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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마법 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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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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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4
추천수 :
564
글자수 :
219,792

작성
23.06.09 19:45
조회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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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9쪽

EP2. 하얀 말, 검은 말

DUMMY

살다 보면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저명한 학자 양반들은 이 증상을 두고 번아웃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 그 작명은 잘못됐다.


무언가가 다 타서 재만 남으려면 애초에 장작처럼 탈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확신컨대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튀어나오는 그 순간부터 딱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태어나 이십 년 언저리 살다 보면 사람은 어른이 된다. 필연의 화살이 시간을 타고 날아와 정수리에 꽂히고, 딱히 하고 싶지도 않은 일들을 잔뜩 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러다 보면 쓸데없이 괴로운 데다 별 요상한 정신병들을 덕지덕지 앓게 되긴 하지만, 무얼. 신께서 그리 매정하진 않으시더라. 어찌 이 악물고 버티다 보면 소설 속으로 이민을 보내주기도 하시더랬다.


하여간 이게 다 무슨 개소리인고 하면 오늘은 조와 울 사이에서 울이 이긴 날이라는 뜻이다. 한낮의 사무실에서, 나는 마지막 남은 한 방울 믹스 커피를 위장에 털어 넣은 다음 말했다.


“아직 안 돼.”

“···그래도, 선생님. 저는-,”

“신아.”


건너편에 앉은 아신의 말이 툭 끊겼다.


아버지의 죽음. 가문의 학살. 아신은 그 모순 사이에서 명확한 해답을 바라고 있었다. 분명히 그 진상을 알고 있을 터이며, 알고 있기도 한 내게서 그 답을 들추려 하고 있었다.


도저히 한 세계의 주인공 씩이나 되어서 할만한 짓은 아니다. 만인의 경외를 사 마땅할 한 세계의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모습도 아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지독한 우울감을 느끼며 다음 봉지를 뜯었다.


굳이 캐묻지 않아도 어련히 때가 오면 알려줄 텐데.


내가 종이컵 하나를 비우는 동안 녀석은 굉장한 억하심정을 담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어코 한숨이 터졌다. 거기에 부응해줄 도리가 없는 나는 어쩔 도리 없이 미리 정해둔 답을 반복해 읊었다.


“그래, 너는 알 자격이 있지.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일이니까.”


여기서부터는 같은 말의 반복이다. 뒤를 생략한 채 지그시 시선만 보냈더니 곧 아신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서는 토하듯 뱉었다.


“······그 시기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물론.”


이 문제에 대한 내 결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이 내가 아는 아신이라면 진상을 밝히는 순간 반드시 주모자를 찾아갈 테니까.


그런데 그 주모자는 당연하게도 이 소설의 라스트 보스였다. 성장할 대로 성장해, 세 명의 7위계 마법사를 동시에 쓰러트린 아신조차도 끝끝내 당해내지 못한 괴물 중의 괴물.


말하자면 단순한 대입법이다. 마왕은 용사가 1레벨일 때 시작 마을에 찾아가면 가뿐하게 죽일 수 있다. 반대로 1레벨 용사를 마왕성 한가운데 떨어트리면 순식간에 죽어버리고 만다.


하물며 만렙을 찍고도 안 됐던 마왕한테 1레벨로 머리 박는 꼴을 부추기라니. 코인이 몇 개고 남아도는 게임에서도 안 할 짓거리를 현실에서 할 리가 없잖은가.


원작에도 없었던 주인공 특전 따위가 갑자기 발동할 리도 없는 마당이다. 나는 내가 좋아한 소설의 주인공이 복날 개새끼처럼 뒈지는 꼴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시기보다도 중요한 게 있어.”

“그게, 뭔데요?”


바로.


“충분한 폭력.”


논리와 이지. 마법 사회라고 말하면 언뜻 세련되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실체는 대단히 원시적이었다. 지엄한 현실의 규율에 적힌 첫 번째 문장은 약육강식이었고, 법과 경제를 초월한 세계에서 폭력은 모든 이해관계를 단순하게 만들었으므로.


압도적인 폭력의 소유자는 그보다 못한 폭력의 소유자들 위에 선다. 나는 그 법칙을 뒤집어엎을 유일한 가능성, 이 세계의 주인공을 그저 호기심 따위에 잡아먹히게 둘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언제까지고 시기 타령하면서 사실을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아신도 어엿한 마법 사회의 일원이다. 둔할지언정 멍청하지는 않다. 녀석은 그런 내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폭력.”

“그래.”


아신의 황금빛 동공이 깊어졌다. 저 반쪽짜리 통찰안은 응당 내 모든 발언에 한 점 거짓이 없음을 꿰뚫어 봤으리라. 결국 녀석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꽉 움켜쥔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그게 갖춰진 다음에는 알려주마.”


네가 알고 싶었던 것도, 알고 싶지 않았던 것도. 모조리.



*



그 전까지는 이 화제를 더 꺼내지 않겠다는 내용의 약속이 말없이 오갔다. 아신은 거기에 합의하면서도 분함에 치를 떨었지만, 나로서는 그래 주어서 진실로 다행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아직까지 아신에게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었다.


