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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마법 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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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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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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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
글자수 :
219,792

작성
23.12.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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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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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DUMMY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믿음이 있다. 하지만 전부 압축하고 나면 두 가지만 남는다. 신용과 신뢰.


신용은 차가운 믿음이다.


툭 까놓고 말해 온도계를 들이대면 절대영도가 찍힐 정도다. 그건 신용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널 믿으니까!’ 따위의 말랑하고도 포근한 감수성은 부재하고, 사람의 감정마저도 숫자로 치환하는 자본가들의 악마적인 저울질뿐이 없다.


반면 신뢰에 해당하는 온도는? 미적지근하다.


금전적인 담보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건 같은 말로 무조건적이라는 뜻이다. 형용모순이다. 비록 덜 금전적인 것을 대가로 믿음을 주고받은들, 애시당초 이 세상에 자본으로 치환하지 못할 건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기만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신용이 아니라 신뢰를 입에 담는 사람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믿을 게 못 된다. 심지어 그걸 가지고 구라까지 치는 놈들의 속내란 뻔했다. ‘널 조지겠다.’ 간단한 경제학이다.


그렇다. 사람은 신뢰라는 말을 발명할 정도로 계산적인 동물이다. 거기에 마법사라는 배경까지 더해지면 더할 나위가 없다.


스스로 평범한 사람들보다 우월하다 여기고 실제로도 우월한 그들은 남들보다 한층 ‘경제적’인즉. 아신을 찾았다는 늙은이가 불러낸 자리에 내가 끼어든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쪽에선 당연히 달갑지 않았겠지.

그런데 달갑지 않으면 어쩔 건가?


내가 원조 후견인인걸.


하여간.


그쪽 늙은이가 지정한 장소로 가는 길은 꽤 궁상맞았다. 요컨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벽지였는데, 근래 깨우친 바에 의하면 운전하다가 ‘씨발’ 소리가 나올 법한 장소에 꼭꼭 숨어 사는 마법사들한테는 약간 신선 같은 습성이 있었다.


고매하게 도 닦는 부류가 아니라, 사람 갈아 만든 선단 먹는 부류. 그런 논조의 이야기를 해줬더니 아신은 질색하며 말을 받았다.


“설마요.”


그 표정을 보고서야 살짝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이놈은 아직 때가 덜 묻은 영혼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한 말이 딱히 농담은 아니라는 건 알았을 테고, 그래서 저러는 거겠지.


이제 와서 유난 떨 일은 아니었다.


아신이 한 차례 휴지를 두고 말했다.


“그보다, 여쭤봐도 될까 싶었던 게 있는데요.”

“그럴 때는 대개 여쭙지 않는 게 정답인데.”

“저 애, 뭐에요?”


아신의 시선이 백미러 속 뒷자리에 잠들어 있는 녀석을 향했다. 나는 그 눈을 쳐다보며 잠깐 고민했다. 꽤 여러 의도가 함축된 질문이었지만, 대답을 조립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나는 이놈한테는 딱히 빚진 게 없었다.


“사연 있는 영혼이지.”

“···누군들 안 그렇겠느냐만요.”


말에 꽤 굵은 뼈가 있었다. 대퇴골쯤 되는 굵기였다. 하지만 나는 저 애새끼가 건방지게 불행 배틀을 걸어온다면 진지하게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리 임전무퇴의 각오를 다지고 적장을 마주 봤건만, 이어지는 말은 퍽 맥이 빠지는 종류였다.


“이름은요?”


백미러 속에서 녀석은 아직 곤히 자고 있었다. 그냥 말했다.


“아래아.”

“좀···, 음. 신기한 이름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신기하기도 하지.”


대놓고 무슨 사람 이름이 그러냐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마음씨가 비단결처럼 고와서 그거 네가 지었던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비포장도로 운전하다가 바닥 한번 시원하게 긁고도 이 정도 배려가 가능하다니, 정말 세상에 나 이상 가는 인격자가 없을 수준이었다.


