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서재

소설 속 마법 포식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현대판타지

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조회수 :
8,835
추천수 :
564
글자수 :
219,792

작성
23.12.16 21:22
조회
108
추천
9
글자
11쪽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DUMMY

수사학에는 예로부터 엄격하게 금지된 비기가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런 셈 치자’다.


식견과 예의범절을 두루 갖춘 선대의 지성인들은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그 비기를 봉인하기로 약조했는데, 그 이유란 바로 그것의 사전적 정의가 너무나도 사악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셈 치자]: ‘나는 네가 방금 지껄인 개소리에 동의하지도 않거니와 하등 개소리라고 생각하지만, 모쪼록 그 형편없는 주둥아리를 더 놀려서 내게 널 공격할 거리를 좀 더 제공해주렴!’


세상에, 그 문면만 보아도 지나치게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말이 지닌 저력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곧장 화제를 전환해 도망치거나, ‘그런 셈 치자니? 그게 무슨 소리니? 너 지금 내가 한 말이 개소리라는 거니?’하는 식으로 맞받아치면, 그 시점 이후로 해당 화제에 변론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청중들은 절대로 그런 감정적 대처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회의 박탈은 아예 영구적으로 소급적용된다.


따라서 저 무적의 말에 당한 피해자는, 스스로 앞날을 지켜내려면 개소리로 치부될 게 분명함에도 다음 말을 이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만다행이 아닌가. 스승을 잘 둔 덕에 나는 ‘왈왈크르르멍멍!’보다는 세련된 화법을 알고 있었다. 인정해버리기.


“고맙다.”


내가 스스로 지껄인 게 개소리였음을 깔끔하게 인정해버리면 추가적인 손실은 발생하지 않는다. 전문용어로 손절이라고도 하지. 나는 필요에 따라 내 정체성마저도 손절해버릴 수 있는 인간이었다.


물론 그거랑은 별개로 여전히 식탁 밑에 쪼그린 녀석이 ‘바로 그거야! 잘했으!’하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끄덕끄덕거리는 건 살짝 아니꼬웠다. 얼른 다리로 밀어서 저쪽으로 치워버렸다.


······하여간.


그렇게 짧았던 정신적 도피를 끝냈다.


조금이나마 식은 머리로 되새겨보건대, 방금 내 발언은 충동적이었다. 다분히 그랬다. 지껄여야 할 근거는 한없이 옅었고, 닥쳐야 할 이유는 수천을 헤아렸으니까.


하지만, 뭐.


괜찮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더 생각하기에는 이미 깎여나간 게 너무 많았다.

나는 지금 굉장히 피곤했다.


“뭘 또, 고마우실 것까지야.”


적어도 이미르는 한결 나아진 낯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주적인 비밀을 열람한 표정이 아니라. 아무래도 적당히 걸러서 적당한 의도로 이해해준 모양이었다.


이거면 됐다.


나는 쓰게 웃어 보이며, 하나를 해결한 김에 치워뒀던 문제마저 해결해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음. 대충 그런 사정으로 내가 한동안 이 녀석을 맡게 되긴 했는데. 쟤 옷이 저거 한 벌이거든.”


분명 이쯤에서, 이미르는 추임새를 넣는 대신 식탁 밑에 있던 녀석을 끄집어내 무릎 위에 앉히고 있었다. 나는 저 아가씨가 저 새까만 머리칼을 쓰다듬어가며 도대체 어떤 단어들을 뇌리에 떠올렸을지 굳이 상상하지는 않았다.


“내일 시간 되지?”

“물론이죠.”


그러니까, 최대한 상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자본주의의 민낯을 있는 힘껏 투영한 이 시대의 마굴이다. 몬스터도 있고 보스도 있다.


게임 속 던전들과는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 던전은 모험가가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 성장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1층 초입에 최종 보스가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


여기서 첫 월급의 기치를 세운 수많은 모험가가 부모님 선물을 사기 위해 도전하지만, 대다수가 한 떨기 전장의 꽃으로 시들곤 했다.


그리하여 오늘 이곳에는 괴물들의 횡포에 분개한 어느 빨간 머리 용사가 당도했나니, 그 손에는 시커먼 흑요석 칼날이 들려있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사랑합니다, 사모님!”


이런 대화가 대략 네 번 반복됐을 때, 나는 정신을 잃었다.



*



‘깨어나세요, 용사여!’


