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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소설 속 마법 포식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현대판타지

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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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7
추천수 :
564
글자수 :
219,792

작성
23.05.12 19:30
조회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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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자
9쪽

EP2. 하얀 말, 검은 말

DUMMY

입사 선물로 받았던 손목시계는 애매한 시간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 없지만 있기는 했던 친구 놈들이 그래도 받기는 해야지 않겠냐며 눈 가리고 짜잔 채워준, 간신히 명품 반열에 들기는 할 브랜드의 시계였다. 벌써 얼굴도 가물가물한 놈들. 이름만 몇 번 되새기다가 결국 잘 떠오르지 않아서 한숨이나 한번 푹 쉬고 관뒀다.


하여간 정말로 애매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사야가 내 예상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자리를 파하고 돌아가 버린 것이다. 나로서는 시간을 조금 더 죽이고 싶었건만, 거기에 혼자 눌러 앉아있자니 또 나로서는 백한영의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어 나온 결과가 이거란 말이다만.


─제가 갈게요. 내일 봐요?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미르는 자기가 뱉은 말을 퍽 잘 지키는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귀한 집안 아가씨답게 긍지 있는 품행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식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르가 정말로 내 사무실에 쳐들어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니까.


물론 나는 그런 일이 정말로 벌어질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일부러 스마트폰을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나왔다. 즉 ‘어제부터 연락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해둔 셈이다.


아무리 이미르라도 내가 본인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게 아닌 이상, 왜 자기 연락 무시했냐며 따지고 들진 않겠지.


심지어 이사야와의 연락은 철저하게 사무실의 유선 전화를 사용했다. 발신 이력 한 점 남기지 않은 완전 범죄라고 볼 수 있을 테다.


그러니까 이제 남은 건, 이미르가 ‘왜 나한테 그토록 연락을 해댔는가?’에 대한 규명뿐이라는 말인데······.


······그게 이틀 내내 안 돼서 문제였다.


문제라는 건 대개 이유만 알면 타개책도 자연히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통 이유부터가 보이질 않으니 마땅한 수 역시 떠오르질 않는 거다.


물론 정 뭔가 이유를 갖다 대라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죄다 이 나이 먹고 떠올리기엔 지나치게 유치한 것들뿐이다. 이미르가 자타공인 미친년이긴 할지언정 어린애는 아니란 사실을 간과한 이유들만 마구마구 떠올라서 생각이란 걸 하면 할수록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살짝 우울해지는 바람에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는데, 잡혀야 할 약 봉투마저 잡히질 않았다. 돌겠네. 사람이 까먹을 게 따로 있지,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한 걸까?


치솟는 우울함과 불안감에 몸서리치며 하늘을 우러러봤지만 유감스럽게도 신하고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하루아침에 사람을 소설 속에 떨궈놓았으니 저기 어디 누가 있기는 있을 텐데, 사람 일은 사람이 알아서 하라는 말인가. 누가 되셨든 대단히 무책임한 양반이 따로 없으시다.


그런 생각이나 하며 투덜거리고 있자니 어느새 발걸음이 사무실 문 앞에 닿아있었다.


흘긋 살펴보니 문 아래 틈새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문고리도 제대로 잠긴 채였고, 안에서 인기척이 나고 있지도 않다.


이건, 뭐라고 하면 좋을까. 살짝 김이 빠지는 소리긴 하지만 이미르가 사실은 내가 우려한 것보다는 정상이었다는 말이겠지. 아마도 내가 부재중인 걸 보고는 알아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래도 혹시. 문고리를 잡아 돌려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만 해도 ‘설마’ 하는 걱정이 사알짝 있었지만, 반전은 없었다. 내 사무실은 어제 내가 자리를 비운 후의 풍경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일단은 한시름 덜었다는 감상에 빠지기도 잠깐, 나는 급한 대로 입에 약부터 탈탈 털어 넣은 다음 믹스커피를 일대일로 섞어 넘겼다.


이 글러 먹은 경구 투여 습관을 보고 의사 선생님께서는 제발 약 좀 그따위로 쳐먹지 말고 물이랑 먹으라고 애원하셨더랬지. 하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평생 봐온 부모님 말씀도 안 들어쳐먹는데, 어디 생판 남인 의사 선생이 하는 말이라고 들을까.


그렇게 혼자 낄낄대가며 소파에 기대있다가, 세상만사 의욕란 의욕이 우울감과 함께 모조리 사라지며 몽롱한 약 기운이 올라올 즈음.


나는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스마트폰을 챙겨 사무실 근처에 잡은 오피스텔에 돌아왔다.


신축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평수가 잘 빠진 게 장점인 마이 스위트 홈이다. 단점이랍시고 굳이 굳이 하나 꼽는다면 관리비가 악마적이라는 것뿐인 나의 안식처에는──,


“늦었네요?”


