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서재

소설 속 마법 포식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현대판타지

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최근연재일 :
2024.04.15 16:46
연재수 :
44 회
조회수 :
8,862
추천수 :
564
글자수 :
219,792

작성
23.11.21 15:40
조회
144
추천
12
글자
11쪽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DUMMY

재차 강조하지만 나는 어른들 말씀을 귀담아듣고 또 존중하는, 이를테면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진중한 별종이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든 가르침이 몇 개쯤은 있었는데,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사나이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다.


그 말이 대체 뭐가 문제냐 하면, 애당초 그 세 번이라는 횟수부터가 글러 먹었다는 거다.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라는 전제는, 애초에 부모가 복수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조건이지 않은가?


말의 태생부터가 모순이다. 즉 개소리다. 그것도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 철부지 금수저의 개소리인데, 태어나서 화생방 훈련만 두 번 받아도 그놈의 세 번이 꽉 차버린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사나이 운운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데다가 감수성이라곤 코빼기도 없는 소리였지만, 어른들 말씀이 대개 그렇듯 부분적으로는 고개를 끄덕여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여간에 찢어지게 슬프면 좀 울라는 소리 아닌가?


······그러니까 말이다.


제발.


제발 좀.


“울어서 네 순수를 증명해다오······.”


내가 ‘슬픈 영화 명작선 best 50’을 보면서 팝콘이나 으적대는 애새끼한테 이렇게 빌고 자빠진 사연은 아래와 같았다.



*



딱히 내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세상은 알아서 굴러간다.


잘 굴러가든 못 굴러가든 아무튼 굴러는 간다.


굴러는 간다는 점에서 세상은 공과 같고, 마침 이 주장을 뒷받침하듯 별들은 공 모양으로 생겨 먹었다.


그런 세상과 공 사이에는 치명적인 공통점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아래에서 위로는 구를 수 없다는 점이다. 누가 무슨 짓을 하든 결국에는 바닥에 처박힐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세상이 저마다 바닥에 닿는 그 순간을 간략하게 죽음이라고 부른다.


지금 당장 살아있는 사람들이라 봤자 백 오십 년쯤 후에는 죄다 죽어있을 테고, 이 세상에서는 그 시기가 백 사십여 년쯤 당겨질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사람은 죽는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쫙 끼치는 비극이 아닐 수 없겠지. 그래서인지 이 세상의 조물주는 그 끔찍한 단어가 참으로 싫었던 모양이다. 자기와 같을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선물까지 준비해 뒀을 정도니까.


요정의 눈물.


딱 한 방울만 마셔도 불로불사를 보장하기로 유명한 판타지스러운 아이템이다. 마법보다도 훨씬 더 마법처럼 들리는 그 매력적인 보물은, 참으로 당연하게도 요정의 눈에서 나온다.


요정은 애초에 불로불사의 존재요, 그 눈에는 미래가 비친다 하니 필경 거기서 흘러나온 짠물에도 신묘한 효험이 있으리라는 귀결이다.


진위야 어찌 됐든 불로불사라는 단어의 울림은 강렬하다. 모두가 좋아죽는 정력제조차 ‘따위’로 만들 지경이며, 그건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당연함 탓에 요정이란 족속은 이 세상에서 천연 비아그라들보다도 수천 년쯤 전에 멸종했다.


그렇게 알려졌었다.


“주님,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주세요.”

“정신, 나간. 새-”

“미안한데 그건 너무 많이 들었어.”


이건 정말이다. 누가 대본이라도 짜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들어서, 요즘에는 아주 진저리가 다 날 지경이지.


육두문자에도 최소한의 미학이라는 게 있는 법이건만. 이 녀석들도 조금쯤은 창의력 비슷한 걸 발휘해줄 수는 없는 걸까? 아마 분명 확실하게 그럴 것 같아서 더 듣지는 않았다.


하여간.


그놈의 요정이라는 족속이 아직 남아있었다는 지점부터 이어가자면, 우연히도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 사악한 패거리가 숨어 살던 요정을 납치했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생명을 무수히도 해쳤으며, 어떤 희생정신 넘치는 애새끼가 얼마나 장렬한 사투 끝에 비극의 히로인을 구출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학대와 고문, 온갖 실험에도 분루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소녀가 한 고결한 구원자의 손을 맞잡으며 생애 단 한 번 흘릴 수 있는 눈물을 쏟아내기까지의─, 이야기로 풀어내자면 장장 소설 한 권 분량쯤은 잡아먹을 방대한 서사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철없고도 낭만적인 구원 서사.


