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회귀남녀

결혼 후 愛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완결

이설理雪
작품등록일 :
2012.05.02 22:52
최근연재일 :
2012.05.02 22:5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90,682
추천수 :
869
글자수 :
318,861

작성
12.04.02 11:55
조회
1,756
추천
17
글자
28쪽

35.그는 열애 중

DUMMY

35.그는 열애 중


10월 24일 월요일 오전 8시.

결혼반지와 긴팔 흰색 셔츠에 회색 바탕 체크무늬 넥타이, 대기 중인 은색 넥타이핀, 밝은 회색 바지까지. 출근 준비를 마친 준은, 혜리가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손길로 넥타이 매듭을 안정적으로 매어주는 걸, 기분 좋은 얼굴로 기다렸다. 마무리로 넥타이핀으로 고정까지 시켜준 뒤 어깨를 탁탁 두 번 털어주며 빙그레 웃는 혜리.

준은 혜리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기며 똑같이 빙그레 웃었다.

“끝!”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 걸? 오늘 뭐할 거야?”

“저번 주를 중심으로 남천초등학교 그림과 사진을 모두 바꾸는 게 끝났어요. 11월에 축제하는데 4, 5, 6학년들의 전시품을 복도에 걸 예정이래요. 이미 걸려 있는 그림과 사진 등의 분위기와 맞춰서 걸어야 하니까, 그거 좀 봐달라는 연락이 있었어요. 갤러리도 한 차례 폭풍은 지나간 거 같아서 남천초 갔다 오려고요.”

“갔다가 집에 바로 올 거야?”

“초등학교라서 건물이 상당히 크고 넓어요. 기내식당도 구비하고 있고. 다 훑어보고 나서 시간 보고 나서 괜찮을지 어떨지 전화 한 번 해볼게요.”

“우리는 시험 끝나서 야자가 부활했어. 담임이라서 빼는 게 쉽지가 않아. 지훈이한테 부탁은 해볼 건데 그 녀석, 요즘 가현 씨랑 부쩍 잘 되는 모양이더라고. 부장 쌤한테 말씀 드려서 특별히 오늘만 빼달라고 얘기해도 되고. 갔다 올게. 몸조심하고.”

“다녀오세요. 이따 봐요.”

“응!”

웃으며 답한 준은 달력만 슬쩍 보고는 방을 나선 뒤 문을 닫고,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고 코에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6월 5일 일요일 저녁에 처음 봤으니까, 그 날부터 따지면 오늘이, ……142일째인가. 자, 그럼 200일이 언제지? 책상 달력으로 200일 계산을 해봐야겠다.’

오랜만에 차를 끌고 출근한 준은 교무실에 오자마자 달력부터 보며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계산에 바쁘다.

‘흠. 우리 200일은 12월 21일 수요일. 병원을 가서 얼마나 컸는지 정확히 봐야 알겠지만 일단 그 때쯤이면 4개월은 됐겠지? 아직 배는 안 나올 때고. 그 날 뭐할 지는 그 때 가서 생각하고 일단 달력에 표기부터 해야겠다.’

빨간 색 연필로 12월 21일 수요일에 크게 동그라미부터 치고 별표도 추가, 200일이라고 적기까지 하는 준. 어머니 생신은 내년 5월에 아버지 생신은 엊그제 치렀고. 난 내년 4월 1일이니 좀 있어야 하고. 그럼 당장 급한 건 200일이랑, 어?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깔끔하게 씻어서 반짝반짝한 결혼반지를 낀 왼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준은 오른손으로 달력을 다시 앞으로 넘겼다. 10월로 돌아오는 달력, 27일에 절친 생일이라고 적혀 있다. 오는 목요일이 지훈이 생일이다.

‘흠. 가현 씨 있으니까 이 녀석 생일은 따로 안 챙겨도 되겠지?’

“내 생일 보고 있냐?”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친구 어깨에 손까지 얹은 그는 절친이자 체육 교사인 윤 쌤 지훈이다.

“응, 왔어? 이번에 네 생일 챙겨야 해?”

“!!”

우두커니 서서 친구의 말을 듣던 지훈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입도 빠르게 벌어졌다. 친구를 올려다보던 준까지 놀랐다. 가현 씨랑 데이트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건만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을 줄은 몰랐다. 괜히 미안하다.

