던 시절 천억 번쯤 외운 격언을 되새겼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


내가 그 문자를 쓴 횟수가 삼천억 번쯤이었으니, 단순 계산으로 나는 지금까지 대략 천억의 사람을 살린 셈이 된다. 지구의 탄생 이래 태어난 모든 인간의 머릿수를 합쳐도 모자랄 수였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도 나처럼 고결한 구원자가 또 없겠지. 내가 구한 사람들의 목숨에 하나를 더할 뿐이다. 정말이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어쩐 일로 찾아주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뭐야, 못 들었나?”


전혀 기억에 없었다. 하지만 저건 내가 본인의 방문을 알고 있었으리라 확신하는 어조였는데, 내가 그런 중요한 내용을 흘려들었을 만한 일은 근래 딱 하나였다.


홍혜아 그 여자가 전화로 잡담하다 끼워 넣은 모양이겠지.


대강 말을 맞췄다.


“아, 자세한 내용은 직접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상하군. 제대로 전해주겠다 말씀하셨는데.”


저 봐라, 나를 지칭할 때하고는 극명한 온도 차이를. 중계를 받은 주제에 주선자의 체면이라곤 요만큼도 고려하지 않고 자빠진 작태를.


이놈은 본인이 나를 무시하는 만큼 홍혜아의 주가도 깎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 나는 다시 한번 깊은 절망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무얼, 아무래도 직접 마주하고 듣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진정성이라는 건 제삼자를 중계해서는 전달되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미력하나마 제가 힘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좋겠습니다만.”

“그래, 네가 미력한 건 사실이지. 나 역시 그런 네가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본인이 스스로 말하기로도 미력하다는 나한테 조력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모르는 건 아닐 터였다. 담시우는 방금 발언을 지껄이면서 살짝 자아에 도취한 표정을 지어 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저놈은 방금 자기가 겸손을 떨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저 발언은 ‘나 정도의 인물이 이만큼 구차해졌음을 인정한다, 이 얼마나 겸허하단 말인가!’라는 의미쯤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저 무시무시한 언어의 구사법에 나는 내가 얼마나 소름 끼치면 좋을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담시우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용건은 간단하다.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라.”


그렇게 말했다.



나는, 한순간 정신의 전원이 내려간 기분이 들었다. 대체로 사람의 뇌라는 물건이 이랬다. 한꺼번에 다 처리하지 못할 양의 정보를 받아들이면 스스로 지키기 위해 전원을 내려버리곤 했다.


그런데 정신을 다시 차리고 나서도 여전히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담시우가 방금 지껄인 농담은 그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정중하게 다시 물었다.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뭐야, 머리가 나쁘면 말귀까지 어두워지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쯧, 내가 이해해야지 어쩔까. 저능아도 알아듣게 설명해주지.”


하지만 그 주둥이에서 흘러나온 건 딱히 설명의 정의에 부합하진 않았다.


“마법도 마법이지만, 제발 사람 새끼부터 좀 되라고 하시더군.”

“그러니까, 의원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더란 말입니까?”

“그래.”


담시우가 짐짓 무게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사람이다. 아니, 사람일 수밖에 없지. 그도 그럴 게 사람이 아니라면 마법을 다룰 수 없으니까.”


물론 나도 원래는 사람만이 마법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훌륭한 반례가 나타나고 말았지 뭔가. 맙소사, 세상에는 깃털이 온통 새하얀 까마귀도 있는 법이었다.


“그분의 말씀이니 분명 굉장히 심오한 철학이 담겨있겠지. 하지만 혼자서는 몇 달을 궁구해도 답이 나오질 않더랬다. 해서 별수 없이 교수님께 신세를 지려고 했다만···, 네가 나을 거라더군.”

“과연, 그런 복잡한 사정이······!”


나는 없는 흥미를 억지로 만들어 바르며 미묘한 심정을 정리했다.


일단 저기서 교수란 홍혜아를 가리키는 말이겠지.


