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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마법 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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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후
작품등록일 :
2023.01.2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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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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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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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EP1. 은사

DUMMY

그러니까, 권선징악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모든 옛말처럼 딱 절반만 현실적이었다.


현실 사회란 착하게 살 것을 종용하지만 못되게 산다고 벌 받지는 않는 곳이니까. 모자란 식견에 감히 문자를 쓰자니 부끄럽긴 한데, 사실이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48세 박 부장은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자질구레하게 그의 인격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셈은 아니다. 요점은 내가 박 부장이 20년 넘게 한 회사에 몸 바쳐 따낸 부장 명함을 존중했다는 것이니까.


그 존중의 의미로 회식 자리에서 걸그룹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보라는 말에도 웃으며 따랐다. 자기 멍청한 딸내미 과외 좀 싸게 해달라는 말에는 돈 같은 걸 어떻게 받겠느냐며 아부도 떨어줬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덜 빌어먹는 삶. 그것을 20년 후 저 자리에 앉았을 나도 누리기 위해 그렇게 했다. 박 부장이라는 인간이 아닌, 그 인간이 가진 명함을 존중했기에.


그 밑에서 시달리느라 권위주의에 감화된 강 과장, 이 대리, 차 차장은 특히나 개 같았지만 그들 역시 존중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나 역시 빌어먹음의 굴레에 갇혀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한 나머지, 그들을 존중하는 것 이상의 처세를, 그 밖에는 내 나약한 정신머리를 지켜낼 방법을 떠올려낼 수 없었으니까.


대충 그랬다.


회삿돈 197억이 박 부장과 그 주변인 개인 계좌에 흘러 들어갔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 날 나는 박 부장 자리에 쳐들어가 어떻게 된 거냐고 정중히 물었다. 복수심이나 공명심, 개인의 정의 따위를 과시하려는 셈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여쭈듯 따졌다.


물론 박 부장이 무릎 꿇고 내 발에 매달려 사정하는 장면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세상이 다 제 발밑인 마냥 활개치던 그의 추락에 내심 쾌감을 느낀 것도 일단 사실이기는 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땠던가?

내가 바랐던 장면은 정말이지 한 조각도 펼쳐지지 않았다.


박 부장 그 인간은 대단히 간단한 방식으로 내 기대를 배신했다. 이와 같은 상황, 이와 같은 대화와 질문이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듯 담담하게 한 마디 툭 지껄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네 차 바꿀 때 되지 않았나?’


이야, 세상만사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그 한 마디에 내 모든 의문이 해결되었다.


감시도 회계도 전문이 아닌, 일개 사원이 어쩌다가 우연히 알아낸 횡령. 눈 가리고 아옹하는 수준의 유령 법인. 그러고 보니 우리 부서 사람들 차가 전부 고급 외제차였던가? 그 차들의 가격대와 차장, 과장, 대리의 월급이 각각 머리를 스쳤다.


그다음에는 내 순수함이 너무나도 쪽팔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었다. 원래부터 빌어먹었고, 그래서 거기 사는 나도 빌어먹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의미를 그때까지도 몰랐던 나 자신이 참 부끄럽고도 한심해서,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을 배신감이라고 정의하기에는 생략되는 의미가 지나치게 많을 테다. 하지만 굳이 떠벌리는 것도 재미있진 않을 일이라 배신감이라고 줄여 말하도록 하겠다.


다만 하나. 꼭 하나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내가 느낀 배신감은 그가 벌인 범죄 행위나 그에 연루된 상사들에게 느낀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정말로 배신당했다고 느낀 지점은 박 부장이 혼자서만 빌어먹음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부분이었고, 그 해탈은 그가 징역을 살고 나온 다음에도 계승되리라는 점이었다.


그 비현실적인 현실이야말로 나한테는 진정 배신이었다.


“그래, 거 참 개 같은 새끼였구만?”

“사람 같은 개새끼라고 하는 게 맞잖겠습니까?”

“하하.”


소리만 내고 진짜로 웃진 않았다.


“짐승의 영성에 관한 토론이 하고 싶다면 전공은 아니라고 답해주지. 장기자랑 하는 와중에도 불타오르는 학구열을 주체하기 어렵다면, 흔쾌히 응해주도록 하겠지만.”