“왜. 나랑 노는 것보다는 가현 씨랑 노는 게 재밌잖아.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건데 상처 받은 거야? 많이 받은 거야?”

“응! 나 많이 받았어. 너 절친 맞아? 어떻게 저 결혼하고 나 애인 있다고 절친 생일을 챙겨야 하냐고 묻냐? 너 정말 너무하는 거 아냐?”

“하하. 미안하다. 그럼 생일 선물 기억해놓든가.”

“몰라!”

“풀어라. 나 지금 신부가 임신한 거 같단 말이야. 오늘 야자도 너나 다른 쌤한테 맡기고서 같이 병원 가봐야 해.”

토라진 척 자기 자리에 털썩 앉던 지훈이 상체만 준 쪽으로 쭉 뺐다.

“정말이야? 와우! 축하한다! 얼마나 됐는데? 허니문베이비야?”

“짐작으로는 허니문베이비야. 이따 병원 가서 진료 확실히 받아봐야지. 임신했다는 걸 토요일에 알았어. 그래서 오늘이 가장 빨리 가는 날이야. 어때, 봐줄 수 있겠어?”

“……. 그래, 알았어. 그런 일이라면 내가 하루 정도 봐줘야지. 가현 씨는 학교로 불러야겠다. 부장 쌤한테 얘기해.”

“알았어. 역시 너밖에 없다, 지훈아.”

“생일 선물 거하게 한 턱 쏴라?”

“쿡! 그래, 알았다.”

친구와 눈을 맞춘 채로 웃으며 회답하는 준이 이윽고 수업 준비에 들어가는데, 교무실에 막 들어선 지연은 그 대화를 다 들었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다가왔다.

“아이 가졌어?”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오빠! 말이 안 되잖아,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아이를 벌써 가져? 말도 안 돼.”

“하지연 선생님.”

“오빠!”

“떠나는 버스 저 멀리 가는데 손짓으로 부른다고 그 버스가 서나? 지하철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상황이라면 택시도 떠나가 버리지. 왜? 손님이 하지연 선생님, 하나만 있는 건 아니거든. 어쩌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늘 늦는 거라고 하니 말이야.”

매정하니 뿌리친 준은 여전히 그녀는 보지도 않고 자기 일만 묵묵히 한다. 잠시 후 부장 직을 맡고 있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부장 선생님, 잠깐만요. 죄송한데 오늘 야자, 윤 선생한테 맡기고 일찍 퇴근해도 될까요?”

“일 있습니까, 최 선생님?”

“신부랑 같이 산부인과에 가야 합니다. 아내가 임신 한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그리 하세요. 야자는 내가 대신 들어가도록 하지. 임신 축하한다는 말 대신 좀 전해주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부장으로부터 흔쾌히 답을 얻은 준은 됐다는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허락 받았어! 우리 반은 부장 쌤이 대신 들어가 주신대.”

“그래? 다행이다. 어, 혜리 씨 오늘 일정은?”

“김 쌤 계시는 남천초 갈 예정이래. 학교 축제한다네? 그래서 복도에 애들 작품 진열할 자리를 같이 봐달라는 연락이 왔대.”

“안 그래도 그림과 사진은 다 교체했다는 소식은 가현 씨한테 들었어. 첩첩산중이라더니 이제는 학교 축제……우리도 하구나.”

“쿡! 참 빠르다, 윤 선생. 이제 슬슬 축제 일정을 잡겠지. 하는 건 애들 몫이고.”

준의 말에 지훈은 앉은 그 상태로 몸을 가볍게 풀었다. 슬슬 수업 준비에 들어가는 그다. 봄가을만큼 밖에서 수업하기 좋은 날씨도 없다. 한편 지연은 홀로 화장실로 왔다.

“아악, 짜증 나!!”

비명을 있는 대로 내지른 지연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확 구겼다.

“어떻게 결혼하고 석 달 만에 아이를 가질 수가 있어? 있을 수 없는 말이야. 착각이야. 착각일 거야. 착각이어야만 해. 기다린다고 했는데. 기다릴 수 있는데. 세상에, 어떻게. 어떻게 아이를 만들 수가 있어?”

‘낙태하라고 협박할까? 아니면 나도 배란일 체크해서 유혹할까? 이대로 뺏길 수만은 없는데. 배혜리 씨!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이 가졌다 이거지? 어쩌지? 이젠, 더는 그냥 있지 못 하겠어.’