새삼 내 고결한 인품에 감탄하고 있었더니 문득 이 씨발스럽게 대단한 비포장도로에도 끝이 보였다. 얄궂게도 또 산속이었다. 도착지는 나무들 사이에 서 있는 커다란 폐가였다.


하여간 악당들은 왜 이놈이고 저놈이고 ‘폐’가 붙은 건물을 본거지로 삼는 걸까. 의문처럼 던져봤지만 사실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죄 폐급이라서다. 거기에 다른 이유는 없다.


다만 이번 악당은 조금 덜 폐급처럼 굴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자 하나가 그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있었으니.


“마중까지 나오셨네.”

“저렇게 극진할 줄 알았으면 현수막이라도 걸어달라고 할 걸 그랬는데요?”

“그런 건 요구 받아서 하는 게 아니라 눈치로 하는 거지. 그럴 눈치가 있으면 사회 나가서 건실하게 직장을 다니는 게 낫고.”

“‘건실’하게요?”


아신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구태여 그 대목을 지적한 걸 보면 이놈은 직장 다닐 눈치가 없었다. 아무렴 어떨까. 차에서 내리며 대충 대답해줬다.


“건실하게.”


그다음 할 일은 별거 없었다. 마중 나온 여자한테 목 한번 꾸벅 숙이고, 뒷자리에서 침이나 질질 흘려가며 퍼질러 자는 녀석을 깨운 다음 아신한테 내 트렁크를 내리게 하기.


그러는 와중에 어디서 개가 짖는지 ‘대체 뭐가 들었길래······’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마중 나온 여자한테 가서 말을 붙였다.


“천하인력 하이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아신이 낑낑거리며 내 트렁크를 질질 끄는 가운데, 녀석은 비몽사몽 잠이 덜 깬 채로 내 뒤에 딱 붙어서 쫓아왔다. 마중 나온 여자는 그 꼴이 퍽 우스웠는지 잠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지만, 그걸 보고 실례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나도 웃겼으니까.


하여간, 안내받아 들어온 건물 내부는 바깥보다도 서늘했고, 밖은 대낮인데도 어두웠다. 그럴만한 환경이었다. 슬레이트 지붕 사이 미세하게 뚫린 구멍에 스며든 햇빛 쪼가리 말고는 광원이 없었다.


그래도 사물의 테두리 정도는 어렴풋하게나마 분간이 됐는데, 덕택에 인사할 사람을 헷갈리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애초에 헷갈릴 여지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널찍한 실내에 있는 거라곤 테이블과 의자 몇 개, 그리고 그중 하나에 앉은 노인뿐이었다.


나는 먼젓번과 같은 인사말을 뱉었다.


“천하인력 하이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누추한 데 모셔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거기 앉으시지요. 아신 군도 앉게.”


제법 정중한 투였지만, 이쯤에서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폭소였을 지도 모른다. 한참을 웃은 다음 물었다.


“여기요?”

“네, 거기요.”


먼지 쌓인 의자에 앉으며 습관적으로 아신을 쳐다봤지만,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두웠다. 늙은이가 미안하단 기색을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면 내 쪽에서 찾아가야 했는데, 거듭 미안하게 됐습니다. 내가 몸이 이래서. 예전처럼 밖에 자주 나가기가 힘들어요.”


그리고 이 말은 내 귀에 다음과 같이 들렸다. 멍멍. 하지만 이 어찌나 다행인가. 언어의 천재인 나는 이 세상 모든 동물의 말을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화법을 취해주었다.


“아뇨, 무슨 말씀을. 저희가 손을 벌리는 입장 아닙니까? 저희 쪽에서 찾아뵙는 게 사리에 맞죠.”

“허허, 말씀도 잘 하시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쪽은 자녀분이신지?”

“아, 예. 제가 딸 사랑이 과하다 보니 말입니다.”


녀석이 내 뒤에서 흠칫 떨었다. 나는 녀석을 내 옆으로 끄집어내서 머리통 위에 손을 얹고 말을 이었다.