그 여자는 마탑의 명예교수이기도 했다. 그밖에도 호칭이 여럿 있었지만, 굳이 마탑에서 사용하는 호칭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나는 ‘저’ 담시우가 어떤 인간인지를 조금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덤으로 저놈이 어쩌다 나한테 굴러오게 된 건지까지도.


요는 간단했다. 홍혜아 그 아줌마가 나한테 저 기수 열외 수준의 폐급을 짬 때린 셈이다. 그것도 일을 나눠준다는 명분을 가지고, 선심 쓰듯이 뻔뻔하게 나한테 쓰레기를 투기했다···!


고로,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유감입니다. 제가 그런 중대한 소임을 맡기에는 참 모자란인간인지라······.”

“뭐, 그래 보이기는 한다만. 그래서?”

“원래 예정대로 홍혜아 사장-”

“교수.”

“-교수님께 문의하시는 게 좋지 않을는지?”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담시우는 홍혜아에게. 세상 만물은 본디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함이 옳다. 게다가 그래야지 비로소 내가 알던 담시우가 탄생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내가 알던 담시우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나있었다. 내가 없었다면 그 아줌마가 제 할 일을 내던지지 않았던 덕분이겠지.


애초에 가망이라도 있었다면 또 모를 일이다. 그런데 희망의 빛줄기라곤 한 가락도 들지 않는 게, 어째 저놈의 가망은 심연의 밑바닥보다도 캄캄했다.


나한테는 이 폐급을 내가 기억하는 절반만큼도 번듯한 인간으로 바꿔놓을 자신이 없다. 이 세상의 미래와 담시우 개인의 존엄을 위해서라도 이 짐승은 홍혜아에게 맡기는 게 옳으리라······.


“흠, 그런가?”

“저로서도 유감입니다만, 그렇습니다.”


그러자 담시우가 테이블에 놓인 계산기를 멋대로 가져가더니, 몇 번 누르고는 도로 내려놓으며 선언했다.


“보수는 대략 이 정도를 생각했다만···.”

“개와 말의 수고를 다 해 모시겠습니다, 고객님.”


거기 적힌 건 포기하기에 너무나도 커다란 액수였다.



*



위대한 선현들께서 말씀하시기로 짐승을 사람으로 만드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쥐는 사람의 손발톱을 먹으면 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곰은 마늘과 쑥만 먹으며 동굴 속에서 100일을 지내면 되고, 꼬리 아홉 달린 여우는 사람의 생간을 100개 먹으면 된다.


한데 그러한 마법마저 부릴 줄 아셨던 조상님들도 ‘사람 같지 않은 새끼를 사람답게 만드는 법’은 모르셔서 늘 자식 농사를 조지셨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자식 농사를 소작 준다는 담진영의 발상은 대단히 창의적이었지만, 그저 창의적이기만 했다. 가정교육을 판타지로 학습한 나한테까지 당번이 돌아오게 방치하면 안 됐다는 뜻이다.


“즉, 고사에도 적혔듯 ‘사람’이라는 것은 고행의 결과입니다.”

“······오호라.”


하고, 담시우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하자면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고역스러운 식사만 하였을 곰의 우직함으로, 우선 저희에게는 그 이상의 고역스러운 꼴과 마주할 각오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상당한 통찰이 담긴 말이군. 역경과 고난의 극복, 그로 인한 일종의 정신적 탈피를 꾀하라는 거지?”

“역시 뛰어나신 분!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하, 별거 아니다!”


내친김에 박수까지 쳐주니 녀석은 아주 살판이 나서 신나게 꿈틀거렸다. 아주 만족스러운 리액션이었다.


“자, 그럼 이제 그 깨달음을 녹여낼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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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5. 어차피 이 세상은 +5 24.01.16 78 13 9쪽
34 EP5. 어차피 이 세상은 +1 24.01.15 66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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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P4. Libra +2 24.01.10 111 13 12쪽
31 EP4. Libra +1 24.01.08 94 1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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