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서재

소설 속 마법 포식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현대판타지

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조회수 :
8,825
추천수 :
564
글자수 :
219,792

작성
23.12.21 21:52
조회
90
추천
11
글자
10쪽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DUMMY

짐승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사람 역시 짐승의 일각이라던 선현들 말씀에 오차 한 점 없는 모양새였다.


지나치게 정확한 타이밍에 등장해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종종 사무실에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놈이니 그러려니 싶었다. 나는 너무나도 그러려니 해버린 나머지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오, 마침 부르려고 했는데. 어쩐 일로?”

“······여전하시네요.”


아신이 쓴웃음을 지어가며 제 스마트폰을 스윽 들어 보였다. 생각은 짧았다. 나도 얼른 내 걸 들어서 확인했다. 거기에는 문자가 몇 통인가 적혀있었다.


-상담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오늘 한 번 들러도 괜찮을까요?


발신자 아신. 여기서 문제는 이 문자에 찍힌 시간대였다.


6시간 전.


음, 이 정도는 늘 있는 일이었다.


“위대한 선조들께서 남긴 유구하고도 엄격한 관습이 있지.”

“남자 번호는 알림을 꺼두라고요?”

“하산해도 좋다.”


그러자 아신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러는 내내 굉장히 어색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깔은 꼭 벌레와 인간 사이의 경계인을 쳐다보는 것 같은······.


“?”


아.


나는 순진무구한 척 나를 올려보는 녀석을 보고서 지금 벌어진 사태의 전모를 파악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아신은 지금 남자 번호는 알림을 꺼두는 게 철칙이라고 주워섬기는 놈팽이가, 크기도 나이도 딱 절반쯤 될 법한 여자애 하나 무릎에 앉혀놓고 있는 꼬라지를 목격한 거다.


눈 뜬 모양을 보아하니 이 꼬락서니에 모종의 확신을 가진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 눈깔로도 일언반구를 않는 게 저놈의 착해빠진 점이겠지.


어처구니를 빌어먹을 심정이었지만, 나는 최대한 무던하게 말했다.


“신아. 나는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뭐가 됐든 그건 오해거든?”

“······오해요?”

“보다시피 이 녀석은 요정이고, 그래서 보기보다 나이가 많지. 그러니까 네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든 그건 명백한 오해라고 할 수 있어.”


그랬더니 아신은 이제는 온전히 벌레를 보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말이 어떻게 들릴 여지가 있었는지 다시 한번 고민해봤다. ‘얘가 이래 봬도 생긴 것만 애새끼니 문제는 없음!’


미치겠군.


아신이 짐짓 진지한 척 목소리를 깔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진짜로 소아-악!”


그러다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웬 쬐끄만 요정이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정강이를 싸커킥으로 걷어찬 덕택이었다.


녀석은 사람 하나를 반병신으로 만들어놓은 다음 ‘나 잘했지?’라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휙 돌아봤다.


나는 그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줄까 고민하다가 그냥 내버려 뒀다. 그랬다가는 또 무슨 요상한 오해를 사려고. 이 이상 저런 종류의 의심을 사는 건 사절이다.


대신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하여간, 그 끔찍한 오해는 이제 풀렸겠지?”

“······ ······.”


그 침묵을 보조하듯 아신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에 내 대응은 간단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애새끼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


“물어.”


그러자 우리 집 도사견은 주인의 명을 다음과 같이 받들었다.


“!”

“아악!”


하, 요 사악한 것은 찬 데를 또 찼다! 절도있는 싸커킥이 아신의 정강이를 후렸고, 나는 그 악독한 행위에 차마 눈을 뜨고 견딜 수가 없어서 이번에야말로 녀석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주었다.


집에 가면서 개껌이라도 하나 물려줘야지.


“이제 풀렸겠지?”

“······네.”


여전히 전혀 수긍하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하여간.


이 소박한 소란 속에서 나는 옅은 유감을 느끼고 있었다. 녀석을 아신과 대면시키면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눈물 한 방울 주륵 흘리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러진 않았다.


