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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마법 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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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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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4
추천수 :
564
글자수 :
219,792

작성
23.04.25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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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EP2. 하얀 말, 검은 말

DUMMY

아신의 눈동자가 두어 번 흔들리더니 단단하게 틀었던 내 멱살을 슬며시 놓아주었다. 덜덜 떨며 입을 벙긋거리는 게 무슨 말을 하려고는 하는데, 감정을 채 말로 짜내지 못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야 내면에서 적잖이 커다란 동요를 겪고 있겠지. 아신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생부는 순수한 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간단한 이야기였다.


화창하던 어느 봄날. 사랑과 도덕, 신의와 우정을 가르치던 그 입으로 읊은 주문이 눈앞에서 어머니를 찢어발겼다.


가문의 모든 인원이 모인 연회장에서, 여동생은 아신의 접시에 피를 토하며 죽었다.


친애하던 당숙들과 조부, 사촌들, 심지어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용인들마저 참살되었다. 시체와 시체가 한 데 엮여 바닥에 쏟아진 창자의 주인마저 구별할 수 없었다.


다만 아신에게 그날 일어난 가장 커다란 비극은, 분명 ‘하나도 남김없이’라는 말로 그 사건에 방점을 찍을 수 없었다는 것이겠지.


아신의 생부 아린은 그날 그 연회장에서 길고도 기계적인 살인의 끝에 오로지 아신만을 땅 위에 남겨놓았다. 사랑하고 사랑해도 모자랄 가족의 모가지를 비튼 손으로 아신만은 향하지 않았다.


왜?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물을 수조차 없었다.


이유라는 것이 붙는 순간, 결과는 합리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아신은 눈앞에서 벌어진 현상에 이유가 붙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어떠한 이유가 있어도 합리화되어선 안 되는 일이었기에, 그 사건을 일종의 재해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생애 모든 증오를 그 재해에만 쏟아부으며 병적으로 선량하게 살아왔다. 아신이 미래에도 다른 악당들을 진심으로 미워할 수 없었던 건, 일생분의 증오를 이미 다 써버린 탓이겠지.


······그런데 그런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인간이 나타났다.


그러고는 지껄이는 게 ‘자신이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돕는다.’는 소리다.


개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밑도 끝도 없는 개소리였을 텐데, 어째서인지 이 세상 모든 거짓을 꿰뚫어 보는 통찰안이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필생의 신념과 지금껏 믿어온 세계가 박살 났겠지. 제정신을 붙들고 있을 여력이란 여력이 통째로 사라졌을 거다. 당장 미친 듯이 분노를 토하면서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부정해서 자기 머리통 속 알량한 세계를 지켜내고 싶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신은 여느 사람들처럼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 눈이 원인이었다.


단지 거짓을 꿰뚫어 볼뿐이건만, 그것이 곧 진실을 가려내는 것과 같다고 믿어온 까닭에 머릿속에 반동이 일어났다.


그 반동은 아신의 머릿속에 일어난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고장 나기 일보 직전인 이성을 어떻게든 수복하고자 제멋대로 끼워 맞춰 하나의 논리를 형성시킨다.


‘하이안은 아신의 아버지 아린과 한패다.’라는 명제는 아마 참이다. 그런데 ‘하이안은 아신을 위한다.’는 명제도 참이었다. ‘그렇다는 건 곧 아버지가 나를 위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러면 그 날 있었던 일들은 사실···?’이라는 다분히 비약적인 논리를.


······아신은 현명하거나 교활하진 못했지만, 멍청하지도 않았다. 내 말에서 멋대로 맥락을 읽고 넘겨짚은 다음 그리 의심했겠지.


그 작은 증거로 내 멱살은 잡았었던 손이 허공에 떠서 갈피를 잃고 있었다. 그것을 어디에 돌려놓아야 좋을지조차 정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아신을 보며, 나는 찻잔을 마저 비웠다.


그리고 박았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신의 눈에는 충분한 진실로 비치도록 깎은, 말로 빚은 쐐기를.


“네 아버지는 마지막에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지.”


미지근한 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



결국, 나도 받은 걸 갚을 뿐이야.


덧붙이자 아신은 한참 눈물을 쏟아냈다. 해묵은 감정의 배설에 ‘왜’ 따위 세련되지 못한 과정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만은 확실했기에.


피우지도 않는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눈시울이 벌겋게 물든 채 조수석에 앉아있는 아신을 백미러로 흘겨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럼 잘 들어가고.”

“···네, 선생님.”


선생님이라.


내가 알던 아신은 정신적 지주로 여기던 홍혜아조차도 마지막에 가서야 그렇게 불렀다. 실제로 오간 말은 많지도 않았고, 대화를 나눈 시간도 짧았건만.