이 키치한 장면을 장기자랑이란 말로 퉁 치다니. 가히 절망스러운 유머 감각인데, 그렇다고 또 대체할 말이 떠오르진 않아서 두 배로 절망스러웠다. 내 유머 감각도 이 수준이란 뜻 아닌가?


“···뭐, 그런 건 아닌 모양이군.”

“예, 뭐. 말씀대로 장기자랑 하는 중이라.”

“이야기는 들을 만했으니 다른 것도 있으면 계속해보시게. 지루한 작업이 덜 지루해져서 좋던걸.”


피차 심심한 터기는 해서 뭐라도 주절거리려다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내장에 조각공예 하는 사람한테 인생 철학 나불대는 건 커먼 센스에 위배 되는 행위 같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은 딱히 제정신을 붙잡아 두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간이나 허파 따위의 내장에는 통각을 느끼는 기능이 탑재되어있지 않았으니까. 말하자면 일종의 쉬는 시간이었다.


“생각나면 계속하죠. 그보다 언제 끝난답니까, 이거?”

“곧. 거의 다 끝났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었다.


“그거 어렸을 때 친가 내려가면서도 들은 말인데. 아마 만남의 광장도 안 지났을 때 들은 말이니까. 어디 보자, 이제 한─”

“시끄러워. 그러면 다 늙어서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인 몸뚱어리로 마도에 입문하는 게 쉬울 줄 알았나?”

“언제는 청춘이라더니?”

“···그런 모순을 견디는 게 바로 마도지.”


그렇다고 하신다.


“애초에 회로 각인은 유소년기에 끝내는 작업이다. 다른 놈들은 전신에 새겨넣지도 않지. 기껏해야 장기 한두 개나 팔 한 짝에서 끝나는 게 보통이고. 그런 상식쯤이야 당연히 알겠지마는.”

“예, 뭐.”


당연히 모른다. 나는 마법을 아는 게 아니라, 마법이 있는 세계관의 소설을 아는 거다. 소설에 적혀있지 않은 건 모른다.


“몸에 마법진을 새기는 게 아니라, 몸 자체를 마법진으로 바꾸는 개념이라는 거다. 19세기에 등장한 개념임에도 마력 가소성이 지나치게 떨어져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쯧.”

“말이 길어지니까 변명하는 것 같아서 쪽팔리셨습니까?”

“눈치는 빠른데 입이 싸서 문제군.”

“영양가 있어서 좋은데 계속해보시지 그럽니까?”

“버르장머리 없는 놈.”


내게 스승─, 이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을 거듭 요구하던 천진효는 불평하면서도 이것저것 마법적인 강의를 주절거렸지만, 딱히 머리에 남지는 않았다.


본인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교수가 대개 그렇듯, 그 양반 역시 딱히 좋은 교사는 아니었던 까닭이다.


강의 평가를 할 수 있다면 F-를 줬을 텐데. 치과 의자에 사지를 결박당한 채 내장까지 까발린 나는 잠자코 그 형편없는 강의를 수강하는 수밖에 없었더랬다.


참 유쾌한 시간이었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 대신 뼈를 깎았다는 말인데···.”


나는 내 뼛가루가 스민 치과용 유닛 체어를 쓰다듬었다. 내 스승이 내 시술을 위해 일부러 공수해다 놓은 것. 처음에는 미관상 어울리지 않아 치울까도 싶었지만, 결국에는 치우지 않은 채였다. 그러기에는 추억이 너무 많이 쌓였다.


실용성도 있었고.


“혹시 재미없었나?”


그 실용성을 방증하고 있는 늑대인간이 으르렁거렸다.


“······미쳤군.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정신 나간 소리야. 너는 그냥 순수하게 대가리가 돌아버린 미친놈이다.”


그런데 내 절절한 소설 세계 표류기를 듣고도 지껄이는 감상이 욕지기라니. 잠깐 서운하긴 했지만, 정말로 잠깐만 서운하고 말았다.


사람은 태생부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고, 따라서 언어를 통해 상호 이해의 격차를 좁히는 식으로 발전해왔다. 언어가 다른 개와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나는 조금 더 알아듣기 쉽게 내 서운함을 어필해주기로 했다.


“내가 그 양반한테 미친 소리 좀 그만하라 했을 적에는 ‘광기의 정의와 그 경계에 대해 논해볼까?’ 하던데. 나도 그래야 하나?”

“미친놈.”


실패했다. 역시 개새끼한테는 사람 말이 안 통하는 모양이다.