일련의 사건에서 원흉이 될 그놈의 짠물만 뱉어버리면 쉽게 갈 수 있었을 텐데. 그 이유에 관해서는 몇 가지 억측이 떠올랐지만 바로 지워버렸다. 여러모로 아쉽긴 했지만, 고민해봤자 의미도 없는 종류의 문제였으니까.


뭐, 어찌 됐든 항복선언도 받아냈겠다. 아까보다는 기분이 한결 나아진 나는 녀석의 상담이란 걸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내 아신이 입을 열었다.



*



물론 나는 그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괜히 애들한테 선행학습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미리 배워두면 나중에는 꺼내서 쓰기만 하면 되니까.


요약하자면 아신의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었다.


녀석은 이 시기에 마법의 양도를 요구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체는 응당 지엄하신 협회다. 협회 끄나풀들은 은근하지만 끈적한 방식으로 그 요구를 정당화했는데, 그 질기디질긴 시도는 ‘너희 집 풍비박산 났더라! 뭐해? 넘겨.’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실로 전통과 혁신이 한데 어우러진 집단다운 행태였다.


저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대가문의 진전을 ‘존중’해 직접 회수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이었고, 옛것이 약해진 틈을 타 제끼고선 새것인 자기네들 배를 불리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지.


보통이라면 이렇게까지 천박한 짓거리를 ‘잘’ 하지는 않지만, 이 애새끼네 집 현판에 적힌 글자가 봉안당이라는 게 주요했으리라. 그도 그럴 게 무려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집안 구석이다. 거기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보물이 축적돼있을 텐가.


탐이 날만은 하다.


그럼에도 그간 협회가 아신을 건드리지 않았던 건 내부에서도 여러 차례 논쟁이 일어났던 탓이다. 후계가 멀쩡히 잘 자라고 있는 마당에 그 집안 재산을 압류하면 과연 협회의 위신이 서겠냐는 반박이 꽤 잘 먹혔던 듯한데, 약빨이 오래 가진 못했던 모양이다.


다만 소설에서는 거기에 한 가지 근거가 더 있었는데, 저놈이 대가문의 가르침을 이어 학계에 공헌할 만큼 유망하지 않은 듯하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언급도 없었던 걸 보면 딱히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거기까지는 내가 알았고 아신이 말하리라 짐작했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누가 절 찾아왔거든요.”


이 뒤의 내용도 기억한다. 방문자의 정체는 홍혜아였다. 그 여자는 아신의 친부와도 면식이 있었고, 협회의 구더기 같은 행태에 진저리를 냈으며, 무엇보다도 잡초 같은 인간상을 숭상했다. 잡초 수집에도 미학이 있다면 바로 그런 의미에서 탐미주의자였지.


6위계 대마도사가 순전히 제 취미를 위해 출사표를 던지자, 안 그래도 반대 의견이 있기는 했던 마당인지라 판이 엎어졌다. 결국 봉안당을 압류하자는 이야기는 유야무야 흩어져버리고 만다.


그랬었지.

다 아는 흐름이지만 짐짓 물어봤다.


“아, 혹시 아줌마라고 부르면 죽여버리겠다는 여자?”

“······그게, 연세 지긋한 노인분이셨는데요.”


허억, 하고 경악스러운 소리가 나올뻔했다.


홍혜아가 아무리 저놈보단 훨씬 연상이라지만 할머니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설마 나한테 뭔가 나쁜 영향을 받아서 만 29세 이상의 인간은 노인으로 취급해버리기로 맹세한 걸까?


그럼, 나는······?


실로 두려웠다.


내가 우주적 공포에 압도당해 되묻지조차 못하고 자빠진 동안, 아신이 말을 덧붙였다.


“남자였어요.”

“?”


뭐라고.


순간적으로 저놈이 만 29세 이상의 여성은 늙은이인 동시에 여성으로 취급할 가치도 없는 하자품이라고 주장하는 줄 알았지만, 저 꼬맹이는 머리가 딱딱해서 농담과 진담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진짜로 그랬다는 거다.


