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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돌청년 클래식 님의 서재입니다.

군주의 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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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프픗
작품등록일 :
2017.01.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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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5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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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레니아가 준 초콜릿을 요리조리 돌려보던 나는 그것을 용감히 입 안에 넣었다.

기껏 만들어 줬는데 맛도 보지 않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혀에 닿자마자 섣부른 결정을 후회했다.


설탕을 듬뿍 넣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남아있는 진짜배기 카카오의 쓰라린 맛.

쓸데없이 싱싱한 민트의 산뜻함이 엉망으로 뒤섞여서 미각을 강간한다.

사실 민트를 아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아이스크림이나 쿠키 같은건 몰라도 민트 초콜릿은 정말 최악이다.


'이거 어떻게 하지?'


레니아의 선물은 아직 내 손 가득 남아있다.

하지만 두 개 째를 입 안에 털어넣을 용기는 없다.

아슬론에게 부탁하면 대신 먹어주겠지만 그건 너무 가혹하다.

고민을 거듭하며 신전을 거닐던 내 눈에 농땡이를 치고있는 아가르타가 보였다.


그래.

세상 어딘가에는 민트 초콜릿을 즐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가르타가 그들 중 한 명이길 빌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알룬님, 그 용은 어떻게 됐어요?"

"내가 처리했어. 따로 할 일 없으면 이거나 좀 먹어봐."

"네? 이건 또 웬거에요?"

"레니아가 만들어줬는데 먹고 남았어."

"아... 나중에 혼나는거 아닐까 몰라. 흔적도 안 남게 다 먹어야겠네."


아가르타는 잘 못 먹고 자라서 그런지 이런 류의 간식을 무척 밝혔다.

처음 보는 과자에 눈을 밝힌 그녀가 뛸 듯이 기뻐하며 초콜릿 하나를 입 안으로 던져넣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가르타는 내가 찾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기대로 달아오른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지더니, 이내 울상이 되어서 초콜릿을 뱉어낸다.


"우, 우웩! 퉤퉤퉷. 이거 뭐에요? 왜 과자에 민트를 넣어놓은거죠?"

"아... 그래? 민트가 들어가 있었어? 몰랐네. 미안해."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내 사제에게 거짓말을 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손톱으로 혓바닥을 긁어내던 아가르타가 치를 떤다.


"제가 길거리 생활 하면서 배 굶고 다닐 때도 민트는 안 먹었는데..."

"그 정도야?"

"당연하죠! 민트가 괜히 잡초겠어요?"


내게 배신당한 아가르타가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때마침 다가온 카엘이 그것을 나무란다.


"아가르타 자매님! 그게 무슨 태도입니까! 알룬님의 자비에 그런 식으로 보답하시다니요?"

"네? 아, 아니. 그게..."

"조용히하세요! 아무리 격의 없는 사이라고 해도 정도가 있습니다!"


무척 드물게도 화를 내는 카엘.

평소에 조곤조곤하던 그녀가 언성을 높이니까 확실히 무섭다.

음량 자체는 아슬론에 비할바가 못되지만 기백이 다르다.

나는 억울함에 몸서리치는 아가르타를 위해서 카엘에게 초콜릿을 하나 건넸다.


"너도 하나 먹어볼래?"

"네? 아. 감사합니다. 그럼..."


다소 뜬금없는 타이밍이었지만 내가 준 것이라 차마 거절하진 못한다.

선물받은 초콜릿을 중재의 의미로 알아들은 그녀가 그것을 씹다가 표정을 구긴다.

내 등 뒤에 숨어있던 아가르타는 거 보라는 듯 씨익 웃었다.


"우, 크윽..."

"맛 없으면 뱉어도 돼."


입 안의 내용물을 차마 뱉어내지 못하고 있던 카엘이 내 허락을 받곤 화단에 구토했다.

그녀는 무척 혼란스런 표정으로 더듬더듬 항의한다.


"알룬님. 저희에게 미흡한 점이 있으면 말씀을 해주십시오. 저희가 우둔한 나머지 알룬님의 뜻을 헤아리는데에 모자람이 있습니다."

"자매님. 아무리 그래도 알룬님께 그렇게 말하시면 안 되죠!"


아가르타는 얄밉게 이죽거리다가 내게 꿀밤을 맞았다.

나는 그 뒤로도 사제들은 한 명씩 찾아다니며 상쾌하면서도 쓰라린 고통을 분배했다.

누가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는데, 사실 그것보다 훨씬 좋은 것 같다.