“도저히 말이 통하질 않는군. 너는 네가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너는 네 스승처럼 그냥 정신이 나갔을 뿐이다. 선량한 시민 하나 납치해서 감금하고 괴롭히는 미친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부분까지는 나도 똑같이 생각하지만, 그 뒤는 도저히 고개를 끄덕여주기 어려웠다. ‘선량한 시민.’ 나는 기다란 개 주둥아리가 나불대는 소리를 세 번쯤 곱씹은 다음 물었다.


“그쪽이?”

“그래, 내가.”


녀석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나는 달이 찬 밤마다 지하에 틀어박혀 내 몸을 사슬로 묶었다. 누굴 해치지도 않았고, 너희 좆같은 요술쟁이하고도 엮이질 않았어. 너희 개새끼들이 어떤 족속인지 잘 알았으니까!”

“아, 그다음에는 ‘어릴 때 마법사한테 납치당해서 웬 개한테 물렸더니 늑대인간이 됐다!’는 주장을 하려고?”

“그게 사실이다!”


어디서 개가 짖었다. 무고한 늑대인간이라니, 마법사한테 납치당해 늑대인간이 되었다고? 자의로 상실한 순결의 변명으로 자전거를 드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던데, 딱 그 짝이었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은 아니고 원작에 적혀있던 서술이다. 나는 충분히 그런 무고하고도 불쌍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도 그럴 게 소설도 현실이 되는 세상이었으니까.


다만 그런 만큼이다. 무고하지 않은 녀석들에겐 관대할 이유가 없었고, 적어도 지금 내 눈앞에서 짖어대는 녀석은 그리 동정받아 마땅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녀석은 제 입으로 떠드는 바와는 달리 요술쟁이였으므로.


“사실은, 그쪽이 3권에 등장하는 일회용 악역이라는 게 사실이고.”

“···뭐?”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지만, 정말로 어이없었던 건 이 녀석이 소설에 등장했을 때 그걸 읽던 나였다.


아무런 복선도, 예고도, 연계되는 에피소드조차 없는, 정말 딱 분량 채우기만을 위한 엑스트라라니. 분서갱유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는 생각까지 했었더랬지. 그때 심경은 정말로 책을 불태우고 작가를 묻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신물 나는 매너리즘의 산물이었지. 판타지나 무협 소설로 치면 여행길에 산적이 나타나는 수준의 아무런 영양가 없는 에피소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에 그런 쓰레기 전개가 나오는 게 너무 싫었어.”

“하, 어처구니가, 아니. 그놈의 소설 이야기를 아직도 하고 자빠졌군. 정신 차려라. 네 좆같은 망상도 더는 못 들어주겠으니까!”

“망상이 아니라 사실이야. 이게 사실이고, 이것만이 사실이지.”

“나까지 돌아버리겠군. 내가 네 망상 속 소설에서, 그저 눈에 거슬린 게 잘못이라고? 그딴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물론 사회 통념적으로는 더 커다란 잘못을 많이 했지.


소설에서 소개하기로서니 이 녀석은 영아납치네 살인 따위를 수차례 저지른 흉악범이었고, 마력범죄자였다. 그런데 참 뻔뻔하게도 그 사실을 내게 숨겨가며 다시금 짐승의 혓바닥을 놀렸다.


“······후, 잘 생각해라. 현실을 봐. 나한테 이래서 너한테 득이 될 게 뭐가 있는지. 당연히 하나도 없을 거다. 네 말마따나 내가 그런-, 무슨 엄청난 죄인이라 한들, 나한테 이래 봤자 결국 너만 손해라는 말이다.”


손해라니.


“내가 왜?”

“천진효를 들먹이더니 그런 것도 모르나? 늑대와 박쥐는 성당에서 가장 엄격하게 관리하는 부류다. 내일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조사가 시작되겠지. 너 같은 풋내기가 그 괴물놈들 추격에서 단 하루라도 버틸 것 같나? 착각이다, 절대로 불가능해!”

“그런데?”

“지금까지 뭘 들은 거냐? 네가 배운 건 천진효의 마법이겠지, 내 흔적을 쫓아올 놈들이 그 유명한 마녀의 마력흔을 놓칠 리가 없다. 너도 마녀로 지정당해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힐 거란 소리다!”


세계관의 상식으로 따져보면 정론이기는 했다.