“그런데 너. 하지연 너. 너한테 완벽하게 죄 없다고, 말 할 수 있어? 무려 7년 세월을 무용지물로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하지연 너니까! 오빠가 아니니까. 나니까!!”

거울 너머로 보이는 자신을 향해 소리를 꽥 지른 그녀는 잘근잘근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용서가 안 됐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이. 그래. 후회한다. 뼈저리게. 거만했고 건방졌다. 기만이기도 했다. 자신만을 봤던 남자니까 충분히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스스로가 너무 미웠다. 왜 청혼을 거절했는지 자신에게 수 백 번을 물어도 마음은 답이 없다.

백그라운드 화려하지 직업 탄탄하지 외모 짱짱하지 여러모로 탐이 나는 남자인데. 어울리지 않는 그 따위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결혼하고 아이까지 가지다니.

모든 게 자신의 몫이었다. 청혼만 받아들이면 그랬을 터! 예정된 거였는데. 그런데. 정신이 나갔었나보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다. 그 순간 미쳤었나보다. 그러니. 대담하게도 스스로를 용서 못 할 짓을 했지. 자멸의 구덩이를 스스로 팠지. 그보다 나을 남자 능히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직업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갤러리 따위 개나 주라는 식으로 그랬다.

찼다. 버렸다. 누가? 다름 아닌 내가! 군대 2년도 멀쩡히 기다려놓고. 그의 순결도 자신의 순결도 지킨 걸로도 모자라 한순간의, 명확한 Judgment miss! 즉 판단 착오로 그를 보낸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죄다. 청혼 거절이라는 망언을 내뱉은 입술의 죄다. 입의 죄다! 지연은 스스로를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정신 차리고 교무실로 돌아온 지연은 실에 이끌리듯 준의 책상으로 향했다. 제일 먼저 달력이 보였다. 10월에 있어야 할 달력은 어느새 6월까지 되돌아가 있다. 바로 옆에 볼펜이 있는 걸로 봐서는 직접 표시를 하다가 자리를 비운 듯싶다.

“이게…뭐야?”

달력 이곳저곳에 적색으로 채워진 하트와 함께 이런 저런 문자가 난무한다. 눈으로 하나하나 세세히 보는 지연.


6월 5일, 감격의 첫 만남! 13일 화요일, 청혼한 날 & 차 안에서 첫 키스한 날. 21일 화요일, 사직구장에서 키스한 날. 22일 수요일, 처음으로 내 순결을 그녀에게 바친 날. 24일 금요일 첫 선물로 넥타이핀 받은 날.


다음 장으로 넘기는 지연의 얼굴은 경악과 충격으로 물들어 있다.


7월 7일 목요일, 견우직녀의 칠월칠석 두 번째의 Water sex. 수시로 키스로 그녀의 입안을 맛본 날은 너무 많아서 통과. 8월 5일 금요일, 사랑하는 신부와의 백년가약을 맺은 날. 그리고 Honeymoon Sex. 신혼여행 마지막 날, Last Sex. 15일 월요일 광복절. 블루원에 규칙 새로 만들 뻔하다. 조항은? 키스 금지. 어? 14일 기념일 그린&뮤직데이를 그냥 넘겼구나! 쳇.

16일 화요일, 처음으로 놀이공원 간 날. 대구의 이월드. 18일 목요일 부산 미월드 간 날. 20일 토요일, 통도환타지아에 간 날. 17일 수요일, 양장피와 와인의 절묘한 관계. 19일 금요일, 목걸이사준 날.

9월 5일 우리 신부 탄생일! 팔찌를 손목에 채워주고 발찌를 왼쪽 발목에 채워준 날. 발찌를 선물하면 영원히 행복할 거라는 속설이 있던데, 헤헤헤헤헤! 12일 월요일, 100일! 14일 수요일, 귀걸이 사준 거 착용하고 같이 Couplephoto 찍은 날. 20일 화요일, 신부가 처음으로 운전대 잡다가 아버지 차 범퍼 긁은 날!! 다행히 그냥 껄껄껄 웃으면서 넘어가주셨다, 감사합니다!

……12월 21일 수요일, 200일!


달력의 날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한 기념일들을 보며 그녀는 “허!”, 기막히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잠시, 그녀의 정신은 기억 속에 간직한 첫 기념일을 회상했다.

‘내일이 무슨 날인 지 알아요?’