그럼에도 내가 저 말에 혼란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였다. 소설에는 그런 내용이 일절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모른다. 너무나도 사소한 사건이라 굳이 서술되지 않은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놈이 평소에 털어놓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되물었다.


“그래서?”

“제가 곤란할 거라며, 돕겠다고 하시던데······.”


아신이 말끝을 흐리며 나를 똑바로 마주 봤다. 황금색 눈동자가 형광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거짓을 꿰뚫어 보는 통찰안.


녀석이 던진 말을 내가 말을 받았다.


“생판 구라였단 말이지.”

“네.”


빠르게 단정했다.


이건 소설에 서술될 가치가 없었을 만큼 사소한 사건은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개의 고리가 맞물려 사슬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움을 빌미로 그 늙은이가 내건 조건이 있었을 텐데, 그건?”

“딱히 없다고는 하시던데, 그것도.”

“구라였군.”


아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전제가 거짓이면 결론도 거짓이다. 원하는 게 분명히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음습한 인간들은 원하는 게 있을 때 반드시 사족을 붙이듯 별거 아니라는 양 털어놓는다.


“그러고서는 그다음에 넌지시 뭐라고 한마디쯤 덧붙였겠지.”

“······정확하시네요.”


아신은 그 늙은이가 지껄였다는 말을 그대로 읊어줬다.


‘생면부지 타인이 갑자기 돕겠다는 거니 네가 망설이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너한테 믿음을 사려고 하는데, 기회를 주지 않겠느냐?’


“거기서는 ‘믿음’이라는 대목이 걸렸고요.”


그리 말하고서 아신이 씨익 웃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음습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내가 상큼하게 마주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럼 줘야지, 믿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소설 속 마법 포식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4 EP6. 구두장이 24.04.15 9 1 9쪽
43 EP6. 구두장이 24.04.08 10 2 13쪽
42 EP6. 구두장이 24.03.21 19 2 9쪽
41 EP6. 구두장이 24.02.16 23 4 9쪽
40 EP6. 구두장이 +1 24.02.11 30 5 9쪽
39 EP6. 구두장이 24.02.06 42 7 14쪽
38 EP6. 구두장이 +2 24.02.04 46 9 9쪽
37 EP6. 구두장이 24.01.27 45 7 9쪽
36 EP5. 어차피 이 세상은 24.01.20 55 10 11쪽
35 EP5. 어차피 이 세상은 +5 24.01.16 77 13 9쪽
34 EP5. 어차피 이 세상은 +1 24.01.15 65 10 11쪽
33 EP4. Libra +3 24.01.13 84 12 12쪽
32 EP4. Libra +2 24.01.10 110 13 12쪽
31 EP4. Libra +1 24.01.08 94 12 11쪽
30 EP4. Libra 24.01.06 85 12 11쪽
29 EP4. Libra 24.01.02 90 10 13쪽
28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30 98 13 9쪽
27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28 96 8 10쪽
26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26 99 8 11쪽
»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21 91 11 10쪽
24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3.12.20 100 8 10쪽
23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 23.12.16 108 9 11쪽
22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 23.12.11 133 13 14쪽
21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3.12.08 122 11 12쪽
20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 23.11.30 126 11 10쪽
19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1.25 134 10 10쪽
18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1.21 144 12 11쪽
17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11.20 151 12 8쪽
16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6.30 182 12 13쪽
15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6.09 199 8 9쪽
14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5.25 195 14 10쪽
13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5.12 206 14 9쪽
12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5.05 221 16 12쪽
11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5.02 226 18 10쪽
10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27 249 19 10쪽
9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25 244 15 9쪽
8 EP2. 하얀 말, 검은 말 +3 23.04.20 266 16 12쪽
7 EP2. 하얀 말, 검은 말 +4 23.04.19 281 15 18쪽
6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4.18 336 20 14쪽
5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17 371 19 10쪽
4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4.14 429 25 11쪽
3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13 606 23 15쪽
2 EP1. 은사 +6 23.04.12 1,020 29 19쪽
1 EP1. 은사 +2 23.04.12 1,500 46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