총의 강선흔처럼 마법과 이능도 사용된 자리에 마력흔을 남긴다. 그 흔적이야말로 마법사들이 마탑의, 그 밖의 사이한 것들이 성당의 관리를 받아 음지에 갇힌 이유였다.


그러한 관리와 위장 공작 덕분에 이 소설 세계는 표면적으로는 내가 알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양새로 유지되고 있었고.


그 목줄이 조금도 헐겁지 않은 까닭에 ‘일단은’ 서로 조심하며 건드리지 않는 풍조가 유행 중인 것이다.


그렇기는 한데.


녀석이 방금 나더러 ‘지금까지 뭘 들은 거냐’고 했던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분명 거기에 ‘그런데?’라고 답했다. 그 말은 곧 ‘위의 상식을 모두 인지하고 있긴 한데, 그래서 그게 뭐?’라는 소리다.


녀석은 그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제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던 녀석이 진정할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가, 개과 짐승의 IQ로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어, 몰라.”

“그딴 것도 모르는 놈이!”


너무 간략했던 모양이다. 워-, 워 짐승을 다루듯 진정시키고 얼른 이어붙였다.


“내가 아니라 성당 놈들이 모를 거라고.”

“개소리다. 마력흔을 조작해? 그딴 짓거리는 네 스승 새끼도 못 했어!”


했다.


녀석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엑스트라답게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내 스승이 할 수 있었던 연유로 나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정정해주는 대신 사실만을 읊었다.


“그럴지도. 그런데 그 양반은 마력흔 때문에 간 게 아니야.”

“?”

“내 스승 천진효가 성당 기사단한테 습격당한 건, 익명의 정의로운 시민이 사악한 마녀의 소재지를 제보해서거든.”


녀석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설마 싶은 일은 대부분 사실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나는 조금 유쾌해진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그 양반은 시한폭탄이었거든. 어쩔 수 없었지.”


그것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제멋대로 폭주해서, 이 세상에 포맷 버튼을 누를 법한 핵탄두. 천진효는 신관을 뽑아두지 않으면 도저히 밤에 발 뻗고 잠들 수 없을 수준의 위험천만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뽑았다.


제자가 스승 뒤통수 후려갈기는 게 천하에 다시 없을 패륜이긴 하겠지만, 그걸 그대로 둬서 60억 인구 다 사라지게 만드는 것보단 훨씬 나았을 테니까. 간단한 공리주의다.


“그냥 미친놈인 줄 알았더니 천인공노할 쓰레기였군. 빌어먹을 패륜아 새끼, 도대체 그 대가리에 뭐가 들어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스승의 마법은 다른 마법을 잡아먹는다. 요컨대 포식이지.”


끝까지 들어줘도 별로 영양가는 없을 것 같아서 중간에 끊고 중요한 부분만 말했는데, 아무래도 꽤나 충격적인 발언이었는지 녀석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마법사에게 마법은 영혼과 같아서 그것을 전수할 상대 외에는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는다. 또 사람에게 영혼은 마법과 같아서, 하나의 육신에 하나만 깃들일 수 있다.


과연 이 늑대인간이 어디까지 이해하고 충격을 받았을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앞의 절반 정도만 간신히 이해한 듯했다. 내 말의 내용 따위는 애초부터 듣고 있지도 않았거나.


“너─, 설마. 아니다. 아무리 돌았어도 그건, 마법사 주제에 마법을 밝힌다는 건,”


마법사는 제자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스스로 마법의 진의를 밝히지 않는다. 간단한 언어 유희다. 더 이상 누군가를 자칭할 수 없게 될 이에게는 충분히 밝힐 수 있다.


거기까진 전달된 모양이라 안심했다.


“뭐, 그럼 혹시 내가 정말로 정의로운 미친놈이라 그쪽 납치한 줄 알았어? 혓바닥 좀 놀려서 설득하면 무사히 집에 보내줬을까 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그래서 웃으며 말을 맺었다.


“아니야. 그쪽 마법이 나한테 쓸모가 있어서지.”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경악하는 척하던 녀석의 낯짝에 이채가 떠올랐다. 지금껏 살려달라 울부짖던 간절함이 가라앉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채워졌다. 마법사다운 교활함.


마력이 요동친다. 녀석은 뒤가 없다고 확신하자마자 은제 사슬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던 늑대인간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곧장 ‘좆같은 요술쟁이’의 본색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곱게 보내줄 셈은 없었단 거군?”