‘무슨 날인데?’

‘몰라요? 우리 100일이잖아요. 진짜 너무한다. 100일도 모르고 있고!’

‘그랬어? 몰랐어, 챙기면 되지.’

7년 남짓 사귀는 동안 그녀에게 제대로 박힌 최 준의 기막힌 단점 중 하나가 바로 <기념일에 무심한 남자> 라는 거였다. 노래 못 부르는 건 넘어갈 수 있어도 기념일 챙겨주지 않는 건 정말이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여자인 지연에겐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상처였다. 중간 중간 ‘내가 이런 남자 꼭 만나야 하나?’ 싶기도 했었다. 생일도 전날 한 번 더 언급해야 하고 100일부터 200일 300일에 1년 2년 3년 4년째 되던 기념일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지연의 몫이었다.

고스란히 저 혼자 달력 봐가며 날짜 계산을 해야 했었다. 학교 공부에 아르바이트로도 충분히 바쁜데 그것까지 해야 했던 거다. 그렇게 알아내어 전 날 말하거나 며칠 전 말해줘야만 겨우 이벤트가 있거나, 또는 키스하거나 포옹이거나, 선물 받거나가 전부였다.

그런데.

헌데.

100일과 200일을 직접 챙기는 걸 봐버렸다. 9월에는 5일에 표기가 되어있다. 무려, 우리 신부 탄생일! 6년 넘게 만난 여자는 생일도 모르고 지나칠 뻔 했던 적 한 두 번이 아니면서,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한 여자의 생일은 며칠 전부터 챙기다니. 기념일로 빼곡한 달력을 헤어진 후에야 보게 되다니. 그것도 다른 여자와의.

머릿속에서는 뭐가 쿵하며 떨어졌고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불기운이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모두 챙겨야 했던 걸 오히려 이 남자가 챙기고 있는 현장을 똑똑히 보고 만 지연은 침을 삼키며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이젠 정말……정리해야 하나?’

이렇게까지 변한 건. 내가 아닌 당신에게 뭔가 있다는 얘기겠지. 그래요. 아이까지 가진 마당에 더 나가는 건 구차하네요. 혼자 찌질하게 구는 건 나도 원하지 않아요. 떠나는 버스 손을 흔들어봐야 제대로 세워주지도 않으니 말이에요. 알았어요. 정리해줄게요. 나만 그리 하면 되니깐. 딱 하나, 딱 하나만 시험해보고요.


오전 11시. 혜리는 가현과의 약속대로 남천초로 왔다. 7대3 가르마를 내고서 7은 위쪽 머리카락을 예쁘게 땋았고, 흰색 블라우스와 같은 색의 재킷, 흑색 핫팬츠와 흑색 스타킹 등 흑백으로 조화를 주기 위해,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검정색을 입게 된 그녀다. 적당히 굽 있는 구두와 작은 손가방, 오른손의 손목시계와 왼손의 팔찌 그리고 결혼반지 등, 그냥 척 봐서는 어디 파티라도 가는 분위기다.

가지런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는 물론 기품도 사뭇 흐른다.

경비실에 얘기해서 허락 받고 학교 교정으로 들어가는 혜리. 한 5일만의 재방문인데 경비실 아저씨도 이제는 혜리 얼굴을 익히 알고 방문을 흔쾌히 허락했다. 교무실로 간 혜리는 때마침 쉬는 시간이라 막 돌아온 가현과 재회했다. 혜리의 호리호리하고 훤칠한 뒷모습 하나만으로도 그녀라는 것을 한 번에 척 알아본 가현이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왔어요? 잘 지냈어요, 혜리 씨?”

“네, 잘 지냈어요. 가현 씨도 건강해보이네요. 애들 작품은 어디 있어요?”

“한참 제작 중이에요. 완성된 건 아직 하나도 없어요. 일단 어디에 뭘 걸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받고 싶어서 부른 거예요.”

“흠. 안 보고 하면 의미가 없는 거 같은데요.”

“그런가요?”

아쉽다는 표정의 가현이 대꾸함과 동시에 천천히 고개를 갸웃댔다. 마음이 급해서 너무 서둘렀다는 느낌이 이제야 오는 가현이다.

“작품은 어떤 게 만들어 지고 있어요? 일단 그거부터 보지요.”