어린 시절의 충격과 상처, 맹목적인 분노와 명확한 대상이 존재했음에도 부표처럼 살고 있었다. 정처 없이 세상의 수면을 떠다녔다. 오직 복수를 맹세하고 악귀처럼 살기에는 수많은 의심과 망설임이 그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기 때문에.


분노에 사로잡힌 채 정의를 믿었다.

선하지만 그 동기는 악의였다.


아신이 마법사로서 크게 성장하게 되는 계기는 꽤 시간이 흐른 뒤에나 등장하지만, 그때조차도 아신 개인이 품은 모순은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원작에서도 후에 여러 차례 꼬집히는 대목이었다. 불순한 동기와 모순된 정의관. 뒤틀린 시각으로 주장하는 너 자신만의 잣대로 세상을 판가름하지 말라며, 아신은 몇 차례고 설교를 당했다.


등장인물들의 설교와 조언은 페이지를 거듭해 켜켜이 쌓였고, 분명 그 결과물로써 저 가엾은 주인공은 어느 정도 교정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늦었다. 너무나도 늦었다. 내가 보기에 그건, 작품의 완성도를 채우기엔 적절했을지 몰라도 한 인간을 교정하기에는 지나치게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목적을 선물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정의를 강요하고, 항상 선하기를 종용하는 대신 단순한 방법론을 쥐여주었다.


감히 타인을 교정하려 드는 게 오만한 발상이란 것쯤은 알지만, 이 세계의 결말을 아는 선지자로서 확실한 오답으로 나아가는 것만은 막고 싶었기에.


만약 틀린 길로 나아가려 하면 온몸을 던져 막고, 바람직하지 못한 요인들은 먼저 나서 배제한다. 나는 이 현실의 아신을 완전한 주인공으로 빚어내, 완벽한 결말을 주도시키고 싶었다.


내가 그린 주인공의 이야기는 이제 막 그 첫걸음을 뗀 참이다.


그래, 이제 고작 첫걸음이었다.


나는 머리에 몰려오는 피로와 우울감을 뒤로하고, 이제는 내게 닥친 이야기의 첫 페이지와 마주했다.


“이런 사무실에 저 말고도 손님이 있기는 했네요.”


방금 사무실에서 나간 아신과 엇갈려 들어온 이사야가 가볍게 이죽거렸다. 빳빳하게 각진 정장과 검은색 캐디백. 언제 보아도 같은 차림이었지만 어딘가 초췌해진 그녀의 말을 받았다.


“손님은 아니고, 마탑 학생입니다.”

“하, 이 인간이 하다하다 마탑 학생도 뜯어 먹으려나 보네. 관둬요. 협회 인간들은 저처럼 호구 잡히고도 넘어가 줄 만큼 인자하지 않으니까.”

“저 녀석한테는 제가 뜯어먹히는 쪽입니다만.”

“······네? 당신이요?”


나한테 뜯겨보기만 한 이사야로서는 도무지 믿기질 않는 모양이었지만, 인생사 대부분의 뜯김-뜯음의 관계에서 나는 뜯기는 쪽에 속해있었다. 하지만 그런 진실을 말해준들 딱히 믿지도 않겠지. 그냥 가볍게 웃어넘겼다.



*



결과적으로 이사야는 결국 나를 써먹을 수 있다고 여겨주었다. 이런저런 의심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과정이 어찌 되었건 써먹을 수는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 신용의 수준은 조사 진도라며 보내왔던 자료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껏 내게 대충 둘러대듯 내놓은 말들과는 애초에 양도, 질도 다른 서류들이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였으니까.


덕분에 지난 며칠은 정신없이 보냈다.


성물 탈취의 주범으로 의심되는 마법사 둘의 신상명세, 그 둘과 연관된 인물들의 이력까지 빼곡하게 정리된 문서는 정말이지 훑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으니까.


만약 내가 이 자료를 수집한 본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털었는데 못 찾아내다니, 이건 이미 이놈들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게 아닐까?’ 하고 진작에 포기했겠지.


좋게 말하면 감탄스러우리만치 성실했고, 평범하게 말하면 병적이리만치 집착적이었다. 만약 내가 저런 인간한테 걸렸다면 불안증세에 시달리느라 밤잠도 설쳤겠지.


“여기에요.”


국도에서 갓길로 새고도 한 시간을 넘게 달린 산중. 난데없이 서 있는 번듯한 건물 한 채 앞에 이사야가 차를 세웠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도로 옆. 현대적으로 매끈하게 마감된 저 3층짜리 주택이 바로 이사야가 지목한 두 용의자, ‘부패’와 ‘의태’ 중 ‘의태’의 공방이었다.


‘부패’ 쪽은 마녀로 지정되어 도주했지만, 그와 동시에 공방 자체를 협회에 압수당해 찾는 의미가 없다나. 그러니 그 둘이 작당 모의를 꾸몄다면 장소는 이곳이리라는 추론 아래, 이사야의 제안에 따라 여기서부터 재조사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음, 그런데 밝은 데서 다시 보니까 조금 피곤해 보이시네요. 간밤에 잘 못 주무셨나 봐요?”

“······다 누구 덕분 아니겠습니까.”


이사야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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