분위기가 일변했다.


방금까지 처절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대체 왜 이러는 거냐며 억울함을 성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녀석은 아무 색도 묻어나지 않는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백진우, 마녀 수배를 피하고자 늑대의 피를 수혈해 신분을 세탁한 변종. 철저하게 마법과는 담을 쌓은 채 등잔 밑에 숨어 살던 마녀는, 본색을 드러낸 뒤에는 한숨이라도 내쉬듯 이리 지껄였다.


“덜미 잡힐 짓은 하고 싶지 않았건만.”


짐승의 몸뚱어리에 종족 특유의 잿빛 마력광이 휘감긴다.


“···유감이다.”


짐승의 주둥이가 흉내조차 못 낼 속도로 주언을 읊는다. 주문 한 소절에 공명하는 마력의 양만 봐도 위협적이다. 인간을 포기하면서 상당한 마법을 소실했을 텐데도 이 정도라니.


과연 마녀로 수배 씩이나 당할 법했다. 마법사로서의 수준을 논하자면 나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차이가 있었다.


녀석의 눈에는 척 보기에 마력의 양도 공방의 수준도 형편없는 내가 우습게만 보였겠지. 고작 은 사슬로 묶어놓은 걸 믿고 제멋대로 지껄여대는 꼴이 퍽 같잖기도 했을 거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을 테니까. 녀석은 그렇게 믿었기에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역시 개새끼는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법이었다.

알아들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테지만.


녀석이 담담한 살의를 담아 마력을 부리자 재색의 실들이 제멋대로 뒤엉키며 유아한 곡선을 그리며 손처럼 뭉쳤다. 그 빛의 손길이 닿자 퍼석, 하고 녀석을 묶었던 사슬이 녹슬어 저절로 깨졌다.


“씁, 그거 비싼 건데.”

“그 주둥이는 죽어야만 닥칠 모양이군.”

“거야 죽어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지.”


부패의 손길. 말마따나 닿은 것을 부패시키는 마법. 금속조차 한순간에 부식시키는바, 사람 몸 따위는 순식간에 한 줌 흙으로 만들 것이 분명한 회색빛 손길은 사슬을 부수기 무섭게 방향을 바꿨다.


“바라지 않아도 곧 그리될 거다.”


아무런 감흥도 묻어나지 않는 선언. 마법 사용자로서의 우열이 지나치게 명백한 나머지, 녀석은 한 치의 의심도 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곧 녀석이 선언한 대로 회색빛 손아귀가 나를 향해 뻗어왔다.


저항이고 자시고, 반응은커녕 인지하는 것조차도 벅찬 속도다. 이것이야말로 수준 차이라고 과시하듯, 스치기만 해도 뼈도 못 추릴 저 끔찍한 빛을 내뿜는 마력의 집결체는─,


잘 날아오다 말고 옆에 열어둔 트렁크 안으로 슉 빨려 들어갔다.


흠잡을 구석 하나 없는 클린 슛.


구경하는 입장에선 박수라도 쳐주고 싶을 정도였지만, 녀석은 마치 무선이어폰을 하수구에 빠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꼴을 멍청하게 쳐다보더니 이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대체-”


나는 말을 지껄이는 대신 잿빛 마력이 소용돌이치는 손아귀를 뻗어주었다. 어릴 적에 강아지를 키웠던 입장에서 강아지 인간의 겁먹은 눈망울을 보는 것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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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5.25 196 14 10쪽
13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5.12 207 14 9쪽
12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5.05 223 16 12쪽
11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5.02 227 18 10쪽
10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27 249 19 10쪽
9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25 244 15 9쪽
8 EP2. 하얀 말, 검은 말 +3 23.04.20 267 16 12쪽
7 EP2. 하얀 말, 검은 말 +4 23.04.19 281 15 18쪽
6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4.18 337 20 14쪽
5 EP2. 하얀 말, 검은 말 +1 23.04.17 372 19 10쪽
4 EP2. 하얀 말, 검은 말 23.04.14 429 25 11쪽
3 EP2. 하얀 말, 검은 말 +2 23.04.13 607 23 15쪽
» EP1. 은사 +6 23.04.12 1,022 29 19쪽
1 EP1. 은사 +2 23.04.12 1,501 46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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