“네! 제가 다음 수업이 없으니까 같이 봐드릴 수 있어요. 일단 차 한 잔 드릴게요. 녹차 커피 율무차, 무엇으로 드릴까요, 혜리 씨?”

“율무차로 주세요, 가현 씨.”

“알았어요.”

카페인은 적이다! 뱃속에 2세가 크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조심해야 한다. 그녀의 모든 건 2세를 먼저 생각해야 할 때이다. 잠시 후 율무차를 손에 든 혜리는 가현과 함께 교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학교 내 구석 구석 건물을 제대로 돌아보는 기회를 얻은 혜리는, 중간 중간 수업 때문에 옆을 비우는 가현을 두고, 레인보우갤러리에서 싹쓸이를 해간 그림과 사진 액자들을 홀로 살펴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초등학교라서 중, 고등학교만큼 늦게까지 하지 않으니 오후 4시쯤 돼서 마치고 퇴근하게 되는 다른 교사들과 가현이다. 퇴근길의 가현을 옆에 둔 혜리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말로 내뱉었다.

“일단은. 준비한 교실 앞에 그 작품을 거는 건 뭔가 좀 아닌 거 같아요. 엇갈리게 놔야만 할 거 같아요. 그래야 뭔가 있어 보이지 않을까요? 엇갈리게 진열해야 너무 성의 없어 보이지는 않을 거예요, 적어도. 그렇다고 분위기 너무 어수선해지지 않을 정도로요. 예를 들어 수묵화를 만든 교실 앞 복도에는 수묵화 대신 다른 그림이 오는 거예요. 이를테면 풍경화나 서예 같은.”

“같은 장르 아래 다른 작품이라는 건가요, 혜리 씨?”

“그렇지요! 보통 C.A.는 토요일에 있잖아요. …그럼 금요일이나 목요일에 전화를 주지 그랬어요. 엊그제가 토요일이었잖아요.”

“미안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괜찮아요. 가볼게요. 오는 토요일에 다시 올게요.”

“거듭 죄송해요, 두 번 걸음하게 해서.”

“괜찮다니까 그러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가현 씨. 저는 신랑이랑 약속이 있어서 대연고로 가야 해요.”

이번 토요일에 다시 오기로 하고 가현과 헤어진 혜리는 그대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대연고에 도착한 시간은 5시 무렵이다. 경비실에 자신의 얼굴을 비춘 혜리는 교무실로 직행한다. 수업 끝나려면 아직 멀었겠지? 준의 책상으로 바로 온 그녀는 각종 기념일에게 잠식당한 달력을 보고서 입을 쩍 벌렸다.

‘어후!! 이게 뭐야, 지금. 아니, 영문으로 섹스라고 버젓이 적혀 있는 걸 누가 보면 어쩌려고? 영어 교사라는 걸 왜 여기서 뽐내는 건데요. 신랑, 오늘 잔소리 좀 들으셔야겠어요?’

6월부터 9월까지는 말 그대로 아주 그냥 난리가 났다. 그나마 10월이 중간고사가 있어서 조금은 깨끗한 편이다. 보고 있으니 머릿속이 어질어질하다. 결혼한 거 티내는 건지 연애 분위기 제대로 내고 있는 건지, 신랑의 속내를 알 수가 없다. 같이 즐긴 날이니 그냥 머릿속에만 담아두면 될 걸 가지고 꼭 이렇게 티를 내고 싶을까. 누가 보면 결혼한 남자가 아니라 열애 중인 남자라고 착각하겠다!

‘이 양반 왜 이래, 정말?’

혼자 닭털을 있는 대로 날리고 있는 신랑의 행동에 부인인 자신마저도 닭살이 돋아서 미칠 지경이다. 턱! 닭살과 오글거림과 함께 동반하는 짜증을 견디지 못 하고 급기야 달력을 엎어버리는 혜리. 책상 왼쪽에 결혼식 사진을 보자마자 그것도 마저 앞으로 턱! 엎어버린다. 아니 결혼식 사진은 또 언제 갔고 왔대? 집 책상 위에 하도 많아서 하나쯤 사라져도 모르겠지 싶었던 모양이다. 이 남자 이렇게나 닭살이었어? 기념일 일일이 다 챙길 정도로 연애 고수였나? 그건 처음 알았다!

“어? 제수씨!”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신랑보다는 그의 절친 지훈이 먼저 혜리를 반겨주었다. 빙글 돌아선 혜리는 짜증을 숨기며 웃는 얼굴로 지훈을 맞이했다.