꽉 차있던 바구니를 거의 다 비워낸 나는 마지막 타자인 로웬을 찾았다.

비공정의 수리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있을 그녀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 집무실은 물론이고 침실에도 없는 것을 보니 아예 성을 나간 것 같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화신체를 해제한 뒤 옥좌의 방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외계신의 시야를 이용해봤자 로웬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그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시야 공유를 차단 한 적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을 할 때에도, 시야를 가리긴 커녕 내쪽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는게 로웬이다.

나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당황하며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얘가 어디갔지? 혹시 눈치까고 튀었나? 그래. 재앙의 씨앗 지도를 이용하면...'


그녀는 아직 재앙의 씨앗으로 취급되고 있으니 지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법신의 파편 정도 되면 달리 방법이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해봐야한다.

나는 그대로 지도를 띄워서 재앙의 씨앗을 찾아봤다.

그러나 자유 교역 도시 전체를 뒤져봐도 씨앗의 심볼은 없었다.


점점 더 심각해지는 의문.

지도의 축척을 키워서 시야를 넓힌 나는 굉장히 기묘한 광경을 목격 할 수 있었다.

넓은 대륙에 흩어져있는 씨앗들이 상당히 빠른 기세로 이동하는 중이다.

속도는 저마다 차이가 있지만 방향은 일제히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게 뭐야? 무슨 소집이라도 받은 것 처럼..."


내가 눈을 심하게 떨고있자 자유 교역 도시의 중앙에 씨앗의 심볼이 솟아난다.

황급히 그곳으로 내려가보자 지팡이를 든 로웬이 나를 맞이했다.

평소와 같이 미소를 짓고 있지만 뭔가를 숨기는 듯한 기색.

나는 그녀를 붙잡곤 지체없이 물었다.


"로웬! 어디에 다녀온거야?"

"잠깐 산책을 다녀왔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내 관심이 달갑지 않은 듯, 애써 동요를 숨기며 되묻는 로웬.

나는 묵살당한 질문을 대충 넘기며 재앙의 씨앗에 대한 정보를 알려줬다.

내 질문이 무시된 것은 조금 짜증이 나지만 그녀가 떠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잠시 눈을 감아서 씨앗들의 대이동을 확인한 그녀가 곤혹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재앙의 씨앗들이 북쪽으로 모이고 있다니... 죄송하지만 저도 딱히 짐작가는게 없어요."

"그래?"


로웬의 말을 믿고싶긴 하지만 무턱대고 믿을 수가 없다.

이대로 눈을 떼면 그대로 달아나버리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아무래도 늘 그랬듯 표정을 읽힌 것 같다.

내 신도들은 화신체의 달걀귀신 같은 얼굴을 잘도 읽어낸다.


"제가 도망칠 것 같으면 이렇게 꼭 붙잡으셔야죠. 그렇게 인상만 찌푸리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아... 그게..."

"마법신님. 거기서 염장질 좀 그만하고 빨리 도와주세요. 요새 저희 대장이 하루에 다섯 번씩 저를 갈궈요."


자유 교역 도시의 광장으로 옮겨진 비공정.

그 안쪽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탈리고라가 조타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로웬은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으나, 그는 눈도 깜빡 하지 않았다.


탈리고라가 좀 비실비실하게 생겨서 그렇지 겉보기보다 훨씬 강심장이다.

그는 아슬론이나 알레디우스 앞에서도 말을 골라본 적이 없다.

하지만 철면피인 것으로 치면 로웬도 지지 않는다.


"지금 중요한 회의중이니까 알아서 좀 하고있어."

"뭔놈의 회의를 손잡고 합니까."

"알룬님이랑 내가 좀 친해. 한 번 더 까불면 네 마법적 능력을 죄다 뺏어버릴 줄 알아."


마법신의 진심 가득한 협박에 입을 비죽이며 후퇴하는 탈리고라.

나는 씨앗 대이동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사제들에게 되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우리가 몇 발짝을 떼기도 전에 도시의 종이 미친 듯 울리며 경보를 울렸다.


보통은 시간을 알리는데에 쓰이는 종이지만, 이번에는 의미가 많이 다른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황급히 성벽으로 달려가자 용족의 거체가 큼지막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기다란 흰색의 천을 휘감고 있는 적룡은 전령이라고 주장하듯 고고하게 활공하는 중이다.


"인간족의 대표는 들으라! 우리 적룡족이 협상을 제안하러 왔으니..."

"전군 사격 개시."


교단 건물 쪽에서 걸어나온 레니아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명령했다.