그 모양새는 분명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종류의 서사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아니, 비단 나뿐만 아니라 나처럼 말랑말랑한 감수성의 소유자라면 모두 그럴 게 틀림없다. 감동이란 명찰을 달았을 뿐인 서정적 폭력은 늘 그래왔듯 내 마음을 흠씬 두들겨 패버릴 테니까.


만에 하나 그런 장면을 눈앞에서 봐버리기라도 하는 날에는─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나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계집애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말겠지.


그런데 말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쳐먹은 성인이,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시커먼 남정네가 질질 짜는 장면 따위는 태양계의 그 누구한테도 수요가 없다. 그렇다면 애당초 공급일랑 하질 말아야지 않겠는가?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말하자면 지구상의 그 무엇보다도 엄격한 규율이다. 인류의 근간 되는 경제학의 초석이자, 결단코 무너져선 아니 될 사회의 반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즉─, 냉철하게 따져보자면 이렇다.


나는 절대로 주인공에게 배정된 서사와 보상을 도둑질하는 게 아니라, 인류사회의 존속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빛나는 희생정신을 발휘해가면서까지 두 발 벗고 나섰다는 거지.


그리하여 인적 드문 어느 산골.


인류사회 존속의 중심지인 이곳은 그 산허리에 대충 지어놓은 가건물 지하다. 으레 대중매체에서 이와 같은 입지에는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시설과 이것저것 복잡한 기계들이 즐비하기 마련인지라, 요컨대 이곳 역시 제법 그럴싸한 악당 소굴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내 부실한 뇌수가 허접한 변명이나 떠올리는 동안 내 근면한 몸뚱어리는 나름대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대단한 보물을 숨겨뒀을 법한 철문을 찾아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시궁창 같은 곳에 숨겨뒀을 보물이라곤 하나뿐이지.


이 문 너머에는 요정이 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죄로써 멸종을 선고받은 가엾은 요정이.


비록 백마 탄 왕자님 대신 비루한 양복쟁이 하나가 출석한 마당이지만, 구해지는 처지에 아쉬운 소리는 못할 테지. 이만하기만 해도 그 눈깔에서 감동의 눈물 한 방울 떨구기에는 모자람이 없으리라.


······그리하여 내 손끝에서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 철문은 오래지 않아 그 너머의 풍경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풍기길 악취와 비프음.


느릿하게 점멸하는 시뻘건 램프 아래로는 창백한 발끝이 비친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그림자처럼 이리저리 얽힌 가운데, 사슬에 매달린 몸뚱어리는 스스로 비극을 호소하듯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졌다.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다가갔으나 그 살짝 뾰족할 뿐인 귓가는 이방인의 방문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쇠꼬챙이들은 그 연유를 간명하게 만들어주었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이 더 아파지는 일도 없었다.


다만 말이나 필요할까.


이 가축에게 목가적인 사육의 나날에 끝이 도래했음을 알리기에는 그 사슬을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그래서 그리 했다.


그러자 비로소 작은 고깃덩어리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우···.”


천천히, 텅 빈 동공이 나를 향하고.


“우으······.”


하나 남은 맑은 눈이 마저 쳐다보더니──,


“우웨에에엑.”


이내 성대하게 위액을 토해냈다.



*



요정─, 에게는 이름조차 없었다.


한 종의 마지막 개체를 지칭하는 데에는 대명사가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게다가 저건 기억이 시작될 무렵엔 이미 목줄이 매여있던 불행 포르노의 피사체다.


원래대로라면 저 녀석을 주웠을 아신은 그 점을 가엾게 여겨 이름도 지어줬지만, 나는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저 몹쓸 귀쟁이가 내 한 켤레뿐인 구두를 쓰레기로 만들어서가 아니다. 손쉽게 귀한 물건을 손에 넣을 줄 알았건만 기대를 배신당해서도 아니고, 저 쬐그만 몸뚱어리로 어찌나 잘 쳐먹는지 나흘 만에 내 한 달 식비를 거덜 내서는 더더욱 아니지.


단지 이름이란 걸 붙이면 정이 생겨서 그렇다. 정이 생기면 애착이 가고, 애착이 가면 버리기 어려워진다. 버리기 어려워진다는 건 달리 말해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나는 집에 불이 났을 때 통장 대신 애착 인형을 가지고 도망치는 얼간이가 될 생각은 없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속 편하게 녀석을 이렇게 불렀다.


“어이.”