“어서 와요. 방과 후 병원 가는 거 때문에 학교로 왔나 봐요?”

“신랑이 얘기를 다 했나 보네요.”

혜리는 결국은 짜증을 얼굴 위로 떠올렸다. 그녀는 엎었던 달력을 들어서 지훈 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자신의 현재 감정을 모조리 토해냈다. 얼마나 닭살이 돋는지에 대해서.

“혹시 이거 보셨어요, 지훈 씨? 우리 신랑 왜 이래요? 키스는 그렇다 쳐도 섹스 한 거까지 적을 필요는 없다고 보거든요? 그냥 뒀다가는 휴대전화 산 날까지 기념일에 들어가게 생겼어요! 달력이 이 모양이 될 때까지 안 말리고 뭐 했어요, 지훈 씨는?”

“저는 수업한다고 바빴죠! 뭐, 많이 심하기는 한데, 이 녀석은 이 녀석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요, 제수씨.”

“연애 분위기 내자고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 원하지는 않았어요! 지금 제 몸에 돋은 닭살 털어서 후라이드치킨 만들어도 두 마리는 충분히 나와요.”

“글쎄, 이유가 있다니까요?”

“무슨 이유인데요?”

되묻는 혜리가 진정됐다 싶은 지훈은 빙그레 웃으며, 7월의 어느 날 준과 같이 술집에서 술 한 잔 했을 때를 떠올렸다.

“내가 여자에 대해서 너무 몰랐나 봐.”

“응? 무슨 말이냐? 여태껏 연애 잘 했던 너잖아.”

“기념일.”

“기념일?”

“응. 기념일. 의진 씨 남편 하룡 형한테 듣자하니 연인끼리 챙기는 기념일이 14일 기념일만 해도 1년에 12개더라고.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념일에 대해서 얘기를 먼저 꺼낸 사람이 내가 아니었어. 언제나 하 선생이었어. 하 선생이 짚어주고 말해주고 손전화에 기록을 해줘야 난 그 때에 가서야 분주히 기념을 챙기기에 바빴지. 이제 와서, 새삼……미안하더라.”

“…….”

“챙겨달라고 말을 하면서도, 겉으로 표현은 못 하고 얼마나 상처가 됐을까. 얼마나 속으로 앓았을까. 어쩌면 헤어지는 것에 대한 빌미는 오래 전부터 내가 꾸준히 만들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 그게 이제 쌓이고 쌓여서 청혼 거절로 드러났겠지. 하다 못 해 하 선생 생일도 그랬어. 늘 까먹기 일쑤였고 하 선생이 던지듯 생일에 대해 말해주면 아! 생일이구나. 챙겨야지. 그랬어.”

지훈으로서도 처음 듣는 얘기다. 그런 비화가 있었을 줄이야. 200일 300일 기념일을 알아서 챙기는구나 했지, 하 선생 지연이 일방적으로 계산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렇게 보면 준도 어지간히 둔하다.

“어찌 보면 실패한 연애지만 차라리 잘 됐다 싶어. 어차피 미안한 거야 청혼 단계에서 내가 일방적으로 거절당한 게 있으니 같은 거라고 넘어가지만, 혜리한테만큼은 그런 상처 주고 싶지 않아. 내가 모르는 상처를 갖고 있게 할 수는 없어. 부부가 될 거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더욱 더.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이 분의 일로 줄어들지만, 그 상처를, 그 슬픔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어. 철저하게 계산하고 치밀하게 알아서, 챙길 수 있는 기념일은 다 챙겨주고 싶어. 생일이랑 결혼기념일은 말할 것도 없고 14일 기념일도 챙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챙길 거야. 달력을 도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라고.

전 애인 지연으로 인해서, 없는 기념일까지 만들어낼 능력을 새로 갖춘 자신의 신랑에 대해, 혜리는 다시 보게 됐다. 이 많은 기념일을 일일이 주워 담지는 못 해도 중요 기념일은 자신도 기억을 해야겠다. 그래야 신랑이 닭털 날릴 준비를 하면 같이 날려줄 수 있을 테니까. 지훈에게 건넸던 달력을 받아서 잘 세운 혜리는 10월로 되돌려 놓았다.