어째서인지, 이상한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



옛날 소설들을 보면 등장인물의 광기를 묘사한답시고 ‘나는 존나 미쳤어! 크르르르!’하는 장면이 드물지 않게 있었다. 예를 들면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센다든지, 말투가 오글거리게 변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 잘 봐. 내가 이제부터 미칠게?’ 어필하는 불쏘시개들이.


물론 정신병이란 개념이 다소 친숙하지 않았던 그 시절 독자들에게는 그 정도로 과장스러운 편이 잘 먹혔겠지. 꽤 억척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정도로 캐릭터가 진한 편이 볼 때도 즐거운 맛이 있긴 했다.


그런데 저 빨간 머리 아가씨의 그것은 다분히 근미래 지향적이었다.


한껏 과시하는 광기와는 사뭇 결이 다르다. 작금의 오락소설 속 정신병이란 대개 요란하기만 하지 실속이 없다고 정면에서 반박하듯, 정갈하게 정신이 나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설마 내 사무실에 찾아오나, 찾아와서 연락을 안 받았다고 따지면 어쩌지’하던 내 고민은 너무나도 범상한 인간의 사고 범주 내에서 이뤄진 걱정이었다는 말이 되겠지.


세상에 그 누가 ‘찾아간다’는 소리가 알려준 적도 초대한 적도 없는 우리 집에 들이닥치겠단 의미일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비범한 상상력의 소유자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못 했다.


정말이지 더도 덜도 내 예상을 가볍게 웃도는 작태였다.


도어락의 잠금장치 부분은 완전히 녹아내려 현관 바닥에는 쇳물이 고여있었고, 도어락보다 성능 면에서 별로 나을 게 없던 결계는 완전히 해부당해 있었다.


그 너머에 마련된 퀸사이즈 침대 위에 자빠져있는 빨간 머리 여자를 봤을 때는─혼절 전문가로서 말하겠는데─혼절할 뻔했더랬지.


나는 놀란 심장을 달래며, 여전히 내 침대 위에 누운 채 한 바퀴 데굴 굴러 ‘늦었네요?’라는 말로 나를 마중한 이미르에게 말했다.


“너는 이르네. 그것도 굉장히 많이.”

“저는 이르가 아니라 이미르고요. 오늘 오겠다고 말도 했잖아요?”


역시 저것한테 상식을 논하는 건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도 혼란스러웠지만, 우선은 장단을 맞춰주며 간을 보기로 했다···.


“그렇다곤 해도 가택침입을 방문하고 같은 범주로 뭉뚱그리는 건 비약이 심하지 않을까 미르야?”

“심해요?”


과연 상식이라는 연약하디 연약한 무기로 저 갈고리 살인마에게 맞서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군. 어쩔 수 없지. 나는 이마를 짚으며 보다 강력한 어른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럼 심하고말고. 게다가 미르야, 너 이거 문짝 하나 바꾸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는 아니? 무려-,”

“네.”


······네?


“안 그래도 아까 업체에 전화했어요. 대금도 치러놨고. 내일 고치러 온다니까 불편해도 잠깐만 참아요. 정 불편하면 어떻게, 집이라도 새로 한 채 마련해드려요?”


미르야 그게 대체 무슨 소리니, 되물을 것까지도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이미르네 집은 무지막지한 부자였다. 그것도 나 같은 놈들은 개 목줄 채워서 길러도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그런 만큼 아마 저 집 한 채 운운도 빈말이 아닐 거다. 각종 법적 문제와 세금 따위는 완벽하게 해결된 아파트로 한 채 해주겠지.


약 기운이 돌면 잠깐 멍청해지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 갑부 앞에서 감히 돈 얘기를 꺼내다니. 나는 저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감각을 만끽하며 공손한 자세로 섰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건 없고.”

“그렇죠? 그럼 이상한 말씀만 하지 말고 얼른 들어와요.”

“어어.”


여기는 분명히 내 집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어째서인지 허락을 받고서야 넝마쪽이 된 문턱을 넘었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주인 행세를 하는 이미르가 읏차, 하고 귀여운 척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자, 그러면 이제 청산을 할 시간인데요 하사장님.”


그런데 미르야 그게 무슨 소리니. 남의 집에 문 따고 쳐들어와서는 난데없이 청산이라니? 저 아가씨는 어쩜 저리도 깜찍한 낯짝으로 7080년대 조폭 같은 소리를 서슴지 않고 뱉는 걸까?


라고, 천진난만한 생각이나 하고 있던 이때까지의 나는 몰랐다. 진실로 끔찍한 말은 저 다음에 이어지리란 사실을.


“하사장님은 어른이니까 자기 잘못에는 책임을 져야겠죠?”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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