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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마법 포식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현대판타지

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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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19,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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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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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EP5. 어차피 이 세상은

DUMMY

-아무튼, 잘 해줬네. 앞으로도 기대가 커.


전화 너머에서 대충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오후였다. 그 소리의 발신자가 손가락 까딱하면 나를 편육으로 만들 수 있는 괴물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딱히 집중이 되지는 않아서 대충 들었다.


물론 나라고 처음부터 대강 들은 건 아니었다.

중간까지는 열심히 경청했단 말이다.


그런데 어느 대목에선가부터 대화가 시시한 신변잡기로 건너가더니,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들만 왕창 쏟아지는 것 아닌가.


사람이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진다더니 정확히 그런 꼴이었다.


해서, 결국 전화가 끊어진 건 내가 직장인의 삼대 기본소양인 ‘네.’ ‘그렇군요.’ ‘정말입니까?’를 구사하기 시작하고도 한 시간쯤 더 지난 뒤였더랬다.


너덜너덜해진 정신으로 수신 이력을 확인하자 거기에는 경이로운 숫자가 찍혀있었다. 자그마지 2시간 하고도 34분. 그러한 중노동 끝에, 나는 기어이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자유, 더없는 자유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대저 사람은 어째서 일 따위를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왜 세상 하나가 바뀐 다음에도 빌어먹을 노동을 해야 하는 걸까. 그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답이 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바로 이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서였다.


“으어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열탕에 들어가면 내는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대체 왜 저런 요상한 행위를 하는 건가 의문이었는데, 이제는 절로 이해가 된다.


필경 그분들도 삶의 풍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선 고되셨던 거겠지. 그 고됨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는 찰나에는 저절로 몸의 긴장이 풀려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삶의 최전선에서 격전을 벌이던 투사들의 신성한 의식인 셈이다. 지금만은 나 역시 그들 중 하나가 된 기분으로 이 한때의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그러려고 널찍한 대청에 대자로 누워서 뒹굴려던 차에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이 집 주인이었다.


“무슨 그런 어르신 같은 소리를 내고 계세요?”


녀석은 요전까지 삼도천에서 반신욕하던 꼴이 무색하게도 참 건강한 낯짝이었다. 방금까지 칼질이나 하다 와서는 지저분하게 땀범벅이었으니까.


즉, 내가 이 애새끼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세월은 화살과 같다는 말이 있지. 그런데 그 화살은 대부분 허리랑 무릎에 와서 박히고. 너도 몇 살만 더 먹으면 알 거다.”

“그냥 선생님이 운동 부족이라 그런 건 아니고요?”

“신아, 내가 왜 의사를 별로 안 좋아하는지 말했던가?”

“······설마 운동 좀 하라고 잔소리해서요?”

“잘 아는구나.”


나는 항상 의사들이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가 의문이었다. 운동에 그만한 효험이 있다면 차라리 운동을 안 하고도 운동한 효과를 내는 약이나 수술을 개발하면 되는 게 아닌가.


하여간 의사들은 숭고한 일을 하는 데 비해 잔말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는 안 궁금하고?”

“맡기라고 하신 건 선생님 아니었어요?”


생각한 것보다도 나이브한 대답이었다.


그도 그럴 게 협회에서 마법을 회수해갈 때에는 재산이나 연구만을 가져가지 않는다. 마법이 담긴 핏줄 자체를 가져다가 갈아서 통조림으로 영구보존하는 과정까지가 한 낱말이었으니까.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자기가 참치나 복숭아랑 친구가 될 뻔한 것치고는 퍽 태평한 모양새다.


나 같은 놈을 얼마나, 이렇게 말하면 우습겠지만 ‘신뢰’하는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라 작게 웃음이 터졌다.


“그래, 내가 그랬지.”

“뭐, 말씀하시는 걸 보면 잘 해결됐겠죠.”

“그렇긴 하지.”


‘고맙습니다’ 따위가 나오면 평범할 맥락이었지만, 아신은 이 대목에서 그런 상스러운 말을 뱉지 않을 만큼은 성숙한 인간이었다. 녀석은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 애는요?”


아래아를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실상이야 어떻든, 아신이 보기에는 자기가 살자고 그 요정을 또 다른 마법사에게 팔아넘긴 격이었다.


살짝 비겁하긴 하지만 만약 이걸 묻지 않았다면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말해주었다.


“좋아 보이던데.”


내 기억 속에서도 아래아는 홍혜아를 꽤 잘 따랐다.


오래 산 사람들끼리 맞는 부분이 있는 모양인데, 사람과 아혈을 철저하게 차별하는 홍혜아도 외형만큼은 깜찍한 아래아한테는 말랑말랑한 태도를 보였더랬다.


정말이지.


‘앞으로 네 집은 여기야!’ 한마디 했다고 내 정강이에 싸커킥을 갈긴 것만 빼면 썩 괜찮은 입양 장면이었을 텐데. 그런 이야기를 열심히 늘어놓았더니 아신은 쓰게 웃으며 이리 말했다.


“종종 보러 가줘요.”


시키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



아직 문명이 발달하기 전, 세상에는 문장학이라는 구차한 학문이 유행했다. 요컨대 잘난 사람들이 깃발 따위에 새기는 모양을 구분하고 온갖 잡다한 의미를 부여해대는 학문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 문장학은-, 학문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약간 애매해진 감이 없잖아 있지만, 하나의 문화가 되어 고전적인 가치를 발휘하고 있었다.


바로 명함이다.