그러자 돌아온 답변이라는 건, 경탄스럽게도 ‘와작’이었다.


‘와작’.


‘와작’이라니.


천하의 노스트라다무스조차 감히 예상이나 했을까? 그 지옥 같은 구렁텅이에서 애써 꺼내준 녀석이, 내 소파 위에서 내 TV로 영화나 보면서 내 돈으로 사준 팝콘이나 으적거리고 있을 줄은.


심지어 저 녀석은, 저런 개백수 한량 같은 작태를 부리는 주제에 내가 거는 말은 족족 무시해버리고 있었다.


대체 저 깜찍한 녀석을 어찌하면 좋을까.


아무한테나 대고 맹세컨대 드라마에서나 보던 사춘기 딸내미들도 저것보단 덜 독했다. 은혜를 기생으로 갚는다는 발상은, 열등한 인간의 뇌로는 떠올려낼 수조차 없을 테니까······!


“하아······.”


깊디깊은 절망감에 내가 한숨을 쉬고 있노라면, 또다시 ‘와작’ 하고 팝콘이나 쳐먹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인간이 아니니까 저럴 수 있는 거겠지.

인간이 아니라서 그리 다뤄졌던 걸 테고.


너무나도 오래, 오래도 묶여있던 탓에 검게 죽어있던 녀석의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나은 채 팝콘 봉지를 휘적대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살가죽과 뼈다귀가 문자 그대로 상접했던 몸뚱이에도 금세 살이 붙어 보기 좋아졌고, 혼자서는 서지도 못하던 다리 역시 제법 근육이 붙은지라 이제는 냉장고까지 멋대로 왕복하는 판이다.


여전히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이제는 소리에도 어느 정도 반응을 하는 모양새에, 무엇보다도 이제는 나를 보고도 구역질까진 하지 않았다.


당초 목적이었던 눈물이야 어찌 받아내면 좋을지 고민이 깊다만···, 무얼. 당분간은 터질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잠깐쯤은 이대로 둬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그런 물러터진 생각이나 하고 있던 찰나였다.


-똑똑.


누군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소설 속 마법 포식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4 EP6. 구두장이 24.04.15 10 1 9쪽
43 EP6. 구두장이 24.04.08 11 2 13쪽
42 EP6. 구두장이 24.03.21 19 2 9쪽
41 EP6. 구두장이 24.02.16 23 4 9쪽
40 EP6. 구두장이 +1 24.02.11 31 5 9쪽
39 EP6. 구두장이 24.02.06 45 7 14쪽
38 EP6. 구두장이 +2 24.02.04 46 9 9쪽
37 EP6. 구두장이 24.01.27 45 7 9쪽
36 EP5. 어차피 이 세상은 24.01.20 55 10 11쪽
35 EP5. 어차피 이 세상은 +5 24.01.16 78 13 9쪽
34 EP5. 어차피 이 세상은 +1 24.01.15 67 10 11쪽
33 EP4. Libra +3 24.01.13 85 12 12쪽
32 EP4. Libra +2 24.01.10 112 13 12쪽
31 EP4. Libra +1 24.01.08 94 12 11쪽
30 EP4. Libra 24.01.06 86 12 11쪽
29 EP4. Libra 24.01.02 90 10 13쪽
28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30 98 13 9쪽
27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28 97 8 10쪽
26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26 99 8 11쪽
25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2.21 91 11 10쪽
24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3.12.20 100 8 10쪽
23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 23.12.16 109 9 11쪽
22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 23.12.11 133 13 14쪽
21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3.12.08 123 11 12쪽
20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2 23.11.30 128 11 10쪽
19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1.25 136 10 10쪽
» EP3. 먼저 아는, 미리 아는 +1 23.11.21 145 12 11쪽
17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11.20 151 12 8쪽
16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6.30 183 12 13쪽
15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6.09 200 8 9쪽
14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5.25 196 14 10쪽
13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5.12 207 14 9쪽
12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5.05 223 16 12쪽
11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5.02 228 18 10쪽
10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27 250 19 10쪽
9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25 244 15 9쪽
8 EP2. 하얀 말, 검은 말 +3 23.04.20 267 16 12쪽
7 EP2. 하얀 말, 검은 말 +4 23.04.19 281 15 18쪽
6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4.18 337 20 14쪽
5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17 372 19 10쪽
4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4.14 429 25 11쪽
3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13 607 23 15쪽
2 EP1. 은사 +6 23.04.12 1,022 29 19쪽
1 EP1. 은사 +2 23.04.12 1,501 46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