벌써부터 부담스러울 정도로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래. 연락할게.”


조수석에서 내려 고개를 꾸벅 숙이곤, 창문 너머로 멀어져가는 등이 심란해 보였다.


아신은 자신의 아버지가 어째서 집안사람들을 쳐죽였는지에 관한 설명은 한 마디도 요구하지 않았다. 어쩌다 죽었는지, 내가 갚아야 한다는 은혜가 무엇인지도 묻지 않았다.


단지 그 날 일어난 참상에 ‘자신을 사랑해서’라는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을 뿐이지만, 당장은 그것만으로 납득하고 넘어갔다.


아신으로서는 한꺼번에 모든 진실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을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물어봤다고 한들 알려주지 않을 예정이기는 했다.


말할까, 숨길까.

적지 않게 고민한 다음 미루기를 선택했다.


아신의 아버지와 엮인 이야기의 진상을 모조리 털어놓는 건 내게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 사건에 연루된 모든 인물보다도 더 상세한 진상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모조리 까발리면, 진실을 알아버리면 아신은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폭주할 우려가 컸다. 결과적으로는 제 아버지보다 못한 방식으로 객사나 하겠지.


나라고 끝까지 숨기지는 않겠지만, 아무런들 지금은 아니었다.


하여간.


아버지를 향한 맹목적인 증오는 아신이 마지막 순간에 엇나가게 되는 동기이기도 했지만, 분명 아신의 성장에 불을 지피는 커다란 장작이었다.


그걸 내 멋대로 빼앗았으니 벌충해주는 것도 내 책임이겠지.


제 아버지에게 얽힌 응어리를 풀어주는 것과는 별개다. 아신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전부 지난 일이고 오해였다며 모든 부정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바보같이 선량하지만, 그렇기에 미워할 대상이 없으면 성장할 이유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이유에서 내가 아신에게 선사할 것은 구원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미워할 대상을 바꿔줄 뿐.



아직 해먹을만한 짓이었다.



*



장마철은 다 갔을 텐데 주룩주룩 장대비가 쏟아졌다.


사무실 창문을 때려대는 빗줄기를 잠깐 쳐다보다가 블라인드를 치러 일어나려는데, 저주스런 단어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저씨.


······의식하고 보니 방금까지 멀쩡하던 무릎이 다 시큰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런 기분이 들 뿐이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 말도 안 되는 착각이지. 털어내고 무릎에 힘을 넣었다.


그러려고 했다.


우웅, 하고 스마트폰이 길게 울었다. 얼마 쓰지도 못하고 이사야한테 박살나버린 합판 테이블 대신, 큰마음 먹고 새로 마련한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서.


아직은 연락 올 사람도 없는데, 광고나 대출이겠거니 싶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발신자를 확인하려다 잠깐 멈칫했다.


나는 내가 등록한 번호가 아니면 진동이 울리지 않게 설정해뒀다.


나한테 덤터기를 쓰고 뒤늦게 불만을 표출하려는 이사야일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지만···, 내가 본 이사야는 인간은 그런 연락도 사무실 번호로 걸 성격이다.


혹시나 새로운 업무 관련 전화여도 그렇다. 사무실 유선 전화가 울렸으면 울렸지, 내 스마트폰이 직접 울릴 일은 없잖겠는가.


게다가 나는 이 세계에 친구 비스무리한 것도 없었다. 원래도 얼마 없긴 했지만, 하여간 그랬다.


내 번호를 아는 사람이라 해봤자 협회 사람 몇이나, 아신. 그리고 이미르뿐인 마당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전부 지금 이 순간 내게 개인적인 연락을 취할 근거가 마땅치 않다.


······그렇다면 이 전화는 뭘까?


작은 위화감이 위기감으로 번졌다. 내 위기감은 꽤 잘 들어맞는 편이었고, 그 감각이 지금 저 전화를 절대 받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내 원시적 본능에 저항하지 않길 택했다.


우웅-, 하고 진동이 맺기를 한 번.


그리고 두 번, 세 번, 결국 독촉하듯 다섯 번째까지 걸려온 다음 끊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십 분.


더는 전화가 걸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잠시 더 기다리는 데까지 포함해서 장장 십오 분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온갖 망상들이 들었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안전하다는 확신이 설 즈음.


나는 조심스레 숨이 멎은 스마트폰을 향해 손을 뻗었고─, 얌전히 엎어져 있던 녀석을 뒤집어 화면을 확인한 순간. 그대로 졸도할뻔했다.


-부재중 전화 5건.

발신자, 이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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