요즘 사람들은 갑옷의 수준 대신 정장의 메이커를 확인했고, 휘날리는 깃발 대신 품에서 꺼내 드는 명함으로 상대의 격을 파악했다.


거기 새겨진 회사명과 직함을 확인하면 하나의 개체를 ‘이 새끼’ 혹은 ‘이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 옛날 문장학이 학문으로 유행하던 시대에도 그러했듯, 계급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은 딱히 문장 따위로 타인에게 인지될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쉬운 식별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자걸이 위에 모자 대신 걸린 게 왕관이면 누구라도 ‘아!’하고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확인법은 역시 현대에 이르러서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대충 알았다, 네 수준. 딱 1위계에 어울리는 시시한 인간이군.”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 분의 머리에는, 다만 금은보화가 번쩍이는 왕관이 올라타 있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여기가 소설 속 세상이긴 해도 나름대로 현대였다. 생일 맞은 계집애가 아닌 이상 그딴 걸 쓰는 정신이상자는 없다.


그런데 눈앞의 상대방이 미래로 시간 여행한 왕가의 혈통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초면인 나를 향해 저토록 우아한 화법을 구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머리통에 있었다.


머리가 많이 아파 보인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소설에서는 등장 인물들에게 특색을 부여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알록달록하게 조형하는 경우가 많았고, 저 머리통에 돋은 털이 살짝 회색이었을 뿐이니까.



*



고매한 선현들의 가르침 중에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약과 독의 구분법이 복용량에 따라 갈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당히 모르는 편이 나은 것들도 있다’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가장 저명한 예시로는 ‘애인의 과거’가 있는데, 애인에게 과거가 있다는 사실만을 알면 경계하고 그만이지만 ‘유학’을 다녀왔다면 당장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완벽한 용례라고 볼 수 있었다.


그에 관한 다른 적절한 예시로는 부모님의 불륜 사실, 혹은 소설 속 등장인물의 낯부끄러운 과거 따위가 있었다.


······그러니까, 담시우는 상당히 멋지게 묘사된 인물이었다.


선대가 살해당한 직후 젊은 나이로 위원직을 이어받아 카리스마 있게 수행했고, 마법사란 종의 한계를 초월한 수준으로 공정했으며, 무엇보다도 다루는 마법의 이름부터가 ‘지옥’이었다.


적어도 내 안에서 ‘멋’이란 단어를 의인화하면 딱 그런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가 맞이한 장절한 최후란─, 회상하자면 지금도 내 머릿속의 15세 소년이 눈물을 수영장 하나만큼은 쏟아내고도 남을 정도로 화려했더랬지.


결코 등장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이 소설이던 시절 담시우는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한 인물이었다. 점잖게, 그리고 끝까지 소신을 지키는 인물에게는 그만큼의 매력이 있었다.


······그러니까, 있었었다.


“쯧, 손님이 방문했는데 차 한 잔도 안 내오다니. 이래서 저능아들이란.”

“아, 네. 지금 바로 내드리겠습니다.”


저건 내가 아는 담시우가 아니었다. 그 젊은 신사는 예의를 준수했고, 허락도 없이 남의 일터 소파에 걸터앉아서는 테이블 위에 다리를 꼬아 올려놓는 저딴 만행은 절대로 저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 애새끼는 누구일까.


내가 동경한 캐릭터를 박살내고 있는 저 사악한 놈은 대체 정체가 뭘까. 혹시 당장 저 악마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면 내가 알던 담시우로 다시 태어나는 건 아닐까?


그딴 상상이 들 정도의 충격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맹세컨대 나는 지금 이 순간, 세상이 한번 뒤바뀐 이래 제일로 머리가 아팠다.


물론 아직 이성이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다. 그 증거로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도 할 수는 있었다.


흔히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사실 많이 바뀐다.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은 인생에서 대전환을 겪고는 휙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담시우에게는 그럴만한 사건도 있는 마당 아닌가.


무려 위원이자 6위계 대마도사인 담진영, 위대한 아버지의 죽음이다. 절대적인 성채처럼 보였을 그가 자연사도 자살도 아니고 무려 살해를 당했으니, 사람쯤이야 바뀌고도 남을만했다.


내가 알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라도 충격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저놈은 이제야 막 약관을 넘은 나이. 쉽게 생각해서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여기면 될 뿐이다.


실제로 나는 그런 부분에서 지금까지 이 세상을 꽤 잘 납득해왔다다는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봤자,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봤자.


찻잔을 옮기는 내 손이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여기 대령했습니다.”

“그래, 이제 드디어 기본이 됐군. 사회에는 나처럼 친절하게 알려주는 사람이 몇 없으니 감사하게 알도록.”

“아, 네. 감사합니다.”


아직 마탑이나 다니는 애새끼가 나한테 사회를 가르치는 연출조차 이 참람한 심정을 다 희석시키지 못했다. 비슷한 경험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내가 얼마만큼의 절망에 빠져있는지 구구절절 공감이 되겠지······.


내가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던 때였다. 찻잔에 입술을 데려던 담시우가 그 내용물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이런 소리를 내었다.


“으음···? 뭐지 이 쓰레기는?”


거기 담긴 갈색 액체는 그러나 내 영혼이자 혈액이었다.


아니, 말하자면 전세계 사회인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유전자였다. 나는 나를 무시하는 것까진 참을 수 있지만, 믹스 커피를 무시하는 언행만은 결단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온 사회인의 정신을 대리하여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외쳤다.


“넵, 다시 내오겠습니다!”


물론 사회인이 윗사람한테 향할 수 있는 반항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마법 사회에서 담시우는 나보다 아득한 윗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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