그러자 명령전달을 맡고있던 측근이 황망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네? 하지만 저놈은 전령인데..."

"이렇게 급한 와중에 자꾸 되물으면 전쟁 못합니다. 한 번 더 불복하면 참수합니다. 전군 사격 개시!"


전에 없이 살벌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서야 북과 나팔이 울린다.

놀란 적룡이 날개를 몇 번 퍼덕이기도 전에 장전되어있던 대형 쇠뇌가 발사.

무식할 정도로 커다란 화살이 적룡의 피막을 찢어냈다.


놈은 용건을 꺼내기도 전에 공격당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 성벽 앞을 구르며 외쳤다.


"잠깐! 나는 적룡왕님의 말씀을 가져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전령을 공격하다니..."

"용족 50을 끌고와서 도시를 습격하는건 괜찮고, 전령을 공격하는건 안 되는건가? 불과 몇 시간 전에 알룬님의 백성들을 학살하려 해놓고 이제와서 도리를 따지다니!"


레니아가 분노한 음성으로 크게 외쳤다.

하지만 용족을 질타한다기 보다는 아군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행동 같다.

아까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우리가 전령을 공격하는 것도 정당하다 알리는 것이다.


예의 테러나 다름없던 기습공격을 떠올린 용은 작전을 바꿔서 본론에 들어갔다.


"굳이 나를 죽일 필요는 없다! 우리 적룡족은 머지않아 이 대륙을 떠날 것이다. 너희가 우리를 뒤쫓지만 않으면 양쪽 다 좋게 끝낼 수 있다!"


오만한 용족들이 고향을 버릴 생각까지 하다니.

아까 내 아스트라를 목격했던게 그리도 충격적이었나보다.

레니아는 그의 말을 예상한 듯, 놀란 기색조차 없이 담담히 대꾸했다.


"양쪽 다 좋게 끝낼 필요 없다. 알룬님의 종들은 모든 용족을 절멸시킬 것이다.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쳐봐라. 이 땅의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명맥을 끊어주마."


어차피 적동용왕의 저주 때문에 협상 따윈 불가능하다.

레니아는 처음부터 그것을 계산에 넣고 공격을 명령한 것이리라.

그녀가 내 허락조차 받지 않은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선택지 자체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녀를 뒤따라서 성벽 위에 오른 아슬론이 무언의 신호를 받았다.

잠시 뒤, 커다란 대검이 용의 머리에 꽂힌다.

비록 원수를 졌다곤 해도 전령을 공격해서 그런지 환호도, 환성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박수를 받기 위해서 용족과 싸우는 것도 아니다.


용의 침입으로 인한 소란이 잦아들자 레니아가 내게 다가오며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미리 알리지도 않고 일은 진행해서 죄송합니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간 놈이 도망쳐버릴 가능성이 있어서..."

"아냐. 잘 했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덕분에 용족들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건 다행이네요."


레니아와 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용 사체를 눈앞에 둔 아슬론이 카스트로에게 말했다.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던 놈이라 그런지 덩치가 꽤 크군요. 이 자식의 두개골을 비공정 뱃머리에 걸어놓는게 어떻습니까?"

"만약 그랬다간 탈리고라가 기겁할걸? 그나저나 너 그거 진짜로 멋있다고 생각하는거냐? 이 자식은 은근히 유치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장갑을 낀 검지가 아슬론의 용머리 투구를 가리킨다.

그러자 아슬론이 투구를 벗어들며 항의했다.


"이게 왜요? 멋있기만 하구만."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난 것 같잖아. 저번에 네가 힐데랑 시내 돌아다닐 때에도 그거 쓰고 다니던거 다 봤다. 그 용인족 아가씨 웃음 참느라 고생 좀 했을걸?"

"아니. 이건 알룬님께서 직접 만들어주신 성물이라 몸에서 떼어놓기가 좀..."


우리는 아슬론의 궁색한 변명을 들으며 신전 건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성벽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자,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로웬은 어디로 산책을 다녀온 것일까?

아까 그녀가 보여줬던 반응은 굉장히 사실적이었다.

씨앗 대이동에 대한 정보는 내 입에서 처음 들은게 틀림없다.


내가 로웬을 쳐다보며 말을 고르고 있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며 비공정을 향해서 돌아갔다.

나는 그녀가 언젠가 해답을 알려주길 빌었다.


작가의말

원래 이 소설에 나오는 ‘전령’은 ‘사신’으로 표기하는게 더 맞습니다.


하지만 괜히 헷갈릴까봐 전부 전령으로 썼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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