같이 엎어진 결혼식 사진도 세우는 그녀. 이때만 기억한다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할 이때만 잘 떠올린다면, 결혼하면서 행복했던 기분을 떠올려 다시 행복하다면, 싸울 일도 없을 테니까.

“어! 언제 왔어?”

신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진을 보고 떠올린 행복과 감동을 그대로 유지하며, 혜리는 활짝 웃으며 다가가 신랑을 와락 안아주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마무리로 뺨에 뽀뽀까지 쪽! 교무실에 때마침 있던 교사들이 오글거림에 몸을 부르르르 떠는 것을 보며, 혜리는 그저 웃을 따름이다. 신랑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과 칠판 가리킬 때 쓰는 회초리를 책상 위에 대신 얹은 그녀는, 팔짱을 자연스레 끼고서 부장 선생님을 바라봤다.

“우리 신랑 퇴근해도 되요?”

“그럼요! 이렇게 예쁜 부인께서 직접 마중 나와 주셨는데 잡을 수는 없지요. 퇴근 해, 최 선생.”

“먼저 가보겠습니다!”

손을 흔들어 인사를 표한 준은 가방을 챙겨서 혜리와 함께 교무실을 나섰다. 갖고 온 자신의 차량 운전석에 오른 준은 뒷좌석에 가방을 둔 뒤 말했다.

“문정주산부인과가 남천역 근처에 있더라? 거기로 가자.”

“안 그래도 거기 가고 싶다고 하려던 참이에요. 집에서도 가깝고 괜찮을 거 같아요.”

“텔레파시가 통했네? 기분 좋다. 그리고 교무실에서 그런 스킨십을 해줄 줄은 상상도 못 했는걸? 왔으면 전화를 하지 그랬어.”

“수업 중인데 어떻게 그래요? 저도 기분 좋아요. 흔치 않은 기회잖아요? 우리 결혼도 했는데 뭐 어때요. 참! 그러고 보니 달력이 그게 뭐에요? 무슨 첫 키스까지 기념일에 들어가요? 첫 만남은 당연히 알아야 100일이랑 200일도 나오지만.”

단숨에 안전띠를 매고서 폭풍 수다로 잔소리를 시작하는 혜리와 달리, 안전띠 매고 시동을 걸어서 후진 후에야 입을 열 짬이 생기는 준.

“그래서. 200일이 언제야?”

“12월 21일 수요일!”

질문했던 준도 혜리와 똑같이 입 맞춰서 말했다.

“연애 기분 내는 것도 좋지만 기념일이 뭐가 그렇게 많아요? 보다 보다 첫 키스 기념일은 처음 봤어요! 이러다간 결혼기념일이랑 결혼했다는 걸 까먹을 거 같아요. 작은 수첩 하나 사다줘요? 거기에 1년 치 기념일 다 채워 볼래요?”

“좋지! 사주라. 적당한 걸로 부탁해?”

“…….”

정신 차리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건만 성큼 물고 보는 준이다. 아무래도 기념일에 대한 정신이 번쩍 든 신랑을 말리기란 쉽지 않을 거 같다. 그래서 혜리는 화제를 바꿨다.

“의진 씨한테 들으니까 임산부들도 일기를 쓴대요. 임신일기 같은 거. 같이 쓸래요, 신랑?”

“그런 것도 있어? 같이 쓰고 싶어!”

“알았어요.”

그런 것도 다 추억이 될 테고, 거기다 나중에 아이가 컸을 때 ‘엄마와 아빠가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이런 것도 했었어.’ 라고 말해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도착한 산부인과는 산모와 남편이 제법 있었다. 아무래도 진료 받으려면 조금 기다려야 할 거 같다. 접수를 끝낸 준은 고개를 갸웃대며 혜리 옆으로 다가왔다. 환자의 이름을 넣으니 진료 기록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신부. 여기 왔었어?”

“아, 네. 그 날이 6월 13일 월요일이에요. 신랑과의 결혼을 앞두고 건강검진 받으려고 왔었어요. 그 때 아무 이상 없다는 결론을 얻었고요. 지금 이렇게 아이를 가졌어요.”

“그랬구나. 역시 우리 신부야! 준비하는 모습이 정말 예뻐.”

“그럼요, 제가 누군데요.”