아련하고도 그리운 울림이 귀청을 때렸다. 그런데 나는 용사가 아니라 꽃이었다. 그 전에는 모험가였고, 내 손에는 허접한 깃발이 하나 들려있었지. 한 번은 휘둘러 본 것도 같았다. 그랬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웬 라운지 같은 곳에 앉아있었다. 백화점 던전의 상층에는 분투를 펼친 용사들을 위해 마련된 휴게공간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있는 것 같다. 아마 여기가 거기겠지.


그게 ‘아마’인 이유는 간단하다. 내 비천한 이해력이 아직도 오늘 하루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지.


어찌 됐건, 오늘의 용사 이미르 님은 건너편에 앉아서 흡족한 용안으로 찻잔을 기울이고 계셨다.


하나 참으로 불경하게도 그 무릎 위에 애새끼 하나가 앉아있었는데, 어디서 보던 거랑 다르게 생긴 게 꼭 부잣집 딸내미 같았다.


“!”


그런데 저 거즈 안대가 흠이군. 아무리 이런 데라도 안대까지는 안 파는 모양이지. 나는 어째서인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양 허리에 손까지 올린 녀석을 보며 고개만 주억거리다가 현실감각을 되찾았다.


그 옆에 이름만 들어본 브랜드들의 쇼핑백이 한 무더기 쌓여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게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나는, 이런 걸 생각한 게 아니었다.


이게 진짜로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하염없이 그 무더기를 바라보면서 영수증을 암산하다가 관뒀다. 그런 다음에는 그저 참람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갚을게.”

“몸으로요?”


?


“?”


머릿속에 선택지가 두 개, 섬광처럼 떠올랐다.


1. 내일부터 지하노역장에 끌려가서 개처럼 부역하기.


2. 지금 당장 저 무릎 위에 앉아 ‘?’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의 귀를 틀어막기.


뭘 골라도 지옥이었다.


극한의 이지선다와 마주한 내 머리통이 충격으로 기능을 정지한 가운데, 이미르는 굉장히 의도적으로 간격을 둔 다음 말을 이었다.


“몸으로요?”


이쯤에서 선택지가 하나 추가됐다. 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치기. 인간 된 도리로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4번을 골랐다.


타협안 제시하기.


“제발, 미르야. 그 남사스럽기 짝이 없는 수단 말고 다른 예시를 들어볼 수는 없을까?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뭐가 있으면 읊어나 보라는 듯한 저 태도가 내 신경을 푹하고 찔렀다. 하지만 이 기지배야, 어른을 얕보지 마라. 비록 오늘 네가 쾌척한 게 거금이긴 하지만, 자금이라는 건 융통하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단 말이다!


이를테면,


이를테면!


“······ ······.”

“몸이요?”


젠장.

때려치우자.


나는 한바탕 심적으로 비명을 내지른 다음 이 불모한 논쟁을 끝내기로 했다.


“······그러든가.”


내가 순순히 항복을 선언하자 정작 가해자인 이미르는 의외라는 시선을 향했지만, 아무렇게나 지껄인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오늘 이전에도 이 아가씨한테 빚을 졌으니까.


“정, 말로요···?”


내 발언이 다소 미심쩍었던 모양인지 침까지 꼴깍 삼켜가며 되묻는 모양새였지만, 뱉은 말을 번복하진 않았다.


“그래, 정말로.”


이 아가씨는 나한테 무려 조물주가 간택한 이 세상의 주인공을 소개해준 전적이 있지 않던가.


그 커다란 빚에 오늘 일까지 얹으면, 이 비루한 몸뚱어리 하나 바쳐 본들 제대로 상환이 될 리도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저 입술에서 어떤 요구가 튀어나오든 어지간하면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그러면.”


이어진 말은, 경이로우리만치 소박했다.


“하루에 연락 한 번씩.”


일일 퀘스트가 생겼다.



*



사람이라는 짐승은 상상 이상으로 적응이 빠르다. 괜히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얼마 지나기도 전에 그걸 일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니까. 예를 들면.


-와작.


이 괘씸한 의성어가 벌써 여기저기 널린 소음들처럼 하얗게 들리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그 곤궁에 빠졌을 때 자기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수식어가 비단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녀석은 하루 정도 이미르 무릎을 의자 대용으로 써보더니 ‘음, 이거 이런 용도로도 쓸만한데?’ 싶었는지 멀쩡한 의자를 두고 사람 무릎에만 앉기 시작했으니.


