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서재

소설 속 마법 포식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현대판타지

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조회수 :
8,790
추천수 :
564
글자수 :
219,792

작성
23.04.27 20:54
조회
248
추천
19
글자
10쪽

EP2. 하얀 말, 검은 말

DUMMY

장대비가 주룩주룩 붉은 저택의 처마를 두들겼다.


특별히 그 이름 앞에 붉다는 색조를 붙여 부르는 데는 큰 이유가 없었다. 그저 외벽에 불그스름한 빛이 감도는 까닭에, 수백 년간 행인들이며 이 저택의 주인들이 붉은 저택이라고 불러온 것뿐이다.


창의력이라곤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명칭의 이 각지고 모난 상자 안에서, 이미르는 오늘 그 무던함에 싫증을 내는 대신 팔짱을 낀 채 스마트폰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


하지만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한들 그놈의 첨단기기는 입을 벌려 뭐라도 소리를 토해내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르가 보기에 그건 상당히 해괴한, 지금까지 쌓아온 상식에 반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고장이라도 난 건가 싶었다.

아니면 비가 와서 전파라도 나빠진 건가 싶었다.


그래서 잘 열지도 않는 메신저 앱을 일부러 열어서 봤더니, 역시나. 그 자그마한 활자 혼합물 안에서는 제 앞가림도 못 하는 머저리들의 번식 욕구가 한도 끝도 없이 갱신되는 중이었다.


종류도 참 각양각색이다.


연령대는 대체로 10대에서 30대. 간접적으로 과제나 학업을 운운하며 조심스레 말문을 트는 녀석들부터, 직설적으로 한번 식사라도 하지 않겠냐는 권유까지.


심지어 방금만 해도 ‘비도 많이 오고 우울한데, 파전에 막걸리라도······’ 어쩌고 하는 눈물겨운 멘트가 갱신된 마당이다.


이미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전자기계를 잘 아는 축의 인간이 아니었지만, 아무리 봐도 고장은 아닌 것 같았다.


화면은 잘 눌렸고, 상단 표시창에 뜨는 안테나도 멀쩡했으며, 인터넷도 나름 제 기능을 다 하는 중인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만큼이었다.


“이상한데.”


지금껏 일어난 적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어나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책상 위에 세워둔 스마트폰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고개가 갸웃 기울어지자 새빨간 머리칼이 어깨선을 타고 흘렀다.


정작 연락이 와야 할 사람은 조용한데, 자기현시욕과 번식욕으로 똘똘 뭉친 상머저리들만 시끄럽게 옹알대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영재, 수재, 천재라 떠받들어진 이미르가 자신의 대단한 두뇌로 생각해본 결과, 아무리 봐도 이건 이상한 일이 맞았다.


···왜지.


······왤까.


새빨간 눈동자가 도로록 구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탁자 위에 놓아둔 직사각형 종이쪼가리가 하나 잡혔다. 아저씨라고 부르면 침울해하던 아저씨한테서 반쯤 억지로 받아낸 명함.


다시 봐도 똑같았다. 그 이름 밑에는 분명 지번으로 시작하는 번호 하나와, 개인 연락처가 적혀있었는데······.


“······.”


아, 하고 작은 깨달음이 뇌리에 떠올랐다. 이미르는 하이안에게 자신의 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아예 연락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니. 애초에 올 수가 없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


맹점이었다.


일평생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머저리들조차 용케 자신의 연락처를 알아내 치근덕거리는 삶이었다. 그런데 한자리에 앉아서 그렇게 오랜 시간(길어야 20분) 깊은 대화(아님)를 나눴는데, 설마하니 연락처 하나 알아내지 못했을 줄이야.


응당 지금쯤이면 ‘도움 줘서 고맙다’, 혹은 ‘다음에는 언제 볼까?’ 하는 말이 한 트럭은 와 있어야 했는데,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흐.”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의외로 얼빠진 사람이었다. 그런 얼빠진 사람을 위해, 이미르는 잘난 자신이 자그마한 친절을 베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미 한참 전에 외운 번호를 찍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단언컨대 21세기는 정신병자들의 시대다.


소위 사회생활이란 걸 하다 보면 아무리 정신이 튼튼한 인간이라도 서너 개쯤 만성적인 정신병을 얻게 마련이었다.