그런 신부가 너무 마음에 드는 준은 참지 못 하고 신부의 뺨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긴장한 모습으로 진료 시간을 기다리는 부부. 난생 처음 오는 산부인과는 아니지만 혜리는 그 때 이상으로 떨리는 지금의 감정을 도저히 못 숨기겠다. 신랑의 손을 꽉 잡는 그녀, 급기야 준이 아프다며 살살 잡으라고 말할 정도다.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가는 부부. 초음파로 진료를 하는 동안 준은 혜리의 손을 계속 잡아주었다. 잡고 있는 신부 손에 땀이 흥건하다. 긴장을 많이 하고 있다는 증거다. 준은 왼손으로 맞잡은 오른손의 손등을 살살 토닥여주었다.

“내가 있잖아.”

그 한 마디에 혜리는 비로소 웃었다. 검사 후. 여의사는 앞의 부부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 10줍니다. 정확히는 오늘이 10주하고 3일째 되네요.”

의사와 똑같이 활짝 웃은 준은 혜리를 확 끌어안았다. 백 마디 말보다는 따뜻한 포옹이 그녀에게 더 도움 되겠다는 판단 하에 그리 한 행동이었고, 혜리에게는 그의 생각대로 백 마디 말보다 포옹이 더 다가왔다.

“다시 한 번 축하해! 그리고,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병원이라서 그럴까. 준은 지금은 이마 뽀뽀로 만족하고, 나중에 집에 가서는 제대로 키스할 거라는 생각에 더없이 들뜬다.

“식재료 사서 집에서 만들어 먹자! 스테이크 어때? 만들 줄 알지?”

“스테이크로는 작으니까 파스타도 같이 할게요.”

“역시 우리 신부야! 부모님한테 전화해. 저녁거리 사간다고 아줌마한테도 연락하고.”

일정 변경이지만 좋은 소식 한꺼번에 전하기 위해서는 그게 좋을 거 같다. 준이 마트로 차를 돌리는 사이 시부모님과 가사도우미 아줌마에게 연락을 넣는 혜리의 모습에서.


작가의말

오랜만에 1만2자 투척>0_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결혼 후 愛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7 終.청첩장 +11 12.05.02 1,688 14 20쪽
46 46.폭탄 맞은 준이네 +7 12.04.24 1,653 15 19쪽
45 45.재작 +8 12.04.23 1,274 12 14쪽
44 44.한숨뿐인 출산 +4 12.04.19 1,642 13 13쪽
43 43.겹경사 +8 12.04.18 1,356 15 13쪽
42 42.환자 +5 12.04.17 1,575 15 14쪽
41 41.둘째 만들기[19금] +5 12.04.14 2,500 20 14쪽
40 40.웬수 꼬물이? +6 12.04.10 1,652 22 17쪽
39 39.200일에는 입덧을 +5 12.04.06 1,503 17 12쪽
38 38.스캔들 +4 12.04.05 1,502 17 17쪽
37 37.지퍼가 필요해 +6 12.04.03 1,459 16 16쪽
36 36.최후의 발악 +7 12.04.03 1,676 19 18쪽
» 35.그는 열애 중 +4 12.04.02 1,757 17 28쪽
34 34.허니문베이비 +3 12.03.31 1,924 19 12쪽
33 33.강력한, 라이벌? +4 12.03.30 1,469 14 19쪽
32 32.워터파크 +3 12.03.28 1,584 14 16쪽
31 31.여행 준비 +4 12.03.27 1,557 17 13쪽
30 30.집으로 +4 12.03.23 1,672 17 15쪽
29 29.내 눈에는 +5 12.03.21 1,750 17 13쪽
28 28.신혼여행 +3 12.03.20 2,025 17 19쪽
27 27.8월의 결혼식 +4 12.03.18 1,842 17 19쪽
26 26.폭로! 술이 웬수다 +3 12.03.17 1,813 19 14쪽
25 25.생일 +4 12.03.16 1,866 19 15쪽
24 24.여우 +5 12.03.15 1,807 19 15쪽
23 23.고급정보와 선물 +4 12.03.14 1,576 20 17쪽
22 22.외톨이야 외톨이야 +6 12.03.13 1,621 18 16쪽
21 21.어머니랑 삼각관계 +5 12.03.12 1,934 23 15쪽
20 20.초밥집 데이트 +6 12.03.10 2,033 20 15쪽
19 19.유치한 별명 +9 12.03.09 2,045 20 16쪽
18 18.합방 +9 12.03.09 2,914 21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