“중요한 자리 가야 한다고 뜯어말려도 통 어리광을 부리지 뭡니까. 그런데 이게 영, 애를 이길 수가 있어야 말이죠.”

“무얼,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요. 나도 이해합니다.”

“그나저나, 참 곱게도 자라지 않았습니까? 저희 딸내미. 누굴 닮았는지는 모르겠는데, 생긴 걸 보면 아마 저는 안 닮았을 겁니다?”


실내는 어두웠다. 저 늙은이의 표정이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보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괜히 유쾌해져서 말을 더했다.


“아, 이거 제가 실수했네요. 어두워서 잘 안 보이실 텐데. 여기 전기 들어옵니까? 그럼 제가 가서 불이라도-,”

“안 들어옵니다.”

“···저런, 불편하실 텐데.”

“크흠.”


불편한 기색이 어둠을 뚫고 전해졌다. 하지만 저 늙은이는 단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을 뿐이다. 불난 집에 사다리 타고 올라온 소방수한테 꺼지라고 외치는데, 그저 불편하다고 하신다.


지금 내 기분을 맞혀보라면 천만 명 중에 천만 명이 정답을 외치겠지. 나는 너무나도 편안했다. 모든 사람이 이 절반만큼만 솔직해도 세상 사는 게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거다.


“그, 내가 어쩐 일로 저기 아신 군을 찾았는지는, 그 자초지종은 들으셨지요? 그러니까, 협회에서 저 친구의 가문을···,”

“압류하려 한다는 이야기죠. 그리되지 않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씀이셨고요. 저희야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예, 바로 그거지요. 나한테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오오, 그렇습니까.’ 하고 흥미로워하는 소리를 냈다. 물론 흥미라고는 벼룩의 성기만큼도 일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우스워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실은 내가 이래 봬도 위원 한 분과 연줄이 있거든요. 마탑 시절엔 동기였습니다. 먼저 그분한테······.”


어쩌고저쩌고.


다분히 정치적인 이야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늙은이는 열심히도 주절거렸는데, 그 주둥이가 내뱉은 선량한 음모는 내 한쪽 귀에 들어가서 모조리 반대쪽 귀로 빠져나갔다.


어차피 전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알든 모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내 머릿속에 미끄럼틀을 시공하는 데에는 번쩍거리는 황금색 눈깔까지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건, 아신이 나한테 이 늙은이가 죄 거짓부렁만 늘어놓았다고 고하지 않았어도 차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저 늙은이는 아직 자기 이름조차 대지 않았다.


내가 분명하게 기회를 제공했음에도 대놓고 외면했다. 밖에 자주 나다니기 힘들다면서 아신을 만나러는 직접 갔단다. 믿음을 주겠다며 부른 장소는 사람 하나 담그기 딱 좋은 폐가다.


심지어 그런 데 숨어서 불이나 꺼놓고 자빠진 작태였다. 공교로웠다. 내가 아무리 바보 병신이라 한들 여기서 공교롭다는 감상을 떠올리지 못하는 건 불가능했다.


요컨대 저 늙은이는 바보 병신이라도 알아듣게 짖는 중이었다.


이 무대장치는 나를 겨냥한 것이라고.


······그리고 사람이라는 동물은 계산적이다. 마법사는 더욱 그렇다. 손해 보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손해를 보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군다면, 그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손해를 통해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 추측하는 것이다.


일단 저 늙은 마법사는 아신을 통해 헛짓거리를 하며 내가 이곳으로 오도록 유도했다. 자기가 누군지도 밝히지 않는 뻔한 짓거리를 통해 의심을 샀지만, 그리하여 자기가 누군지 밝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이득을 봤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간단했다.

증명하는 방법 역시도.


“······그래서······.”


늙은이가 아직도 웅대하고 심원한 모략을 나불대고 있는 가운데 나는 문득 피곤해졌다. 어떻게든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싶었다. 그런 셈 치기로 하며 품에서 종이로 된 상자를 하나 꺼냈다. 거기서 한 대를 꺼내 입에 물고 말했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달칵, 하고.

라이터의 자그마한 불빛이 그의 면상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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