자아와 빌어먹음. 가족, 교우관계, 상사와 부하, 동료, 다시 빌어먹는 자아로 순환하는 무한한 굴레 속에서, 그 영겁의 고통을 버텨낼 내구성이 우리 인간에겐 준비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외눈박이 나라에선 외눈박이가, 세눈박이 나라에선 세눈박이가 정상인 것처럼, 다행히도 모두가 정신병을 앓고 사는 까닭에 모두가 평범한 사람을 흉내 낼 수 있었다.


요컨대 우울증이나 ADHD 하나쯤 안 달고 사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운 세상이란 거다.


심지어 나는 개중에서도 ‘병자’ 취급받을 만큼 덕지덕지 늘어지는 진단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남들 눈이 서너개라면 나는 아르고스쯤 되겠지.


그런데.


그런 내가 보기에도 참 눈이 많이 박혔다 싶은 인간이 있었다.


[이미르]: 안녕하세요.

[이미르]: 제 연락처를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이미르]: 이미르예요.

[이미르]: 많이 바쁘신가 봐요.

[이미르]: 꺼져있지는 않은데, 무음으로 해두셨나요?

[이미르]: 저기요.

[이미르]: 뭐해요?

[이미르]: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아요?

[이미르]: 내가 뭐 잘못했어요?

[이미───


오케이, 거기까지.


나는 그 밑으로도 주욱 이어진 71통의 수신 이력을 떠올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끓는 두통 속에서 내가 지껄일 수 있는 말이라곤 또다시 이것뿐이었다. ‘너 이런 애 아니었잖아.’


이미르의 연락처 자체는 아신한테서 받아둔지라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맥을 짚어보면 이미르는 그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럴 텐데도, 마치 당연히 내가 본인에게 연락을 해야만 했다는 어조로 말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소름 끼치는 포인트였다.


물론 화룡점정은 따로 있었지.


[이미르: 어쩔 수 없네.]

[이미르: 제가 갈게요. 내일 봐요?]


어디를?


가긴 어딜 가는데?


뻔했다. 저 말의 목적지는 내 사무실일 게 분명하다.


얘가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소설의 서면에서 나타난 이미르의 광증을 감안하면 조만간 내 집까지도 알아내 들이닥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건, 본인이 원하는 걸 원하는 방식대로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종류의 병이다.


유아기의 온갖 트라우마들이 성숙한 다음 어리광 비슷한 것으로 발현됐는데,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의 어리광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게 너무나도 익숙해진 나머지 그대로 고착된 고질병이었다.


하지만 그 장단에 끝까지 맞춰주고, 치유까지 해줄 수 있는 건 아신 쯤이나 되는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다. 나처럼 평범한 소시민이 따라가려면 도중에 다리가 부러져 버리고 만단 말이다.


이미르가 과연 어떤──이유와 의도로 나한테 본인의 광적인 집착을 드러내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 심약한 새가슴이 불안에 빠지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내게는 저 기행에 대책을 떠올려낼 일종의 유예가 필요했다···.


“사장님, 여기 수육 대자랑 소주 한 병 주세요!”

“···옙!”


그래서 예정을 살짝 앞당겼다.


“아, 여쭤보는 걸 깜빡했네. 반주하시죠?”

“·········제정신이세요?”


테이블 건너편에서는, 이사야가 잔뜩 썩은 표정으로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



흔히 흡혈귀는 미각이 약하다고 한다. 훌륭한 정찬을 입에 대고도 그 맛을 분별할 수 없어, 유일무이 맛이랄 게 느껴지는 사람의 피에 갈증을 느끼도록 설계되어있었다.


그 갈증은 이성으로 억누를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만약 적십자회가 성당의 산하 기관이 아니었다면, 대다수가 아사했거나 흡혈 충동을 참지 못한 끝에는 성당에게 토벌당했을 정도라고.


그리 장사가 잘되지 않는 국밥집의 사장 백한영은, 상당히 최근까지 자기 가게의 불황이 바로 본인의 둔한 미각에서 기인했다고 믿었다.


아니, 어쩌면 아직 그렇게 믿고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잡스러운 패널티는 애당초 흡혈귀로 태어난 진조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당신 가게가 장사가 안 되는 이유는, 그냥 ‘당신이 음식을 더럽게 못 해서’라는 말이다···!