처음에는 이게 대체 왜 이러나 싶었는데, 나는 어설프게 배운 아동 심리학을 접목하는 대신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무릎이란 게 닳는 것도 아니···진 않지만. 하여간.


괜히 생각하니 더 쑤시는 것 같아서 관뒀다.


그랬더니 저절로 녀석이 즐겁게 시청 중인 스플래터 영화가 시야에 잡혔다. 그런데 그게 또 여간 수위가 아니었던지라. 나는 그 잔혹함에 진저리를 내야만 했다······.


정말이지, 뭐라고 하면 좋을까.


나는 온종일 피, 날붙이, 내장만 줄줄 흘러나오는 저 장르에서 일말의 매력도 느낄 수가 없었는데, 녀석한테는 저게 일상을 아름답게 미화해 그린 힐링 영화쯤으로라도 비치는 모양이었다.


그럴듯하군.


귀신 나오는 공포영화는 오들오들 떨면서 도망을 치던 걸 고려해보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고 본다. 나는 요정 생태학의 최고 권위자로서 이 가설을 정론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영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이맥스에 도착했다.


와작,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는 가운데 영화에서는 살인마가 피해자의 눈을 후비고 있었다. 단지 그 도구가 조금 남사스러웠는데, 이거 정말로 애가 봐도 되나 고민하고 있을 즈음.


돌연 녀석이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말했다.


“마법사.”


······카산드라와 헬레노스의 선례 이래 예언가들은 스스로 입을 닥쳤다. 아직도 앞날을 조잘거리는 주둥아리의 주인들은 모조리 사기꾼이며, 그 진실성은 모든 예언가가 주식 부자가 아니라는 데서 기인한다.


이 녀석, 소설에서는 아래아라는 이름을 받은 요정에게 대사가 배정되지 않은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그래서 나는 이 녀석이 말 한마디 꺼내지 않는 데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


원래 그랬으니까.


나는 원래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내가 모르는 일이 발생한 걸까.


저 고운 목청으로 세 음절을 주절거린 데는 대관절 무슨 의미가 담긴 걸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알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소설 속 마법 포식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4 EP6. 구두장이 24.04.15 10 1 9쪽
43 EP6. 구두장이 24.04.08 10 2 13쪽
42 EP6. 구두장이 24.03.21 19 2 9쪽
41 EP6. 구두장이 24.02.16 23 4 9쪽
40 EP6. 구두장이 +1 24.02.11 31 5 9쪽
39 EP6. 구두장이 24.02.06 42 7 14쪽
38 EP6. 구두장이 +2 24.02.04 46 9 9쪽
37 EP6. 구두장이 24.01.27 45 7 9쪽
36 EP5. 어차피 이 세상은 24.01.20 55 10 11쪽
35 EP5. 어차피 이 세상은 +5 24.01.16 77 13 9쪽
34 EP5. 어차피 이 세상은 +1 24.01.15 66 10 11쪽
33 EP4. Libra +3 24.01.13 85 12 12쪽
32 EP4. Libra +2 24.01.10 110 13 12쪽
31 EP4. Libra +1 24.01.08 94 12 11쪽
30 EP4. Libra 24.01.06 85 12 11쪽
29 EP4. Libra 24.01.02 90 10 13쪽
28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30 98 13 9쪽
27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28 96 8 10쪽
26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26 99 8 11쪽
25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21 91 11 10쪽
24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3.12.20 100 8 10쪽
»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 23.12.16 109 9 11쪽
22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 23.12.11 133 13 14쪽
21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3.12.08 123 11 12쪽
20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 23.11.30 127 11 10쪽
19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1.25 134 10 10쪽
18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1.21 144 12 11쪽
17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11.20 151 12 8쪽
16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6.30 183 12 13쪽
15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6.09 200 8 9쪽
14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5.25 195 14 10쪽
13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5.12 206 14 9쪽
12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5.05 221 16 12쪽
11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5.02 226 18 10쪽
10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27 249 19 10쪽
9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25 244 15 9쪽
8 EP2. 하얀 말, 검은 말 +3 23.04.20 266 16 12쪽
7 EP2. 하얀 말, 검은 말 +4 23.04.19 281 15 18쪽
6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4.18 337 20 14쪽
5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17 371 19 10쪽
4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4.14 429 25 11쪽
3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13 606 23 15쪽
2 EP1. 은사 +6 23.04.12 1,020 29 19쪽
1 EP1. 은사 +2 23.04.12 1,500 46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