수육 한 점을 집어먹은 나는 그 말을 큰소리로 외쳐주고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그런 소리를 했다간 한 대 얻어맞는 정도로는 안 끝날 것 같아서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슬쩍 가게 유리창을 흘기자, 신문을 읽는 척하면서 이쪽 테이블만 뚫어지게 지켜보는 백한영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전에 읽은 묘사가 두 줄가량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백한영은 흡혈귀이면서 이사야라는 성당 기사를 사랑했다.’

‘그는 그녀를 살해한 세상에 영원한 복수를 맹세했다.’


서글프게도 현실은 언제나 활자보다 추한 법이었다. 나는 로맨틱하고 카리스마 넘치던 흡혈귀 군주의 실체를 직시하는 대신 힘겹게 눈을 돌렸다.


그러자 더욱 슬픈 현실이 펼쳐지고 있었다.


“참나, 입에 대지도 않을 술은 왜 시켰대요?”


나더러 ‘제정신이세요?’ 물었던 성직자는 음료 냉장고에서 새 술병을 꺼내오고 있었다. 분명 한 병 시키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이사야가 저 혼자 자작해서 비워버렸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왜기는요. 요즘 경제 불황이잖습니까? 사장님도 장사하셔야죠.”

“하, 웃겨.”


웃기라고 한 말이긴 했는데. 그런데 취기로 살짝 홍조까지 돌기 시작한 이사야가 피식 웃음 흘리자, 어디서 까드득 이빨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가 아니라 이빨이었다. 어쨌거나 박쥐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래서 내가 장소를 정할까도 했는데, 설마 했더니 백한영의 가게를 지정하는 말에 그대로 수긍한 내가 등신이었지. 이거야 원 밤길 조심 안 하면 미라로 발견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저편에서 날아오는 살기에 벌벌 떨면서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소설 속 마법 포식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4 EP6. 구두장이 24.04.15 8 1 9쪽
43 EP6. 구두장이 24.04.08 10 2 13쪽
42 EP6. 구두장이 24.03.21 19 2 9쪽
41 EP6. 구두장이 24.02.16 23 4 9쪽
40 EP6. 구두장이 +1 24.02.11 30 5 9쪽
39 EP6. 구두장이 24.02.06 38 7 14쪽
38 EP6. 구두장이 +2 24.02.04 44 9 9쪽
37 EP6. 구두장이 24.01.27 44 7 9쪽
36 EP5. 어차피 이 세상은 24.01.20 54 10 11쪽
35 EP5. 어차피 이 세상은 +5 24.01.16 76 13 9쪽
34 EP5. 어차피 이 세상은 +1 24.01.15 65 10 11쪽
33 EP4. Libra +3 24.01.13 83 12 12쪽
32 EP4. Libra +2 24.01.10 109 13 12쪽
31 EP4. Libra +1 24.01.08 94 12 11쪽
30 EP4. Libra 24.01.06 85 12 11쪽
29 EP4. Libra 24.01.02 88 10 13쪽
28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30 98 13 9쪽
27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28 96 8 10쪽
26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26 99 8 11쪽
25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21 90 11 10쪽
24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3.12.20 98 8 10쪽
23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 23.12.16 108 9 11쪽
22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 23.12.11 133 13 14쪽
21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3.12.08 121 11 12쪽
20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 23.11.30 125 11 10쪽
19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1.25 134 10 10쪽
18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1.21 143 12 11쪽
17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11.20 151 12 8쪽
16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6.30 182 12 13쪽
15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6.09 199 8 9쪽
14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5.25 195 14 10쪽
13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5.12 205 14 9쪽
12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5.05 219 16 12쪽
11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5.02 225 18 10쪽
»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27 249 19 10쪽
9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25 244 15 9쪽
8 EP2. 하얀 말, 검은 말 +3 23.04.20 266 16 12쪽
7 EP2. 하얀 말, 검은 말 +4 23.04.19 280 15 18쪽
6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4.18 336 20 14쪽
5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17 370 19 10쪽
4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4.14 429 25 11쪽
3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13 606 23 15쪽
2 EP1. 은사 +6 23.04.12 1,012 29 19쪽
1 EP1. 은사 +2 23.04.12 1,499 46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